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그 대본 가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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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간 이어진 촬영을 끝내고 오랜만에 푹 잤다. 늦잠을 자고 싶었지만, 그동안 지지부진했던 포인트를 쌓으러 가야 했다.
“안녕하세요.”
연습실 문을 연 유수한 손에는 커피가 들려 있었다. 처음에는 맛없던 커피가 이제는 입맛에 딱 맞는다. 환경에 따라 사람의 입맛도 달라질 수 있다는 걸 깨닫는 수한이었다.
“촬영은 잘했습니까?”
연습실로 들어오는 유수한을 보며 강철수가 물었다. 유수한은 커피를 꺼내 강철수에게 주며 말했다.
“사람들에게 민폐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그 말이 가장 정답일 듯했다.
첫날, 긴장에 온몸이 굳었던 유수한은 자신만을 기다리는 스태프를 보며 피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씩 촬영 현장에 익숙해지며 연기력도 나아졌지만, 그래도 아직 모자랐다.
“또 많이 배워야 한다는 사실도 느꼈고요.”
커피를 마시며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강철수는 말없이 유수한을 보다가 이내 챙겨 왔던 대본을 꺼냈다.
“여기 중에 한 번도 안 본 대본 골라 봐요.”
꽤 작품 수가 많았다. 하나같이 명작이었고 연기를 업으로 삼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보았을 작품이었다. 하지만 유수한은 달랐다. 예전의 유수한도 연기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지금의 유수한은 연기 초보자였다.
“안 본 게 많은데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툭 던진 말이었다.
“그거 자랑 아닌데요.”
그리고 늘 그렇듯 한 소리를 듣는다.
“죄송합니다.”
사과를 하고 진지하게 대본을 골랐다. 하나같이 눈부신 금빛을 자랑하고 있어서 고르기 힘들었다. 일단 봤던 작품은 한편에 치워 두고 눈에 들어오는 작품을 몇 개 골라 놓았다.
“내용도 보면 안 되나요?”
“제목만 보고 고르세요.”
“네.”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대본 하나를 고르면 연습을 시작하게 될 텐데, 하나같이 빛나는 작품이라 어떤 걸 선택해도 아쉬웠다.
“이거요.”
유수한이 고심해서 고른 대본을 들며 말했다.
“좋습니다. 일단 남은 대본을 치우죠.”
강철수가 대본을 정리하는 동안 유수한은 대본 표지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
「비가 오는 날 – 서정민 작품」
사실 다 좋은 작품이라서 고민이 길어졌다. 이 작품을 고른 이유는 그래도 평이한 제목이라 쉽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었다.
“대본 보기 전에 간단히 설명하죠.”
강철수가 커피를 마시며 말을 이었다.
“이 영화에 대해 아무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연기를 할 겁니다. 오늘 대본 숙지를 하고 다음 수업부터 하나하나 연기하는 모습을 찍을 거고, 완성되면 확인 후에 이 영화를 보게 될 겁니다.”
그의 말을 경청하며 유수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아무 정보가 없어야 유수한 씨만의 연기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역할은 지정해 주죠. 상대역은 내가 대충 해 줄 겁니다. 역할은 역시.”
강철수가 대본을 힐끔 보며 말했다.
“주인공이 좋겠죠.”
유수한이 이 작품을 고를 줄은 몰랐다. 독립 영화였지만, 작품성을 인정받아 해외 영화제에도 초청받은 작품이었다.
이 영화는 그리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시작했지만, 1년이 지나 한국에서도 뒤늦게 주목받았다. 역주행 인기. 딱 그 말이 어울리는 영화이기도 했다.
“저는 오늘 이 대본을 읽으면 되나요?”
“예.”
“수업을 좀…….”
“뭐요.”
“아니요. 날로 드시는 거 같아서.”
“허.”
어이없다는 듯 강철수가 눈을 찡그렸다. 유수한은 괜한 말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생각한 것이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올 때가 있었다.
“날로 먹는 거 같으면 혼자 연기 연습하시든가.”
“아니에요. 제가 실수했네요.”
저 새끼 잘 삐치는데 왜 입을 놀렸지.
