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님, 유수한 파면 안 부끄러움?
KBC <단막극 시즌 2022>는 그리 주목을 받진 못했다. 올해를 대표할 만한 단막극이 나오지 않았고 기껏해야 지난해 한 작품이 10%를 넘기며 유의미한 결과를 낳았을 뿐이었다.
더군다나 단막극 시즌 중에서도 ‘아임 홈리스’는 가장 기대감이 낮은 작품이기도 했다. 로맨스는 차라리 재밌을 거라는 기대감이라도 있지, 노숙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단막극은 이목을 끌기 부족했다.
당장 방송은 다음 주. 제작 발표회가 열리기 애매한 시점이었다. 방송국에서 ‘아임 홈리스’에 거는 기대가 없었기에, 이런 일정이 잡혔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유수한은 알고 있었다. 이 작품은 잘될 거라는 걸.
“오.”
“생각보다 괜찮은데?”
제작 발표회에 모인 기자들은 모두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15분 남짓 짧게 편집된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자 하나둘 자세를 고쳐 앉았다.
유수한이 멋지게 차려 입고 출근하는 장면에는 다들 무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멀쩡한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신문지를 덮고 벽에 기댄 장면에서 다들 탄성을 질렀다.
낙엽이 굴러가는 효과까지 들어가니, 말 그대로 유수한은 거지 같았다.
“유수한 씨에게 질문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망가지는 역할은 하신 적이 없는데, 이번 작품에서 노숙자 연기에 도전한 이유는 뭔가요?”
첫 질문.
유수한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마이크를 들었다.
“우선 작가님 대본이 좋았구요. 새로운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는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망설임 없이 도전했습니다.”
평이한 대답이었지만, 그렇기에 모범 대답이었다.
처음 하는 제작 발표회는 오히려 촬영보다 긴장이 덜했다. 오는 질문을 받고 대답만 잘하면 된다. 그래서 막바지로 갈수록 마음을 놓을 즈음.
“유수한 씨. 음주 수영 논란에 대해서 한마디 해 줄 수 있습니까?”
작품과 관련 없는 질문에 제작 발표회 분위기가 술렁인다. 조연출이 팔로 엑스 자를 그리며 질문을 넘기라고 말했지만, 여기서 피하는 건 답도 없었다. 오히려 자극적인 기사만 터져 나올 것이다.
“아니요. 대답하겠습니다.”
유수한이 짧게 상황을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일단 기자님. 한 가지 정정하고 가겠습니다. 음주 수영이 아니라 그저 수영하다가 쥐가 나서 물에 빠진 것뿐입니다. 하필 수심이 낮아서 다들 제가 열심히 수영한다고 생각했고 제가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네요. 그 또한 제 잘못이라면 잘못입니다. 다음번에는 수영할 때, 쥐 단속을 잘하도록 하겠습니다.”
거짓말이지만, 이미 이성실이 돈으로 입막음을 끝낸 상태였다. 쥐 단속은 나름 사늘하게 식은 분위기를 살려 보려고 농담 한 번 던진 거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안 웃긴가.
“더불어, 그런 질문은 때와 장소를 구분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자리는 ‘아임 홈리스’ 제작발표회 현장입니다. 작품과 관련 없는 질문은 감독님이나 작가님, 그리고 다른 배우님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수한이 빙긋 미소를 지으며 작품과 상관없는 질문을 한 기자를 보았다.
“충분한 답변이 되셨길 바랍니다.”
* * *
“진심 막 찍어도 개존잘. 돌았다.”
오늘 이경민은 반차를 쓰고 유수한을 만나러 왔다. 그동안 열심히 모아 두었던 휴가가 날아가고 있었다.
유수한을 덕질할 만한 것이 딱히 없었다. 필모도 딱 세 개였고 예능도 그다지 자료가 없었다. 다 보고 나서 새로운 소식이 없는지 계속 둘러보았지만, 없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오늘, 제작 발표회만 기다렸던 이경민이었다.
촤라라라라락!
현장에서 거대한 렌즈가 달린 대포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은 기자 외에 이경민밖에 없었다. 단막극이라 팬덤이 있는 배우가 없었다.
이경민은 인맥을 이용해 어렵게 제작 발표회에 들어갈 수 있었다. 방법은 방송사에서 일하는 지인이었다. 덕질 생활을 하면서 여러 인간관계를 쌓았고 방송 관련 인맥은 무조건 꽉 붙잡아 놓았다. 생일을 챙기는 건 물론 때때로 작은 선물도 보냈던 이경민이었다.
