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숙자, 천재 배우 되다-7화 (7/175)

7. 그 마지막이 바로 당신이야

강철수의 도발은 먹히지 않는다. 당연했다. 지금은 유수한이 아니라 김대한이었으니까. 유수한은 책상에 앉아 대본을 정독하기 시작했다. 강철수는 유수한이 자신의 도발에 넘어가 아무 말도 안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사실은 대본 내용을 하나도 모르기 때문에 집중하는 중이었다.

핸드폰으로 드라마 검색을 해 보니, 기본 정보를 살필 수 있었다. 시청률만 보아도 얼마나 인기가 좋은 드라마였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남자 주인공의 비중이 높아 연기력이 중요했다는 사실도.

드라마 내용은 간단하다. 매일 죽을 고비를 넘어야 하는 남자 주인공은 삶에 회의적이다. 직업은 소설가였고 칩거 상태로 살아간다. 그러다 새로운 가정부로 찾아온 여자 주인공과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반전으로 남자 주인공은 매일 죽을 고비를 넘겨야 하는 게 아니라 망상에 빠진 거였고, 알고 보니 여자 주인공은 정신과 의사였다는 사실.

“시간을 언제까지 드려야 합니까?”

10분 넘게 기다리던 강철수가 못 참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여기 표시되어 있는 장면을 연기하면 되는 건가요?”

“네.”

“독백이네요.”

“시간 더 줘야 합니까?”

강철수가 귀찮다는 듯 물었다. 그러자 유수한이 고개를 저으며 호흡을 가다듬는다. 사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남 앞에서 목소리를 낼 일도 없었으니, 연기는 당연히 할 일이 없었다. 손에 땀이 차는 듯했다.

“……시작하겠습니다.”

괜한 잡생각은 털어 버린다. 배우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것저것 많은 걸 찾아보았다. 겉핥기식이었지만, 연기에 가장 중요한 건 몰입도라고 했다. 아마도.

눈을 감고 감정을 잡았다.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는 걸 깨달은 심정을 마음에 새긴다.

“아니야.”

누군가가 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여기였어. 난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머리 위로 화분이 떨어졌어. 그걸 맞고 난 기절했었어. 무서워서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었고 학교도 그만뒀어. 내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소설을 쓰는 일밖엔 없었어. 언제나 죽음이 날 찾아와. 근데, 그 모든 게…….”

독백이 이루어지는 곳은 길거리였다. 남주가 머리에 화분을 맞고 쓰러져 죽을 뻔했다고 믿었던 그 거리.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 보았다. 무릎을 꿇은 채로 울며 부들부들 떠는 남자를 상상한다. 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우는 남자를 피해 가고, 그 순간을 그는 경험해 봤다. 차이점은 이 인물은 주변 시선을 파악할 수 없을 만큼 패닉 상태라는 거였다.

“이게 다 거짓이라고? 아니야. 아니야!”

유수한은 나름대로 노력했다. 연기 초보자였지만, 목숨이 걸려 있는 일이기에 더 열심히 연기했다. 잘나가는 소설가, 매일 죽음이 찾아온다고 생각하며 두려움에 세상으로 나오지 못했던 남자, 그 모든 망상증은 어릴 때 부모의 죽음을 목도하며 시작되었다.

대본을 읽으며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본연의 감정을 떠올리려 했다. 한순간에 프로처럼 연기할 수는 없었다. 공감. 연기하고자 하는 인물의 감정에 공감하는 것. 유수한이 필사적으로 찾아낸 연기의 첫걸음이었다.

“그만.”

하지만 연기 베테랑이 보기에는 한없이 미흡하기만 할 뿐이었다. 강철수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유수한에 대해 좋지 않은 정보만 가지고 있는 그였지만, 객관적으로 보아 유수한은 연기를 못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잘하는 편도 아니었지만, 이렇게 기본기가 없는 배우는 결코 아니었다.

