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데
김민수는 오랜만에 유수한 욕을 했다.
그가 요구한 대본은 말단 직원이 손에 넣기 힘든 대본이었다. 뭐, 방법이라면 있겠지만, 딱히 쓰고 싶은 방법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유수한에게 구하기 힘들다고 말했지만, 갑자기 욕을 퍼붓는 바람에 당황해서 알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잠깐이나마 유수한이 변한 줄 알았다. 그런데 변한 게 아니었다. 그 속을 숨기고 있었던 거지.
“겨우 구했어요.”
그 말이 맞다.
김민수는 이 대본을 구하기 위해 하면 안 될 행동을 했다. 팀장급만 공유가 된 대본이었고 서인하 팀장 담당이었다. 회사에서는 민서온이 이 드라마에 합류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신인급 배우를 끼워팔기 할 계획이었다.
김민수는 직속 상사의 자리에서 몰래 대본을 빼 왔다. 직속 상사와는 상관없는 일이라서 가능했고 서랍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기에 빼올 수 있었다.
“저 이거 들키면 죽어요.”
“안 들키게 할게.”
“무슨 생각이신데요?”
“아직은 아무 생각 없어.”
유수한은 대본을 몇 장 들춰 보고는 이내 가방에 집어넣었다.
“아. 맞다.”
가방을 닫으려던 유수한이 순간 잊은 것이 있었다. 가방에서 상자 하나를 꺼낸 유수한이 김민수에게 내밀었다.
“성공 보수다.”
원래 단막극이 끝나면 민수에게 선물 하나를 줄 생각이었다. 단막극을 준비하면서 직장인들을 자주 구경하고 관찰했는데 다들 태블릿 PC를 들고 있었다.
유수한은 원래 유수한이 가지고 있던 태블릿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걸 보니 새로운 것이 갖고 싶어졌다. 기존 유수한이 쓰고 있던 것이 아닌, 온전히 내 것.
그래서 사는 김에 김민수 것도 함께 샀다. 함께 계속 일할 사이니, 뇌물이라고 생각하고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이거 진짜 저 주시는 거예요?”
“어. 그러니까 앞으로도 나 좀 도와줘라.”
“형님.”
“왜.”
“진짜 미치셨어요?”
이걸 확.
“내놔.”
“아닙니다.”
“너 한 번 더 미쳤다는 소리 하기만 해?”
“안 하겠습니다.”
“알았다. 혹시나 대본 들어오는 거 있으면 챙겨 놔.”
“네.”
김민수는 방금 전만 해도 유수한 욕을 속으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뇌물 앞에서는 답도 없었다. 불법적인 선물도 아니었으니 이렇게 기분 좋게 웃는 건 당연했다.
로드 매니저는 연차가 쌓여도 월급이 거기서 거기였다.
보급형 태블릿 PC를 사용하고 있기는 했지만, 늘 사과패드가 갖고 싶었던 김민수였다. 이렇게 뜻하지 않은 신형 태블릿 PC가 생겼으니 웃음이 입에 걸리는 것도 당연했다.
“나 간다.”
“네, 형님. 들어가세요.”
유수한은 김민수 목소리를 들으며 빠르게 사무실에서 빠져 나왔다.
* * *
[단독] SBC ‘시간’ 편성 어떻게 되나 …… 3분기 예상
[연예뉴스] SBC ‘시간’ 편성 마지막 조율 중
[연예토킹] 1년 공백 배우 민서온 SBC ‘시간’ 합류하나?
‘시간’은 아직 제작 단계의 드라마였다. 캐스팅도 이제 막 진행하는 듯했고 편성은 아직 받지 못한 듯했다. 아마 민서온이 합류하면 배우를 내세워 편성을 받을 계획으로 보였다.
대본은 아직 읽지 못했다. 차에서 핸드폰으로 관련 정보만 찾아보았을 뿐이었다. 금빛으로 빛났다는 건 분명 어느 정도 수준은 된다는 소리였다. 이 드라마에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조연으로 합류만 해도 큰 메리트가 있다.
일단 단막극은 상업성이 없지만, 미니시리즈는 상업성이 있으니.
“음.”
집에 돌아온 나는 대본 두 권을 책상에 놓았다. 그리고 우선순위를 정했다. 하나는 이제 연습해야 할 대본이었고 남은 하나는 앞으로 일이 될 수도 있는 대본이었다.
“역시 일이 먼저.”
물론 연습을 대충 했다가는 강철수에게 철퇴를 맞는다. 하지만 아직 읽지 못한 대본을 보고 접근해 볼 만한 배역이 있는지 확인하는 게 먼저였다.
[형님, 그 오늘 드린 대본 조연 오디션 한 달 후에 시작한다네요?]
뭐랄까.
뇌물의 효과는 굉장했다.
