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숙자, 천재 배우 되다-12화 (12/175)

12. 호소력 짙은 목소리

두 시간가량 진행된 극은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보편적인 사랑이라고 해서 평이한 내용을 예상했는데, 바람피우고 또 피우고 그러다가 들켜서 싸우고 헤어지더니, 다시 만나고 그러다가 또 한눈팔고.

그런 내용이 주였다.

공연이 끝났다.

유수한은 가슴에 손을 얹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유선아, 그러니까 한초원의 연기는 대단했다. 연극으로 쌓은 내공이 절로 느껴지는 연기였다. 그와 함께 연기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나저나, 생각보다 막장이었네.”

이윽고 불이 켜졌다.

유수한은 가방에 넣어 두었던 프로그램북을 꺼내 정독하고 있었다. 공연을 보기 전과 보고 난 후의 마음이 달라졌다. 쉬이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생생한 연기를 처음 보는지라 그 감정에 계속 빠져 있었다.

[라이프 체인지] 연극 관람 포인트 적립! <현재 총 누적 포인트 : 25>

익숙하게 핸드폰을 꺼내 포인트 적립을 확인했다.

사람들이 하나둘 객석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저거 유수한 아니야?”

조금씩 묻혀 있던 유수한의 존재가 드러나고 있었다. 유수한은 고개를 숙이며 사람들이 어서 공연장에서 빠져나가기를 기다렸다.

고개를 숙인 채로 눈을 감고 극을 복기했다. 항상 강철수는 발성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듣는 사람이 못 알아들으면 실패한 연기라고 말했다. 그 말의 의미를 비로소 오늘 깨닫게 되었다.

유수한이 사람들을 피해 빠르게 극장에서 빠져나왔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두 눈으로 보았던 배우의 연기를 떠올렸다. 매체 연기와 다르게 힘이 들어간 연기였지만, 그럼에도 배울 것이 많았다. 어떻게 하면 더 연기를 잘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유수한은 집으로 돌아갔다.

“아, 좋다.”

유수한으로 살면서 깨닫게 되는 일이 너무나 많다.

뜨거운 물을 욕조에 받아 놓고 목욕하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 지도 알게 되고 커피를 마시며 여유롭게 창밖을 내다보는 일도 참 좋은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모든 것이 돈이 있어야만 주어지는 일상적 행복이었다.

“카메라를 켜고.”

늦은 시간이지만, 연기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카메라를 설치한 유수한이 그 앞에 섰다. 대본을 들고 있었고 하도 읽어서 머리에 대사가 박힌 상태였다.

툭, 침대에 대본을 던진 유수한이 카메라를 보며 연기를 시작했다.

“제가 뭘 잘못했는데요?”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비스듬히 선 채, 상대가 있다고 생각하고 대사를 읊었다. 이건 강철수가 알려 준 연습 방법이었다. 매체 연기를 할 때는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유수한은 카메라 앞에 서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카메라가 얼굴을 비춘다 생각하면 몸이 자꾸만 삐그덕거렸다.

“어디 보자.”

찍은 내용을 확인한다.

처음보다는 나아졌지만, 여전히 무의식적으로 카메라를 신경 쓰고 있었다.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찍고 확인하는 걸 거듭했다. 표정이 어땠는지, 딱딱하게 굳었는지 확인하며 자연스러운 얼굴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생각을 거듭한다.

“자, 마지막.”

심호흡을 하고 카메라를 보던 유수한이 이내 눈을 감았다. 인물의 감정을 생각하고 카메라 존재를 머리에서 지워 버린다.

이윽고 눈을 뜬 유수한이 연기를 시작했다.

“제가 뭘 잘못했는데요?”

절박한 이지호가 되어 대사를 내뱉는다.

“아버지!”

엘리트 이지호.

도박 빚이 쌓이고 쌓여 걷잡을 수 없는 순간을 가족에게 들켰다. 이지호는 지금 참담하다. 누군가에게 절박하게 매달릴 성격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다.