유수한이 웃으며 손을 저었다. 조용히 대본을 펼쳤다. 새로운 대본을 확인할 때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것도 찬란한 금빛을 쏟아내는 작품이었다. 그러다 문득 강철수가 정리한 대본도 궁금해졌다. 하나같이 명작이라 읽어 보고 싶었다. 그런 유수한을 눈치챘는지 강철수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일단 그거나 집중하세요.”
“아, 넵.”
대본을 천천히 읽던 유수한이 미간을 좁혔다.
“이거 판타지였네요?”
제목이 서정적이어서 단순한 로맨스를 생각했다.
로맨스는 로맨스였는데 판타지가 섞인 장르였다. 여름, 비가 오는 날에 사고로 죽은 주인공은 매년 여름 같은 날에 살아난다. 한 가지 조건이 있다면 같은 날, 비가 와야 한다는 사실이었고 그 짧은 하루를 그린 이야기였다.
현수 : 나야.
민영 : (놀라 눈이 커진 상태로 뒷걸음질 친다.)
현수 : (다가가며) 민영아. (목이 메는 듯) 나야…….
민영 : (다가오는 현수를 보고 뒷걸음질 치다 이내 발이 꼬여 넘어진다) 오, 오지 마……!
현수 : (겁에 질린 민영에 마음 아픈) 무서워하지 마.
민영 : (현수 보는)
현수 : 나라고. (이내 울분 터지는) 나야, 나란 말이야! 네가 사랑했던 차현수!
차현수는 결혼식 날 죽었다.
무더운 여름이었고 두 사람은 사랑을 했다. 사정 때문에 해외가 아닌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떠났고 그날, 큰 사고를 당했다. 현수는 그 자리에서 즉사, 민영은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차현수는 매년 여름 비가 오는 날 다시 살아난다. 만약 죽은 날에 비가 오지 않으면 살아날 수 없었고 비가 오는 해는 어김없이 죽은 자리에서 되살아났다.
그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제주도 거리를 헤맨다. 몸이 빗물에 젖고 목소리를 낼 수 있으며 사람답게 모든 걸 느낄 수 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면 그는 사라졌다.
이 세상에 없는 사람처럼.
현수 : 내가 널 얼마나 찾았는데.
민영 : (고개를 저으며) 아니야. 아니야…….
현수 : 혼자서 얼마나 외로웠는데.
민영 : 넌, 죽었잖아.
현수 : 내가, 죽었어? 그럼 난, (두 손을 바라보며) 지금 여기 있는 난 뭐야?
죽음을 거부하는 차현수와 그런 그를 사랑했지만, 두려워하는 여민영. 차현수의 기일, 그가 그리워진 민영은 제주도를 찾았고 그가 죽은 자리를 본능적으로 찾았다.
늘 피하고 싶었고 달아나고 싶었던 그날의 기억이었지만, 사랑하는 이를 잊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목도하게 된 차현수. 민영은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민영 : 현수야.
현수 : (고개를 끄덕이는)
민영 : 아무래도 내가 미친 것 같다.
아직 초반부임에도 흡입력이 좋았다. 유수한은 정신없이 작품을 읽어 내리고 있었다. 벌써 결말이 궁금했다. 두 사람은 과연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 하지만 분위기를 보아 행복한 결말은 아닐 듯했다.
“이거 제가 연기할 수 있을까요?”
중반부까지 읽은 유수한이 걱정되는 투로 물었다.
“해야죠. 모든 연기자가 자기에게 주어진 배역을 어떻게든 해내니까.”
“자꾸 궁금해져요. 차현수를 연기한 사람은 어떻게 연기했는지.”
“절대 집에 가서 영화 찾아보지 마세요. 그럼 이 수업은 허사로 돌아가니까.”
“나만의 차현수를 만들라 이거죠?”
“잘 알고 있네요.”
나만의 차현수.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매력 있는 역할이었고 시간을 돌린다면 이 역할을 어떻게든 손에 넣었을 것이다. 처연하면서도 처절했고 살고 싶어서 발버둥 치는 인물. 민영을 너무 사랑해서 다시 살아 돌아올 수밖에 없던 그의 마음이 가슴을 울렸다. 결국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야 하겠지만, 그의 사랑을 이기적이라 말하고 싶지 않았다.
