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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품에 뛰어든 예리의 머리를 얼떨결에 쓰다듬으면서 상황을 분석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의 기억까지 [로드]해왔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설마 총에 관통당하기 직전에 보았던 그 사실과 관계가 있을까?
예리에게 향하던 총구의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분명히 아주 잠시지만 세상이 멈춰버렸던 사실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또 다른 강제력의 하나인가?
그저 놀랍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계속 되지 않았다. 갑자기 울기 시작한 예리에게 놀라야 했기 때문이다.
“흐으흑...흑...”
전에 울 때와 달리 정말로 서럽게 소리까지 내면서 우는 모습에 어안이 벙벙했다. 예리라는 여자에게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었다.
“예리야..? 우는 거야?”
하지만 내말에 대답조차 없이 그녀는 계속해서 울고 또 울었다. 그렇게 정말로 긴 시간이 흘러가고 겨우 울음을 그친 그녀가 퉁퉁 부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눈물로 범벅이 된 눈가와, 잔뜩 빨개진 코, 헝클어진 머리로, 얼굴이 엉망진창인 상태였는데도 불구하고 귀엽게 느껴졌다.
“아저씨, 용서하지 않을 거야.”
“뭐?”
아직도 히끅- 거리며 몸을 진정시키지도 못하면서 나를 잔뜩 째려보고는 그렇게 말해왔다. 하지만 말하는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용서하지 않을 거야아...흑...”
다시 눈을 비비다가 내 몸 여기저기를 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런 상처도 없다는 걸 확실하게 확인하더니 자신의 머리에도 손을 얹어 여기저기 눌러보기 시작했다.
“아저씨.. 나도 총을 맞았는데, 갑자기 세상이 하얗게 돼버렸어, 뭔가 아는 거 있어..?”
코맹맹이 소리로 나에게 질문을 했다. 하지만 그 질문 내용이 조금 의외였다. 그녀의 말대로 라면 내가 총에 맞아 쓰러진 뒤에, 예리도 총에 맞아 죽을 뻔 했다는 뜻이 된다.
그 때문에 어딘가에서 발생한 강제력으로 그녀까지 과거로 돌아온 건가?
아마도 그녀가 죽으려는 순간 강제력이 발생했다면, 그녀 할아버지의 총구가, 그녀의 머리로 향했을 때 잠시 멈춘 것 같았던 세상도, 결국 같이 과거로 돌아왔다는 사실도 모두 강제력일까? 대체 왜?
A랭크의 여자는 죽어서는 안 된다는 건가? 의문이 꼬리를 물었지만 분석은 불가능했다. 내 고민을 알 수가 없는 예리는 겨우겨우 울음을 완전히 멈추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야 이곳이 내 집이라는 걸 깨달았는지 신기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과거로 돌아온 것 같아 예리야”
일단 사실만을 분석해서 말해주었다. 나는 [로드]를 사용했지만, 그녀는 그냥 과거로 돌아온 게 사실이니 거짓말을 한 셈은 아니다.
“나,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잘 된 거지 이거? 아저씨도 살아있고..”
“뭐 그렇지..”
“그럼 아저씨와 집에서 이야기 하던 그때로 돌아온 거야?”
“응, 실제로 예리가 갈아입었던 티셔츠가 아닌, 원래 입고 있던 옷차림 인 걸 보면 어떤 시점인지 알겠지?”
내말에 그녀는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분명히 벗어던졌던 옷을 다시 있다는 게 신기한 듯 했다. 그걸 인지하고는 다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예리야? 옷은 왜 또 벗어?”
“다시 시작해야지? 여기 발신기가 있을지 모른다고 했던 건 아저씨잖아?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과거로 돌아왔다면 적에게 이득이 되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지.”
과거로 돌아왔다는 충격적인 상황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면서 옷을 벗기 시작하는 그녀. 결국 곧바로 알몸이 되어버렸다. 나는 다시 그녀의 옷을 처리하러 나가야 했다. 솔직히 여기에 발신기가 있다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지만, 혹시 모르는 나비효과는 피해야했다.
옷을 처리한 후 돌아오자 예리는 집안을 뒤져서는 전에 내가 주었던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참 능동적이기도 해라.
“그거 맘에 들었어?”
“히힛, 그렇다고 할까? 그나저나 아저씨이..?”
어울리지 않게 말을 늘어뜨리면서 예리는 현관문을 닫고 들어오는 나에게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나를 침대에 앉혀 놓더니, 갑자기 방안을 뒤지 시작했다. 그리고 현관문 쪽에서 머리카락을 하나 들더니 내 무릎위에 털썩 앉아서는 입을 열었다.