아직 아버지 역할을 할 상대 배우를 모르기 때문에, 그가 어떻게 연기할지는 머리에 없었다. 역할 소개를 보아 냉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아무리 자식이라 해도 망나니짓을 용인할 사람이 아니었다.

이내 유수한의 몸이 움직였다.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연기를 하다 보니, 감정에 따라 몸이 다르게 움직였다.

털썩.

무릎을 꿇은 유수한이 상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듯한 모습으로 고개를 들었다.

“제가 잘못했어요!”

눈에는 절박함이 가득했고 마치 벼랑 끝에 내몰린 어린 맹수 같았다.

몸이 약하거나 결함이 있는 새끼는 가족과 함께 할 수 없다. 다큐멘터리를 보면 으레 나오는 장면이었다.

부모가 피눈물을 흘리며 귀한 새끼를 목덜미를 물어 죽이거나 벼랑에 밀어 버리는 장면.

그리고 지금 이지호의 감정은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연기를 마치고 숨을 고르며 카메라를 들었다.

찍은 내용을 확인하니, 이제야 조금 마음이 편해진다. 시간은 성큼성큼 흐르고 있었고 그렇기에 마음이 초조해지고 있었다.

나아지고 있다.

조금씩 연기력이 늘고 있음을 확인할 때면 마음이 한결 나아진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새벽 2시가 넘어가는 시간. 유수한은 카메라를 도로 제 자리에 두고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이윽고 잘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눕는다.

눈을 감아서도 계속 대본 생각을 했다. 대사를 어떻게 치면 더 자연스러울지 생각하고 이지호라는 사람의 감정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을 하다 보면 어느새 지쳐 잠드는 유수한이었다.

* * *

[라이프 체인지] 출석 포인트 적립! <현재 총 누적 포인트 : 26>

추운 겨울, 눈 뜨기 싫은 아침을 즐겁게 해주는 건 역시 포인트였다.

현재 모은 포인트는 총 26 포인트.

운동을 하고 나면 27 포인트.

집에 오면서 영화관에 들러 영화를 한 편 보면 28 포인트였다. 즉 이제 곧 체험판 구매 기간을 연장할 만큼 포인트를 쌓았다는 뜻이다.

순식간에 운동을 마치고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왔다.

이제 신작 영화도 부지런히 본지라 더 볼 수 있는 영화가 없었다. 내친김에 2점을 더 쌓아서 체험판 연장을 하고 싶었다.

“할 수 있는 퀘스트가 더 없나.”

할 수 있는 건 죄다 작품과 관련된 거였다. 우선 운동을 하고 온 유수한은 바로 극장으로 향했다. 광화문에 있는 작은 극장에는 프랜차이즈 영화관에서 상영하지 않는 독립 영화를 더러 상영했다. 지금은 볼 수 있는 건 거의 다 보았기에 독립 영화로 시선을 돌린 거였다.

[라이프 체인지] 영화 관람 포인트 적립! <현재 총 누적 포인트 : 28>

이제 2점만 더 모으면 된다.

내친김에 영화를 하나 더 예매했다.

꼼수지만, 이렇게라도 해서 포인트를 따내는 게 옳았다.

지금 당장 제작 발표회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가장 가까운 대본 리딩도 이틀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

물론 체험판 연장을 한다고 해서 뭐가 크게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단순히 말하자면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시간보다 6개월이라는 시간이 더 여유롭다.

마음이 급하면 몸도 급해져서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해서, 마음이라도 편안하게 할 생각이었다.

“확실히 독립 영화는 잠이 오는구나.”

하품이 밀려온다. 배우의 연기를 눈여겨보았지만, 계속 눈이 끔뻑끔뻑 감겼다. 내용도 심오하고 내용도 잠잠한데, 연속으로 영화 관람인지라 정신이 지쳐 있었다.

