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숙자, 천재 배우 되다-10화 (10/175)

10. 진정한 노숙자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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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한은 처음에는 기분이 좋았다. 퀘스트는 그 수가 방대해서 하나하나 다 기억할 수 없었다. 방송국에 처음 방문하는 걸로 1포인트가 적립되는 걸 몰랐기에, 뜻밖의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새해에 방송국 방문이라니.

방송 업계에 일하는 사람은 휴일이 따로 없다고 하지만, 이렇게 열심히 일할 줄은 몰랐다.

“아, 유수한 씨. 듣던 대로 얼굴은 잘생겼네요.”

드라마국 작은 회의실 문을 여니, 최인성 감독이 보였다. 나이는 30대 중반, 이번 ‘아임 홈리스’가 첫 입봉작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김은정 작가가 앉아 있었다.

“감사합니다.”

손을 맞잡고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는 말했다. 얼굴은 잘생겼다고. 그 말에는 작은 뼈가 있었다. 칭찬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칭찬이 아니었다. 얼굴 빼고는 볼 게 없다고 돌려 말한 거였다. 아무렴 상관없었다.

유수한에게 가진 게 얼굴뿐이라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조금 놀랐어요. 노숙자 역할이라, 신인 배우들도 이 대본을 기피하고 있거든요.”

뭔가 굉장히 무례한 최인성 감독과 다르게 김은정 작가는 나긋나긋하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단막극은 신인 배우나 무명 배우에게는 기회의 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나름이었다.

대본을 몇 번이나 읽어 봤지만, 참 주인공은 볼품이 없었다. 눈에 띄길 원하는 신인 배우가 이 배역을 원할 리가 없다. 그렇다고 무명 배우를 쓰자니, 감독이나 작가는 성이 차지 않았을 것이다.

“좋던데요. 누가 대본을 썼는지 궁금할 정도로 재밌었어요.”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을 졸업하고 증권회사에 입사해서 고액 연봉을 받던 주인공이 도박에 빠진 후에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회사에서도 해고당한다. 노숙자로 전락한 주인공의 모습과 예전의 당당한 모습은 사라지고 하루하루 견뎌 내는 이야기.

사실상 상업적인 내용은 아니었다. 도박의 위험성과 노숙자의 삶을 그려 낸 이야기로, 어떻게 주인공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지를 중점으로 두고 있었다.

유수한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시작할지도 모르는 드라마가 스스로 잘 알고 있는 이야기여서.

“난 좀 모르겠더라고.”

가만 대화를 듣던 최인성 감독이 말했다.

“유수한 씨처럼 고생도 안 해 본 사람이 노숙자와 어울릴까 해서.”

그 이유 외에도 많은 의미가 들어 있는 말이었다.

“유수한 씨가 이런 연기가 어울릴지 모르겠네.”

물론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유수한은 그저 미소를 지으며 감독을 쳐다보았고 뒤늦게 회의실에 들어온 김민수가 분위기를 살피며 인사를 건넸다.

“커피 사 왔는데, 한잔하시면서 편하게 대화하세요.”

김민수는 매니저로서는 괜찮은 사람이었다. 사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성격도 아니었고 일도 깔끔하게 해낸다. 유수한을 버틴 유일한 매니저답게 근성 역시도 완벽했다.

이렇게 커피를 사 온 것도 자신이 담당하는 배우를 위해서였다. 여전히 유수한을 믿지 못하는 그였지만, 이건 엄연히 일이었다. 또한 지금 여기서 만나는 작가와 감독이 나중에 어떤 식으로 엮이게 될지 몰랐다.

모든 것이 비즈니스였다.

“지금 좀 보여 줄 수 있나?”

연기에 대해 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유수한은 다음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다. 유수한의 인지도는 단막극에 출연하기에는 좋은 편이었으나, 최근 불미스러운 일을 빚은 배우였다. 그랬기에, 최 감독은 마치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앵벌이 어떻게 할지 보여 주면 좋겠는데.”

자극적인 말을 섞는다.

앵벌이라는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작가와 매니저도 움찔했지만, 유수한은 여유가 있었다. 옅은 미소를 지은 채,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그가 최 감독을 보며 말했다.

“앵벌이라는 말은 좀 저속하네요. 구걸이라고 하시죠.”

하지만 유수한은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는다.

