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뇌물만 받지 않았어도
“다들 준비를 꽤 잘해 왔네. 우선 현수. 지각해서 허겁지겁 달려오는 표현 좋았어. 그리고 연우는 잽싸게 자리를 차지하는 건 좋은데, 이른 아침 시간에는 다들 얼굴에 표정이 별로 없어. 지쳐 있거든. 아직 어려서 출근의 쓴맛을 모르나 본데, 연우는 아침에 학교 갈 때 기분이 좋나?”
그 물음에 연우라는 학생이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 학교 가는 거 좋아요. 친구들이랑 같이 지하철 타고 가거든요.”
“그렇구나. 좋을 때다.”
유수한은 자신의 눈이 의심스러웠다. 그 까칠한 강철수가 학생들을 마주할 때는 웃기도 하고 제법 다정하기도 했다.
“그래도 언제나 학생에 머물 수 없으니까, 나중에 학교 갈 때 출근하는 사람들 관찰해 봐.”
“네!”
조곤조곤 설명을 이어 나간다.
“좋은 배우가 되고 싶으면 항상 세상을 관찰해야 해. 생활 연기를 잘하는 방법은 관찰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평소 움직일 때 계산하고 생각하며 움직이지 않잖아? 생활 연기도 그래야 해. 지금은 관찰한 것을 토대로 계산해서 연기를 했다면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나와야 해. 물론 계산은 필요하지. 카메라에 어떻게 담길지 정도는 생각해야 하니까.”
유수한은 강철수가 하는 말을 노트에 적었다.
이 나이에 공부라는 걸 하게 되다니. 필기라는 걸 하게 되다니. 신기하면서도 즐거웠다. 강철수는 딕션이 좋아서 하는 말이 귀에 쏙쏙 꽂혔다. 공부할 맛이 나게 해 준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가르치는 능력이 탁월해 보였다.
“저는요?”
뒤늦게 유수한이 손을 들며 물었다.
“저는 평가 안 해 주셨는데요.”
다정하게 제자들을 보던 강철수의 눈빛이 사늘하게 식었다.
“댁은 생활 연기에 맞지 않은 과장된 연기를 하셨습니다.”
강철수가 말을 이었다.
“뭐, 그것도 누군가에게는 생활의 일부분이니,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생각보다 정말 사기꾼 같아서 놀랐습니다. 그런 배역 많이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끝까지 비꼬는 걸 잊지 않는다. 말하자면 유수한은 비열한 사기꾼 같은 역할이 딱이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말과 다르게 강철수는 유수한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눈치껏 학생들을 따라 출근하는 직장인을 표현할 수도 있었다.
어차피 강철수는 아이들에게 특출 난 연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저 자연스러움을 이끌어 내기 위한 과제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유수한은 보여 주었다.
이 단순한 과제에서도 눈에 띄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저 그러면 수업 계속 들어도 될까요?”
강철수가 가만 유수한을 쳐다보았다.
“재밌어서 계속 듣고 싶은데.”
악의가 없다는 듯 활짝 웃는 얼굴을 본 강철수가 혀를 찼다.
“댁은 따로.”
뇌물만 받지 않았어도.
“댁이 애들 사이에 끼여 있으면 곤란해. 무슨 물을 들이려고.”
이렇게 유수한에게 말릴 일은 없었을 텐데.
* * *
어렵게 강철수를 꼬여 냈다.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한 결과였다. 조금이라도 더 늦어졌다면 다음 일을 진행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연기 수업은 재밌었다.
이렇게 진지하게 뭔가에 몰두해 본 적이 처음이라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즐거웠다. 아이들은 해맑았고 쉽게 다가오며 이것저것 물어 왔다. 유수한의 악평을 들어 보지 못한 건지 뭔지 모르겠으나 오랜만에 적의가 담기지 않은 시선을 받았다.
강철수와의 수업은 치열한 공방 끝에 주 3회로 결론 났다.
어떻게든 주 5회는 받고 싶었지만, 강철수는 그 이상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려 했다. 처음 강철수가 제안한 것은 주 2회였고 서로 공방을 펼치다 타협한 것이 주 3회였다.
[라이프 체인지] 영화 관람 포인트 적립! <현재 총 누적 포인트 : 8>
연기 수업을 마치고 지금 유수한이 도착한 곳은 영화관이었다. 그냥 집에서 영화를 볼 때는 포인트가 적립되지 않았는데, 중요한 조건이 영화관이었던 모양이다.
포인트는 주로 연기와 관련된 일을 했을 때 적립이 된다. 영화를 관람하는 것도 연기에 도움이 되었다. 특히나 드라마나 영화에 관심이 없던 유수한에게는 더더욱 중요한 일이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재미가 없든 있든 집중해서 보려고 노력했다. 배우의 연기 하나하나를 눈에 담고 장점을 배우기 위해 반복해서 보고 또 보았다.
“큰 스크린으로 보니 다르긴 하네.”
영화를 다 보고 나온 유수한이 기지개를 켰다. 연기 수업을 받고 영화 관람까지 하고 나니, 어느새 저녁 시간이었다.
