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대본 리딩
방송국으로 향하는 차 안.
유수한은 대본 리딩에 참여하는 모든 배우를 머리에 집어넣고 있었다. 어제부터 달달 정보를 외우고 있지만, 혹시나 실수할까 봐 보고 또 보는 걸 멈출 수 없다.
우선 주연 배우로 함께 나오는 한초원은 접점이 없기 때문에 실수할 일이 없다. 그리고 아버지 역할로 나오는 김석범은 예전 데뷔작에서 만났던 적이 있다. 데뷔작 ‘어둠이 온다’에서 유수한이 맡았던 역할에 의해서 처참히 살해당하는 역할이었다. 그리고 어머니 이순자는 이번 작품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이다.
그 외에 조연 배우 중에서 몇몇이 유수한과 접점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유수한 행세를 하려면 그 정보를 머리에 빠삭하게 외우고 있어야 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KBC 본관 앞에서 이순자를 만났다. 유수한은 허리를 굽혀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어, 그래. 수한이지?”
“네. 유수한입니다.”
이순자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유수한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직 유수한과 만나 본 적이 없는 그녀는 그가 어떤 성격의 소유자였는지 모르고 있었다. 물론 알고 있다고 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유수한은 강약약강답게 싹싹하지는 못해도 선생님급 배우에게는 늘 잘했다.
“이렇게 함께 연기하게 돼서 영광입니다. 선생님.”
아마 과거의 유수한이었다면 멀리서 이순자를 발견하면 걸음을 돌렸을 것이다. 같이 대본 리딩 현장으로 가는 길이 어색하기 때문에 피했을 텐데, 지금은 달랐다. 어른에게도 너스레를 떨며 스스럼없이 대할 줄 안다.
“영광은 무슨.”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얼굴에 꽃이 폈다.
“선생님, 커피 드시겠어요? 제가 사오겠습니다.”
“아니야. 가서 물 마시면 돼.”
“그럼 따뜻한 차는 어떠세요?”
“괜찮대두.”
“어떤 차 좋아하세요?”
“그럼 페퍼민트 있음 사와.”
“네, 선생님.”
그 대화를 들은 매니저 김민수는 가증스럽다는 듯 유수한을 보고 있었다.
“어차피 커피 제작진이 준비했을 텐데요.”
“아, 그래?”
대본 리딩 할 때는 커피와 물은 기본이었다. 그리고 가벼운 간식도 준비한다. 그러니 지금 유수한의 행동이 이상할 뿐이었다. 저 사람이 강약약강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대선배에게 이렇게 사근사근 구는 사람이었던가? 아닌데.
“몰랐네.”
그리고 유수한은 정말 몰랐다.
“너도 마실래?”
“저는 아이스 바닐라 라떼요.”
“다른 건?”
“저 여기 와플 좋아해요.”
“카드는?”
“네?”
“법카.”
그렇지. 사람이 쉽게 변하지 않지.
“여기요.”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주며 김민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 *
“선생님, 여기 페퍼민트 왔습니다.”
미소를 지으며 차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순자는 웃음으로 화답한다. 유수한은 회의실을 크게 돌아보며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었다. 한초원이 자리에 앉아 있어 들어오면서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다른 배우도 마찬가지로 눈을 마주치며 살갑게 인사를 한 상태였다.
자리에 앉은 유수한은 정면에 보이는 한초원을 보았다. 연극 무대에서 보았던 사람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게 되니 기분이 묘했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한초원이 고개를 들어 유수한을 보았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초원 씨.”
유수한의 살가운 말에 한초원이 미간을 좁힌다. 생각했던 이미지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유수한의 이미지는 당연히 좋지 않다. 자숙 후에 복귀작이 단막극이라는 건 조금 의외였지만, 사실 상대역으로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한초원에게는 이번 단막극이 처음 도전하는 매체 연기였기 때문에,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을 상대역으로 만나고 싶었다.
“네, 저도 잘 부탁드려요.”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리고 유수한이 미소를 짓는다.
이윽고 빈자리가 하나하나 채워진다. 유수한은 테이블에 설치된 카메라를 보았다. 홍보팀이 부지런히 설치한 카메라였다. 대본 리딩부터 익숙하지 않은 카메라가 눈에 띈다. 하지만 이제 익숙해져야 할 일이었다. 당장 이틀 후에는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해야 하니.
“자, 다들 모였군요.”
마이크를 든 연출 최인성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나 운을 뗐다.
