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숙자, 천재 배우 되다-6화 (6/175)

6. 무슨 생각인지 지켜나 보자

김대한은 공부를 할 여건이 되지 않아서 그렇지, 기본적인 머리는 좋은 편이었다. 게다가 없이 살다 보면 눈치를 봐야 하는 경우가 잦았다.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파악하고 움직이는 것이 빠르다. 지금도 그랬다.

이성실의 마음은 이미 돌아선 상태였다. 유수한을 보기도 싫다는 듯 시선을 주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차분하게 할 말을 하고 있었다. 차라리 화를 내는 것이 더 대처하기 쉬울 때가 있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화를 낸다는 건, 적어도 작은 감정 정도는 남아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대표님.”

김대한은 기존 유수한이라는 인물에 대해 잘 모른다. 마주친 것도 아주 짧았기에, 그에 대한 정보는 추측하는 것이 전부였다. 유수한을 흉내 내는 것도 한계가 있다. 처한 상황을 유연하게 벗어나기 위해서 흉내를 내고 있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통하지 않았다. 그럴 때는 오히려 김대한답게 헤쳐 나가는 것이 정답이 될 수도 있었다.

“이미 난 너에게 많은 기회를 줬던 걸로 기억하는데.”

갑자기 무릎을 꿇은 유수한을 보고 놀란 이성실이 한동안 침묵하다 무겁게 입을 열었다.

“왜 내가 또 너에게 기회를 줘야 하지?”

그의 말을 부정할 수 없다.

유수한은 고개를 숙인 채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돌아선 사람의 마음을 한순간에 바로잡을 수는 없다. 유수한이 모르는 무수한 세월 속에서 조금씩 무너져 내린 관계였기 때문이었다.

짧게나마 이성실을 마주한 유수한은 그는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사람을 쉽게 포기하지 않고 인내심을 갖고 끌어 주는 사람.

그런 사람을 돌아서게 만드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아주 몹쓸 재주.

“대표님.”

생각을 정리한 유수한이 고개를 들어 이성실을 보았다.

“사람이 죽다 살아나니까 깨달음을 얻게 되더라고요.”

거짓은 아니었다. 유수한은 한번 죽었다가 새로운 몸으로 다시 살아났으니까.

“부끄러운 일이지만, 물에 빠졌을 때 주마등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이렇게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창피하더라고요.”

이것도 연기라면 연기일 것이다. 타인의 인생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지금도 유수한이라는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연기라고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온전한 제 것이 될 것이다.

“제대로 살고 싶어졌습니다.”

무릎을 꿇은 채로 유수한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았다.

누구처럼 비싼 술을 마시고 자기 소유의 호텔 수영장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차가운 길바닥에서 죽었다.

그 누구도 김대한의 죽음을 모른다. 초라한 죽음이었다.

죽기 직전, 사람답게 제대로 살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다. 그리고 그 기회가 이렇게 주어졌다. 이 소중한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우리 계약은 반년 남았다.”

이성실이 무릎을 꿇은 유수한을 보며 말했다.

“그랬기에 네게 한 번이라도 더 기회를 주려 했지만, 넌 또 다시 내 회사에 먹칠을 했어.”

이성실은 유수한의 음주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소속 연예인이 불미스러운 사고를 치게 되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 소속사 비난이었다.

회사의 이미지는 굉장히 중요했다. 좋은 배역을 따내기 위해서는 배우의 이미지도 중요하지만, 소속사의 능력 역시도 중요했다.

유수한의 병크는 빨리 수습해야 옳았고 그랬기에 방치하지 않고 빠른 입장 표명, 기자를 포섭하여 두둔 기사를 쓰게 했다.

더불어, 유수한을 밀착 취재하여 특종을 잡은 기자에게 접근하여 문제가 된 기사를 내리게 하는 것. 그 모든 일들이 하루 안에 이루어졌다.

돈과 인력이 동시에 드는 작업이었고 유수한이 벌었던 돈은 모두 사고 수습에 들어갔다. 이쯤 되면 가지고 있는 게 손해였다.

“난 그 반년 동안 네가 얼마나 잘하는지 보려고 했다. 내 눈이 틀리지 않았기를 바랐지만, 넌 역시 늘 같았어. 내 기대가 보잘것없을 정도로.”

이제는 더 말할 이유도 없었다. 갑자기 무릎을 꿇는 행동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이미 마음은 돌아섰다. 재계약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유수한이 고개를 들어 이성실을 보았다. 이성실의 말은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이성실은 회사 대표로서 소속 배우를 책임져 왔다. 아무리 사고를 자주 치는 배우일지라도.

이성실의 마음이 돌아선 것은 한순간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등을 지는 그 순간에도 저열하게 약점을 내거나 화를 내며 갑질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더더욱. 김대한이 유수한으로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성실의 존재가 필요했다.

“만회하겠습니다.”

유수한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는다. 뚜렷한 목표가 생긴 지금, 흔들릴 이유가 없었다.

