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미친 게 분명함
“지금 당장 쓸 수 없는 아이템이네.”
뭐든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나았다.
딱 한 번 사용할 수 있는 아이템. 처음 운 좋게 뽑은 아이템이 S급이라서 눈이 높아진 탓이지, 공짜로 얻은 거라 D급이라도 좋아해야 마땅했다.
“이걸 어디에 써야 좋을까.”
지금 당장은 쓸 일이 없다.
하지만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 필요할 날이 생길 터였다. 아무래도 기존 유수한은 이미지 탓에 발언권에 힘이 실리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걸 생각하면 쓸모가 있는 아이템이었다.
물론 D급이지만.
유수한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래도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 오늘 하루를 영화만 계속 본 이유도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서였다. 새해를 맞이하고 하루가 지나는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6개월이라도 시간을 벌어 놓으니 마음이 놓였다. 그동안은 시한부 인생을 사는 것만 같았다. 물론 6개월 연장한 것도 시한부는 마찬가지였지만.
다음 날, 유수한은 운동을 마치고 바로 K엔터를 찾아갔다. 공백기를 끝내고 공식적인 활동이 시작되었으니, 자연스럽게 연기 수업 외에도 회사를 찾는 일이 생겼다.
“형님, 오셨어요?”
매니저 김민수 손에는 대본이 들려 있었다.
자연스럽게 유수한은 김민수 손에 들려 있는 대본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근데 그건 뭐냐?”
“아, 이거요······?”
김민수는 멋쩍은 듯 웃었다.
괜히 유수한이 미니시리즈 대본을 보고 화를 낼까 우려스러운 탓이었다. 예전 유수한은 작은 일에도 질투가 심했다. 비슷한 나이 또래의 배우가 좋은 작품에 들어가면 그 화를 매니저에게 풀었다. 그러니, 김민수가 대본을 숨기듯 품에 안는 건 당연했다.
“줘 봐.”
“예?”
“잠깐만 보고 줄게.”
우물쭈물하는 김민수에게 다가간 유수한이 억지로 대본을 낚아챘다. 아무 생각 없었다. 그저 대본에서 빛이 나고 있었기에 단순히 작품이 궁금했을 뿐이었다.
“유수한.”
유수한이 대본을 살피고 있는데 멀리서 이성실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 하니?”
성큼성큼 다가온 이성실이 유수한 손에 들려 있는 대본을 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손을 내민 이성실을 유수한이 보고 있었다.
“아, 잠깐 구경만 하고 있었습니다.”
김민수도 그렇고 이성실도 그렇고 하나같이 유수한을 경계하고 있었다. 유수한이 멋쩍은 듯 웃으며 대본을 이성실에게 주었다.
답삭, 대본을 받은 이성실이 고개를 돌려 김민수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죄송합니다. 형님이 잠깐만 보신다고 하셔서요.”
유수한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 대본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저 제목과 어느 감독, 작가의 작품인지 알아 두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거 누가 들어가는 작품이에요?”
“그건 네가 알아서 뭐 하게.”
이성실은 대본을 김민수에게 건네며 무심하게 대꾸했다.
“그거 망할 텐데.”
들릴 듯 말 듯 말을 건네고는 유수한이 걸음을 옮겼다. 김민수가 들고 있던 대본은 붉은빛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작품을 궁금해했던 건 단순했다. 이렇게 망할 작품을 쓴 작가가 누군지 첫 번째로 궁금했고 감독 역시도 자연스럽게 궁금해졌다.
남이 잘되는 걸 좋아할 사람은 몇 없겠지만, 지금의 유수한은 남을 유치하게 질투할 성격은 아니었다. 물론 이해는 된다.
과거 유수한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직접 경험하지 않았더라도 얼추 알 것 같으니까.
“쟤 뭐라니?”
멀어져 가는 유수한을 보며 이성실이 기가 찬 듯 물었다.
“글쎄요. 망할 것 같다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누가 그걸 물어본 줄 아니? 나도 귀 있어.”
“아, 네.”
괜히 핀잔만 들었다.
김민수는 성실하고 일도 곧잘 하지만, 융통성이 부족한 성격인 탓이었다.
