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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이었다.
갑자기 내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오랜만에 보는 [게임창] 이었다.
[50억을 지불하고, 다시 그날로 돌아가시겠습니까?, 과거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와도, 더 이상 돈은 승계되지 않습니다.]
요컨대 돈을 포기하면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는 걸까? 이 빌어먹을 게임의 신이 사람을 갖고 노는구나! 하지만 욕이 나오면서도 고마웠다.
돈 따위가 문제가 아니다. 너무나도 뼈저리게 느끼며 마음 한구석을 공허하게 만드는 사실. 그건 바로 이 세상에는 예리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있기는 하지. 하지만 누워있을 뿐이다. 50억과 건강한 예리라니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바로 창을 터치했다.
그러자 예전에 [로드]를 하던 그때처럼 세상이 하얗게 변해버렸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예리는 내 무릎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키스를 하는 중이었다. 매우 열정적인 키스였다. 얼굴이 상기되어 내 목을 끌어안고 내 혀를 빨고 또 빨고 있는 예리의 모습이 너무나 섹시했다.
이건 어느 시점이지?
계속 되는 예리의 뜨거운 혀 때문에 머리가 날아갈 것 같아서, 일단 그녀의 몸을 떼어내고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침이 질질 흘러 내렸다. 예리는 혓바닥을 내밀고는 다시 내 목에 손을 두르고 키스를 계속하려는 듯 다가왔으나 그걸 저지했다.
“예리야? 잠깐만”
“뭐? 왜? 아저씨, 키스하는 거 싫어?”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보는 예리를 와락 품안에 껴안았다.
“그럴 리가 없잖아. 잠시만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래”
이곳은 집안이다. 그녀가 우리 집에 오기 시작한 건, 게임 상으로도 꽤나 최근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복장.
이건 분명히 게임을 클리어 하던 그때의 복장이다.
그래. 그때 문밖으로 나가려던 예리의 팔을 잡고, 한차례 키스를 나눴었다.
기억이 떠올랐다.
그럼, 여기서 뭘 어떻게 해야, 현실이 바뀌지? 고민해야 한다. 너무나도 중요한 순간이었다.
“아저씨?”
예리는 내 품안에서 나를 불렀다. 그녀를 은퇴시키는 건 히든미션이었다. 그것이 잘못 되었을 리는 없었다. 그건 확신했다. 그럼 이 상황에서 대체 뭘 바꿔야 한 단 말인가.
아무런 힌트도 주지 않는 게임의 신을 욕하면서 나는 일단 예리를 놓아주었다. 그러자 예리는 내 품안에서 떨어져 나왔다.
“갑자기 왜 그렇게 심각한 얼굴이야? 아저씨...?”
키스를 멈춘 것에 대해서 따지려고 내 얼굴을 응시했으나. 내 표정이 눈에 들어왔는지 하려던 말을 멈추고 걱정스런 얼굴로 질문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정도로 생각에 잠겨있었다.
이전에 한 것. 하지만 하지 말아야 할 것.
나는 이전에, 이 상황에서 그녀에게 게임에 대한 것을 설명했었다. 남들은 절대로 믿지 못할 비밀을 말해 준 것이다.
설마 그게 문제였던 건가?
게임의 시스템을 내 입으로 말해 버린 것이?
그 말은 게임에 대한 걸 말하지 않는 것만으로 클리어를 한 현실에 건강한 그녀를 승계시킬 수 있단 말인가? 의문이 꼬리를 물었지만, 해불 수밖에 없었다. 게임에 대한 건 입을 꾹 다물고 끝까지 비밀로 해야겠다.
그러면 남은 건 하나였다. 그녀를 보내는 것.
그녀를 보내지 않으면 게임이 클리어 되지 않는다.
그녀가 돌아가 은퇴를 사실상 선언해야 모든 것은 종료되는 것이다.
해보는 수밖에 없다. 제발.
“일단 예리야, 할아버지와 협상을 하고 만나자. 평범한 예리가 되어서 돌아와 줘”
“치, 그러려고 했는데 가는 나를 붙잡은 건 아저씨다?”
“그러게, 그건...미안.”
“뭐 좋아. 모든 걸 정리하고, 내일 오후 정각에 그 정류장에서 만나자 아저씨. 히히”
예리는 그렇게 말하더니 고개를 숙여 내 입술에 쪽 뽀뽀를 했다.
“아저씨, 예전에는 권력이 내 살아가는 이유 같았어. 하지만 이젠 아니야. 아저씨가 없으면 아무 소용도 없으니까. 일 같은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아저씨랑 계속 같이 있는 거. 다시 생각해보니 그 무엇보다 행복한 일인 거 같아. 나 일단 돌아갈 게. 내일 봐 아저씨!”
