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숙자, 천재 배우 되다-17화 (17/175)

17. 홈마스터

처음 촬영했을 때는 갑갑한 갑옷을 입은 것처럼 온몸이 무거웠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단 하루였지만, 경험이 쌓였고 더불어 가장 잘할 수 있는 연기였다.

“컷! 좋아요!”

유수한의 연기는 경이로웠다.

단순히 더러운 노숙자를 연기해 내는 것이 아니었다. 노숙자 이전에 이지호가 살아 있었다. 잠에서 깨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을 때는 이지호가 가진 무력감이 절실히 느껴졌다.

죽은 사람처럼 멍하니 허공을 보다가 허기짐을 느끼고 미간을 찌푸렸을 때는 다른 감정이 찾아왔다. 삶의 의지를 버린 듯했던 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더불어 허리를 굽혀 땅을 훑어보다가 떨어진 삼각김밥을 발견했을 때, 떨리는 손끝에서 음식에 대한 갈망이 느껴졌다.

망설임 없이 삼각김밥을 허겁지겁 먹어 치울 때는 더러우면서도 저렇게까지 노숙자 연기를 해내는 것에 감탄하게 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와, 진짜 더럽게 처먹는데 왜 잘생겼냐?”

그 사실이 가장 경이로웠다.

숯검댕이를 얼굴에 묻혀도 잘생김은 숨길 수가 없다. 떡진 머리를 하고 추레한 옷을 입어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우스운 건, 그 비싼 몽클레스 패딩을 입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건 유수한의 아이디어였다. 이지호는 쫓겨나도 다른 사람처럼 솜 패딩이 아닌 비싼 명품 패딩을 입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물론 그 몽클레스도 지저분해지고 구멍까지 생겼다.

“누구야, 근데?”

야외 촬영이라 사람이 몰리는 걸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

“몰라. 근데 잘생겼다.”

주변에 몰린 사람들은 추레한 차림을 한 사람이 유수한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파격적인 변신이었다.

찰칵.

정신없는 촬영 현장.

스포를 방지하기 위해 사진 찍는 걸 막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최 감독은 그냥 내버려 두라고 지시했다.

단막극이라 관심도가 낮으니 이렇게라도 홍보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무리 방송사에서 기대 없는 단막극이라지만, 최 감독에게는 입봉작이었다.

그러니 뭐라도 해야만 했다.

“저 죄송한데, 저분 누구예요?”

전주 여행을 가기 위해 서울역을 찾은 젊은 여성 한 명이 스태프 한 명을 붙잡았다.

“아, 유수한 씨예요.”

“네?”

그리고 뜻하지 않은 이름에 놀라 눈이 커졌다.

“그 유수한이요?”

그 반응이 낯설지 않다. 여기 모여 있는 모든 스태프가 오늘 느꼈던 감정이었으니까.

“와, 근데 잘생겼다.”

기차 시간이 임박했음에도 여행을 떠나야 할 젊은 여성은 발걸음을 쉬이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친구를 말려야 할 일행도 마찬가지인 듯 여전히 카메라를 들고 유수한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저 사람 유수한이래.”

“헐, 그 유수한?”

거지 차림을 한 잘생긴 남자가 트러블 메이커 유수한이라는 사실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핸드폰 셔터음 소리가 계속 울렸고 카메라가 돌아가기 직전, 조연출이 돌아다니며 주의를 주었다.

“사진 촬영하셔도 되는데, 소리는 나면 안 됩니다. 부탁드릴게요! 무음 앱 사용 바랍니다!”

유수한은 완벽하게 배역에 빠져들었다.

삼각김밥을 들고 게걸스럽게 먹는 장면을 수차례 반복해 찍었다. 눈은 텅 비었고 삼각깁밥을 쥔 두 손은 덜덜 떨리고 있다.

카메라에 담길 눈빛 하나하나를 생각했고 그의 입가에는 김이 덕지덕지 붙었다.

“컷!”

드디어 하나의 장면이 끝났다. 유수한은 연기를 멈추고 스태프를 돌아보았다.

“촬영 감독님?”

“OK.”

“음향 감독님.”

“잠시만요. 체크 한 번만 하고요.”

이윽고 음향 감독이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유수한은 얼굴에 묻은 삼각김밥 잔해를 닦아 내고 숨을 돌렸다. 다이어트하느라 속세 음식과 거리를 두었는데, 오늘은 삼각김밥을 원 없이 먹었다.

물론 중간에는 버거워서 모두 뱉어 냈지만.

“저 사인해 주시면 안 돼요?”

뒤늦게 주변에 사람이 몰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수한은 펜을 받아들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럼요. 안 될 거 없죠.”

