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숙자, 천재 배우 되다-8화 (8/175)

8. 뭐든 쉬우면 재미없지

그래, 뭐든지 쉬우면 재미없지.

유수한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물론 생각을 그렇게 한다고 해도 마음이 쓰라린 건 당연했다. 귀중한 1 포인트를 얻었지만, 계속 연기 수업을 받아야 한다. 단순히 포인트 때문은 아니었다. 지금 유수한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연기를 가르쳐 줄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라이프 체인지] 출석 포인트 적립! <현재 총 누적 포인트 :5>

출석 포인트와 함께 눈을 뜬다. 그리고 부지런히 씻고 헬스장으로 향했다. 이렇게 매일 운동하게 될 줄은 몰랐다. 운동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지난날과 다르게 지금은 운동을 해야만 하는 목적이 뚜렷했다.

“다 먹고 사진 찍어 보내는 거 아시죠?”

헬스 트레이너가 챙겨 주는 식단은 솔직히 말해서 맛이 그다지 없다. 하지만 굶고 살았던 예전을 생각하면 감지덕지였다. 오늘의 식단은 삶은 계란과 구운 닭가슴살, 그리고 샐러드였다.

유수한이 된 첫날 먹었던 진수성찬이 가끔 머리를 꽉 채운다.

지금도 맛있는 음식이 집에 가득했다. 그 진수성찬을 두고도 외면해야 하는 사실이 뼈아프지만, 나중에 충분히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체험판이 아닌 온전한 상품 유수한을 손에 넣는다면.

“이것 좀 드시면서 일하세요.”

유수한은 운동을 마치고 바로 회사에 들렀다. 커피를 잔뜩 사고 직원들에게 돌린다. 그리고 남은 하나는 강철수에게 주었다. 강철수는 커피를 내미는 유수한을 보며 혀를 찼다.

“안 먹습니다.”

공짜 커피도 마다할 정도로 유수한이 싫은가 보다.

“아, 그러면 초콜릿은 어떠신가요?”

유수한은 김민수를 닦달해서 강철수의 취향을 파악했다. 카카오 49% 함량에 견과류가 콕콕 박힌 초콜릿을 좋아한다고 들었다. 김민수는 강철수는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이라 알아내기 힘들었다며 한숨을 쉬었다.

“…….”

저건 비싼 초콜릿이다.

강철수가 자기도 모르게 초콜릿 박스를 들었다. 한 개도 아닌 한 박스였다. 잠시 초콜릿에 사로잡혔지만, 잠깐이었다.

텅!

경쾌한 소리를 내며 초콜릿 박스가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어찌나 우렁차게 울려 퍼졌는지, 사무실에 있던 다른 선생님들도 집중할 정도였다.

“이런 짓 한다고 해서 제 마음은 안 달라지는데요?”

역시 뇌물은 통하지 않는다. 이 도도한 고양이 같으니.

유수한이 속으로 생각하며 빙긋 웃었다. 그리고 강철수는 그 미소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 유수한은 생각할수록 이상한 사람이었다.

사내에서 유명한 사람이었던 유수한은 보는 사람마다 혀를 내두르며 갑질이 생활화된 남자라고 말했다. 그런 사람이 왜 이렇게 질척이며 비굴하게 구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초콜릿 한 박스 더 있는데.”

유수한은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어제 한 번 거절당했다고 포기하면 되는 게 하나도 없다. 애초에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고 시작했으니, 그리 놀라울 일도 아니었다.

“제 마음입니다.”

슥, 책상 구석에 초콜릿 상자를 밀어 넣으며 유수한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필요 없습니다.”

강철수는 다시 초콜릿을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 * *

[라이프 체인지] 연기 수업 포인트 적립! <현재 총 누적 포인트 : 7>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늘 하루는 강철수가 퇴근할 때까지 거머리처럼 붙어 있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수업 참관을 하게 되었는데 포인트를 받을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연습생 사이에 끼여 수업을 참관만 해도 포인트가 적립되었다.

“불청객이 하나 있네요.”

수업에 들어온 강철수가 한가운데에 앉아 있는 유수한을 보며 미간을 팍 찌푸렸다. 계속 들러붙어서 사무실에서 나갈 생각을 하지 않던 사람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

해서, 이제야 포기한 줄 알았는데 배우 연습실에 딱 붙어 있었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제가 알기로는 회사 소속 배우는 어떤 수업이든 참관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유수한은 아주 뻔뻔하게 손을 들어가며 차분히 말하고 있었다. 강철수는 유수한이 사라지기 무섭게 쓰레기통에 처박았던 초콜릿 상자를 다시 주워 책상에 놓았다.