이성실은 묘하게 유수한의 말이 거슬렸다. 예전 유수한을 본다면 그런 악담을 한 이유는 단순히 질투심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전과 다른 표현 방식이었다.
보통 유수한이라면 내게도 이런 작품을 가져오라며 닦달했을 것이다. 저렇게 조용히 악담 한마디만 하고 지나갈 성격이 아니었다.
“대표님, 저 이제 가 봐도 될까요?”
“가. 대본 간수 잘하고.”
“네.”
김민수는 조금 억울했다.
오늘 유수한이 회사에 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가 약속한 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왔다. 이렇게 대본을 전달하러 가는 중에 마주칠 줄은 전혀 몰랐다.
회사 대표와 멀어지며 김민수가 한숨을 푹 쉬었다. 사회생활은 역시 힘들다. 쉬운 일 하나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오늘따라 더 고된 듯했다.
* * *
유수한은 소회의실에 들어가 있었다.
김민수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전신 거울 앞에 서 본다. 운동을 시작한 지 아직 보름도 채 되지 않았지만, 조금 살이 빠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식단 관리에 술도 끊고 담배도 끊었으니 자연스럽게 몸이 좋아지는 건 당연했다.
“뭐 하세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온 김민수가 거울 앞에 서 있는 유수한을 보며 물었다.
“그냥 내 얼굴 본다.”
“예?”
“잘생겨서.”
돌았나?
태연자약한 유수한의 말에 김민수의 표정이 구겨진다. 그것도 잠시 다시 표정 관리를 한 김민수가 손에 들고 있는 스케줄표를 테이블에 놓았다.
“앞으로 정해진 스케줄입니다.”
거울로 유심히 얼굴을 관찰하던 유수한이 몸을 틀었다.
책상에 놓인 종이 한 장.
의자를 뒤로 끌고 테이블에 앉은 유수한이 스케줄표를 유심히 보았다.
“대본 리딩이 이틀 후네?”
“네.”
“촬영 시작은 일주일 남았고.”
생각보다 일정이 빠듯했다.
“포스터 촬영은 현장에서 스틸 컷으로 대신할 예정이고요. 제작 발표회는 2월 말에 진행할 예정입니다. 정확한 날짜는 이번 달 안으로 나온다고 하네요.”
KBC 단막극 시즌은 다음 주부터 시작된다.
이미 촬영을 마친 단막극 두 편이 마무리 후반 작업 중이었고 차례차례 방송이 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아임 홈리스’는 3월에 편성되었다.
“촬영은 일주일 동안 진행되고 이건 촬영 스케줄입니다.”
김민수가 미리 출력한 촬영 스케줄을 내밀었다.
유수한은 촬영 스케줄을 보았다. 처음 보는 유물 같은 느낌이었다.
굉장히 복잡했다.
간략한 촬영 내용뿐만 아니라 장소까지도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심지어 그날 날씨가 어떤지, 비 소식이 있는지 그런 기본 정보까지 기입되어 있었다.
“D와 N은 뭐지?”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장면 설명 외에도 부가적인 내용이 있었는데, D와 N. 그리고 다른 영어도 쉽게 알아챌 수 없었다. 유수한이라면 익숙하게 알아들었겠지만, 아직 김대한은 그 수준까지 이르지 못했다.
“?”
의아한 듯 김민수가 유수한을 보았다.
“이게 오랜만에 보니까 좀 헷갈리네.”
멋쩍은 유수한의 말에 김민수가 미간을 살짝 좁히며 말했다.
“D는 DAY, 낮이요. N은 NIGHT, 밤이요.”
김민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눈빛은 정말 몰라서 묻느냐는 투였다.
“아, 잠깐 깜빡했어. 오랜만에 봐서.”
대충 둘러대고는 촬영 스케줄을 다시 꼼꼼히 살펴보았다. 모르는 용어는 집에 가서 따로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촬영 스케줄에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형광펜.
미리 김민수가 유수한이 나오는 장면은 따로 표시를 해 두었다.
“고맙다.”
유수한이 촬영 스케줄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뭘요?”