지금 최 감독이 이 자리에서 갑의 위치에 있기에는 다소 모자란 감이 있었다. 그는 스타 감독도 아니었고 이제 고작 입봉작을 맡은 위치였다.

더군다나, 이미 작가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나.

캐스팅에 난항을 겪고 있다고.

“제가 생각하는 이지호 캐릭터는 구걸을 할 스타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순하게 날을 세울 일은 아니었다. 무게 추가 감독 쪽에 더 무겁게 올라가 있는 건 사실이니까.

“이지호는 유명 대학을 나온 엘리트였죠. 그런 사람이 도박에 빠져 가족에게 버림받고 거리에 나앉았습니다. 빚쟁이들이 언제 찾아올지 몰라서 몸을 웅크리며 살아요. 근데 이지호에게 딱 하나, 변하지 않는 게 있어요.”

유수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건 바로 자존심입니다.”

1년 가까운 세월을 길에서 보낸 사람이 김대한이었다. 그는 많은 노숙자들을 곁에서 지켜 봐 왔고 이지호 같은 케이스도 충분히 경험해 보았다.

“이지호는 구걸을 하지 않아요. 그저 허리를 이렇게 숙이고 땅을 보죠.”

허리를 숙인 유수한은 땅을 보며 고개를 휙휙 돌렸다. 눈은 살짝 크게 뜨고 뭔가를 찾는 것처럼 고개를 흔들어 가며 종종걸음으로 나아간다. 손은 바닥을 향했다가, 이내 걸음을 멈춘다.

“떨어진 돈이 없나 찾아 보겠죠.”

이건 유수한도 자주 했던 행동이었다.

깡통 하나 두고 구걸할 수도 있었지만, 그건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하지 못하는 행동이었다. 물론 유수한도 궁지에 몰렸을 때는 구걸을 떠올렸지만, 사람들의 잔인한 눈빛에 주저해 왔었다.

“사실 자존심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말인즉슨.

“구걸도 용기가 있어야 하거든요.”

노숙자에 대해서는 그 어떤 배우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유수한은 입을 벌리며 집중하는 작가를 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방금 실감 나는 노숙자 연기를 보여 준 사람답지 않은, 말끔한 미소였다.

“이렇게 허리를 숙이고 땅을 쥐 잡듯이 뒤지다 보면.”

유수한이 손을 뻗어 무언가를 줍는 시늉을 했다.

“누군가가 먹다 버린 빵도 주울 수 있습니다.”

돈도 좋지만, 깨끗하게 먹고 버린 음식도 마찬가지로 좋았다. 비닐에 싸여서 바닥에 떨어져 있다면 먹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서울역에서는 흡연 부스에 진을 치며 깨끗한 꽁초를 주우려 안달 난 노숙자들도 많았다. 그러니 포장지에 싸인 채 버려진 빵은 그거에 비하면 아주 깨끗한 음식이었다.

유수한은 무릎을 꿇고 손을 덜덜 떨며 빵을 먹는 연기를 했다. 손에는 아무것도 없음에도 실감 나게 허겁지겁 땅에 떨어진 빵을 주워 먹는다. 생생한 연기에 다들 숨을 멈추고 집중하고 있었다.

빵을 남김없이 먹은 유수한이 입가에 묻은 크림을 손등으로 닦아 냈다. 그러다 손등에 묻은 크림도 아까운지 혀로 핥는다. 모든 것은 즉흥 연기였다. 빵이 바닥에 떨어져 있을 리도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실감 날까.

눈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남자는 분명 잘생긴 배우였는데, 왜 자꾸 추레한 거지로 보이는 걸까.

“감독님.”

연기를 마친 유수한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최 감독이 어깨를 움찔하며 순간 놀란다. 유수한의 연기에 압도되었던 최 감독은 잠시 이곳이 작은 회의실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이 정도면 만족하실까요?”

최 감독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닥에서 일어난 유수한은 무릎을 탁탁 털어내고 다시 자리에 앉아 잠시 숨을 돌렸다.

“어쩜 그렇게 노숙자에 대해 잘 아세요?”

최 감독과 별개로 김 작가는 눈을 빛내고 있었다. 어차피 캐스팅은 난항을 겪고 있었고 유수한은 김 작가도 그리 반기지 않은 배우였지만, 지금은 별다른 수가 없었다.

