소설리스트

노숙자, 천재 배우 되다-21화 (21/175)

21. 홍보는 셀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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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출석 포인트와 함께 아침을 맞이했다.

[메일 확인 요망.]

그리고 강철수에게 문자가 도착했다. 핸드폰으로 메일을 확인하니 ‘비가 오는 날’ 연습 영상 편집본이 도착해 있었다.

“운동 다녀와서 보면 되겠다.”

노트북에 미리 편집본을 다운로드해 놓고 짐을 챙겨 나왔다.

당장 사흘 후가 방송이었다. 제작 발표회는 방송 전날에 하는 게 보통이었지만, 조율이 잘 되지 않았는지 일주일 전에 진행했다.

뭐 언제 하든 상관없었지만, 최 감독은 그것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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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반응이든, ‘아임 홈리스’에서 가장 인지도 높은 배우는 역시 유수한이었다. 대부분 홍보 기사가 전부 유수한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대형 포털 사이트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기사가 실린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작게나마 연예란에 기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예고편은 계속 KBC에서 흘러나오고 있었고 반응이 어떨지는 뚜껑을 열어 봐야 했다. 한 가지 고무적인 사실은 지난주, 타 단막극 시청률이 소폭 상승했다는 거였다.

계속 4%를 넘지 못했는데, 처음으로 그 벽을 넘어섰다.

“티저 반응은 나쁘지 않은데.”

운동을 다녀와서도 계속 모니터링이었다.

“하지만 뭔가 화제성이 부족해.”

제작 발표회도 기자들이 원체 오질 않아서 보도 자료가 시원찮았다. 기껏해야 커뮤니티에 유수한 거지 짤만 조금 화제 된 수준이었다.

금빛 대본이라고 해도, 이번에 연습했던 독립 영화 ‘비가 오는 날에’처럼 뒤늦게 화제가 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지금 유수한은 돌아서 갈 시간 따위가 없었다.

최선의 선택이었지만, 어느 정도 가시적인 성과가 필요했다.

“어, 보라야. 지금 통화 괜찮니?”

노트북에 받아 놓은 연습 영상이 있지만, 지금 급하게 확인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때, 내가 입었던 옷 말이야. 응, 노숙자 할 때.”

반응은 만들면 된다.

“응, 그거 민수한테 전달 좀 해 줄래? 급한 건 아니고. 너 시간 날 때.”

의상을 부탁하고 전화를 끊었다. 노트북 앞에 앉은 유수한은 연습 영상 편집본을 열었다. 2주 동안 열심히 찍었던 영상 압축본이 여기 담겨 있었다.

이윽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저 가벼운 카메라 한 대로 찍은 영상이었다. 앵글도 딱 하나. 나오는 사람도 유수한 하나. 그럼에도 즐거웠던 작업이었다.

「이번이 두 번째. 무더운 여름, 내가 다시 살아났다.」

내레이션을 시작으로 화면이 밟아지며 황망히 서 있는 유수한이 보였다. 아니, 차현수가 서 있다. 걸음을 옮기던 차현수가 하늘을 올려보며 눈을 가린다.

「희미한 기억 속에서 나는 내가 누군지 어렴풋이 기억한다. 그리고 여기가 내가 생을 마감했던 장소라는 것도.」

쏴아아아아.

소나기가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죽은 날에 비가 내리면 나는 이 자리에서 다시 살아난다. 그리고 내가 사랑했던 여자를 찾아 하염없이 헤맸다. 내가 이 자리를 맴도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비를 맞으며 걷던 차현수가 걸음을 멈춘다.

「너를 다시 만나기 위해.」

가볍게 찍은 연습 영상이었기에 다소 허술해 보였지만, 영상을 보는 유수한의 눈빛은 진중했다. 아직 배우로서 경험은 턱없이 부족했다. 이제 겨우 한 작품을 경험했고 가야 할 길이 멀다.

이번 연기 수업은 다른 때와 다른 느낌이었다. 작품에 대해 아무런 정보 없이 연기를 시작한다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면서도 새로운 캐릭터를 만나는 듯한 기분이었다.