그렇게 말하며 상큼한 미소를 짓더니, 몸을 획 돌려서 그대로 떠나버렸다. 게임에 대한 사실을 말하지 않아서 일까? 예전과 대사가 변해 있었다.
게임에 대한 사실을 말하는 순간, 예리는 꿈 안에 내가 갇히는 게 되는 꼴이 되는 건가? 그렇다면 그건 부정해 주겠다. 강제력이든, 뭐든 그런 의문 따위 아무 상관없다. 해결할 필요도 없다. 그냥 현실에도 건강한 예리를 보내줬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바로,
[히든미션 「마음의 치유」 클리어, 미션난이도 A]
[축하합니다. 게임을 완전 클리어 하셨습니다.]
클리어 창이 나타났다.
세상이 빛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미 한 번 경험한 적 있는, 게임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터널을 통과하여 눈을 떴다.
정신을 차리니 여전히 집안이었다.
이곳이 현실인지 아닌지는 컴퓨터를 부팅시키면 알 수 있다.
전원을 누르자 ?위잉 하는 소리와 함께 컴퓨터가 켜졌다. 일단 여기까지는 전과 동일했다. 나는 그래서 예리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정류장으로 달려가려다가 멈추었다.
그녀는 내일 만나자고 했었다. 정확히 정각이 약속시간이었다. 그렇다면 그때까지 기다리는 게 맞다. 아무것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내일 정류장에서 그녀의 존재를 확인하기 전까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혹시라도 또다시 병원에 누워있는 그녀를 마주할 까봐 너무나 두려워서 그대로 그냥 침대에 누워서 약속시간이 다가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시간이 빠르게 가길 바랄 때는 오히려 가지 않는다. 미친 듯이 천천히 움직이는 것 같은 시계바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본 끝에 드디어 약속시간에 도달하고 있었다. 나는 두근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집에서 나왔다. 나온 길에 통장을 찍어보았다.
나타났던 메시지대로, 잔고는 0원이었다. 아예 모든 돈이 사라져있었다.
“하하하”
허탈함을 느꼈으나, 예리만 제대로 존재한다면 상관없었다. 아직 1시간이 남았다. 정류장까지 걸어가기도 충분했다. 계속해서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걷고 또 걸었다. 40분 후 아무도 없는 정류장에 도착했다.
시간을 확인하니 아직 12시 정각은 아니었다.
“후우...”
정류장 의자에 앉아서 가만히 그녀를 기다렸다.
제발.
제발 나타나줘 예리야.
너무나 간절했다. 제발 전의 세계와 모든 게 바뀌길 바랐다. 빌어먹을 게임아. 제발.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자세로 있으려니 시간이 지나가 버렸다. 어느덧 정각이 넘어가 버렸다. 하지만 예리는 나타나지 않았다.
차도를 하염없이 바라봐도, 평범한 차들만이 왔다 갔다 하며, 버스가 정류장 앞에 정차할 뿐이었다. 예리의 차가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찢어질 것 같은 마음으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몇 시간을 더 기다렸다. 하지만 여전히 변화는 없었다. 좌절하며 숨을 몰아쉬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때, 갑자기 누군가 등을 토닥였다.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익숙한 목소리가 내 귀에 파고들었다.
“아저씨~♡”
예리였다. 예리가 나타났다. 혀를 삐죽이면서 웃고 있었다. 그녀의 보조개가 이 순간 너무나 아름답고 반가웠다.
“예, 예리야?”
나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이전 세계에서 앙상하게 뼈만 남아있던 예리가 아니다. 게임에서 항상 만났던, 건강하게 살아 숨쉬고, 화내고, 죽일듯한 눈빛을 보내기도 하고, 가끔 애교를 부리기도 하는, 내가 사랑하는 예리였다.
“아저씨... 미안, 조금 늦어버렸어. 할아버지는 역시 욕심이 많아서, 내 조건을 침을 흘리면서 승낙해버렸어. 나, 이제 기록상으로는 죽은 사람이랄까?”
“그래?”
“후후후, 일단 이거 받아 아저씨.”
“뭔데?”
예리가 넘긴 건 한 장의 카드였다. 금색으로 빛나는, 하지만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카드.
“죽은 사람이 되기 전에, 아직 권력이 있을 때, 아저씨의 계좌를 하나 강제로 만들어서, 내 전 재산을 모두 옮겨버렸어. 유럽에 있는 안전한 계좌야 아저씨. 아저씨 명의니까 아저씨가 가지고 있어”
“뭐...? 그래도 예리의 돈인데 그럴 수는 없지...”
