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뭐 불만 있어요?
카메라.
그리고 스태프.
유수한을 따라다니는 반사판, 환한 조명들, 마이크 붐대.
모든 것이 낯설다.
유수한의 첫 촬영은 낯선 것에서 익숙해지는 과정이었다.
“컷! 다시.”
첫 장면은 그리 까다롭지 않은 촬영이었지만, 유수한에게는 처음이었기에 쉽지 않았다. 단순했다. 그저 출근하는 장면을 찍는 거라 잘만 걸어도 되는 촬영인데도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컷! 다시!”
분위기가 점차 다운된다. 그 이유는 모두 배우 탓이었다.
빨리 찍고 넘어가야 할 장면이 늦어지니 스태프 사이에 불만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유수한은 숨을 고르며 물을 마셨다. 아무것도 아닌데, 그저 몇 걸음 걸었을 뿐인데 이상하게 숨이 찼다.
“유수한 씨.”
감독이 짜증이 잔뜩 배인 얼굴로 다가왔다.
“뭐 불만 있어요?”
간단한 촬영을 한 시간 넘게 진행하고 있으니 감독으로서 화가 날 만한 상황이었다.
촬영 시에 시간은 곧 돈이었다.
한 컷 찍는데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면 자연스럽게 모든 촬영이 밀린다.
게다가 이렇게 장소 협조를 하고 빌린 공간이라면 더더욱 시간은 금이었다.
“아니요. 죄송합니다!”
지금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최 감독 역시도 허리를 굽혀 죄송하다고 사과하는 유수한을 보고 혀를 찼다. 차라리 평소 유수한 이미지처럼 되바라지게 행동했다면 냅다 들이박기라도 했을 텐데, 그럴 수도 없었다.
“감독님. 10분, 아니, 딱 5분만 시간 주실 수 있을까요?”
유수한이 두 손을 공손하게 모으며 양해를 구했다.
“제가 너무 오랜만에 촬영해서 몸이 굳었습니다. 잠깐만 밖에 나가서 몸만 풀고 오겠습니다.”
저렇게 말을 하는데 안 된다고 할 사람은 몇 없었다. 최 감독은 크게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10분 줄 테니까 몸 제대로 풀고 오세요.”
“네. 감사합니다.”
유수한은 밖에 나와 가볍게 뛰며 몸을 풀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 사람만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에 머리가 딱딱한 돌이 돼 버렸다. 대사가 있는 장면도 아니었고 그저 성큼성큼 걸어와 멈춰 서는 그 단순한 연기마저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형님.”
뒤따라온 매니저가 손에 들고 있던 물을 내밀었다.
“고맙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팔을 휙휙 휘저으며 굳은 몸을 풀었다. 입도 크게 벌리며 딱딱하게 얼어붙은 얼굴 근육을 풀지만, 여전했다.
마음 같아서는 차가운 물을 뒤집어쓰고 싶은 심정이었다.
“민수야.”
허리를 숙여 스트레칭을 하던 유수한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매니저를 불렀다.
“네.”
유수한이 피가 쏠려 조금 붉어진 얼굴로 매니저를 보았다.
“나 지금 민폐 장난 아니지?”
“…….”
“솔직히 말해도 돼.”
“아닙니다.”
매니저가 미간을 좁히며 솔직하게 말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달라진 유수한보다 원래의 유수한을 더 많이 겪은 사람이었다.
“아니긴. 나도 알아. 내가 지금 얼마나 한심한지.”
유수한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고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찬 바람이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간다.
배우라는 직업을 쉽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실제 카메라를 마주하고 연기를 시작하려니 온몸이 굳었다.
짝.
뺨을 가볍게 때렸다.
머리에 안개가 낀 듯이 멍해서 이렇게 해서라도 정신을 차려야 했다.
김민수는 그런 유수한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술에 취해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이후로 유수한은 어딘가 이상해졌다.
“형님, 저 궁금한 거 있어요.”
혼자 제 자리에서 뛰고 있던 유수한이 멈춰 서서 매니저를 보았다.
“갑자기 왜 그렇게 열심히 하시는 겁니까?”
계속 김민수는 궁금했다.
그리고 또 의아했다.
꽤 오랜 시간을 유수한과 함께 일해 왔다. 어떤 작품이든 그가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 김민수였다. 대본도 제대로 읽지 않아서 직전에 대기실에서 달달달 겨우 외우고 촬영에 임하는 모습이 익숙했다.
지금 유수한은 어떤가.
대본은 하루 만에 너덜너덜해졌다.