[라이프 체인지] 영화 관람 포인트 적립! <현재 총 누적 포인트 : 29>

대신 포인트를 얻었다. 지금은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가기 전이라서 이렇게 시간이 남아 있었다. 최대한 이 시간을 활용해야 한다. 포인트 하나라도 눈에 불을 켜고 쫓아다녀야 옳았다.

한번 무리해서 영화를 하루 종일 봤던 적이 있다. 그러다 깜빡 졸고 말았는데, 그 영화는 적립이 되지 않았다. 그 말은 제대로 영화를 보지 않으면 포인트를 얻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유수한은 영화 한 편을 더 예매하고 남는 시간 동안 카페에서 커피를 사 마셨다. 카페인으로 졸음을 최대한 밀어 내 본다. 잠시 밖에 나가 찬 바람도 쐬며 정신을 바짝 차렸다.

마지막 영화는 가장 볼만했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주인공이 탈선을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온갖 고초를 당하게 된다. 그러다 좋은 선생님을 만나 마음을 다 잡고 공부를 시작한다는 내용이었다. 가장 볼만한 이유는 스토리 때문이 아니었다. 주인공 역할을 맡은 어린 녀석이 실감 나게 연기를 잘해서 흐트러지는 정신을 바로잡게 해주었다.

나이와 상관없이 대단했다.

저런 게 바로 배우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할 만큼 멋있었다.

[라이프 체인지] 영화 관람 포인트 적립! <현재 총 누적 포인트 : 30>

“좋아!”

이제 체험판 6개월 연장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영화관을 빠져나오면서 유수한은 계속 핸드폰을 붙잡고 있었다. 차에 올라탄 유수한은 히터를 틀어 차 안을 따뜻하게 했다. 이윽고 핸드폰에 문자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라이프 체인지] 장시간 영화 관람은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주의하세요!

가뿐히 경고를 무시하고 앱을 열었다. 오늘 영화 세 편을 내리 본 이유는 단 하나였다. 체험판 기간 연장을 하기 위해서.

[체험판 유효기간 연장]

6개월 상품을 계속 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구매 제한 횟수가 표시되어 있었고 6개월 상품은 총 3번 구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1개월 단기 상품은 구매 횟수 10회로 넉넉했으며 3개월 연장 역시도 3번이었다.

그러니, 본품을 살 때까지 시간을 아끼며 살아야 한다.

카테고리에 들어간 유수한은 거침없이 6개월 상품을 클릭했다. 이윽고 안내창이 핸드폰 액정에 떠올랐다.

[30 포인트를 사용하여 체험판 유효기간을 연장하시겠습니까?]

[YES] [NO]

당연히 손가락이 [YES]에 닿았다.

심장이 쿵쿵 뛴다.

생각해 보면 부지런히 돈을 모을수록 쓰는 행위에 더 큰 쾌감이 밀려왔다. 지난 시간, 포인트를 쌓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어라?”

유수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체험판 유효기간 첫 연장 이벤트!]

뜻하지 않은 안내창이 눈에 보였다. 반짝거리는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체험판 유효기간 연장 특전을 드립니다!]

이건 보나 마나 좋은 거다.

뭔가 좋은 것을 [라이프 체인지]에서 준비한 게 분명했다.

[카드 한 장을 선택해 주세요!]

이윽고 문구가 사라지고 빈 화면에 카드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총 10장의 카드가 화면을 꽉 채운다.

같은 색상, 같은 모양의 카드였다.

카드 한 장을 선택하라고 했다.

유수한은 마른 침을 삼키며 핸드폰 화면을 뚫어져라 보았다.

떨리는 손으로 카드 한 장을 클릭했다.

휘이이익.

카드 하나가 선택되자 남은 카드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유수한이 선택한 카드가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번쩍!

이윽고 눈부신 빛에 카드가 휩싸이고 카드가 뒤집힌다.

[호소력 짙은 목소리 (D)]

이 목소리를 들으면 순식간에 설득당해 버린다.

제한 시간 1시간

“?”

D급 아이템.

뭔가 굉장히 애매하면서도 좋아 보이는 아이템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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