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얼굴에 분칠한 놈은 못 믿지
대본 리딩 다음 날.
[HOT] 유수한 인성은 썩었는데 얼굴은 잘생김 +348
운동을 마치고 커뮤니티를 둘러보던 유수한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족할 만한 글이 올라왔다.
- 어떻게 껍데기만 남을 순 없냐?
⌞그럼 영혼이 없잖아
⌞⌞영혼이 필요한가? 껍데기만 있어도 충분할 듯
⌞⌞⌞영혼 없으면 그냥 죽으라는 거 아니냐 ㅋㅋㅋㅋㅋㅋㅋ
⌞⌞⌞⌞포장지는 미치게 잘 뽑혔는데 내용물이 썩은 케이스 ㅉㅉ
⌞⌞⌞⌞⌞근데 반깐 존잘이다 진심
사실 돌려 까는 글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옹호글이기도 했다. 결국은 잘생겼다는 내용이 중심이었으니.
- 얼굴 잘생기면 모든 게 용서됨? 존나 쉽네 ㅋㅋㅋㅋㅋㅋ
⌞2222 솔직히 이런 글도 불편함
⌞⌞333333 걍 얼굴 잘생긴 쓰레기 아님?
⌞⌞⌞44444 복귀하기 무섭게 얼굴 잘생겼다고 빨아주는 거 보소
⌞⌞⌞⌞⌞555555 진심 보기 싶음 쟤 갑질도 쩐다며
⌞⌞⌞⌞⌞⌞엥? 갑질? 유수한 갑질도 함?
⌞⌞⌞⌞⌞⌞⌞ㅇㅇ 아는 사람이 방송국에서 일하는데 개싸가지래
댓글은 보는 재미가 있다.
지금 다이어트만 아니었다면 팝콘에 콜라를 마시며 댓글을 정독했을 것이다. 욕을 먹는다고 해도 그다지 마음에 타격이 없었다. 기존 유수한의 인성이 글러 터진 건 사실이니까.
처음에는 이런 반응이 낯설었다.
하지만 지금은 익숙해져서 자연스럽게 읽어 내리고 있었다.
“반깐이 뭘까.”
차례차례 검색하며 요즘 쓰는 말도 터득하고 있다.
“아, 앞머리를 반만 깠다고? 별걸 다 줄이네.”
댓글은 이제 그만.
차에서 계속 핸드폰을 붙잡고 있으니 시간이 속절없이 흐른다. 유수한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시동을 걸었다.
곧 첫 촬영이었고 당분간 연기 수업을 받기는 힘들 것이다.
해서 오늘 촬영 전에 마지막 점검을 할 계획이었다.
“이런 것 좀 들고 오지 마요.”
이번에는 인스턴트커피 한 박스를 사들고 왔다. 수업하면서 느낀 건데 강철수는 원두커피는 좋아하지 않았다. 늘 같은 브랜드 인스턴트커피를 마시는 걸 지켜본 유수한이었다.
“촬영 들어가면 못 보니까 아쉬워서 그렇죠.”
“아쉽기는.”
커피 박스를 구석에 치워 두고 자리에 앉았다.
강철수는 유수한이 오기 전에 대본 리딩 영상을 보고 있었다. 일부러 유수한에게 리딩 영상을 받아 오라고 했고 덕분에 어떻게 연기했는지 상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대본 리딩 영상 다 봤어요.”
생각보다 괜찮았고 한편으로는 보완할 점도 많았다.
“발성은 꽤 나아진 거 같은데 왜 그렇게 얼굴이 굳었어요?”
“너무 오랜만이라 긴장되더라고요.”
“대본 리딩에 그렇게 긴장할 정도면 촬영은 어쩌려고요?”
“잘해 봐야죠.”
사실 그 말 밖에는 할 말이 없다.
대본 리딩 현장에서 감독과 역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결론은 알아서 잘할 수밖에 없었다. 감독이 촬영 현장에서 세세한 디렉팅으로 연기를 이끌어 준다고 해도 결국 카메라 앞에 서는 사람은 유수한이었다. 자신 없게 주눅 드는 것보다는 차라리 당당한 것이 백번 낫다.
“이봐요. 유수한 씨.”
강철수가 팔짱을 끼며 삐딱한 시선으로 유수한을 보았다.
“그쪽 진짜 이상해진 거 알고 있어요?”
