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이건 뭐 거지가 따로 없잖아?
주 3회, 1시간가량 연기 수업을 받는다.
아직은 발성과 발음을 잡는 데 중점을 두고 있었지만, 차기작이 결정되었으니 작품에 신경 써야 할 시점이었다.
유수한은 미리 대본을 숙지하고 수업에 참여했고 지금 처음으로 이지호를 연기하고 있는 중이었다. 강철수는 유수한의 연기를 탐탁지 않아 했다. 하지만 엘리트였던 이지호가 추락하고 거리에 나앉는 그 순간, 눈빛이 달라지고 있었다.
“허.”
그가 짧게 감탄했다. 지금 유수한은 벽에 기댄 채 허공을 보고 있었다. 추운 듯, 작게 어깨를 떠는 모습에 리얼리티가 살아 있었다.
그다음 장면은 허리를 굽혀 땅을 보며 걷다가, 동전 하나를 줍는 장면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자연스러울 수 있을까.
“뭐, 요즘 기차역에서 노숙자 체험이라도 하고 왔어요?”
유수한의 굽은 허리, 벽에 기댄 채 허공을 보고 있는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마치 이곳이 기차역처럼 느껴졌다.
“이건 뭐, 거지나 다름없잖아?”
처음 듣는 강철수의 칭찬이었다. 이걸 칭찬으로 받아야 할지 모르겠지만.
유수한은 연기를 마치고 뻐근한 허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열심히 연구는 했습니다. 잘하고 싶어서요.”
“잘하네요. 더 연구 안 해도 될 정도로.”
문제는 엘리트였을 때의 이지호였다. 유수한은 노숙자 연기만큼은 그 누구보다 잘할 자신이 있었다. 1년 동안 괜히 거리를 헤맨 게 아니었다. 이건 연기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몸에 자연스럽게 습득된 스킬이었다.
“증권회사 에이스였던 시절은 짧으니까, 대사 톤만 가다듬으면 잘 넘어갈 것 같네요.”
그 말에 유수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지호가 말끔한 정장을 입는 장면은 몇 컷 되지 않는다. 대사도 그리 길지 않으니, 잘생긴 얼굴로 어떻게 비벼 보면 될 듯했다.
무엇보다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노숙자가 되었을 때였다.
“근데 멋이 없어.”
곰곰이 생각하던 강철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노숙자일 때야 멋은 필요 없다지만, 엘리트 모습에는 멋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유수한이 멋쩍은 듯 웃음을 지었다.
“뭐가 문제인가 생각했는데, 늘 주눅이 들어 있는 느낌이에요. 목소리에 힘도 없고 자세도 좋지 않고. 리얼한 노숙자 연기도 좋지만, 이지호라는 캐릭터를 잊지 마세요. 이지호는 도박에 빠진 멍청한 인간이지만, 엘리트 특유의 자만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사실 무슨 뜻인지 딱 알 수 없었지만, 분위기에 밀려 유수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숙자의 모습에서도 이지호가 묻어나야 해요. 그 특유의 오만함, 아시겠어요?”
“아, 네.”
이제야 조금씩 깨닫게 된다. 유수한이 했던 연기는 그저 자신을 대입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다 보니, 계속 주눅 들어 힘없는 모습이 이지호에게 입혀졌다. 연기를 할 때 자신의 경험을 살리는 것도 좋지만, 역할 특유의 특성을 무너지게 하면 안 된다. 그 사실을 깨달은 유수한은 대본을 보며 이지호에 대해 생각했다.
“허리 펴세요.”
“네.”
“눈빛. 힘주고.”
“네.”
“부릅뜬다고 눈빛에 힘 들어가는 거 아니에요.”
연기 수업을 시작하면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간다. 1시간이라는 시간이 그리 짧지 않음에도 그랬다.
“오늘 숙제는 거울 보고 표정 연습해 오세요.”
강철수가 유수한을 보며 말을 이었다.
“표정만 자연스러워도 단막극은 문제없을 겁니다.”
어느새 약속했던 수업 시간이 끝났다.
* * *
표정 연습.
지금까지 발성과 발음을 잡는데 집중했던 유수한에게 주어진 새로운 숙제였다. 강철수는 많이 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틈만 나면 포인트도 적립할 겸 영화관을 다녔던 유수한이었다.
이번에는 대학로였다.
살아 있는 연기를 눈앞에서 지켜보기 위해서.
마침 시간도 비었고 연극 관람도 포인트를 쌓을 수 있었다.
연기를 배운다는 건 꽤 재밌는 일이었다.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니, 매력적인 직업이었다. 늘 기본적인 의식주를 채우기 급급했던 유수한의 삶과는 상반적이었다.