부드럽게 말을 건네고 사인을 했다. 촬영 전에 틈틈이 사인 연습을 했고 기존 유수한과는 다른 사인이 완성됐다.

“아,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뒤늦게 이름을 묻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이경민이요!”

“네.”

위에 이름을 쓰고 사인을 마무리했다. 한 명을 상대해 주니 하나 둘 유수한에게 몰렸다. 어떤 이는 사진을 요청했지만, 몰골이 몰골인지라 정중하게 거절했다.

“저 한 번만 안아 주시면 안 돼요?”

물론 악수나 포옹은 해 줄 수 있지만,

“제가 지금 더러운데, 괜찮으세요?”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요! 오빠 얼굴이 안 더러워요!”

아? 그런 거야?

유수한은 미소를 지으며 팔을 벌려 포옹을 해 주었다.

“근데 무슨 촬영이에요?”

“아, 네. ‘아임 홈리스’라고 KBC 단막극 촬영이에요. 3월 방송인데, 홍보 부탁드려요.”

유수한은 사인을 해 주며 홍보도 잊지 않았다.

다음 촬영을 위해 이동해야 하지만, 사람들이 몰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매니저가 다가오며 상황을 정리하려는데,

“괜찮아. 어차피 다음 촬영 세팅하는데 시간 걸리니까 천천히 이동하자.”

유수한은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포인트를 빠르게 쌓는 방법은 아무리 생각해도 유수한의 대중 호감도를 높이는 일이었다. 호감도를 높여야 좋은 작품이 들어올 확률도 높아진다. 그러니 이런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옳았다.

“오빠! 잘생겼어요오오오옥!”

멀리서 들려오는 격한 샤우팅에 유수한이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리고 그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다들 앓는 소리가 들렸다. 문득 느낀다. 잘생기면 뭐든 다 정답이구나, 하는.

“그나저나 여기도 참 오랜만이네.”

한때는 모든 의식주를 해결했던 장소였다. 오늘 서울역에 돌아왔을 때는 촬영에 대한 생각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형, 잠깐 편의점 들를까 하는데요.”

“그래. 그러자.”

입고 있던 거지 옷을 벗어 스타일리스트에게 건네주고 롱패딩을 입었다. 얼굴에 묻은 숯검댕이도 물티슈로 닦아 내고 일부러 만든 떡진 머리는 모자를 푹 눌러쓰며 가렸다.

편의점에서 물 하나를 고르고 속이 좋지 않아 소화제를 사려던 유수한의 눈에 빵을 고르고 있는 아이들이 눈에 보였다.

“어?”

아는 얼굴이었다. 어렴풋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아이들이었다. 약과 물을 든 채로 아이들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누나, 이거 사면 안 돼?”

“안 돼. 그건 비싸.”

“그럼 이건?”

“지금 우린 천 원밖에 없잖아.”

아이들의 대화를 듣던 유수한이 미간을 좁히며 생각에 잠겼다.

오늘은 화요일이었고, 매주 화요일에는 서울역 근처 교회에서 사람들에게 500원씩 나눠 준다. 김대한 시절, 유수한도 종종 줄을 서서 500원을 받았기에 그 기억이 남아 있었다.

아이들의 대화를 통해 유추하자면 오늘 아이들은 줄을 서서 돈을 받았고 그 천 원으로 빵을 사러 온 모양이었다.

한겨울, 그때도 얇은 옷차림이었던 아이들은 여전했다. 어른의 손길이 닿지 않아 옷이 낡고 더러웠다.

“형님, 뭐 하세요?”

“어, 잠깐만.”

유수한이 손에 들고 있던 물과 소화제를 매니저에게 주었다.

작은 카트를 하나 들고 이것저것 먹을 걸 담기 시작했다. 삼각김밥과 음료수에 과자, 라면까지 다양하게 담았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유심히 가격을 살피며 빵을 고르는 아이들 곁에 다가갔다. 일부러 말은 건네지 않고 빵을 손에 집히는 대로 카트에 넣는다.

“이걸 다 사시려고요?”

“응.”

담담하게 계산을 치르고 봉지를 양손에 든 채,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얘들아.”

짧게 아이들을 부르고는,

“이거 너네 먹어.”

계산을 마친 봉지를 내밀었다. 아이들의 시선이 유수한에게 닿았다.

“네?”

“아저씨가 주는 거야.”

“왜요?”

그 물음에 그저 미소를 짓고는 손에 봉투를 쥐여 주었다. 무거운지 인상을 찌푸리는 아이를 보며 뒤돌아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민수는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듯 고갤 갸웃거리고 있었다.

유수한은 빠르게 편의점에서 나왔다. 갑자기 먹을 걸 얻게 된 아이들은 놀란 눈으로 멀어져 가는 유수한을 지켜보고 있었다.