차현수는 비극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감정을 떠올리면 심장이 아리는 듯했다.

연기라는 것은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이었다. 차현수도 그랬다. 그를 이해해야만 연기를 할 수 있었다.

유수한이 되기 전에는 먹고사는 일에 급급했다. 김대한으로는 다른 누군가를 이해할 여력이 없었다.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움직이며 터득해 나가야 한다.

어쨌든 지금의 유수한은 경험이 턱없이 부족하니.

“집중해서 봤더니 눈이 아프네.”

연기를 배우면 배울수록 감수성이 풍부해지는 듯했다. 영상을 보다 보니, 자꾸만 눈물이 핑 돌았다.

여민영을 상상하며 머리에 그렸다. 그렇기에 더더욱 영화가 궁금해졌다. 여민영은 어떤 배우가 어떻게 연기했을까 해서.

[선생님, 보내 주신 편집본 잘 봤습니다. 고생하셨어요. 내일 뵙겠습니다.]

강철수에게 감사 문자를 보내고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았다. ‘비가 내리는 날’의 가격은 3천 원. 이 정도면 저렴하다.

냉장고에서 물을 가져와 소파에 앉은 유수한은 이내 영화를 재생했다.

* * *

홍보는 셀프다.

아니, 사실은 셀프는 아닌데.

“이거 어디에 쓰시려고요?”

“이거 입고 거리 팬미팅 좀 하려고.”

“예?”

그렇게 됐다.

“오늘부터 시간 날 때마다 매일.”

일주일 동안 촬영하면서 유니폼처럼 입었던 의상은 여전히 누더기 같다. 그리고 김민수는 여전히 의문스러운 눈치였다.

“이것도 챙겨 놔.”

미리 유수한은 판넬 하나를 제작했다. 오늘 오전에 제작이 완료돼서 받으러 갔는데, 큼지막한 홍보 문구가 급하게 만든 것치고 제법 괜찮았다.

“이건 또 뭐예요?”

“보면 모르냐? 거리 팬미팅 때 쓸 거.”

“형님, 저 아직도 이해가 잘 안 돼서요.”

“네가 언제는 이해 잘했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유수한은 제 생각을 매니저에게 말해 주었다.

“어때?”

“근데 왜 두 벌이에요? 형님이 촬영할 때 쓴 옷은 딱 이거 하나였잖아요.”

김민수는 누더기 같은 몽클레스 패딩과 너덜너덜해진 옷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건 매니저가 말했던 것처럼 유수한이 촬영 때 입었던 옷이었다.

“그야, 나 혼자 하면 창피하니까.”

“예?”

“보라한테 물어보니까, 한 벌 더 구할 수 있다더라고.”

“…….”

“같이하면 좋지 않겠냐?”

“예?”

“배우 옆에는 매니저. 네가 내 측근 아니겠니? 함께하면 더 그림이 좋잖아.”

그 말에 매니저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누더기 같은 옷이 하나 더 있어서 설마 했다. 유수한은 지금 이 누더기 같은 옷을 매니저에게 입힐 생각이었다.

매니저 입장에서는 당연히 싫었다.

특히 김민수는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주목받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면 매니저가 아니라 개그맨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쉽게 유수한에게 반기를 들 수가 없었다.

예전과 다르게 많이 착해졌다고 하지만, 언제 갑자기 화를 낼지 알 수 없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았고 그건 유수한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손 놓고 있다가는 그대로 묻힐 것 같단 말이지.”

커피를 마시며 유수한이 말했다.

“이 작품은 안될 리가 없긴 하지만, 너무 늦게 빛 보면 큰일이거든.”

그전에 내가 죽을 수도 있어서.

뒷말은 집어삼키고는 골몰히 생각에 잠긴 유수한의 머리에 스쳐가는 기억이 하나 있었다. 처음 유수한을 보았을 때, 그들이 나누었던 대화.

“기부.”

유수한의 눈이 매니저를 향한다.

“그래, 나 기부 좀 해야겠다.”

“갑자기요?”

“그래. 난 돈은 차고 넘치니까.”