“수한 오빠!”
사회 초년생인 이경민은 올해 스물넷이었다.
자연스럽게 학생 때보다는 더 풍족한 덕질 생활이 가능했고 요즘 무료하던 참이었다. 이렇게 병크가 있는 배우를 파게 될 줄은 전혀 몰랐지만, 원래 인생은 모르는 법이었다.
“팬이에요!”
그리고 유수한은 거대한 카메라를 들고 있는 팬을 보고 다소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촤라라라락!
셔터 소리가 들리고 유수한이 이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저 기억나세요?”
카메라를 내린 이경민이 유수한을 보며 물었다.
“네, 서울역에서. 맞죠?”
이름은 가물가물했다.
그날 사인해 준 사람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얼굴은 어렴풋이 기억났다.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니었고 유수한은 사람 얼굴을 제법 잘 기억하는 편이었다.
“네! 맞아요!”
“죄송해요. 이름이 뭐였죠?”
“저, 이경민이요!”
“경민 씨. 기억할게요, 이름.”
늘 앵무새처럼 ‘아, 진짜요?’ 같은 말만 자주 들었던 이경민은 유수한의 다정함에 푹 빠지고 있었다. 유수한이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눈부셔서 제대로 얼굴을 보기 힘들 정도였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
“추운데, 계속 여기서 기다린 거예요?”
그 물음에 이경민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 모르셨겠지만, 안에서 사진 찍고 있었어요.”
“아, 정말요? 몰랐는데.”
“괜찮아요. 이제부터 알면 되잖아요.”
“네, 기억할게요.”
유수한이 자연스럽게 악수를 청했다. 그 손을 붙잡은 이경민이 미소를 지었다. 이번 덕질은 순조로울 듯했다. 경쟁자가 없다는 건 아주 큰 메리트였다. 나만 독점할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 이유로 가끔 무명 배우나 뜨지 못한 아이돌 그룹을 따라다니는 팬도 더러 있었다.
“밥은 먹었어요?”
“아니요. 이제 먹을 거예요.”
“배고프겠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유수한이 견과류 한 봉지를 꺼냈다.
“이거라도 먹어요.”
그리고 이경민은 덕후답게 그 견과류를 먹지 못하고 고이고이 모셔 두었다.
* * *
팬.
유수한은 가만 생각에 잠긴 채, 이경민이 주고 간 편지를 보았다. 유수한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살기 위해 일했을 뿐이었고 이렇게 사랑받을 행동을 한 적도 없었다.
편지를 펼쳐 보았다.
한 장도 아닌 다섯 장. 빼곡하게 적힌 글자를 보니 마음이 묘해졌다. 심지어 손으로 쓴 편지는 처음 받아 보는 유수한이었다.
편지에는 이경민이 쓰는 파랑새 아이디가 있었다. 일상계는 따로 두고 유수한 덕질을 위해 만든 계정이었다.
유수한도 파랑새를 하기는 하지만, 아직 능숙하게 하지는 못했다. 한동안 들어가지 않았던 파랑새를 열었다.
@onlyyou_soohan
계정을 입력한다.
정성스럽게 꾸민 배너가 눈에 들어왔다.
배너 사진은 영화 ‘어둠이 온다’ 한 장면을 캡처해서 보정한 사진이었다.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었는데,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담배를 피우는 그 장면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아직 글은 몇 개 없었다.
유수한이 출연했던 필모그래피에 대한 글이었고 하나같이 정성스럽게 캡처해서 보정한 사진도 함께 실려 있었다.
이게 바로 사랑받는 느낌일까.
「소문과 다르게 스윗했던 유수한. 노숙자 분장했는데도 경이로운 존잘력」
처음 이경민이 유수한을 만났을 때, 핸드폰으로 찍었던 사진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도 얼마나 열심히 보정했는지, 실물보다 더 나았다.
「#실물깡패 #유수한 #아임홈리스 #KBC2 #단막극」
글 밑에 달아 놓은 해시태그도 눈에 띈다. 최근 글에는 ‘아임 홈리스’ 예고편이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밑에 달린 댓글을 확인하니,
- 님, 유수한 파면 안 부끄러움?