유수한의 이미지가 물론 걸리지만, 무명 배우를 쓰는 것보다는 홍보 면에서는 더 탁월했다. 더군다나, 생각보다 준비도 많이 해 온 티가 났다.

“대본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서울역 가서 노숙자분들 공부하고 왔습니다.”

게다가 얼굴 예쁜 사람이 말도 예쁘게 하니, 싫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노숙자답지 않게 너무 잘생겼어.”

최 감독은 마지막까지 유수한에 대한 탐탁지 않은 감정을 표현했다. 유수한이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최 감독을 응시했다. 이미 무게 추는 유수한에게 넘어와 있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최 감독이 유수한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이지호는 금수저 엘리트 집안이었는데, 도박에 빠져서 모든 걸 다 잃었잖아요. 그러면 제 얼굴하고 어울리지 않을까요?”

그 대답에 김 작가가 고개를 끄덕이고 최 감독을 보았다. 최 감독은 말없이 커피를 마시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사실 오늘 유수한을 부른 건 단순한 이유였다. 유수한이 이 배역을 탐낸다는 것도 의아했고 자존심을 구겨도 선뜻 하겠다고 할지 궁금했으니까.

“뭐, 틀린 말은 안 하네요.”

계속 삐딱하게 굴 수는 없다. 유수한이 인간적으로 별로라는 건 별개였고 지금은 일로 봐야 한다. 애초에 최인성 감독은 단막극으로 입봉 준비를 하고 싶지 않았다. 번듯한 미니시리즈를 맡고 싶었는데, 주어진 기회가 고작 단막극이었다.

단막극이 잘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해서,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첫 시작 성과가 얼마가 되느냐에 따라서 또 다음 기회가 주어진다.

“좋습니다.”

유수한이 작품을 진지하게 준비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망설일 이유도 없다. 오히려 유수한 복귀작으로 노이즈 마케팅을 하는 방안도 있었다.

“오늘은 작품 이야기를 조금 더 하고 다음에 정식으로 계약 진행하죠.”

* * *

사흘 후 계약서 도장을 찍었다. 이제 비로소 단막극 ‘아임 홈리스’의 출연을 확정지은 셈이었다. 유수한은 차에서 커피를 마시며 부지런히 쌓은 포인트를 확인했다.

[라이프 체인지] KBC 단막극 출연 계약 포인트 적립! <현재 총 누적 포인트 : 24>

열심히 포인트를 쌓은 결과 두 자릿수가 되었다. 지금처럼 부지런히 움직인다면 처음 목표했던 6개월 체험판 연장 상품을 구입할 수 있을 것이다.

유수한의 몸으로 사는 것도 이제 완전히 익숙해졌다. 거리를 다니면 사람들이 힐끔거리는 것도 즐기게 되었고 익숙지 않던 커피 맛도 좋아졌다. 이제는 알아서 아침에 일어나면 커피를 마시러 가는 유수한이었다.

[연예이슈] 유수한 KBC2 단막극 시즌 2021 ‘아임 홈리스’ 전격 복귀!

[일간연예] 유수한 단막극 ‘아임 홈리스’ 노숙자 역 캐스팅 …… 내년 상반기 방송

계약 성사가 되니 하나둘 보도 자료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 유수한 노숙자 역할 ㅋㅋㅋㅋㅋ 갈 데까지 갔나 봄 ㅋㅋㅋ

⌞ 222 얼마나 작품 안 들어오면 노숙자를 하냐

⌞⌞ 지금 노숙자 비하함?

⌞⌞⌞ 이게 어떻게 비하임? 팬이면 팬카페 가

⌞⌞⌞⌞ 기존에 유수한이 하던 역할이랑 다르니까 하는 말인데 팬들 진짜 애잔하다

⌞⌞⌞⌞⌞ ㅇㅇ 아직도 팬이 있는 게 신기함

좋은 반응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유수한은 인터넷 창을 끄고 기지개를 켰다. 그 누가 봐도 ‘아임 홈리스’는 망할 작품으로 보인다.

노숙자가 주인공이고 사회 고발성이 짙은 내용이니 더더욱.

요즘은 단막극이어도 작품성 이전에 대중성을 챙기려는 행보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이해는 되었다.

유수한이 만약 작품 보는 눈이 없었더라면 더 좋아 보이는 다른 작품을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임 홈리스’는 빛났다.

그것도 금색으로 찬란하게.

이건 되는 게임이었다.

실패할 확률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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