“누나! 저 아저씨 좋은 사람이다, 그치?”

좋은 사람?

김민수가 그 말을 듣고 헛웃음을 지었다.

유수한을 뒤따라가려던 김민수는 걸음을 멈추고 아이들을 유심히 보았다. 봉지 안을 들여다보며 웃는 얼굴을 보고 입고 있는 옷차림을 보았다.

솜이 삐죽 나와 있는 낡은 점퍼, 늘어난 청바지, 딱 봐도 풍족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아이들은 아니었다.

“얘들아.”

짧게 고민하던 김민수가 명함을 꺼내며 말했다.

“아까 이거 준 아저씨 친군데, 혹시 필요한 일 있으면 전화해.”

유수한은 먼저 차에 도착했다. 핸드폰을 보고 있던 유수한은 차에 올라타는 김민수를 모른 체했다. 보나 마나 아까 그 일에 대해서 물어볼 게 뻔해서 외면하고 있는 중이었다.

“형.”

그 목소리를 무시한다.

“그 애들, 아는 애들이에요?”

“아니.”

“근데 어떻게 저 애들이 불쌍한 애들인 줄 알았어요?”

“그렇게 함부로 동정하지 마. 그것도 상처야.”

“모른다면서요.”

김민수는 시동을 걸고 안전벨트를 매며 짧게 말했다.

“혹시 몰라서 명함 줬어요. 형님이 좀 신경 쓰는 것 같아서요.”

신경 쓰이나. 사실 그건 잘 모르겠다.

유수한은 이타적인 성격은 아니었다. 누굴 도와주는 것도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유수한은 그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돈이 여유가 있지만, 김대한 시절에는 어림없었다. 그래도 귀중한 음식을 양보했던 건, 모두 눈에 밟혀서였다.

“속이 답답하네.”

소화제를 먹고 창문을 열었다.

* * *

이경민은 주로 아이돌 그룹을 따라다니는 홈마스터였다.

줄여서 홈마.

그녀의 덕질 인생은 꽤 길었다. 처음에는 텔레비전에서 노래를 부르는 아이돌을 보며 좋아했고 조금씩 커 가면서 공방을 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카메라를 장만하고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 주기적으로 업로드했다.

하지만 지금은 오랫동안 좋아했던 아이돌이 해체하면서 덕심이 식은 상태였다. 지금까지 이경민은 아이돌만 좋아했었다. 마음이 식을 즈음에 새롭게 등장하는 보이그룹에 빠졌고 자연스럽게 공백기는 없었다.

지금.

지금만 예외였다. 이경민은 10년 덕질 인생에서 처음으로 휴덕기를 맞이하고 있었으니.

“유수한…….”

그는 이경민 인생에서 관심이 없던 배우였다. 아이돌을 따라다니다 보면 자연스럽게 배우를 보게 된다. 그들을 보면 잘생겼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덕통사고는 없었다.

그러나 오늘.

그녀는 대형 덕통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외모 돌았다, 진짜.”

오늘 이경민은 친구와 함께 전주 여행을 떠났다.

기차 시간이 임박하도록 유수한의 외모에 빠져서 생각도 하지 않았던 사인까지 받았다. 성격 더럽다던 유수한은 소문과 무색하게 스윗했고 착했다.

자연스럽게 이경민이 덕질했던 상대들을 떠올리게 했는데, 그들은 뜨는 동시에 배가 불러 팬을 돈으로 보았다. 그런 성의 없는 팬서비스를 보다가 사람다운 팬서비스를 받으니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너, 계속 그거만 들여다볼 거야?”

“미안, 좀만 찾아본다는 게…….”

이경민은 전주로 가는 내내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가볍게 유수한을 검색했고 새로 업로드되었던 사진을 찾아보았다. 가장 마음을 울렸던 건, 대본 리딩 현장 스틸 컷이었다.

쉼표 머리가 이렇게 잘 어울리는 남자는 처음 보았다. 분명 예전에 덕질했던 아이돌을 보고 쉼표 머리는 이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머리라고 말했던 게, 엊그제 같았음에도 그랬다.

“너 이러다가 유수한 덕질 시작하겠다?”

그 말에 뜨끔하지만, 아직은 입덕 부정기였다.

“아니야. 나 병크 있는 남자는 싫어.”

“근데 잘생기긴 했더라.”

“그치?!”

“병크 있는 남자는 싫다며?”

“아니, 얼굴은 죄 없으니까…….”

그러면서 이경민은 유수한의 필모그래피를 찾고 있었다. 몇 개 없어서 하루면 다 끝날 양이었고 그게 못내 아쉽게 느껴지면서도 정신 차리려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꾸 손이 핸드폰으로 간다.

처절한 입덕 부정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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