이미 유수한은 사라졌고 다시 올 거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초콜릿을 하나 까먹고 수업에 들어왔다. 그래서 지금 살짝 뜨끔한 상태였다.

뇌물을 버린 척하고 주워 먹었으니.

“과제 검사하겠습니다.”

강철수는 유수한을 무시하고 의자에 앉았다. K엔터에는 배우 연습실이 총 3개가 있다. 하나는 기성 배우를 위한 연습실, 또 하나는 신인 배우를 위한 연습실, 나머지는 아직 어린 쉽게 말해 연습생을 위한 연습실이었다.

즉 이 공간은 유수한과 어울리지 않았다.

“지난 수업 때 여러분께 내 준 과제는 생활 연기와 관련된 과제였죠.”

지금 강철수는 유수한을 내쫓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기 이 자리에 있는 다섯 명의 연습생들은 각기 나이가 다르고 경험도 적었지만, 강철수가 공들여 키우고 있는 예비 배우들이었다.

그 앞에서 강철수는 유수한을 말 그대로 쪽팔리게 할 생각이었다. 창피를 넘어서 쪽팔리게. 아직 데뷔도 못 한 아이들보다 한참 못한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 작정이었다.

“자, 지하철을 만들어 봅시다.”

일사불란하게 아이들이 의자를 들고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책상을 뒤로 밀어 공간을 만들었다.

유수한은 눈치를 보며 아이들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의자는 서로를 마주 보게 2열로 줄 맞춰 내려놓았다. 지하철이라기에는 뭔가 부족하지만, 서로를 마주 보는 좌석을 생각하면 퍽 지하철 같기도 했다.

“지난번에 지하철에서 출퇴근하는 연기를 했을 때, 여러분들은 참 평이한 연기를 했었죠? 일주일 동안 얼마나 관찰을 잘했고 생활 연기를 얼마나 터득했는지, 한번 지켜봅시다.”

강철수는 웃으며 중간중간 의자에 인형을 놓았다. 이미 앉아 있는 사람을 인형으로 대체한 느낌이었다.

“자.”

유수한을 짧게 응시한 강철수가 두 손을 들었다.

“시작해 봅시다.”

짝.

손바닥이 마주치는 소리와 함께 아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수한은 눈치껏 아이들 틈에 섰다. 줄을 서 있는 걸 보니, 지하철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를 연기 중인 듯했다. 강철수가 벽에 기대며 상황 설명을 시작했다.

“열차가 5초 뒤에 들어옵니다.”

그때, 멀리 빠져 있던 한 남학생이 뛰어오기 시작했다.

“헉헉.”

유수한은 힐끔 그 아이의 연기를 곁눈질로 보았다. 다른 아이들은 두 줄로 서서 핸드폰을 쳐다보거나 손목시계를 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확실히 상황 설정에서 눈에 띄었다.

숨을 몰아쉬며 정말 힘들어 죽겠다는 표정, 그러다가 아직 열차가 도착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눈으로 한마디 덧붙인다.

“후우, 늦을 뻔했다.”

이윽고 강철수가 미소를 지으며 상황 설명을 덧붙였다.

“열차가 들어왔습니다. 3초 후 문이 열립니다.”

마치 다른 칸에 줄 선 것처럼 줄은 반으로 나뉘어 선 상태였다.

“문이 열렸습니다.”

그 소리와 함께 아이들이 부산스럽게 지하철에 들어선다. 여기저기 자리를 차지하려 아우성이었고 남은 자리는 고작 두 자리였다. 그 두 자리를 차지한 아이들은 의기양양하게 웃는다. 그러다가 무신경하게 핸드폰을 보며 연기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유수한은 문이 열리기 직전, 이 과제의 의미를 파악하고 있었다.

생활 연기.

지하철에서도 많은 사람이 오간다. 남과 다른 연기를 해야 옳았다. 실생활에서 볼 수 있으면서도 남과 다른 연기를 보여 주는 것이 이 과제의 포인트였다.

지하철은 자주 탔다.

동네 근처에 공사판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어쩌다가 공장에 일하러 갈 때는 지하철은 필수였다. 이른 새벽, 출근을 하는 사람들이 어떤 얼굴인지 아주 잘 안다.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도.