기본 프로필의 파랑새 이용자에게 욕을 먹고 있었다. 이경민이 운영하는 계정은 애초에 팔로우도 몇 명 없었다. 10명도 채 되지 않았는데, 이 계정을 찾아 유수한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욕을 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책임감이 생긴다.
지금까지 유수한은 기존의 유수한과 선을 긋고 있었다. 과거의 그가 했던 행동 때문에 욕먹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도 감정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새로운 감정이 생겼다.
미안했다.
그저 유수한을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런 비난을 받는 것이.
“나 열심히 해야겠다.”
그리고 동기 부여.
유수한으로서의 동기 부여는 늘 충분했다. 노숙자 인생을 청산하고 화려한 삶을 이어 갈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지만.
하지만 배우로서의 동기 부여는 꽝이었다. 연기에 조금씩 재미를 붙여 가고 있었지만, 티끌만 한 책임감도 없었다. 그저 빛나는 대본을 골라 퀘스트를 성공하고 포인트를 쌓는 데만 급급했다.
그런 유수한에게 배우로서 동기 부여가 생겼다.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것.
적어도 팬을 위해서 나쁜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한다.
「그저 유수한 보러 갔을 뿐인데 선물 받았다. 아까워서 못 먹어.」
이런 작은 것에도 행복해하는 사람을 실망시킬 수는 없으니까.
* * *
예고편 반응은 느리지만, 조금씩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유수한은 알았다. 아무도 관심 없었을 단막극이 넷상에서 퍼져 나가는 이유는 단 한 명의 팬이 부지런히 홍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이경민은 부지런했다.
제작 발표회 현장에서 찍은 유수한의 사진을 바로 보정해서 업로드했다. 그것뿐만 아니라, 대형 커뮤니티에도 예고편과 함께 보정한 사진을 업로드했다. 물론 다른 사람이 퍼 온 것처럼 꾸몄지만, 그 단순한 홍보 작업이 효과가 있었다.
“그 팬 말이야.”
오랜만에 유수한에게 전화를 걸었던 최 감독의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유수한 씨 팬.”
“아, 네.”
“일당백이야.”
“예?”
“KBC 홍보팀보다 나아요, 그 팬이.”
그 말은 사실이다.
방송국 홍보팀은 바쁘다. 단막극은 전담 팀이 없었고 각 팀에서 하나씩 할당받아 보조로 홍보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다른 드라마처럼 공격적인 마케팅이 없었다.
대충 찍은 스틸컷은 대중의 관심을 끌기 어려웠다. 하지만 유수한의 팬은 자신의 배우를 서포트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움직였다.
보통 누군가의 팬이 되면 그 누군가에게만 집중한다. 하지만 위치가 애매하다면 주변도 같이 공략해야 했다.
유수한이 이 단막극에 사활을 거는 것처럼 이경민도 그랬다. 본능적으로 아는 거다. 유수한의 위치는 애매해졌고 복귀작이 티끌만 한 관심도 받지 못하면 그저 그런 배우로 전락하게 될 거라는 걸.
그래서 이경민은 유수한을 찍으면서도 한초원 등 주변 배우들, 그리고 최 감독까지 찍었다. 더불어 보정까지.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유수한을 찍고 보정하는 것처럼 정성이 들어가진 않았지만, 말끔하게 정리된 사진은 눈길을 끌기 충분했다.
그리고 그게 커뮤니티에 퍼졌을 때, 예고편과 함께 자극적으로 쓴 홍보 문구는 크진 않아도 작은 파동을 일으킨다.
“거하게 밥이라도 사 주고 싶다니까?”
이 단막극에 사활을 걸고 있는 건 유수한만이 아니다. 입봉작인 최 감독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도 참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이렇게 해 주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보답하고 싶은 건 유수한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 이상으로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글을 올릴 때마다 따라오는 비난이 유수한의 눈에도 보였으니까.
“감독님, 우리 꼭 대박 나요.”
항상 ‘아임 홈리스’ 대본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대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금빛은 늘 마음을 편안하게 하면서도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이건 실패할 리 없다는 자신감.
하지만 점차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아이템을 믿지만, 미진한 관심에 정말 성공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 한다.
유수한은 어떻게 하면 대중의 관심을 끌지 고민하며 말했다.
“그게 제 팬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보상일 것 같아요.”
아무래도 이대로 가만두고 볼 수는 없다.
슬슬 움직일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