“안녕하세요. 최인성입니다. 앞으로 좋은 작품 만들어 봅시다.”
차례로 소개가 이어진다. 다들 대본 리딩이 익숙한 듯 물 흐르듯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윽고 마이크가 유수한에게 전해진다.
“안녕하세요. 이지호 역할을 맡은 유수한입니다.”
짧게 소개를 마치고 마이크는 한초원에게로 넘어갔다.
“안녕하세요. 한초원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유수한은 소개를 하는 사람들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그 누구보다 떨고 있는 사람이 유수한이었다. 연예인을 실제로 보는 것도 처음, 대본 리딩도 처음, 연기를 사람들 앞에서 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손발이 차가워진다. 대본을 보며 마음을 가다듬지만, 쉽지 않았다.
“씬1. 카지노. 이지호가 카드를 보고 있다. 풀하우스. 그의 눈이 커지고 이내 미소를 짓는다. 카드를 내려놓고 있는 칩 모두를 건다.”
조연출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대본을 보던 유수한이 고개를 들었다.
“올인.”
첫 장면부터 이지호가 등장한다. 주인공이었고 거의 원톱이나 다름없었으니 당연했다. 지문을 읽는 조연출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유수한은 연기를 이어 나갔다.
“말도 안 돼!”
무려 풀하우스였다. 풀하우스를 이기는 패를 가진 사람이 있다니, 그 사실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눈치였다.
“어떻게 풀하우스가 져! 이건 사기야!”
이지호는 도박 중독자였다. 그는 주말이 되면 카지노를 찾았고 가장 좋아하는 게임은 역시 포커였다. 처음 도박에 빠진 건 호기심이었다. 그리고 차라리 돈을 잃었다면 좋았을 것을. 하필 포커로 큰돈을 쥐게 되며 피할 수 없는 중독으로 번져갔다.
“한 번 더 해! 돈 가져오면 되잖아!”
그리고 이지호는 조금씩 도박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유수한의 연기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 유수한이 노숙자 역할로 복귀한다는 소식을 듣고 다들 의아해 했다. 아무리 사고를 쳤다지만 주연급으로 드라마 출연을 하던 배우였다. 단막극을 하더라도 더 좋은 배역이 있었을 텐데, 볼품없는 역할을 선택했다는 것에 의아함을 느꼈다.
“이지호.”
노숙자 신세가 된 이지호를 찾아온 전 여자 친구 김선영.
“여긴 왜 왔어.”
이지호는 모든 것을 잃고 자존심에 김선영에게 이별을 고했다.
“그냥 궁금해서. 아니, 마음 정리하고 싶어서.”
김선영은 이지호를 찾아다녔다. 그와 결혼을 약속했기에 갑작스러운 이별에 마음 정리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지호가 도박에 빠져 재산을 탕진하고 빚까지 졌다는 사실도 들었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감정이 한순간에 사그라들진 않았다.
“이런 네 모습이라도 봐야 정리가 될 것 같더라.”
그 말을 하고 김선영은 지갑에서 돈을 꺼낸다. 이지호 얼굴에 떨어지는 지폐를 상상하며 유수한은 허겁지겁 돈을 줍는 시늉을 했다.
“더, 더 줄 수 없어?”
“뭐라고?”
“한 백, 백만 원만. 내가 다 갚을게. 아니, 몇 배로 돌려줄 테니까. 응? 선영아.”
자존심을 굳게 지키던 그는 돈 앞에서 무너진다. 김선영은 불쾌한 듯 미간을 좁히고 지갑에 있는 돈 모두를 그에게 던져 주고 떠난다. 질렸다는 눈으로.
두 시간 가량 진행한 대본 리딩이 끝났다. 유수한은 힘없이 숨을 내뱉으며 눈을 감았다. 아직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간 것도 아닌데, 바짝 긴장해서 진이 다 빠졌다.
“자, 찍습니다.”
대본을 들고 사진을 찍는다. 이제야 비로소 첫 대본 리딩을 마쳤다.
* * *
대본 리딩을 마치고 다음 스케줄은 의상 확인이었다. 유수한이 원하는 의상을 매니저에게 전달했고 매니저는 스타일리스트와 통화하며 대본과 의상 콘셉트를 알려 주었다.
그리고.
한동안 연락이 없던 스타일리스트 보라가 준비한 의상을 들고 회사를 찾았다.
“어때요? 마음에 드세요?”
스타일리스트 보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 그녀가 준비한 의상은 수트를 비롯한 노숙자 의상이었다.
