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숙자, 천재 배우 되다-4화 (4/175)

4. S급 아이템

늘 그랬다.

없이 살아온 김대한은 늘 대가 없이는 무언가를 얻을 수 없었다. 노력 끝에 돈을 악착같이 모으고도 한순간에 잃어버린 사람이 김대한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랬다. 대가 없이는 아무것도 손에 쥘 수 없다.

[라이프 체인지] 출석 포인트 적립! <현재 총 누적 포인트 : 2>

다음 날.

눈을 뜨니 포인트 적립 안내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 현실이었다. 김대한이 유수한 몸에 들어오게 된 건 우연이 아니었다. [라이프 체인지]라는 시스템에 의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김대한은 그 시스템에 놀아나게 될 것이다. 포기하기에는 너무 달콤한 삶이었기에.

“요약하자면…….”

지금 김대한은 유수한 상품의 체험판을 경험 중이고, 이 몸을 계속 유지하려면 포인트를 착실히 모아 본품을 사야 한다는 뜻이었다.

안내에 따르면 포인트를 쌓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유수한의 직업과 관련된 일을 성공했을 때 크게 벌 수 있었다.

유수한의 직업은 배우였고 그와 관련된 일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하나는 외모 관리였고 두 번째는 연기였다.

포괄적으로는 배우로서 성공하는 것.

문제는.

“유수한이 자숙 중이라는 거지.”

김대한은 없이 살았다. 그랬기에 이런 과학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일에도 쉽게 납득하고 대책을 강구한다.

무엇보다 따뜻한 집이 있다는 것에 만족했고 폭신한 침대에서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라이프 체인지]의 설명에 따르면 유수한은 생을 마감했다. 어쩌다가 죽었나 궁금해서 찾아보았던 김대한은 혀를 끌끌 차고 말았다.

[연예뉴스] 유수한, 또 음주 해프닝? …… 소속사 “사실과 다르다”

유수한은 술 마시고 수영을 하다가 그대로 물에 빠져 죽은 거였다. 뒤늦게 응급실로 실려 갔지만 심장이 멎었고, 그 사이에 자신이 영혼이 들어왔다고 지레짐작하고 있었다.

문제는 유수한이 봉사 활동으로 자숙 기간을 보내며 배우로서 복귀를 준비하던 시기였다는 점이었다.

[단독뉴스] K엔터테인먼트 “음주 수영 파문은 사실무근, 억측 삼가 달라.” 입장문 발표

소속사에서는 사태 진압에 나섰다. 발 빠르게 입장 발표를 했고 이렇게 문제가 사그라 들었지만, 젊은 층 사이에서는 여전히 유수한을 물고 씹고 뜯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HOT] 외모 천재 유수한, 하지만 그렇지 못한 썩은 인성 +899

이미 네티즌은 유수한을 손절하는 분위기였다. 소속사에서는 술 취해 수영하다가 물에 빠져 응급실에 실려 간 게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 말을 쉽게 믿지 않았다.

물론 김대한 조차도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사고에 대해서 주변인에게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서울역에서 보았던 그의 인성을 보아 술 마시고 수영을 했던 게 분명해 보였다.

그것도 아주 진창 마셨겠지.

- 아, 근데 범죄는 아니잖아 유수한 너무 까는 거 아니냐? 그냥 죽길 바란 듯 ㅉㅉ

⌞범죄는 이미 두 번이나 저질렀잖아 ㅋㅋㅋ 쉴드 개오짐

⌞⌞누가 보면 유수한이 처음 병크 터트린 줄 ㅋㅋㅋㅋㅋㅋㅋ

⌞⌞⌞ㅇㅇ 이번엔 범죄는 아님 걍 망신살 낌

⌞⌞⌞⌞222 망신살 ㅇㅈ

⌞⌞⌞⌞⌞ 333333

유수한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건 남이 봐도 부끄러울 일이었다. 술 먹고 노는 건 다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술 먹고 물에 빠져서 죽을 고비를 넘기는 건 일반적인 일은 아니었다.

이럴 거면 들키지나 말든가.

짧은 시간 동안 김대한은 많은 것을 배워 가고 있었다. 대형 커뮤니티에는 관심도 없었는데, 유수한에 대해서 알아보다 보니 여러 커뮤니티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다양한 곳에서 유수한에 대한 글을 볼 수 있었고 거의 다 비난뿐이었다.

인터넷을 끄고 앱을 열었다. 문자로 온 [라이프 체인지] 링크를 들어가고 난 후에 핸드폰에는 앱 하나가 설치되었다.

이 앱에 다른 사람도 들어갈 수 있는지 확인해 보려 공기계를 구해 링크를 똑같이 검색하여 들어갔지만, 없는 페이지로 나왔다.