“하기 싫으면 말하지 그랬어요?”

결론을 내린 강철수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그렇게 대충 연기할 거면 왜 여기 왔는지도 모르겠네.”

그러다가 불쾌함이 치솟았다. 연기를 배우겠다고 할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강철수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가 유수한 같은 사람이었다. 얼굴만 믿고 연기하는 놈. 실력도 없는 주제에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놈. 연기에 진정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배우라고 할 수 없는 놈.

“시간 낭비 했네요. 내가 여기서 돈 벌어먹고 사는 입장이라.”

강철수가 짜증을 내며 유수한에게 다가갔다.

“유수한 씨가 싫어도 한 번은 봐 줘야 해서 온 건데.”

그러더니, 책상에 놓인 대본을 홱 가져간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생각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성실 대표는 이 작품을 놓친 것을 두고두고 한스러워했다. 그럴 때마다 강철수는 소화하지도 못할 역할이라고 속으로 웃었었다.

애초에 연기자로서 기본도 갖추지 못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놓친 작품이고 속이 쓰리다고 할지라도 연기를 할 때는 진심을 담아야 한다. 강철수가 보기에는 유수한은 성의 부족이었다. 하고자 하는 마음 역시도 없다.

“잠깐만요.”

뒤늦게 유수한이 강철수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제 연기가 그렇게 엉망이었습니까?”

“그걸 말이라고!”

그 뻔뻔한 물음에 강철수가 화를 참지 못했다. 유수한은 여전히 강철수 앞을 막고 호기롭게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올곧은 눈빛. 강철수는 유수한의 단단한 눈빛을 보고 작게 실소를 터트렸다.

“어디가 어떻게 엉망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알려 주세요.”

강철수가 눈을 가늘게 뜨고 유수한을 응시한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는 눈으로.

“연기의 기분은 발성이죠. 발음도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호흡이 안정적이어야 하며 소리를 낼 때 흐트러지지 않고 쭉 뻗어 나가야 합니다.”

그 말을 하면서도 강철수는 한숨을 푹 쉬고 있었다. 대체 왜 이런 기본적인 상식을 말해 줘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

“유수한 씨를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아예 머리에 정보가 없는 건 아닙니다. 적어도 이렇게 엉망으로 연기할 실력은 아니었죠. 뭐 그렇다고 썩 잘하는 편도 아니었지만.”

강철수가 매서운 눈으로 유수한을 쏘아 보았다.

“해서, 나는 그쪽이 날 갖고 놀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보여 준 건 연기가 아니었잖아?”

공격적인 그 말에 유수한이 미간을 좁혔다. 예전의 유수한의 연기와 비교한다면 당연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 이렇게 장난질 치고 물러선 듯한 느낌을 주게 되면 연기 수업을 더 받을 수 없게 된다. 지금은 포인트 한 푼이라도 아쉬운 시점이었으니.

“발성과 발음은 연습하면 되지 않을까요.”

강철수는 냉정한 사람이다. 유수한은 강철수라는 사람이 마치 고양이처럼 한없이 예민한 사람처럼 보였다. 사람이 들어오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안경을 닦던 그 모습에 공격적인 기가 느껴졌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연습?”

이건 또 무슨 헛소리냐는 듯 강철수가 되물었다.

“제가 최근에 물에 빠져 죽을 뻔한 거 알고 계시죠.”

“그건 갑자기 왜?”

“머리를 다쳤습니다.”

사람을 설득해야 할 때는, 특히나 불신에 가득 찬 사람을 설득해야 하는 경우에는 거짓이라도 좋으니 한 방이 필요하다. 쉽게 말하자면 스토리텔링. 유수한은 지금 연기력이 저하된 이유에 대한 스토리를 풀어 내고 있었다.

“그래서 예전처럼 발음과 발성이 제대로 나오지 않더라고요.”

내가 그걸 믿겠냐?