순간, 허기짐이 느껴진다.
차에 올라탄 유수한은 집 주소를 찍고 한숨을 쉬었다. 잠시 숨을 돌리고 핸드폰을 든다. [라이프 체인지] 앱에 들어간 유수한이 심각한 눈으로 포인트 적립 방법을 읽고 있었다.
[천만 관객 돌파 영화 출연 시에 500 포인트 적립!]
500 포인트면 본품 구매 비용의 무려 절반이었다. 유수한이 퀘스트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찔끔찔끔 1 포인트씩 모으는 건 한계가 있었다. 어찌어찌, 체험판 연장을 한다 해도 그다음은 더 까마득하다. 연기든 뭐든, 성장해서 위로 더 올라가야 한다.
“D급이라도 쓸 만한 아이템 뭐 없나.”
운 좋게 S급 아이템을 손에 넣었지만 그건 지금 당장 적재적소에 써먹기는 무리였다. 단막극 대본 사이에서 금빛 작품을 발견한 건 좋은 일이지만, 그걸 살리는 건 온전히 유수한의 몫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연기력 부족.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그걸 연기하는 자가 제대로 살리지 못한다면 모두 허사로 돌아간다. 그러니, 아이템에 매달리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듣기 좋은 목소리 (D)]
발성과 발음을 일정 수준 끌어올려 준다.
효과는 미미하다.
가장 눈에 들어오는 건 이 아이템이었으나, 효율이 그리 좋지 못했다. 이 아이템은 등급에 따라 효과가 달라졌다. 예를 들어.
[듣기 좋은 목소리 (S)]
발성, 발음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려 준다.
누구나 이 목소리를 들으면 강력한 흡입력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
이렇게나 효과가 달라진다. 뭐든, S급이 좋은 건 당연했다. 아이템을 당장 사는 건 역시 보류였다. 지금은 노력에 기대는 수밖에 없다.
“사지도 못하는데 봐서 뭐 하냐.”
천천히 차를 움직이기 시작한 유수한은 오늘 배운 것을 되새기고 있었다. 발성과 발음을 바로 잡는 게 주였지만, 꽤 신선한 자극이었다.
이렇게 뭔가를 배우려 몰입해 본 건 처음이라 그랬다.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리고 그 감정이 나쁘지 않은 유수한이었다.
* * *
[라이프 체인지] 출석 포인트 적립! <현재 총 누적 포인트 : 9>
아침은 언제나 출석 포인트로 시작한다. 세수와 양치만 대충 하고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잠도 덜 깬 얼굴로 차에 올라타고 바로 헬스장으로 움직였다.
[라이프 체인지] 운동 포인트 적립! <현재 총 누적 포인트 : 10>
매일 아침 운동한다는 건 참 좋은 일이라는 걸 체감하고 있다. 땀 흘리고 나면 개운하고 몸은 물론 정신도 건강해지는 기분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인사를 하고 트레이너가 주는 식단 도시락을 받았다. 오늘은 연기 수업이 없기 때문에 하루 종일 일이 없었다. 집에 돌아가 식단 도시락을 까먹고 연기 연습을 할 생각이었다.
“그래, 민수야.”
차에 올라타기 무섭게 민수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내일? 일단 알았어.”
들어 보니 단막극 미팅이 잡혔다는 소식이었다. 내일 오후 3시였고 준비할 시간은 충분했다. 통화를 마치고 운전대를 잡았다.
여러모로 생각이 많아진다.
방송국에 가는 것도 처음이었고 미팅이라는 것도 처음이다. 뭔가 번듯한 사회인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연기를 시켜 보겠지?”
계약을 위한 자리는 아닐 것이다. 제작진이 계약을 염두에 두었다면 김민수는 다르게 말을 전했을 것이다. 계약에 대한 말이 전혀 없었다. 그것도 제작진의 일방적인 통보였다.
내일 오후 3시 KBC 드라마국.
그게 정보의 끝이었다. 그러니 그쪽은 간을 최대한 볼 것이다. 과연 유수한이 적임자인지 아니면 노이즈 마케팅이라도 하도록 붙잡아야 하는지.
사실 유수한이 음주 수영 논란만 없었다면 간 보는 상대는 오히려 이쪽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고 유수한은 무조건 이 단막극을 사로잡아야 했다. 여러모로 이점이 있다. 아직 장편 드라마를 찍기에는 역량 부족이기에 호흡이 짧은 작품을 선택해야 했다. 거기다가 중박도 아닌 대박을 칠 작품이었다.
“가서 부지런히 연습해야겠다.”
뭐 늘 생각하지만 답은 하나였다. 부지런히 노력을 해서 실력을 키우고 포인트를 착실하게 모으는 것. 지금 상태에서 D급 아이템으로 연기력을 티끌만큼 늘리는 것은 정답이 아니었다.
“저 왔습니다.”
“아들!”
이제 저 목소리도 조금씩 익숙해진다. 간드러지게 사랑이 듬뿍 담긴 목소리.