“감사합니다.”
한 시간 일찍 도착한 터라,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사 마셨다. 옛날이라면 커피 한 잔 값이 아깝고 그 맛을 몰라서 제 돈으로 사 먹지 않았을 것이다.
창가 자리에 자리를 잡고 커피를 마시며 태블릿 PC를 꺼냈다. 핸드폰이 아닌 큼직한 태블릿이라니. 그리고 이 시간에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다니. 작은 일로도 감격하는 유수한이었다.
귀에 이어폰을 끼고 영화 한 편을 틀려는데,
“저기…….”
사실 카페에 들어오는 그 순간부터 느꼈다. 유수한의 등장에 일순간 공기가 달라지고 사람들이 그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김대한은 주목받는 삶과는 거리가 멀었고, 유수한으로 사는 지금은 낯설게 느끼면서도 즐기고 있었다. 잘생긴 외모 하나로 사람들의 시선이 다소 달라졌다.
“유수한 씨, 맞죠?”
일주일 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유수한은 혼자 거리를 돌아다닌 적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포인트를 쌓을 수 있을까 골몰히 집중한 결과, 아침에 일어나면 운동을 하러 나갔고 끝나면 연기 수업을 받거나 제작진 미팅을 하러 방송국에 들렀다. 퇴근할 즈음에는 또 포인트를 쌓기 위해 영화관에 시간 맞는 영화를 보았다.
“사인 좀 해 주세요!”
이렇게 대낮에 카페에 있으니, 이런 사람도 만나게 된다. 유수한은 대외적 이미지가 좋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잘생긴 얼굴 덕분에 어느 정도 상쇄가 되나 보다. 문제는 아직 유수한이 사인 연습을 하지 않았다는 거였다.
“…….”
노트를 찢은 종이와 펜 하나.
그걸 받은 유수한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연예인에게 사인은 필수적인 조건이라는 걸 알고 있다. 연극배우처럼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배우들도 기본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사인이었다. 하지만 유수한은 다르다.
유수한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사인이라고 하면 카드를 긁고 난 후에 하는 기본적인 서명밖에는 해 본 적이 없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하지만 고민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더불어 연예인이 사인이 없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유수한은 생각을 정리하고 미소를 지었다.
“김슬기요!”
“아, 네.”
우선 사인을 요청한 사람의 이름을 적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악필은 아니었다. 어릴 때 보육원에서 맞아 가면서 글씨를 교정한 게 꽤 도움이 되었다.
유수한이 어떤 사인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해서, 멋대로 필기체로 사인을 해도 괜찮을지 걱정이었지만, 이제 김대한이 곧 유수한이었다. 그러니, 어떻게 사인을 하든 큰 문제는 없으리라.
유수한을 크게 필기체로 쓰고 아래, 날짜와 함께 감사하다는 짧은 문구를 적었다. 처음 하는 사인이라 손이 떨렸지만, 제법 괜찮은 사인이 만들어졌다.
가만 종이를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즉흥적으로 만들었지만, 깔끔해서 꽤 마음에 들었다.
집에 돌아가서 사인을 다듬으면 더 좋은 완성물이 나올 듯했다.
“감사합니다! 진짜 잘생겼어요!”
그 말에 유수한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평생 유수한으로 살면서 잘생겼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유수한이 되고 나서는 매일 듣는 소리가 잘생겼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 말이 기분 나쁘지 않다.
“좀 신경 쓰이네…….”
계속 카페 내에 있는 사람들이 유수한을 힐끔거리며 보고 있었다. 누가 봐도 잘생기고 키도 큰 사람이 창가에 앉아 있으니,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이제야 왜 연예인이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지 이해가 된다. 태블릿 PC로 틀어 놓은 영화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괜히 자세를 계속 바르게 잡게 되고 표정 관리도 하게 된다.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생각 탓이었다.
결국 오래 카페에 머물지 못하고 나와야 했다. 커피를 마시며 주변 산책을 하다가 연극을 보는 게 더 나을 듯했다.
대학로 거리.
젊은 사람이 오가는 거리를 걷다 보니 예전과 많이 달라졌음을 피부로 느낀다. 막노동을 하며 살았을 때는 몸에 파스 냄새가 진동했고 제대로 씻지 못한 채 지쳐 잠드는 생활을 해 왔다. 평범한 사람과 관계를 어려워했고 뭔가를 공부하는 건 더더욱 힘든 일이었다.
한적한 골목, 잠시 걸음을 멈추고 비어 있는 벤치에 앉았다.