그의 대본을 잠시 맡아둘 때 펼쳐 보면 빼곡한 글씨가 없는 페이지가 없었다. 심지어 작은 메모장까지 붙여 놓고 어떻게 연기할지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
처음에는 연예계에서 영영 복귀도 하지 못하고 배우 인생이 끝날 거라는 위기감 때문인 줄 알았다.
사람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았고 그건 유수한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점차 이상하게 그가 진심으로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로서 책임감 하나 없던 그가 달라졌다.
“글쎄.”
열심히 뛰었더니 몸에 열이 오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자 조금 머리가 상쾌해지는 느낌이었다.
“이거 제대로 못 하면 죽을 거 같아서.”
그 대답에도 김민수는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눈치였다.
“내가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지?”
김민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수한이 웃으며 말했다.
“넌 몰라도 돼. 그냥 내가 좀 제대로 살아 보고 싶어서 그래.”
유수한은 고개를 돌려 문 너머로 보이는 사람들을 보았다.
스태프들은 하나같이 유수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배우가 돌아오면 제발 제대로 연기해 주길 원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 들어가자.”
약속한 10분이 임박했다.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간 유수한이 심호흡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두려웠다.
늘 음습하게 숨어 사는 것이 익숙했던 김대한이라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제 김대한은 없다.
오직 유수한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죄송합니다!”
허리를 굽혀 스태프에게 사과를 한다.
“이제 촬영에 지장 없도록 하겠습니다.”
부담감이 사라진 건 아니다.
주목을 받는 것에 익숙해진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앞으로 달라질 것이다. 처음부터 한순간에 모든 것이 이루어질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계단을 밟아 올라가듯, 걸음을 내디딜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컷! 좋습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 있으리라.
* * *
다음 날, 오전 8시.
서울역에는 촬영팀이 한창 세팅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제 유수한 연기 엉망이던데?”
“조금 더 지켜봐야죠.”
촬영 세팅에 여념이 없던 강석일 촬영 감독은 유수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제 유수한은 마치 신인 배우가 된 것처럼 어색한 연기력을 선보였다.
촬영을 하다 보면 딜레이 되는 건 늘 있는 일이었지만, 예상한 시간보다 3시간을 넘기는 건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것도 까다로운 촬영이 아니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평범한 컷도 제대로 소화 못 하는데, 노숙자는 어떻게 연기하려고.”
걱정되는 건 연출자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유수한을 반대했던 최 감독이었지만, 미팅할 때 보았던 그의 연기력은 인정했다. 그랬기에 비난을 감수하고 유수한을 선택한 거였고 뚜껑을 열었을 때는 실망만 가득했다.
“노숙자는 아마 잘할 거예요.”
그래도 연출자는 배우를 믿어야 했다.
배우를 믿지 못하면 죽도 밥도 안 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유수한의 노숙자 연기는 디테일이 살아 있었기에 믿고 있었다.
설마 이것도 못하겠어.
물론 의연한 척을 하고 있지만, 사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안녕하세요. 유수한입니다.”
어제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유수한은 다른 의미로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저거.”
그리고 강석일 감독 역시 마찬가지였다.
“거지 아냐?”
‘아임 홈리스’에 참여하는 모든 스태프들은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아무리 잘나가는 직장인 시절이 있다고 해도 유수한이 이 배역에 어울릴까?
단 한 번도 연기를 하면서 망가져 본 적 없는 그가 역할을 위해서 망가질 수 있을까?
그것도 제대로?
“수한 씨, 머리가…….”
하지만 유수한은 그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다.
제대로 망가진 모습을.
“좀 더럽죠? 걱정 마세요. 머리는 감았고 왁스로 떡진 머리 만든 거예요.”
오히려 담담한 건 유수한이었다.
너털웃음을 지으며 기존 유수한에게 없었던 친화력을 발휘했다. 어제는 낯설어서 낯을 가렸지만, 오늘은 한결 마음이 편했다.
무엇보다 노숙자 차림이 그 누구보다 편했다.
“근데 잘생겼어요.”
“네?”
“어떻게 그렇게 추레한데 잘생겼어요?”
지금 대화하고 있는 여자는 제작 피디였다. 눈이 반짝이는 걸 보니 거짓말은 아닌 듯했다. 유수한은 그 말을 듣고 씩 미소를 지었다.
“칭찬 감사합니다.”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던 스태프 사이에서 유수한은 서서히 녹아들고 있었다. 예전 유수한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최 감독은 유수한의 분장을 세세하게 관찰하듯 보고 있었다.
미리 매니저에게 노숙자답게 철저히 분장해서 오라고 말했지만, 이렇게 완벽하게 분해서 올 줄은 몰랐다.
“어제는 잘 잤어요?”