강철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열심히 재활하며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찾아뵌 것도 그런 이유죠. 발성과 발음을 다시 처음부터 잡기 위해서입니다.”

꽤나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감정은요?”

이번에는 되레 유수한이 역습을 시도했다.

“연기의 기초에는 감정도 있다고 알고 있는데요.”

“……!”

역습 시도는 제대로 먹혔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지만, 감정선은 살아 있었다. 그래서 끊는 타이밍을 재지 못했고 그 지랄 맞은 연기를 꽤 오래 지켜본 후에야 중단시켰다.

강철수는 머리를 굴렸다.

유수한의 말을 전부 다 믿을 수는 없지만, 굉장히 잘 꾸며진 말들이었다. 머리를 다쳐서 발음과 발성이 무너진 상태. 거기에 감정은 살아 있다. 오히려 감정만큼은 예전 유수한보다 더 나아 보였다.

“원하는 게 뭡니까?”

그리고 아직도 유수한의 진심을 모르겠다. 이렇게 연기를 배우려는 의도를.

“갑자기 연기를 배우고 싶다, 단지 그 이유뿐입니까?”

유수한이 씩 웃었다.

“네.”

선선히 낚싯대를 드리운다. 그리고 강철수는 머지않아 그 미끼를 덥석 물 것이다. 강철수는 연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허울뿐인 그 말에도 심장이 반응할 것이다.

그게 바로 강철수라는 사람이었다.

쓸데없는 의심은 많아서 끊임없이 유수한을 의심할 테지만,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연기 스킬을 모두 가르쳐 줄 것이다.

“진정한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그 근거는 이건 연기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유수한은 연기에 목숨을 걸고 있다. 진정한 연기자가 되어 유수한 몸으로 호의호식하는 것. 목표가 뚜렷했기에, 강철수가 의심을 한다고 한들 별다른 수가 없을 터였다.

“진정한 배우?”

허, 강철수가 조소 섞인 웃음을 터트렸다.

“지나가던 개가 웃겠군.”

유수한이 했던 말은 단순히 사탕발림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강철수의 가슴에 비수를 꽂을 만큼 강렬한 말이었다.

늘 강철수는 진정한 배우가 되고 싶었다. 가난한 연극배우 생활, 무대에서 관객을 바라보며 연기를 하는 일이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진정한 배우는 연기를 사랑하고 돈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 그 생각에 젖어 궁핍 역시도 진정한 배우가 되기 위해 감내해야 한다고 믿었다.

사실은 모두 핑계였다.

안정적인 배우 생활을 하기에는 모자람이 있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매체 연기에 자꾸 눈이 돌아갔던 적도 숱했다. 오디션도 보았지만, 다소 떨어지는 외모에 특징 없는 생김새라는 이유로 미끄러지는 것을 반복했다.

그는 진정한 배우가 되는 것을 포기했다.

연기를 사랑하기에 계속 연기와 관련된 일을 하게 된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있었다.

유수한의 말은 그의 폐부를 찔렀다. 얼굴밖에 가진 게 없는 같잖은 배우가 감히 진정성을 입에 올린다.

“잘생긴 배우는 세 종류로 나뉘죠.”

강철수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하나는 얼굴은 잘생겼는데 연기를 못하는 배우.”

이죽거리는 그 표정에서 유수한은 불길함을 느낀다. 강철수는 남의 속을 효과적으로 강하게 긁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또 하나는 얼굴도 잘생겼는데 연기까지 참 잘하는 배우.”

유수한은 표정 관리를 하며 강철수의 말을 들었다.

“마지막은 얼굴은 잘생겼는데, 연기도 못하고 인성도 바닥인 배우.”

강철수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비웃었다. 이윽고 그의 손가락이 유수한을 향했다.

“그 마지막이 바로 당신이야.”

싹둑.

마치 그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미끼를 드리운 낚싯줄을 날카로운 이로 끊어 버리는 듯한 소리가 유수한의 귀에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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