“이거. 하나하나 표시해 준 거 고맙다고.”
김민수의 표정이 뜨악해진다.
그 유수한이 고맙다는 말을 다 하다니.
요즘 유수한이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이후로 조금 이상해졌다.
지금까지는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형.”
오랜만에 김민수가 ‘님’ 자를 빼고 유수한을 불렀다.
“혹시 미쳤어요?”
그저 고맙다는 말 한마디 했을 뿐인데, 미쳤다는 소리를 들은 유수한이 어이없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그래, 나 미쳤다.”
유수한이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미친 짓 한번 해 주리?”
그 말에 김민수가 아연실색이 되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 *
“집 좋네.”
한강이 보이는 고급 아파트.
전날에 유수한은 가지고 있는 재산을 상세히 알아보았다. 아파트 한 채가 있었고 본인 소유의 호텔도 가지고 있었다. 한동안 드나들지 않은 집은 조금 삭막했다. 유수한은 보일러를 돌리고 거실 소파에 털썩 앉았다.
유수한으로 살면서 참 많은 것을 느끼게 된다.
우선 돈이 있다는 것은 참 편했다. 사실 배우 일을 하지 않아도 유수한은 돈이 차고 넘쳤다. 만약 그냥 신의 선물처럼 유수한으로 아무 조건 없이 살 수 있었다면 김대한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돈이란 그래서 좋은 거였다. 뭘 해도 아등바등 살지 않을 수 있고 편하게 삶을 영위할 수 있으니.
바닥까지 떨어졌던 김대한으로서는 그 어떤 목적의식이 없었다. 그저 유수한으로 사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지만, 상황이 달라졌으니 적응해야 마땅했다.
“L이 로케이션이구나. 야외 촬영.”
하나하나 촬영 용어를 배워 나간다. 모르면 공부하면 된다. 그리고 그 과정이 고통스럽지 않았다.
“확실히 혼자 있으니 능률이 좋네.”
촬영 용어를 대충 수첩에 옮겨 적은 유수한이 잠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아파트는 유수한의 본가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큰 통창으로 보이는 한강이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다.
이 집에는 기존 유수한의 흔적이 가득했다.
부엌에서 와인셀러를 둘러본다. 술은 끊은지라 그림의 떡이었다. 마시게 되더라도 작품을 하지 않는 휴식기에나 한잔 가능하겠지.
방 하나는 엄청난 양의 옷과 가방이 즐비했다. 본가에 있는 옷보다 몇 배는 더 많은 옷이 꽉 들어차 있었다.
“이 녀석은 돈 아낄 줄을 모르는구만.”
옷방에서 나와 마지막으로 침실에 들어간다. 제일 깔끔한 공간이었다. 퀸 사이즈의 침대 하나와 협탁, TV가 끝이었다.
벌러덩, 침대에 누운 유수한이 허기짐을 느낀다.
요즘 맛없는 식단만 입에 밀어 넣고 있었다. 적어도 여기는 음식의 유혹이 적으니 한결 나았다.
“배가 고플 때는 견과류.”
트레이너는 운동이 끝나고 나면 헬스 보충제를 마시라고 했다. 포만감은 있지만, 맛은 그냥 배고파서 먹는 수준이었다. 견과류는 입이 심심할 때, 한 줌씩 챙겨 먹으라 했고. 그 역시도 그다지 입을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
그래도.
“이마저도 없을 때가 있었지.”
모두 다 버티게 한다. 과거의 쓰디쓴 경험이.
먹을 게 없어서 바닥을 뒤지고 다니던 그때가. 동전을 주워 편의점 빵 하나를 겨우 사 먹던 그 순간이 여전히 몸에 남아 있다.
유수한과 김대한의 차이점은 그것이었다. 김대한은 굶주림을 알고 있다. 김대한이 유수한의 차고 넘치는 환경에 동화되지 않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아득.
고소한 아몬드를 씹는다.
견과류를 먹으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늘 바닥에 머물던 김대한은 어느새 높은 곳에 있다. 다시는 바닥에 처박히고 싶지 않았다.
* * *
이틀 후.
대본 리딩 날이 왔다.