“남은 계약 기간 동안 만회하겠습니다. 대표님.”

* * *

[라이프 체인지] 출석 포인트 적립! <현재 총 누적 포인트 : 2>

[라이프 체인지] 운동 포인트 적립! <현재 총 누적 포인트 : 3>

로드 매니저 김민수는 의구심을 가지면서도 유수한이 원하는 모든 요구를 들어주었다. 아침 운동을 마친 유수한은 적립된 포인트를 확인하고 회사에 들렀다.

“어, 좋은 아침.”

마침 사무실에서 김민수를 마주쳤다. 김민수는 손에 대본을 들고 있었고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유수한을 보았다. 그러다 한 박자 느리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어제 유수한이 한차례 이성실과 면담을 마친 후에 김민수는 바로 대표실 호출을 받았다. 이성실 대표는 김민수에게 유수한에 대해 물었고 그는 아는 대로 말해 주었지만, 큰 소득은 없었다.

이성실이나 김민수나. 모두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우고 있었다. 유수한이 저렇게 바뀐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말씀하신 단막극 대본이에요.”

단막극 시즌.

공영방송인 KBC는 단막극 방영을 축소하고 있었다. 돈이 안 된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수신료를 받아먹으면서 의무는 회피한다는 거센 비난을 받고 올해 다시 단막극 편성을 대폭 늘렸다. 그걸 항간에서는 단막극 시즌이라 불렀다.

연초 1월부터 3월까지 KBC2 채널에서 수요일 밤 9시에 방영하는 단막극은 신인이나 무명 배우에게 새로운 기회의 장이 되었다. 그리고 그 기회를 유수한이 노리고 있었다.

“고마워.”

유수한은 하나하나 대본을 살펴보았다. 아직 눈에 띄는 대본은 없었다. 의외로 붉은색은 딱 하나였다. 단막극은 대중성보다 작품성을 중시하는지라, 시청률이 낮아도 망작인 경우는 거의 없는 듯했다. 빨간색 빛을 뿜어내는 대본은 제목만 보고는 휙, 다른 책상에 던져 치워 놓았다.

“많지는 않네?”

유수한이 물었다.

“네, 캐스팅 안 된 작품만 가지고 왔거든요.”

사실 김민수는 아직 로드 매니저라 함부로 대본을 가져올 수 없었다. 업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보안이기 때문이었다. 방영 전인 대본은 소속사에서도 높은 직급만 먼저 확인할 수 있다. 단막극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김민수는 이 대표에게 먼저 상의를 했고 이성실은 대충 대본 몇 개만 가지고 가라고 지시했다. 아직 이성실 또한 유수한을 믿지 않고 있었다. 그렇기에 캐스팅이 된 작품이라도 소속사 힘으로 밀어붙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따라서 유수한은 한정적인 대본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지!”

유수한의 눈빛이 반짝였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대본은 총 다섯 권이었고 그 안에 좋은 작품이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보였다. 찬란한 금빛이.

선별 작업은 순식간에 끝났다. 아무 빛도 나지 않는 대본도 한쪽에 치워 두고 초록빛과 금빛을 추려 책상에 놓았다. 총 두 권이었다. 아무거나 들고 온 거에 비해서 아주 좋은 효율이었다.

「아임 홈리스(I’m Homeless) - KBC2 단막극 시즌 2022」

아쉽지만 초록색도 치워 두고 찬란한 금빛이 뿜어져 나오는 대본을 들었다. 우습게도 제목마저 김대한과 유사했다.

“이거.”

작품 보는 눈은 빗나가지 않는다. 내년 단막극 시즌에 가장 호평을 받을 작품은 이거였다. 김민수는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갸웃했다. 유수한은 내용을 확인하지도 않고 작품을 골랐다. 그렇게 대충 골라 놓고는 저 의기양양한 표정은 뭐란 말인가.

“정말 이걸로 선택하시게요?”

의구심이 잔뜩 들어 있는 김민수를 보던 유수한이 미소를 지었다. 대본을 손에 쥔 유수한은 따스한 눈으로 대본을 보며 말했다.

“좋은 작품이야.”

여전히 김민수는 영문 모를 표정이다.

“내 복귀작은 이거다.”

* * *

아무리 소속사와 배우 간의 사이가 나빠졌다고 해도 계약으로 얽힌 관계이다. 이성실이 계약 해지를 통해 관계를 청산할 수도 있겠으나, 그는 괜한 일을 터트리기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더군다나, 이제 고작 3개월 남은 관계였다.

단막극은 돈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유수한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아무리 복귀를 위해서라도 단막극 같은 주목받지 못할 드라마는 기피하는 사람이 유수한이었다. 그 콧대 높은 유수한이 단막극을 선택했다.

그것도 볼품없는 노숙자 역할을 원한다.

“이상하지?”

이성실이 턱을 괸 채로 김민수를 올려 보았다.

“네. 이상합니다.”

이하 동문, 입을 열지 않아도 생각은 같다.