[알려 줘서 고맙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탁상 달력을 본다. 제작발표회와 방송 날짜가 표시되어 있었다. 이달 말에 제작발표회, 3월 초에 방송이다. 그리고 드라마 ‘시간’의 오디션 날짜는 대략 3월 말.
스케줄에 문제는 없다.
물론 당장 다음 주에 오디션이 있다고 해도 어떻게든 준비해서 나갔을 테지만, 시간적 여유가 있는 게 백번 나았다. 무엇보다 단막극이 방송돼야 연예계 복귀 신호탄을 공식적으로 쏘아 올릴 수 있다.
“일단 읽자.”
달력을 제 자리에 두고 ‘시간’ 대본을 펼쳤다. 1회 대본을 읽는 데 걸린 시간은 1시간 12분이었다. 유수한은 처음은 가볍게 훑었고 그다음에는 꼼꼼히 대본을 읽는다. 그리고 다시 읽기 전에 느낀 점을 생각하고 정리해서 노트에 적곤 했었다.
“마음에 드는 배역은 역시 주인공이지만, 내게 줄 리가 없다.”
기존 유수한은 생각도 없고 객관성도 없지만, 지금의 유수한은 생각도 객관성도 가지고 있다.
“단막극이 성공했다고 해도 남주 자리는 이미 정해진 상황일 거야.”
그렇다면 서브는?
그것도 여의치 않다. 비중은 낮아도 남주만큼이나 매력적인 캐릭터였고 하고 싶어 하는 배우들이 줄을 섰을 것이다.
물론 K엔터가 나서준다면 상황이 달라지지만, 아직 이성실은 유수한을 믿지 않고 있었다. 회사 덕도 보지 못한다면 타 배우 경쟁에서 밀린다.
“그렇다면 서서브인데.”
하지만 주연 4인방이 아니라면 서서브는 그리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오히려 초반에 여자 주인공을 구하고 죽는 첫사랑 역할이 더 매력적이었다.
드라마 ‘시간’의 내용은 간단했다. 여자 주인공 재벌 3세 ‘이은서’는 사고로 다리를 쓰지 못한다. 그리고 그 사고로 인해 사랑하는 남자를 잃었다. 사고 이후 마음의 문을 닫고 사는 ‘이은서’는 후계 자리에서 사촌에게 밀리고 만다. 그 과정에서 조울증을 앓고 있는 남자 주인공 ‘정유환’과 계약 결혼을 하게 되는데, 두 사람이 상처를 딛고 성장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유수한이 원하는 배역은 초반, 이은서를 사랑했고 이은서를 해치려는 세력에게서 그녀를 지키다가 목숨을 잃는 ‘조성운’이었다.
아직 1회밖에 읽지 못했지만 조성운의 역할은 확실하다. 1회, 남자 주인공보다 더 많은 분량이 있었고 1회 마지막 장면에서 은서를 지키다가 크게 다친다. 2회에서 죽음으로 장렬히 퇴장할 캐릭터로 조연이었지만, 확실한 존재감을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였다.
“망설일 이유가 있나?”
곰곰이 생각하던 유수한이 핸드폰을 들었다.
[대표님. 유수한입니다. 시간 괜찮으시면 한번 얼굴 뵀으면 좋겠습니다.]
바로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참는다. 공개 오디션이 아니라 비공식 오디션을 통해서라도 조성운 역할을 거머쥐고 싶었다.
생각한 대로 이성실에게는 바로 답이 없었고 잠시 잊은 채, 유수한은 연기 연습에 집중했다.
* * *
[내일 점심에 시간 빈다. 12시에 오도록.]
이성실은 무뚝뚝하게 답장을 보냈다. 답장이 오지 않는다면 다짜고짜 찾아갈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답을 받아서 한결 마음이 편했다.
“대표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유수한은 카푸치노를 들고 있었다. 이성실이 가장 많이 마신다는 커피.
“용건만 간단히 하자.”
이성실은 책상에 놓인 카푸치노를 구석으로 치우며 말했다.
“저 이 대본 우연히 봐서요.”
유수한이 용건만 간단히 하라는 이성실의 말처럼 대본을 꺼내 보여 주며 말했다.
“여기 나오는 조연 하나가 눈에 띄어서 대표님과 상의하러 왔습니다.”
“조연?”
이성실은 두 가지에 놀랐다. 하나는 ‘시간’ 대본은 아직 편성도 받지 않은 터라 극비리에 캐스팅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더불어 대본 역시도 극비였기에, 이 대본이 유수한에게 갔다는 것에 놀랐고 두 번째는 관심 있다는 배역이 조연이라는 거였다.
“네. 2회에 죽음으로 퇴장하는 조성운이요.”