“응, 마음에 들어.”
보라가 준비한 수트 세 종류는 색이 모두 달랐다. 네이비 색상과 짙은 그레이, 남은 하나는 일반적인 블랙 수트였다.
그 위에 입는 코트도 다양하게 준비해 놨다.
“예전에 입던 대로 준비했는데, 사이즈가 좀 타이트하네요.”
그러면서 힐끔 유수한 눈치를 보고 있었다. 예전이었다면 유수한은 의상이 잘 맞지 않는다며 인상을 팍 찌푸리며 화를 냈을 것이다.
미리 치수를 쟀다면 좋았겠지만, 유수한과 사이가 그리 가깝지 않았기에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치수를 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유수한과 일하면서 꽤 고생했던 그녀였고 그럼에도 관두지 못하는 이유는 프리랜서라 인맥 하나하나가 소중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잘리기 전까지는 싫어도 이 일을 계속할 것이다.
“이 정도는 괜찮아.”
유수한은 거울을 보며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의상이 타이트한 건 느끼고 있었지만, 옷에 몸을 구겨 넣은 수준은 아니었다.
“요즘 내가 운동해서 그래.”
그리고 그런 유수한의 반응에 보라가 미간을 좁혔다. 예전 같으면 길길이 날뛰었을 사람이 화도 내지 않고 차분하니 이상하게 느껴졌다.
조심스럽게 유수한에게서 멀어진 보라가 김민수에게 다가가며 작게 속삭였다.
“저 인간 왜 저래요?”
당연히 그렇듯 유수한은 주변 사람에게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말도 곱게 나올 리가 없다.
“나도 모르지.”
윗대가리가 비정상이면 자연스럽게 그 아래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사이가 더 좋아진다. 씹을 상대가 생기니 공감대도 형성된다. 그래서 김민수도 보라와 말을 놓으며 편하게 지내고 있었다.
“약간 돈 것 같은데? 저 사람?”
“나도 요즘 그렇게 생각해.”
거울을 보던 유수한이 미간을 좁힌다.
두 사람이 숙덕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렸고 별 좋은 소리는 아니라는 걸 느끼고 있었다. 고개를 홱 돌린 유수한이 김민수와 보라를 번갈아 보았다.
그 눈빛에 찔끔한 두 사람이 거리를 두고 시선을 회피한다.
“보라야.”
유수한이 한숨을 쉬고 손짓했다.
“노숙자 의상 말인데.”
주춤거리며 다가간 보라가 긴장하며 그의 말을 들었다.
“안 쓰는 명품 패딩이 있으면 좋겠다.”
“패딩이요?”
“응, 낡은 패딩 말이야. 캐릭터가 잘 살던 놈이었으니까, 입고 있는 옷도 그만큼 고급이지 않을까 해서.”
“아, 네.”
“구멍 좀 내고 때가 타야 하니까 새 거일 필요는 없어.”
“네, 그거면 돼요?”
“응. 부탁한다.”
이제 촬영이 며칠 남지 않았다.
스타일리스트 보라는 유수한의 의견을 수렴해서 의상을 준비할 것이다.
“밥 먹었니?”
다정한 물음에 보라가 미간을 좁혔다.
“안 먹었으면 민수랑 먹고 오라고.”
지갑을 꺼낸 유수한이 말했다.
“난 몸 관리 중이니까 둘이 맛있는 거 먹고 와.”
엉거주춤.
카드를 받은 보라가 멍한 눈으로 유수한을 보았다. 이 인간이 법카가 아닌 개인카드로 뭘 사 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흔들리는 눈으로 유수한을 보던 보라가 고개를 돌려 김민수를 보았다.
달라진 유수한을 이미 경험해 본 김민수는 말없이 어깨를 으쓱이고 있었다.
“그럼 먹고 올게요.”
“그래.”
주섬주섬 의상을 정리해서 나가는 두 사람을 보던 유수한은 지친 듯 자리에 앉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연기에 대한 부담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그럴수록 더 열심히 하자.”
가방에서 대본을 꺼낸 유수한이 기지개를 켰다.
하도 읽어서 걸레가 된 대본을 펼치고 볼펜을 손에 쥐었다.
그의 눈이 진지해진다.
점차 대본에 빠져들고 있었다.
“아, 귀 가려워.”
그리고 이상하게 귀가 가려운 유수한이었다.
밥 먹으러 나간 김민수와 보라가 열심히 유수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