“머리 볼륨펌 넣었어요. 대본 보니까 초반에는 말끔하게 나오잖아요? 그러면 머리에 살짝 볼륨이 들어간 게 깔끔하기도 하고 멋스럽기도 해요.”
“네, 좋아요.”
“길이는 많이 손 안 댔어요. 나중에 노숙자 될 때는 좀 부스스한 게 나을 거 같아서.”
대본 리딩에 참석하기 전에 유수한은 숍에 먼저 들렀다. 역할에 대해 의논하고 머리 손질을 마쳤다.
대본 리딩은 보통 평소 모습 그대로 참석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유수한은 처음 경험하는 일이라, 이것저것 신경 써서 나왔다.
옷도 깔끔하게 슬랙스에 블랙 셔츠를 입었다.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셔츠 소매를 두 번 접고 깔끔하게 정돈된 머리를 본다.
확실히 전문가 솜씨는 남달랐다.
“수한 씨.”
처음 숍 사람들도 유수한을 경계했다. 하지만 기존 유수한과 다른 태도에 하나둘 마음을 열고 있었다.
본디 못된 사람이 한 번 호의를 베풀면 그 선의가 더 크게 느껴지는 법이었다.
“셔츠 단추 하나만 더 풀면 좋을 거 같은데.”
그 말에 유수한이 거리낌 없이 단추 하나를 더 풀었다. 유수한의 컬렉션에서 눈대중으로 골라 입는 옷은 대체로 잘 어울렸다.
우선 기존 유수한이 패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었고 자신에게 맞는 옷만 사 모았으니 잘 어울리는 것도 당연했다.
“제가 셔츠 좀 만져도 돼요?”
헤어 디자이너 김지선이 한걸음 다가오며 물었다.
“네, 그럼요.”
옷매무새를 만지는 손길이 미용 일을 하는 사람답게 꽤 야무졌다.
툭, 정리를 마친 김지선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남자는 살짝 쇄골이 보여야 섹시하거든요.”
“그래요?”
몰랐던 사실이다.
“소매도 이렇게 막 접지 말고요.”
“그럼요?”
알아서 유수한은 자신의 팔을 내밀었다. 김지선은 접은 소매를 풀고 고무줄 하나를 가져왔다.
“여기 고무줄을 끼우고 소매 정리하면 더 깔끔해요.”
소매를 크게 한 번 접은 김지선이 고무줄을 그 사이에 끼웠다. 그러더니 작게 소매를 접는다. 마지막으로 접은 소매 주름을 정리하더니 한 걸음 멀리 떨어져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요.”
나머지도 정리가 끝났다. 고무줄이 팔목을 살짝 조여 불편함이 있었지만, 움직이다 보면 익숙해질 듯했다.
“고마워요.”
김지선은 가만 유수한을 보았다.
뭔가 사람이 달라진 듯한 기분이었다. 유수한은 공백기가 길어서 예전처럼 자주 만나지는 못했다. 가끔 들러서 머리를 손질하고 가기는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다시 이렇게 얼굴 본 건 거의 반년 만이었다.
“혹시 여자 친구 생겼어요?”
“네? 제가요?”
“아니, 갑자기 사람이 너무 스윗해져서.”
유수한은 얼마나 거지 같은 사람이었을까.
“여자 친구 있으면 좋겠네요.”
유수한이 웃으며 말했다.
살면서 김대한은 여자 친구를 사귀어 본 적이 없다. 살면서 여자 친구 생겼느냐는 말도 처음 들었다.
여자 친구라.
유수한이 가만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앞으로는 현장에서 자주 보겠네요.”
“네, 앞으로 잘 부탁해요.”
숍을 나서며 유수한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김지선은 여전히 분위기가 달라진 유수한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그러다 자동문이 닫힌다.
헤어 디자이너로 일하는 그녀는 유수한 같은 사람을 자주 만난다. 연예인은 기본적으로 갑질이 몸에 밴 사람이 많았다.
유수한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일 뿐이었다. 그래도 사람이 사람답게 행동하면 일이 한결 편해진다.
김지선은 그런 유수한의 부드러움이 바쁜 현장에서도 계속 유지되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