티셔츠아래 아무것도 입지 않은 그녀의 무방비한 엉덩이가 나의 성욕을 괴롭혔다.
“이 머리카락, 내꺼 아니야. 그리고 아저씨 것도 아니지. 아저씨 머리는 이렇게 길지 않잖아?”
“으응?”
이상했다. 분명히 [로드]전에 그녀가 방을 뒤지면서 뭔가를 검사하는 행동을 취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때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었다. 그랬는데 이번에는 대체 뭘 발견한 거지?
“바보 같은 표정하지 마. 사실 이거,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 아저씨 집을 검사했을 때 발견했던 거야. 모른척하고 있다가 머리카락의 DNA를 감정해서 주인을 찾아 찢어 죽인다음에 아저씨 눈앞에 던져주려고 했었어.”
“뭐어어어!?”
언제 또 혼자서 그런 무서운 상상을 했던 거냐. 이 여자. 정말 방심할 틈이 없다.
그리고 머리카락의 주인을 추측하자면 아마도 민유리의 것일 것이다. 이 집에 예리와 내 것이 아닌 머리카락이 있다면 당연히 한사람 밖에 없었다. 누나는 우리 집에 온 적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청소 좀 할걸 후회가 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어?”
“잠깐 정말로 그랬다면 머리카락 주인을 죽인다음에 난 어쩌려고 했는데?”
“흐음, 몰라. 아마 죽이지는 못했을 거라고 생각해? 실제로 아저씨 물건을 입까지 사용해서 빨아줬잖아? 그냥 여자만 죽여서 뼈저리게 깨닫게 해줄 셈이었지, 다시는 못 그러게...하지만... 걱정 마. 지금은 전혀 다르다니까..”
“응?”
“마음이 바뀐 게 아니라면 이걸 아저씨한테 보여줬겠어?”
“그래?”
예리는 쿡쿡거리면서 웃더니 손에든 머리카락을 그냥 바닥으로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손을 털어버렸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냥 봐줄게. 누구 머리카락이야?”
그러더니 다시 머리를 내 품에 기대면서 허리에 팔을 감고는 안겨 들어왔다.
“아저씨이...헤헷..”
뭐지? 나는 갑자기 천차만별로 달라진 이 여자의 행동에 식은땀이 나는 걸 느껴야 했다. 이건 현실인가? [로드]를 가장한 꿈 아니야? 이렇게 다정한 예리라니. 있을수가 있는 일인가?
“그러니까..빨리 말해. 누구 꺼야?”
일단 하는 행동을 보니 솔직하게 말하면 넘어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사실을 말해주었다.
“저건 민유리의 머리카락이야. 그날 폐가에서 데리고 돌아왔는데 그녀가 기절해버려서 잠시 집에다가 눕혀놓은 적이 있었거든, 물론 아무 일도 없었다?“
그렇다. 물론 이 집에서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 그건 사실이지. 예리는 내 고백을 듣더니 내 가슴에 기대고 있던 얼굴을 들더니 살짝 내 얼굴을 노려보았다. 다만 정말로 분노해서 노려보는 표정은 아니었다.
“또 그 여자야? 휴우...”
한숨을 쉬더니 다시 얼굴을 내게 기대면서 말했다.
“아저씨, 있잖아, 내가 사실은 그 여자 해외로 보내는 척 하면서 죽여 버렸다고 하면 나한테 화낼 거야?”
어쩐지 연락이 전혀 없더라. 예리라면 그러고도 남을 여자지. 하지만 그건 좀 너무 하잖아? 약속을 해놓고는 그렇게 뒤통수를 쳐? 나는 그녀의 몸을 때어내고는 조금 언성을 높여버렸다.
“사실이면 나, 널 사랑한다고 했던 거 다시 생각해보겠어..”
그렇게 말하고는 내 위에 앉은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 나도 침대에서 일어나 버렸다. 그러자 예리는 의외로 나를 등 뒤에서부터 껴안아 버렸다.
“왜? 그 여자한테 아무런 감정도 없다고 했잖아? 거짓말 한 거야..?”
“그런 거랑 상관없잖아. 예리가 직접 나한테 살려준다고 약속을 해놓고 지키지 않았다는 게 엄청나게 화가 날뿐이야”
“거짓말인걸, 그냥 해본 말이야. 나보다 그 여자가 이 방에 먼저 들어왔다고 생각하니까 열 받는 걸 어떻게?, 실제론 아무 짓도 안했으니까 화내지마 아저씨.”