[라이프 체인지] 공식 앱 역시 설치가 불가능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니. 그게 일반적일 리가 없다.

“어?”

앱에 없던 것이 생겼다.

“스타터팩?”

스타터팩을 홍보하는 배너를 클릭했다. 지금 가지고 있는 포인트로는 본품은커녕 체험판 기간 연장도 못 하며 D급 아이템도 살 수 없었다.

“아이템 첫 구매 이벤트. 1포인트만 있으면 랜덤으로 아이템 획득?”

대박이다.

D급부터 S급까지 랜덤으로 아이템 하나를 획득할 수 있었다. D급 아이템만 하더라도 기본 5 포인트는 필요하니, 아무거나 걸려도 이건 이득이었다.

안 살 이유가 없다.

[구매]

망설이지 않고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가지고 있던 포인트에서 1 포인트가 차감되고 보물 상자가 튀어나왔다. 이내 보물 상자가 흔들리며 빛이 뿜어져 나온다.

달칵달칵달칵.

대충 녹음한 듯한 효과음이 귓전을 때렸다.

툭.

정신없이 흔들리던 보물 상자가 멈췄다.

번쩍!

보물 상자가 열리며 빛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입을 쩍 벌린 보물 상자에서 카드 한 장이 튀어나왔다. 화려한 무지개 색.

단순한 색상이 아니라는 것에서 심장이 쿵쿵 뛰고 있었다. 빛이 점차 사그라들고 무지개 카드가 선명해진다.

“!”

카드를 확인한 유수한의 눈이 커지고 있었다.

[작품 보는 눈 (S)]

좋은 대본을 골라낼 수 있는 능력.

금색은 대작, 초록색은 평작, 빨간색은 망작이다.

“헉?!”

좋은 아이템이 나올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확률표만 보아도 1%도 안 되는 게 S급 아이템이었다. C급만 나와도 감사하다고 할 판이었는데, 무려 S급이 떴다. 그것도 배우에게는 꼭 필요한 능력이었다.

지금의 유수한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배우라는 직업은 생소했고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막막하던 찰나였다. 하지만 이렇게 뜻하지 않은 귀한 아이템을 얻고 나니, 자신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뭐든 잘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사용하기]

망설일 이유가 없다. 영구적인 아이템이었으니, 바로 적용해야 마땅했다. 사용하기를 눌렀지만, 아직 큰 변화는 없어 보였다.

그러니 실험을 해 본다. 책장에서 빛나는 대본을 하나둘 꺼냈다. 하나는 금색이었고 하나는 초록색, 나머지는 빨간색이었다.

핸드폰을 들고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검색하기 시작했다.

「어둠이 온다 – 강상영 감독」

금색으로 빛나던 시나리오는 유수한의 데뷔작이자 비중 있는 조연으로 활약했던 영화였다. 그리고 이 아이템 설명이 맞는다면 이 영화는 대박을 쳐야 옳았다.

“천만 돌파?”

이 영화는 천만 관객을 동원했다.

아이템 능력이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유수한은 놀란 가슴을 진정하고 다음 초록색으로 빛나던 대본을 확인했다.

「붉은 달 아래 – KBC 미니시리즈」

이 작품은 유수한이 병역비리가 터지기 전에 찍었던 미니시리즈였다. 인터넷에 검색하니 쉽게 시청률을 확인할 수 있었다. 평균 시청률은 12.8%였는데, 유수한은 이 시청률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평소 드라마나 영화에 대해 무지했다. 천만 관객을 동원했다고 하면 잘된 영화라는 걸 알 수 있었지만, 15%가 안 되는 시청률은 중박 수준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OKEN] 대진운 아쉬운 ‘붉은 달 아래’ 확고한 마니아층, 작품성은 최고!

[연예토킹] 후반 시청률 불붙는 ‘붉은 달 아래’ 제목대로 뜨겁게 타오르나?

기사를 확인해 보니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었다. 작품성은 좋지만, 대중성은 살짝 모자랐던 듯했다. 하지만 예전과 다르게 시청률 10%만 넘어도 드라마가 잘됐다고 하는 모양이었다.

“이제 마지막.”

유수한이 폭행 사건을 터트리기 직전에 찍었던 마지막 작품.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 SBC 미니시리즈」

20살에 데뷔해서 톱스타로 빠르게 성장한 유수한은 21살에 터진 병역 비리로 그해 겨울, 군 입대를 결정지었다.

애초에 유수한은 군대에 갈 생각이 없던 사람이었다. 귀한 아들을 군대에 보내고 싶지 않았던 유수한 부모는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병역 면제를 얻어 냈다.