“상관없어. 나, 아저씨만 있으면 돼, 그리고 사실, 나도 가지고 있어. 후훗, 아저씨가 나를 버리면 바로 막아버릴 장치도 해놨으니까, 이상한 생각하면 안 돼? 그리고 정말로 날 버리는 그런 날이 오면 아저씨를 죽이고 나도 죽일 거니까... 절대로 딴 소리하지 마”
“그럴 리가 없잖아. 바보야”
“흥, 사람마음은 모르는 거랬어. 하지만, 그 외에는 마음대로 써도 돼. 아저씨께 내 꺼고, 내께 아저씨 꺼야.”
“차, 참고로 대체 재산이 얼마십니까?”
“상당수는 할아버지에게 넘기느라, 얼마 되지는 않아. 2조원 정도일까? 우리 둘이 평생 살기에는 충분하지 않을까? 히히.”
순간 허탈했다. 50억을 포기했더니 2조원이 들어왔다. 너무 해피엔딩인거 아냐? 또 함정이 있을 것 같은 기분에 찜찜함이 들었다. 망할 놈의 게임의 신이 그렇게 관대할 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 나한테 안겨 들어오는 예리의 달콤한 향기가 나를 취하게 만들었다. 긴장이 풀리며 예리만 있다면 함정이든 뭐든 아무것도 상관없다는 마음이 들고 있었다.
“아저씨. 나, 사실 경호원이 지내본 적이 없고, 항상 시녀들이 있었는데, 조금 걱정되기도 해”
“걱정 마. 나랑 같이 하나하나 배우면 되는 거 아냐?”
한참을 부둥켜안고 있던 예리와 나는 손을 맞잡고 걸어갔다. 그리고 우리는 자취방에서 격렬하게 하나가 되었다.
며칠 후 아무래도 원룸의 자취방은, 둘이서 살기 좁았기 때문에, 20평이 조금 넘는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예리는 볼을 부풀리며 더 큰집을 사자고 말했지만, 아직 집안일의 집도 모르는 예리에게 그건 무리였다. 큰 집을 관리할 능력이 안 된다고 할까?
나와 살기위해서, 이 나라에 모든 기록이 사망으로 처리된 여자다. 모든 걸 들어주고 싶지만, 돈을 쓰는 것에 있어서는 자제를 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침실에 누워서 마주보고 있었다.
한판의 섹스를 끝낸 후였다. 현실에서의 정력은 게임에서처럼 높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수많은 경험을 해서인지 그럭저럭 쓸 만한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적어도 내 품에 밀착해서 안겨있는 이 여자를 만족시킬 정도는 되지 않나 생각한다. 나 혼자의 생각이면 좀 안타깝지만.
“아저씨, 그냥 하루 종일같이 있으면 안 돼? 또 나가?”
“그래도 사람이 일은 해야지. 너무 나태해지는 건 좋지 않잖아?”
그래 나는 이 현실에서도 해결사 일을 하고 있었다. 누나와 다시 만난 것이다. 물론 예리와 함께. 예리는 처음에는 매우 탐탁지 않았으나, 이미 게임세계에서 인정한 바가 있어서 결국 강하게 거부하지는 못했다. 누나는 누나대로, 예리에게 총에 맞았다는 사실이 있어서 맺힌 게 있는지 둘이 만나면 상당히 험악한 분위기였다.
“아저씨, 그럼 오늘밤도 늦어?”
“미안, 주말에 쉴 수 있으니까...”
“치잇... 바보...그렇게 맘대로 해봐? 흥.”
예리는 삐져버린 듯 몸을 획 돌려서는 침대 구석으로 가서, 이불을 덮어써 버렸다. 달래주려다가 약속시간에 늦을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이불안의 그녀의 등을 쓸어내리고는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새벽 늦게 귀가했을 때 집안은 매우 조용했다. 침실로 들어가니 아직도 방안에 있는 듯 이불이 볼록했다.
아까부터 계속 저러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무튼 먼저 잠든 것 같았다. 나도 피곤했던 지라, 바로 침대에 누워서 골아 떨어졌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나는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시야가 밝아져서 고개를 두리번거리자, 내 몸이 쇠사슬로 침대에 묶여 있는 걸 발견했다.
그리고 보니 조금 익숙한 쇠사슬이었다. 예리가 감금당했을 때 사용된 쇠사슬과 똑같았다.
“야 서예리!”
진엔딩[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