여기는 사람이 많지 않다. 애초에 사람이 많이 탄 지하철이라면 빈자리가 있을 리가 없다. 그 말은 걸어 다닐 수 있을 만한 아주 이른 시간대라는 거였다.

짧게 생각하고 판단을 세운다.

역시 지금은 가장 잘할 수 있는 연기를 해야 했다.

“허.”

제자들의 연기를 유심히 지켜보던 강철수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예 눈길도 주지 않았던 유수한이 갑자기 바닥에 엎드렸기 때문이었다.

유수한은 다리가 마비된 사람처럼 팔로 앞으로 기어간다. 손에는 뭔가를 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이내 사람들에게 든 것을 내밀었다.

“하, 한 푼만 도와주시면, 감, 감사하겠슴미다……”

예전에 비하면 많이 사라졌지만, 지하철에는 여전히 구걸하는 사람이 있다. 미리 출력한 전단지를 사람들 허벅지 위에 두고 한 바퀴 휙 돌아간 후에 다시 전단지를 받아 가며 구걸하는 사람도 있었고 껌을 팔기 위해 돌아다니는 노파도 있었다.

지금 유수한은 가장 자극적인 연기를 하고 있다.

일부러 강철수의 시선을 빼앗기 위해서.

“제, 제게는 어린 자식이 있슴미다. 사, 사, 사고로 다리가 다쳐서 일을 못 합미다…….”

허. 생각할수록 기가 막히다.

유수한, 그가 누구인가.

항상 멋있는 역할에 주인공만 하려고 하던 사람이 유수한이었다.

이렇게 바닥을 기며 구걸하는 연기를 할 사람이 아니다. 심지어 연기도 괜찮게 하고 있었다. 잘생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까지 어눌하게 하니, 말 그대로 구걸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유수한은 강철수의 시선을 빼앗기 위해서 승부수를 던졌고 보여 주는 연기는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어, 뭐, 뭐야!”

그때 어눌하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연기하던 유수한이 파드득 몸을 떤다. 마치 다리를 못 쓰는 사람처럼 굴더니, 한순간에 다리가 나은 사람처럼 허겁지겁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서도 받은 돈은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왜 이 시간에 단속이 떠!”

짜증을 내며 후다닥 도망간다. 벽에 가로막히자, 유수한은 마치 문을 열고 다음 칸으로 넘어가려는 듯한 연기를 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단속반에게 붙잡힌다.

아등바등.

마치 두 사람에게 붙잡힌 듯한 연기를 자연스럽게 해내고 있었다.

“아, 제발 한 번만 봐주세요. 저 결혼도 했고 애도 있는데, 우리 애가 아직 세 살밖에 안 됐습니다. 제발요. 저 진짜 처음이에요. 제가 짤려서 돈이 없어요. 먹고는 살아야 하잖아요. 네?”

질질 끌려가며 변명하는 모양새가 퍽 자연스러웠다. 어제보다 발음이 아주 조금 나아졌다. 전날 유수한이 집에서 볼펜을 물고 한참이나 책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최선을 하고 있었다.

유수한 연기를 지켜보던 강철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음 상황 설명을 이어 나갔다.

“종로3가역에 도착했습니다. 3초 후 문이 열립니다.”

분위기는 압도적으로 유수한이다. 지각할까 봐 문 앞에 서성이며 계속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던 학생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피곤해서 꾸벅꾸벅 조는 아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만의 연기를 하던 학생들도 화려한 유수한의 연기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다.

압도적인 스케일.

유수한에게는 경험에서 새어 나온 생활 연기였다.

“아, 진짜! 이렇게 매몰차게 구실 거예요?”

문이 열리고 질질 끌려가던 유수한이 몸을 크게 뒤흔든다. 제 팔을 붙잡던 남자 하나가 나가떨어지고 발로 걷어차는 시늉을 한다. 그리고 그 틈을 타 달아나는 모습까지. 유수한은 끝까지 자신이 설정한 배역에 몰입하고 있었다.

“미친놈.”

그리고 강철수의 입에서는 상황 설명 대신 짧은 욕이 터져 나왔다.

“그만!”

짝!

손이 마주치는 소리와 함께 각자 연기를 하던 학생들이 멈춘다. 유수한도 숨을 몰아쉬며 하던 연기를 멈추고 강철수를 보았다.

강철수는 삐뚜름한 표정으로 유수한을 응시했다.

“제자리로 돌아가세요.”

그리고 유수한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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