“네. 덕분에 잘 잤습니다. 감독님은요?”
“저도 잘 잤습니다.”
걱정을 한시름 덜어 낸 최 감독이 오늘 촬영할 내용을 의논했다. 유수한은 능숙하게 어떻게 연기를 할지 이야기했고 그 말을 들으며 최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등장은 여기 기대앉아 있으면 좋겠어요. 아, 신문지 있을까요?”
“물론 준비했죠.”
유수한은 거리낌 없이 바닥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댔다. 자연스럽게 리허설이 시작되었고 조명 감독까지 합류해서 리허설을 지켜보았다.
빈털터리 노숙자가 된 이지호의 첫 장면이었다.
이 장면은 여러모로 중요했다. 처음 이지호가 등장할 때는 멋진 모습이었기에 추락한 첫 장면은 무조건 충격적이어야 했다.
벽에 기댄 유수한이 감은 눈을 뜬다.
생기 넘치던 눈은 텅 비어 있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본다.
아무 감정 없이 하늘을 올려보던 그는 미간을 이내 좁힌다. 허기짐에 꼬르륵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렸다.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유수한은 몇 걸음 옮기다가 툭 고개를 떨어뜨린다.
느릿하게 허리를 굽힌 채 땅을 살펴보며 걸음을 옮긴다.
“여기서 김밥이나 뭐 빵 같은 거 하나 떨어져 있었으면 좋겠어요.”
“계속해 봐요.”
“그걸 주워 먹는 거죠. 아무리 생각해도 떨어진 음식을 주워 먹어야 이지호가 얼마나 바닥에 처박혔는지 딱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연기는 이미 미팅에서 두 눈으로 지켜본 최 감독이었다. 그래서 유수한의 연기에 놀라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리허설을 지켜보던 강석일 촬영 감독은 달랐다.
그는 마치 이런 생각을 하는 듯했다.
그 유수한이 저렇게까지 연기를 한다고?
“그래서 미리 여러 가지 음식 준비했어요.”
최 감독이 조연출을 불렀다. 그리고 조연출은 검은 봉지에서 여러 가지 편의점 음식을 꺼내 보여 주었다. 유수한은 꼼꼼히 음식을 확인하다가 삼각김밥을 하나 들었다.
“감독님, 이거 어떨까요?”
최 감독을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딱 한 입 먹고 버려진 거 주워 먹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삼각김밥은 여러 개 들어 있었고 하나 정도는 뜯어도 될 듯했다. 유수한은 삼각김밥을 뜯고는 두 손으로 김밥을 들었다.
“이렇게.”
유수한이 게걸스럽게 삼각 김밥을 먹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더럽게 먹으면 어떨까요.”
“좋네요. 한 입 먹었던 삼각김밥이니까, 더 초라하게 느껴질 것 같고.”
“아, 그리고 제가 일부러 입술 터진 분장했거든요.”
어제와 달리 유수한은 적극적이었다.
“아무래도 이지호는 밑바닥 생활이 어색한 사람이니까, 노숙자 서열에서도 많이 밀릴 것 같아요.”
그건 경험담이었다.
유수한 이전, 김대한 시절이었을 때 그는 노숙자 서열에서 거의 끄트머리에 놓여 있던 사람이었다.
“자존심이 강한 녀석이라 얻어맞기도 했을 것 같아요. 근데 얘는 얻어맞으면서도 끝까지 개기는 거죠. 그래서 다리를 좀 절었으면 해요.”
카메라 세팅을 위해 리허설을 유심히 지켜보던 촬영 감독은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 악명 높은 유수한이 노숙자 역할을 한다고 했을 때, 당연히 색안경을 낄 수밖에 없었다. 이 업계에 오래 있던 사람이니 들은 게 많아서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지금 유수한은 작품에 임하는 자세가 달랐다.
어제는 능숙하지 못한 연기력 때문에 불만이었지만, 그 불만이 싹 사라질 만큼 오늘 유수한은 진정 배우 같았다.
“좋습니다. 그런 설정 좋아요. 이지호를 더 입체적으로 만들어 주니까요.”
리허설은 성공적이었다.
이제 최 감독은 강석일 촬영 감독과 함께 어떻게 각을 잡을지 의논했다. 이어서 조명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누었다.
“오늘은 촬영 잘 풀릴 것 같네.”
강석일 감독은 한결 풀린 얼굴로 처음으로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최 감독도 한결 풀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야외 촬영은 늘 까다로운데 오늘은 날이 촬영하기 좋았다. 해도 그리 쨍쨍하지 않았고 날도 한결 풀렸다.
“자, 촬영 시작합시다.”
모니터 앞에 앉은 감독의 목소리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