애초에 돈이 있는 집안이었고 유명 로펌 대표 변호사였던 어머니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우울증은 기본에 가벼운 정신분열까지 만들어 내며 병역 면제를 만들어 냈으나, 한 가지 변수가 있었다. 설마 귀한 아들이 유명 연예인이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울며 겨자 먹기로 군대를 다녀온 후에 짧은 휴식기를 가진 유수한은 고심 끝에 차기작을 결정지었다.

24살, 따스한 봄에 찍은 드라마였다.

“개망했네.”

평균 시청률 1.7%에 조기종영이라는 불명예까지 떠안았다. 군 전역 후에 찍은 복귀작이라 배우로서 몹시 중요했는데, 시청률은 물론 작품성도 엉망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결국 이 드라마에서 병역 비리에 대한 만회를 하지 못한 유수한은 급이 한 단계 떨어지고 만다.

물론 이어서 바로 폭행 사건을 터트리면서 한 단계는 무슨, 이미지가 요단강을 건너는 데 일조를 했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다. 유수한은 짧고 굵게 전성기를 구가하고 떠나갔다고.

“좋아. 일단 좋은 무기가 하나 생겼어.”

결론을 내리고 다시 [라이프 체인지] 앱을 열었다. 지난밤, 잠도 제대로 지새우지 못할 만큼 충격적이었던 이야기. 유수한의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싫든 좋든, 포인트를 쌓아야 한다.

관건은 배우로서 얼마나 자리를 잡을 수 있는지였다.

예를 들어, 연예계 복귀만 해도 10 포인트를 얻을 수 있다. 시청률이 5% 이상 기록하면 5 포인트가 적립되고 10% 이상은 10 포인트였다. 난이도에 따라 적립되는 포인트가 달랐고 포인트를 적립할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본품 구매는 1000 포인트가 필요하군.”

티끌 모아 티끌이었다.

시간이 많다면 열심히 티끌을 모아 본품을 구매하면 편하겠지만, 체험판에는 기간이 정해져 있었다. 그 말인즉슨, 체험판 기간 연장을 할 수밖에 없고 포인트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체험판 한 달 연장이 10 포인트…….”

체험판 기간 연장을 해야 한다면 한 달보다는 6개월짜리를 구입하는게 더 저렴했다. 한 달 연장은 무려 10 포인트지만, 6개월은 30 포인트였다. 거의 절반 값으로 살 수 있지만, 문제는 한 달 내에 포인트를 적립할 수 있는가였다.

“생각할 필요가 없다.”

지금은 움직여야 한다.

유수한은 핸드폰 연락처를 주르륵 확인하고는 로드매니저 김민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생각만 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고 시간만 흘러간다. 뭐라도 부딪히는 게 지금 상황에서는 최선이었다.

“김대, 아니. 유수한입니다.”

습관은 무섭다.

34년 인생동안 김대한으로 살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몸이요? 아, 괜찮습니다.”

매니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뭔가 두려워하는 목소리였다. 그 이유를 김대한은 알지 못했고 그저 유수한을 걱정하는가 보다 넘겨짚었다.

“예?”

하지만 매니저 김민수는 아주 뜻밖의 말을 꺼냈다.

“머리요? 저 머리 안 다쳤는데요.”

매니저가 당황한 듯 말을 더듬고 있었다. 김대한은 김민수의 반응을 보며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서울역 뒤편에서 유수한은 담배를 피우며 누군가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리고 유수한의 성격을 보아 남에게 잘해 줄 성격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의 유수한은 이전의 유수한과 괴리감이 있다는 뜻이겠지.

“죽다 살아난 김에 존댓말 한번 써 봤다.”

어색하게나마 유수한을 따라 해 본다.

“너 어디냐?”

그래도 효과가 있었는지 김민수의 목소리가 한결 차분해졌다.

“1시간 후에 회사 앞에서 보자.”

전화를 끊고 옷을 갈아입었다. 깔끔한 블랙 슬랙스에 니트를 입는다. 그 위로 더플코트를 걸친 유수한은 어색하게 거울 앞에 섰다.

늘 싸구려 옷만 입었던 그였기에, 단순한 옷차림에도 어색했다.

옷도 입어 본 놈이 잘 입는다. 유수한이 갖고 있는 컬렉션이 대부분 스타일리시해서 대충 걸쳐도 태가 났지만, 유수한이 스스로 옷을 사 입는다면 그렇지 못할 것이다.

배워야 할 게 늘어난다. 유행은 순식간에 바뀌고 유수한이 사 놓은 옷으로 평생 유지할 수는 없었다. 지금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그 후에는 공부를 하며 터득하면 될 일이었다.

유수한의 드레스룸 끝에는 문 하나가 있었다. 그 문을 열면 바로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신발장에서 무난한 스니커즈를 꺼내 신은 유수한은 문을 활짝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온다.

후우, 깊은 숨을 내뱉고 푸른 잔디를 바라보았다.

새로운 세상.

이제 첫 발을 내딛는 유수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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