“미팅 주선해.”

툭툭툭,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던 이성실이 지시를 내렸다.

“무슨 생각인지 지켜나 보자.”

* * *

[라이프 체인지] 연기 수업 포인트 적립! <현재 총 누적 포인트 : 4>

첫 연기 수업. 유수한은 어김없이 핸드폰에 도착한 문자를 무표정으로 보았다. 항상 생각하지만, 어떻게 시스템이 돌아가는지 모르겠다. 물론 그런 의문을 가진들 하등 쓸모가 없었다.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게 된다 해도 다를 건 없을 테니.

“안녕하세요. 유수한입니다.”

신인 배우 담당 연기 선생님 강철수가 의자에 앉아 안경을 닦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을 텐데,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느릿하게 안경을 닦는다.

“강철수입니다.”

안경을 쓴 강철수가 고개를 돌려 유수한을 보았다. 유수한이 다가와 손을 내민다. 강철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 손을 맞잡았다. 악수를 한 상태에서 미묘한 탐색전이 시작된다. 유수한은 아무런 악의 없이 미소를 짓고 있었고 강철수는 그 미소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윽고 손이 떨어지고 강철수가 운을 뗐다.

“놀랐습니다. 갑자기 유수한 씨가 연기 수업 요청이라니.”

세상만사가 다 귀찮은 강철수여도 악명 높은 유수한을 모르지 않는다. 연극배우 생활을 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이 대표를 만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K엔터에 입사했다. 연기에 대한 열정은 있으나 계속 굶주린 생활을 할 수는 없었다.

K엔터에 입사한 것은 길게 보면 괜찮은 선택이었다. 현실적으로 연기를 계속 붙잡고 있을 수 있고 월급도 따박따박 들어왔다. 덕분에 생활에 여유가 생겼다.

보통 강철수는 신인 배우나 연습생 담당이었다. 이제 막 연기를 시작한 배우들을 가르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들은 하얀 도화지나 다름없었다.

강철수가 원하는 대로 색을 입힐 수 있다. 물론 데뷔하고 나면 성과에 따라서 강철수가 입힌 색이 달라지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건 그의 권한 밖이었다. 항상 강철수는 데뷔를 앞둔 신인이나 연습생을 가르쳐 왔으니까.

하지만 유수한은 달랐다. 신인도 아니었고 소문도 그리 좋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서 떨떠름하다. 맡고 싶은 사람은 아니었다.

“제가 기본기가 부족한 것 같아서요.”

이제 유수한인 척하는 것도 자연스러워진 김대한이었다. 어제 유수한의 필모그래피를 모두 찾아보았다. 금빛 대본이 인상적이었던 데뷔작 ‘어둠이 온다’부터 마지막 작품까지. 유수한의 연기는 잘하는 듯 못했고 못하는 듯 잘했다. 말이 이상하지만, 어쨌든 그리 연기력이 특출 난 건 아니었다.

유수한의 대외적인 평가는 얼굴로 먹고사는 배우였다. 데뷔 초, 작품 운도 좋아서 승승장구했던 유수한이 조금씩 하락세를 면치 못하며 외모마저 무너지고 있었다.

해서, 지금 김대한은 무너진 유수한의 외모를 다시 바로잡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강철수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공손하게 말하는 유수한을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다. 항상 누군가를 가르칠 때는 그 상대의 생각을 파악해야 한다. 그가 알고 있는 유수한은 건방지고 무례하며 못된 남자였다.

그런 남자가 고개를 숙여 가며 얌전하게 군다? 필시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생각을 마친 강철수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실력 테스트부터 해 보죠.”

강철수 책상에는 대본 하나가 놓여 있었다.

“자.”

휙, 강철수가 대본을 유수한에게 던졌다. 대본을 받은 유수한이 뿜어져 나오는 금빛에 미간을 좁힌다. 딱 봐도 대박 친 작품이었다.

「너와 함께한 모든 순간 – MBS 미니시리즈」

대본을 확인하는 유수한을 보며 강철수가 말했다.

“뭐, 잘 아는 작품일 테니.”

그 말에 고개를 들어 강철수를 보는 유수한이었다.

“유수한 씨가 병역 비리만 아니었어도 군대 대신 이걸 했을 테니까.”

그 순간, 유수한은 저도 모르게 탄식을 터트렸다. 이건 보나 마나 대박을 터트렸을 것이다. 그걸 놓치고 군대에 가야 했으니, 유수한이 얼마나 질투에 휩싸였을지 보지 않아도 눈에 훤했다.

“대표님이 참 아쉬워했지. 그 드라마가 그해 최고 시청률을 찍었으니까.”

지금 강철수는 유수한의 심기를 살살 긁고 있었다. 문제는 속에 들어 있는 사람이 김대한이라 먹히지 않을 뿐이었다.

“하지만 과연 유수한 씨가 그 역할을 잘 소화할 수 있었을까?”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 생각에는 아마 소화 불량으로 체했을 것 같은데.”

명백한 도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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