K엔터에 입사해서 유수한과 별다른 접점이 없었던 강철수였지만, 그의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커리어가 바닥에 처박히니 급해서 그러는 줄 알았다. 뭐라도 해 보려고 성격 죽이고 사는 줄 알았다. 그렇게 생각하기 충분했고 사실 지금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이상했다.
들었던 소문과 멀리서 보았던 그의 행동이 달라서.
“그래요?”
유수한이 짐짓 모르는 체하며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근데 이상한 게 좀 낫지 않나?”
농담이 섞인 말에 강철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다 생각을 접고 신경을 끈다. 일적으로 만난 사이는 깔끔해야 옳았다. 괜한 호기심은 금물이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죠.”
강철수가 대본 리딩 영상을 보고 느낀 점을 적은 수첩을 보며 말을 이었다.
“날이 추우면 입도 잘 안 풀리고 얼굴도 굳을 거예요. 요즘 날씨에는 세트장에서 촬영해도 제대로 난방 할 수 없으니, 항상 카메라 돌아가기 전에 얼굴 근육 풀어 줘요.”
요즘 강철수는 배우에게는 기본인 정보들을 유수한에게 하나하나 짚어 말해 주고 있었다.
유수한은 신인이 아니다.
물론 다양한 작품을 경험한 배우도 아니었다.
고작 세 작품을 찍은, 광고를 찍은 횟수가 훨씬 많은 아무것도 아닌 배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겨울에 촬영해 본 경험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하나하나 기본 정보를 알려 주는 건.
“이런 건 너무 기본인데, 말해 줘야 할 것 같아서.”
였다.
“뭐든 알려 주면 좋죠.”
강철수는 힐끔 유수한을 보고는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대사 톤 다시 잡아야 할 거 같은데.”
“톤이요?”
“일단 대사 치는 톤이 일정하지 않아요. 갑자기 높았다가 낮았다가. 중구난방. 일상적인 대화를 할 때는 늘 일정한 톤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 그쪽에게 말하는 것처럼 일정한 말투. 톤.”
유수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발음을 너무 신경 쓰다 보니 자꾸 과해져요. 목소리가 마치 연극 무대 선 배우 같아.”
그 말에 유수한이 뜨끔했다.
사실은 최근에 연극 한 편을 보고 감명받았다고 하면 강철수는 또 눈을 홉뜨고 혀를 끌끌 찰 것이다.
한심하다는 듯.
“잘 하고 싶어서요. 그래서 목소리가 그렇게 나왔나 봐요.”
처음 강철수는 유수한을 삐딱한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물론 지금도 좋은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작품에 대한 태도가 진지하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지나친 의욕은 화를 부른다. 적당히 조절하는 것도 능력이었다.
“잘 하고 싶다고 생각하면 몸에 힘 들어가요. 힘 빼요. 연기는 다른 사람이 되는 거라, 힘 들어가면 그냥 유수한이 다른 사람 흉내 내는 꼴 됩니다.”
강철수가 유수한을 보며 말을 이었다.
“오늘은 톤 잡는 걸 도와줄 테니까, 촬영 직전까지 계속 연습하세요. 내 것이 될 때까지.”
* * *
[라이프 체인지] 출석 포인트 적립! <현재 총 누적 포인트 : 14>
첫 촬영 날.
출석 포인트를 확인하고 집을 나섰다.
유수한은 긴장감에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늘 처음은 그런 거였다. 계속 연습한답시고 목을 많이 쓴지라, 촬영 전날에는 물을 자주 마시고 대본만 계속 읽었다.
지금까지 유수한은 얼굴에 분칠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유수한이 된 후에는 얼굴을 신경 써야 해서 선크림을 발랐지만, 이렇게 전문적인 메이크업은 처음이었다. 여러 사람이 붙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준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모든 준비가 끝나 있었다.
의상은 회사원답게 네이비 색상 정장에 블랙 코트였다.
원래도 유수한의 신체 조건은 좋았다. 키도 큰 편이었고 어깨도 운동하지 않았음에도 딱 벌어졌다.
좋은 조건을 타고났지만, 유수한은 운동도 하지 않고 몸을 방치했다. 덕분에 마른 몸에 군살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유수한은 몸에 붙은 군살을 빼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식단을 병행하고 운동을 하며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턱에 붙은 살이 조금 정리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예전 날카롭던 턱선이 살아났다.