“다 읽었어요?”
“네.”
“어땠습니까?”
“비 오는 날이 되면 차현수가 생각날 것 같네요.”
어느새 약속한 수업 시간이 모두 지나갔다. 대사 하나하나를 집중해서 읽었고 그의 감정을 느껴 보려 무진 애를 썼다. 좋은 작품일수록 결과물이 더 궁금해진다. 어떻게 이 영화가 만들어졌을까 바로 확인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수업은 여기까지.”
“네.”
“대본 숙지해서 다음 수업에 봅시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연습실에서 나온 유수한은 바로 5층으로 올라갔다. 매니저들이 모여 있는 사무실. 지금까지 이곳을 자주 드나들면서 깨달은 점은 생각보다 정보가 많이 포진되어 있다는 거였다.
유수한은 하이에나처럼 사무실을 느릿하게 돌아다니며 눈을 이리저리 돌렸다. 대본이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본 같은 경우는 보안이 필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끔 책상에 두고 화장실에 다녀온다거나 종영한 대본이 있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러다 유수한의 눈에 들어오는 희미한 빛이 있었다.
“그렇지.”
책 사이에 끼여 소심하게 내뿜고 있는 금빛이었다.
홀린 듯 그 빛에 다가갔다. 지금까지는 단막극 준비 때문에 경황이 없었지만, 그 일은 한 단락 마무리되었다. 방송까지는 아직 한 달이 남았고 이제는 다음을 준비해야 할 시점이었다.
그 빛이 새어 나오는 자리에는 사람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대본 끄트머리를 잡던 그 순간.
“여기서 뭐 하세요?”
자리의 주인이 나타났다.
“유수한 씨?”
서인하 팀장.
회사 내에서 드문 여성 매니저였다. 주로 여자 배우 담당이었고 유수한과는 마주칠 일이 별로 없었다. 물론 그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건 왜 들고 있어요?”
유수한은 들고 있는 대본을 빠르게 훑었다. 방영한 드라마인지, 아니면 이제 시작하는 드라마인지. 제목을 머리에 새기고 서인하에게 대본을 건넸다.
“아, 눈에 보여서 그만. 죄송합니다.”
“…….”
“근데 그거 무슨 대본이에요?”
제목은 외웠지만, 이 대본을 가지고 있다는 건 서인하가 이 드라마와 어느 정도 관계가 있다는 뜻이었다. 서인하는 미심쩍은 눈으로 유수한을 보았다.
“그건 왜 궁금하세요?”
“아, 재밌어 보여서요.”
“못 본 걸로 하세요. 회사에서 진행 중인 배우 있으니까.”
가차 없다.
그 말은 이 대본은 네가 볼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그래도 잠깐 대본만 보는 건 괜찮지 않을까요?”
“글쎄요. 보안이 중요해서.”
조금 더 질척거려 볼까.
“네, 알겠습니다.”
아니다.
그럴 필요는 없다.
어차피 서인하의 권한은 그리 많지 않다. 더군다나 서인하 팀장이 맡고 있는 연예인은 여자 배우였다. 요즘 그녀가 맡고 있는 여배우는 민서온이었다. K엔터 간판 연예인이기도 한 민서온은 작품 보는 눈이 좋은 사람이었다.
아마도 높은 확률로 이 드라마에 민서온이 들어간다.
“실례 많았습니다. 서 팀장님.”
서인하에게 가볍게 목 인사를 건네고 지나쳤다. 민수의 자리는 비어 있었고 의자에 털썩 앉으며 핸드폰을 들었다.
“어, 나야. 지금 어디냐?”
지금 유수한은 그 대본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 남자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빛나는 배역이 있다면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어차피 포인트고 뭐고 단계를 밟아 가며 올라가기로 결심했으니,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크게 상관없다.
“나 지금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 말이야.”
뭐든 부딪혀 봐야 후회가 없다.
“대본 하나만 구해 줄래?”
머리에는 짧게 보았던 그 대본이 아른거렸다. 그 대본의 제목은,
“시간.”
이었다.
“그 대본 가져와. 어떤 수를 써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