이미지가 좋지 않은 연예인이 자주 사용하는 방법은 역시 기부였다.

물론 그것도 이미지 메이킹 하는 거라며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기부한다는 행위 자체를 비난하지는 않는다.

기존의 유수한도 기부로 이미지 변신을 꾀하려 했다. 물론 결과는 좋지 못했지만, 시도한 자체의 의미는 있었다.

“1억? 아니야. 그걸로는 모자라.”

유수한이 눈을 굴리며 생각했다.

“그래, 3억.”

“예?”

“각 1억씩 보육원, 노숙자 쉼터, 동물보호단체에 기부하는 거야.”

지금 유수한에게는 돈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저 좋은 이미지를 구축하고 배우로서 성공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홍보 방향 갈피를 잡은 유수한이 씩 미소를 지었다.

“보도 자료 준비하고 기부할 단체 좀 추려서 정리해 봐.”

“지금요?”

“어.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김민수에게 해야 할 말을 끝내고 유수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연기 수업 할 시간이 다 되었다.

카페에서 나와 회사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유수한은 이제 익숙해진 연습실 문을 열었다. 강철수는 눈을 감고 있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왔습니까?”

강철수는 이내 하품을 늘어지게 했다. 요즘 신인 배우 하나가 데뷔를 앞두고 있어서 정신이 없다더니, 그 말이 맞나 보다.

“영화 비교해 보니 어땠어요?”

본론부터 들어간다. 유수한은 영화와 비교하면서 차현수 역을 맡았던 배우에게 감탄했다. 유수한이 했던 연기와는 결이 달랐다. 유수한이 그린 차현수는 감정적이고 민영을 사랑하지만, 놓아줘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여민영 곁에 있고 싶은 마음에 괴로워하면서도 결국 그녀의 행복을 빌어 준다.

그리고 영화 속 차현수는 거칠었다. 처음, 여민영을 다시 재회했을 때 그는 울부짖는다. 내가 여기 있는데 왜 나를 알아보지 못하느냐며 화를 내고 괴로워한다.

그는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끊임없이 부정하고 민영에게 다가가려 애를 쓴다.

여민영과 키스를 하고 순수하게 웃을 때는 그가 참 행복하다고 느꼈으며, 운명을 받아들이고 편지를 쓸 때는 그의 슬픔이 절실히 느껴졌다.

“거기 차현수 맡았던 배우. 진수원.”

“네.”

“그 영화 찍고 지금은 톱 찍었어요.”

“아.”

고개를 끄덕였다.

“진수원이 마초적이면서 해맑고 순수한 연기는 정말 잘하거든. 엄청 거칠고 남자 같다가도 웃을 때는 해맑고 소년 같고. 매력 있는 배우예요, 진수원.”

강철수가 누군가를 이렇게 칭찬하는 모습을 처음 봤다.

“유수한 씨 연기도 뭐 처음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을 하긴 했는데.”

볼펜을 휘익 돌리며 강철수가 말했다.

“진수원과 함께 오디션을 본다고 치면.”

“…….”

“유수한 씨는 보이지도 않겠죠?”

강철수가 또 뼈를 때렸다.

“오디션 준비한다면서요?”

“아, 네.”

“잘 됐네. 자유연기 해야 할 텐데, 연습한 거 써먹어요.”

“네?”

“말 참 못 알아듣네.”

“…….”

“차현수.”

“아.”

뒤늦게 유수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SBC ‘시간’ 공개 오디션 준비를 틈틈이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1회 대본만 보고 연습했고 그 후에 민수가 2-3회차 대본도 가져다주었다. 생각해 둔 역할 외에 다른 역도 조금씩 눈여겨보고 있었다.

공개 오디션이라고 해도 모든 사람에게 문이 열리지는 않는다.

대본 유출에 대비해서 소속사가 있거나 어느 정도 연기 경력이 있는 사람에게만 오디션 기회가 주어졌다. 말은 공개 오디션이지만, 사실상 비공개나 다름없었다.

“뭐, 자유연기도 감독 마음에 들어야 보여 주긴 할 테지만.”

강철수가 말을 이었다.

“잘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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