사실일까? 살짝 미심쩍었지만, 안 한걸 했다고 거짓말을 하는 그녀여도, 한 걸 안했다고 하지는 않는 여자긴 했다.
“그, 그럼 다행이고..”
“으응...”
예리는 그렇게 대답하더니 한참을 내 등 뒤에 매달려 있다가 내 앞으로 휙 몸을 돌려서 혓바닥을 내밀었다.
“나, 아저씨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잠시나마 너무 여러 가지 후회를 한 탓에, 계속 아저씨를 껴안게 되네..후후..”
“정말이지, 그럴 때가 아니잖아, 일단 앉아봐 앞으로의 이야기나 하자”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끌고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예리도 내 옆에 앉혔는데 이 여자는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앉자마자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왔다.
“아저씨? 이거 편하다?”
내 어깨에서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면서 가만히 있지를 않는 모습에....화를 낼 수는 없었다. 왜 이렇게 귀여워 진거야? 미치겠네.
“그, 그보다 할아버지를 이번에는 어떻게 상대할 거야? 그대로 가면 똑같이 배신자가 나타나서 또 교전이 발생한다고?”
“몰라. 할아버지 따위, 지금은 생각하고 싶지 않은걸. 아저씨가 또 잡아와 주면 안 돼? 이번에는 절대로 할아버지가 총을 쏘게 두지 않을 테야”
“이미, 능력은 써버렸다고? 또 쓰기 위해서는...”
“뭐야, 또 싸게 해줘야 하는 거야? 정말 불편한 능력이네. 한심해 왠지”
“그, 그러게..하하..”
능력에 대해 이렇게 쉽게 말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내 얼빠진 대답이 한심했는지 예리는 귀엽게 볼을 부풀렸다.
“나, 차안에서 분명히 입으로 해주는 건 평생의 마지막이라고 했다?”
“그랬지..”
“그리고 섹스는 하고 싶은 기분이 아냐. 나 아저씨가 말한 사랑이라는 거 조금은 알 것 같아. 그러다 보니까 쉽게 몸을 주고 싶은 기분이 안 생기는 걸?”
“그러신가요...그럼 그냥 다른 방법을 생각해서 배신자를..”
예리는 내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웃기 시작하더니 보조개까지 보이면서 아예 폭소를 시작했다. 갑자기 왜이래?
“거.짓.말.이.야 아저씨. 나한테 말해봐. 예리에게 복종하고 복종하고, 그리고 사랑합니다. 라고 말해봐. 그러면 조금 생각이 변할지도? 히히”
말하라고 하니, 뭐 말하지뭐. [로드]전 보다도 내용이 순화되서 아무렇지도 않았다.
"예리에게 복종하고, 복종하고, 그리고 사랑해."
"됐어?"
잔뜩 저음으로 말을 깔아주자 예리는 왜인지 멍하게 나를 보더니, 가슴에 손을 대고는 가만히 있다가 다시 나에게 가만히 안겨왔다.
"아저씨... 사랑한다는 말 왠지, 묘하게 마약이라도 먹은 기분이야. 붕뜨는 느낌?..후후후. 좋아 아저씨.. 입대신에.. 허락해줄게. 내 처녀를 가져가 아저씨."
"뭐? 섹스는 사랑을 하기전에는.."
"그 이상 말하지마 아저씨. 전과는 정말 달라. 아저씨가 소중하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그, 그러니까! 아, 아무튼 나한테 이런말 까지 하게 만들었으면 책임을 져야지 아저씨? 사실..죽었다고 생각했을때 그냥 차라리 아저씨와 하나가 되었다면 덜 후회했을거라는 생각까지 했단 말이야. 그러니... 이번엔 정말로 진짜야."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또 회색빛 세상이 찾아와 버렸다. 선택지가 나타난 것이었다. 하지만 내용은 예전과 조금 달랐다. 그녀의 기억이 유지된 영향이겠지.
[선택.1 닥치고 섹스 한다.]
[선택.2 배신자를 찾는다.]
여기서 나는 해결사의 예감이라는 기술이 떠올랐다. 레벨.9에서 써봤어야 했는데 멋모르고 그냥 흘려보냈던 [스킬]말이다. 예감이라니까 아무래도 선택지에서 쓰는 게 아닐까? 물론 그녀의 대사에서 전과 다른 진심이 느껴지긴 했다. 나를 소중하다고 말해준 것이다. 그거 하나만으로 나도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돌다리는 두드리고 건너자. 그것이 예리니까.
========== 작품 후기 ==========
예리공략 진짜 코앞. 눈앞. 발앞...
레벨.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