“잘생겼어.”
멍하니 거울을 보던 유수한이 자기도 모르게 생각하던 걸 입 밖으로 내뱉었다. 본인은 그걸 인지하지 못했는지, 거울 속에 비치는 얼굴을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처음 이 얼굴을 봤을 때도 잘생겼다고 생각했다.
김대한의 얼굴은 평균 이하였기에 더더욱 배우 유수한의 얼굴이 흡족했다. 심지어 더 잘생겨질 수 있다는 것에 감탄한다.
괜히 전문가가 있는 게 아니었다.
“형님.”
잠시 유수한은 외모에 흠뻑 빠져 있었다. 그 덕분에 긴장했던 것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고 이내 고개를 돌려 김민수를 보며 말했다.
“가자.”
촬영장은 어수선했다.
처음이 붙는 일은 언제나 정신없다.
‘아임 홈리스’ 촬영팀도 마찬가지였다. 연출 감독과 촬영 감독이 앵글에 대해 의논하고 있고 조명 감독은 조명 세팅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정신없는 현장에 주연 배우 유수한이 등장하고 있었다.
저벅 저벅.
발걸음 소리에 하나 둘 고개를 돌려 유수한을 본다. 어떤 이는 미간을 좁히고 있었고 어떤 이는 살짝 입 벌린 채 멍하니 유수한을 주목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같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유수한이 저렇게 잘생겼던가?
“안녕하세요.”
유수한은 스태프 사이에 유명했다.
연출 감독이나 작가에게나 인사를 하고 그 외의 스태프는 유령 취급하는 사람으로.
인사를 먼저 건네 본 적 없다는 목이 빳빳한 배우로 유명했다.
“안녕하세요. 유수한입니다.”
그런 사람이 보이는 사람마다 고개를 숙이며 살갑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유수한은 촬영장을 크게 돌았다. 일부러 모든 스태프와 인사를 하며 좋은 인상을 남기고 있었다.
오늘 촬영장은 판교였다.
회사 건물 일부를 빌렸고 주인공의 화려한 회사 생활을 보여 줄 공간이었다.
“감독님. 안녕하세요.”
회사 로비를 크게 돈 유수한은 살갑게 감독에게 다가갔다.
“강석일 감독님, 앞으로 촬영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유수한은 자연스럽게 촬영 감독을 보며 인사를 건넸다. 유수한은 일부러 헤드 스태프의 이름을 모두 외웠다. 촬영 시에 스태프에게 밉보여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강석일은 말없이 유수한을 응시했다.
그는 베테랑 촬영 감독이었고 유수한에 대해서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카메라를 들고 방송질을 하다 보면 귀가 있다 보니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건 유수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그의 태도가 미심쩍을 수밖에 없었다.
“저도 잘 부탁합니다.”
사실은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다른 말이었으나, 그걸 입 밖으로 내뱉을 만큼 모자라지 않았다. 현장에서 촬영 감독은 영향력이 있으면서도 없는 사람이다.
만약 촬영이 심각하게 딜레이 된다면 스태프 사이에서 첫 번째로 욕을 먹는 사람이 촬영 감독이었다. 그러니, 그에게도 배우와의 관계는 중요했다.
아무리 예술적인 각을 잡아 내도 배우가 따라 주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니.
“수한 씨. 조금 기다려야 할 거야. 이제 시작이라 손발을 맞춰야 하거든.”
최 감독의 말에 유수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 괜찮습니다, 감독님. 대본 보면서 오늘 촬영에 누가 되지 않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살갑게 인사를 하고 유수한은 돌아섰다.
촬영장 분위기를 살피며 커피를 마신다. 차라리 세팅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게 나았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기에 유수한에게도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듣던 거와는 좀 다르네?”
강석일이 최 감독을 보며 작게 속삭였다.
“그건 아직 모르죠.”
최 감독은 강석일보다 나이도 한참 어리다.
애초에 강석일 촬영 감독은 단막극 사이즈에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최 감독이 도와 달라고 부탁하며 모셔 온 인재였다.
촬영장에서 연출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촬영 감독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최 감독이 강석일을 모셔 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의 풍부한 경험을 빌리기 위해서였다.
“하기야.”
강석일이 대본을 읽고 있는 유수한을 곁눈질로 보며 말했다.
“애초에 얼굴에 분칠한 놈은 못 믿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