말없이 이성실은 유수한을 응시했다. 대체 저 녀석이 무슨 생각인지, 파악하려는 눈으로.
“다음 달에 공개 오디션 있어.”
“대표님. 저 계약이 석 달 정도 남았죠?”
“…….”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고. 한 번만 어떻게 자리 만들어 주실 수 없을까요?”
이성실은 대답 없이 미간을 팍 찌푸릴 뿐이었다.
유수한 생각은 단순했다. 어차피 계약은 얼마 안 남았고. 여기서 딜이 먹히지 않는다면 울며 겨자 먹기로 공개 오디션에 나가야 한다.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한 번 더 찔러보는 거다. 못 먹는 감도 찔러나 본다고 하지 않나.
“혹시 모르잖아요. 제가 다시 잘될 수도.”
“잘되면 너만 좋은 거 아니냐?”
“그때 저 재계약해 주세요.”
유수한이 다시금 힘주어 말했다.
“계약금 없이 대표님이 원하시는 조건 그대로 맞추겠습니다.”
“너 마치 네가 잘될 거처럼 말한다?”
“그만큼 대표님이 좋다는 거죠. 하하.”
이성실은 너스레를 떠는 유수한을 보며 혀를 찼다. 유수한에 대해서는 계속 김민수에게 이야기를 들어 왔다. 유수한은 촬영장에서 성실히 연기했고 현장에서 트러블도 없었다. 더불어 강철수도 그랬다. 연기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노력한다는 말. 이성실은 그 말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물론 단막극은 상업성이 없기 때문에 잘될 거라는 기대감은 없었다. 하지만 이성실은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이었고 뭐든지 실익을 추구해야 한다.
만약 버린 패였던 유수한이 다시 되살아난다면?
그렇다면 무조건 잡아야 옳았다.
“좋아.”
그렇다면 족쇄를 미리 채워 놓는 게 좋겠지.
“여기에 사인해.”
“네?”
“이건 신인 배우나 무명 배우에게 주는 계약서야. 너도 받은 적 있겠지만, 조건은 다르지. 넌 될 거라 믿었던 패였으니까.”
말없이 유수한은 계약서를 보았다. 계약금도 없었고 수익 배분도 소속사가 5할이나 가져간다. 계약 기간은 3년이었고 그리 긴 편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소속사가 필요한 무명 배우가 울며 겨자 먹기로 도장 찍는 계약서였다. 하지만 유수한은 가진 것이 많아서 돈이 크게 필요하지 않았다.
“싫으면 사인하지 않아도 된다.”
원래 유수한이라면 이 계약조건을 보고 화를 냈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이성실은 유수한을 도와줄 생각 따위는 쓰레기통에 처박을 게 분명했다.
“내 직인은 없어.”
네가 잘됐을 때, 그때 내 도장이 찍힐 거다.
* * *
이성실 대표와의 딜은 나쁘지 않았다. 이성실이 움직였던 큰 이유는 주인공이 아닌 조연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유수한이 어디까지 갈지 궁금하기도 했다.
단막극에 이어 미니시리즈 조연.
늘 유수한이 기피하던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건 이성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하지만 확답은 내리지 않았다. 우선 감독을 만나 운을 떼 보겠다고 했으나 미팅이 성사될지는 미지수였다.
“안 되더라도 네가 망가뜨린 이미지 탓이니, 내 탓은 하지 마라.”
그 말도 맞는 말이라 유수한은 더 말하지 않고 수긍했다.
유수한은 이성실의 답을 기다리며 연기 연습을 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 이성실 대표에게서 기다리던 답이 도착했다.
[감독 만나 봤는데 확답을 주지 않는다. 마음 접어.]
문자를 읽고 실망감이 먼저 찾아왔지만, 이성실이 말했던 것처럼 자업자득이었다. 그간 이미지를 망가뜨렸던 대가였다. 물론 그 이미지를 망가뜨린 건 기존의 유수한이었지만, 지금 유수한이 된 사람은 김대한이었으니 어쩔 수 없다.
[일단 조성운 역할에 대해서는 말해 뒀으니까, 오디션에서 잘해 봐라.]
뒤이어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했다. 계속 이렇게 낙담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성실에게 기대했던 것을 얻을 수는 없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한 건 아니었다. 이성실이 제작진에게 유수한에 대해 말한 것만으로도 상황은 달라진다.
아직 기회가 끝난 것은 아니기에 마음을 정리해야 한다. 공개 오디션을 준비하며 시간을 보내던 그 즈음,
[티저] ‘아임 홈리스’ 유수한 거지 되다?
티저와 함께 ‘아임 홈리스’ 제작 발표회가 열렸다.
“유수한 씨. 음주 수영 논란에 대해서 한마디 해 줄 수 있습니까?”
그리고 늘 그렇듯 제작 발표회 역시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