간혹 지나가는 사람들이 돌아보며 유수한임을 알아채고 있지만, 다가와 사인을 요청한다거나 알은체를 하지 않아 편했다. 유수한은 커피를 내려놓고 핸드폰을 들었다.
[자유게시판] 오늘 카페에서 유수한 봤음 개존잘 +5
예전에는 아예 모르고 살던 세계를 알아 가고 있다. 대형 커뮤니티 몇 곳을 가입해 두었고 따로 등업을 하지 않아도 글 내용은 볼 수 있었다.
“사진은 언제 찍었지.”
미간을 좁히고 멀리서 찍힌 사진을 보며 혀를 찬다. 배우로 살아남기 위해 피부과도 다니며 외모에 신경 쓰고 있는데, 이렇게 모르는 사람에게 사진을 찍히니 더 얼굴을 신경 쓰게 된다.
유수한 화장대에는 각종 화장품이 즐비했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던 얼굴에 갑자기 파운데이션 따위를 바르는 게 어색했던 유수한은 자신과의 타협을 선크림으로 정리했다.
커뮤니티를 뒤로하고 관련 기사를 확인했다.
드라마 계약을 마치고 물망에 오른 조연 배우를 비롯해 상대역 여배우까지 정보를 들었다. 아직은 협의 중이라고 했고 이번 주 내로 모두 정리될 예정이라 말했다.
사람 보는 눈은 모두 같았다.
대본의 숨겨진 힘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유수한 하나뿐이었고 남은 사람들은 상업성을 중시했다.
그러니 다들 간을 볼 수밖에.
[연예토킹] 유수한에 이어 연극배우 한초원 ‘아임 홈리스’ 합류
한초원이라는 배우를 감독에게서 듣기는 했지만, 정확히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지금 이렇게 보도 자료가 나온 것을 보아, 캐스팅이 정리된 모양이었다. 유수한은 검색창에 한초원을 입력하고 검색했다.
“연극배우 출신?”
나이는 올해 서른하나였고 지금도 연극판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배우였다. 김대한보다는 어리지만, 유수한보다는 연상이었다.
“어?”
한초원의 필모그래피를 확인하던 유수한의 눈이 커졌다. 오늘 유수한이 관람할 연극인 ‘보편적인 사랑’이 있었다. 많은 연극 중에 이걸 선택한 이유는 생각보다 규모가 큰 연극이라는 것과 시간이 딱 맞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자리가 꽤 빨리 나갔구만.”
한초원이라는 배우는 대중적인 인기는 모자라지만, 연극판에서는 인지도가 높은 배우였다. 상대 배우가 될 거라고 생각하니, 자기도 모르게 관심이 가는 유수한이었다.
“의도한 건 아닌데…….”
괜히 신경이 쓰인다.
계속 밖에 나와 있으려니 으슬으슬 추웠다. 다 마신 커피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다시 극장으로 돌아왔다.
화장실에 다녀오고 포스터를 구경하다가 프로그램북 하나를 구입했다. 미리 들어가 자리를 잡고 프로그램북을 펼쳤다. 간략한 줄거리와 배우 소개가 실려 있었다. 딱 2천원어치 값어치를 하는 퀄리티였다.
「보편적인 사랑 – 스무 살에 만나 뜨거운 연애를 시작하고 시간이 지나 권태기를 겪는 보편적이며 일반적인 연애를 그린 이야기」
연극 관람은 거의 처음이나 다름없었다. 보육원에 살 때, 자원봉사를 한답시고 교회에서 성탄절 기념 공연을 한 적이 있다. 그 때, 김대한이 느끼기에는 저런 쓸데없는 연극을 볼 바에는 차라리 잠을 자는 게 더 이득이라고 생각했다.
엉터리 연기를 하면서 아이들을 보는 눈에는 측은지심이 가득했다. 차라리 어른들이 하는 연극이었다면 모를까, 같은 나이대의 또래가 끼어 있으니 자존심이 상했다. 공연을 하는 아이들 눈빛 하나하나가 딱한 것을 보는 동정의 시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로 연극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당연히 돈 주고 보기 싫었던 그 공연보다는 몇 배는 나을 공연이었다.
프로그램북을 가방에 넣어 두고 기지개를 켜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사람들이 하나둘 빈자리를 채우고 이윽고 조명이 꺼졌다.
어둠 속에서 무대를 바라보았다.
서정적인 배경음악이 흘러나오고 핀 조명이 누군가를 비추었다.
“우리는 스무 살에 만나 뜨거운 연애를 시작했다.”
나지막하며 선명한 목소리.
한초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