“엄마, 회사 안 가?”
그리고 유수한은 조금 귀찮아졌다. 유수한의 모친의 직업은 변호사. 그것도 대형 로펌의 수장이다. 드라마를 보면 대형 로펌의 수장은 바쁘다. 정치질하기도 바빴고 일도 바쁘고 직원 관리도 신경 쓴다. 근데 왜 허구한 날 집에만 있을까.
“넌 왜 엄마 보면 회사에 못 보내서 안달이니?”
“일하시라고요. 나만 쫓아다니지 말고.”
관심도 정도껏 해야 받아 줄 만하다. 요즘 유수한의 주식은 트레이너가 짜 준 식단이었다. 건강한 몸을 만들기 위한 식단. 그리고 간식은 견과류였고 역시나 세속적인 맛은 아니었다.
아직 운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술과 담배를 동시에 끊어서 건강해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물론 부작용이 하나 있다.
맛있는 걸 눈앞에 두고도 먹지 않으니 때때로 예민해진다.
“엄마, 2층 출입 금지인 거 알지?”
매일 맛없는 것만 먹는 아들이 안타까운지, 유수한의 모친은 매일 방문을 두드리며 맛있는 걸 강요한다. 하루가 다르게 말라 가는 것 같다며 눈물짓는 건 기본이었다. 그리고 그런 유수한 모친이 부담스러운 유수한은 결국 출입 금지를 선언한 것이다.
“아예 독립해 버릴까.”
방에 들어와 문을 걸어 잠근 유수한이 작게 중얼거렸다. 겉옷을 벗어 옷장에 걸어 놓는다. 이윽고 책상에 앉는데 노크 소리가 울렸다.
“수한아! 오늘 올해 마지막 날인데 정말 이러고 있을 거니?”
하.
짧게 탄식을 터트린 유수한이 핸드폰으로 날짜를 확인했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언제 올해가 다 지나갔단 말인가.
벌컥.
여전히 문을 두드리고 있는 소리에 짜증을 못 참은 유수한이 문을 벌컥 열었다. 갑자기 방문이 열리자 당황했는지 유수한 모친이 멈칫했다.
“엄마.”
사실 하고 싶은 말은 굉장히 많다.
“나 요즘 예민해. 알지?”
“그래도 엄마 좀 섭섭해. 응?”
“작품 끝날 때까지만, 이해해 줘.”
하지만 괜한 충돌은 하지 않는다. 유수한으로 편하게 살기 위해서는 부모는 응당 필요하다. 유수한이 되기 전에는 부모가 없었다. 김대한은 부모가 없는 사람이었기에 가족 간의 정을 전혀 모르고 살았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의 부모가 버거웠다. 하지만 조금씩 적응해야만 했다. 유수한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필요한 절차였다.
“우리 아들, 작품 끝나면 엄마랑 데이트하는 거다?”
“응, 그럼. 내가 맛있는 거 사 줄게.”
“역시 우리 아들이 최고야!”
유수한 모친을 1층으로 돌려보내고 다시 문을 걸어 잠갔다. 다시 책상에 앉는다. 서랍에서 금빛으로 빛나는 단막극 대본을 꺼냈다.
“유수한이 집 하나 없을 리가 없을 텐데.”
그러다가 문득 독립 생각이 난다. 저렇게 과한 애정을 표현하는 사람이 엄마라면 더더욱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유수한이 마마보이가 아닌 이상 말이다. 유수한은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볼까 하다가 관두었다. 그건 스스로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다. 급한 일이 아니니 나중에 유수한의 재산을 자세히 찾아보면 된다.
대본을 펼쳤다.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은지라 너덜너덜했다. 오늘 강철수는 캐릭터 해석이라는 걸 해 보라고 조언했다.
작품에 들어갈 때 배우가 최우선으로 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자신이 연기해야 할 인물에 대해서 세세하게 해석하고 자신만의 캐릭터를 만드는 것.
유수한은 볼펜을 쥐고 ‘이지호’라는 인물에 대해 노트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노숙자로 전락했지만, 원래는 증권 회사에 다니는 직원이었다.
그것도 엘리트.
그렇다면 자존심도 그만큼 있을 것이다.
캐릭터 해석을 마치고 바로 발성과 발음을 바로잡았다. 연습을 하다 보니 시간이 흘러가는 줄도 몰랐다. 목이 슬슬 아파질 즈음에 연습을 멈추고 방에서 나왔다.
유수한은 2층을 통째로 사용한다. 거실에는 냉장고가 하나 있었다. 거기서 물을 꺼내 마시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단순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내일 미팅이 별일 없이 끝나길 바라는 마음.
“유수한 씨가 이런 연기가 어울릴지 모르겠네.”
하지만 언제나 현실은 생각과 다르다.
“지금 좀 보여 줄 수 있나?”
상대는 굉장히 무례했다.
“앵벌이 어떻게 할지 보여 주면 좋겠는데.”
어떻게 하면 사람의 자존심을 부술 수 있는지 잘 아는 사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