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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돕고 나서 갇혀버리다니. 너무 의외였다. 그녀의 마지막 대사가 “잘 있어 아저씨” 였던 걸로 봐서는 이렇게 될 걸 알면서도 나를 도왔다는 거다. 그 예리가? 천하의 서예리가? 터널에서의 사건 후 조금 태도가 바뀐 건 느꼈지만 이건 예상 밖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일단 만나고 싶었다. 만나서 이야기 하고 싶었다.
갇혔다는 걸 어떤 상태를 의미할까? 그냥 외출을 금지당한 수준이 아닐까? 설마 친손녀를 감옥 같은 곳에 가둬버리거나 그 이상의 제재를 가했을까? 하지만 예리의 성격을 봤을 때, 만약 그 성격이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거라면 이야기다 달라질 수도 있다.
찾아가봐야 하나? 그렇지 않고서야 무슨 상황에 처한 건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생각해보니 문자도 보낼 수 없는 상황인 걸 봐서 외출금지 수준으로 생각하는 건 너무 낙관적인 것 같다.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머리만 아팠다. 시간은 남아돌지 않는다.
밖으로 나왔다. 집 위치는 알고 있다. 다만 접근하는 건 불가능했다. 물론 아이템을 쓴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현재 알고 있는 아이템 중에, 예리를 구출 할 수 있는 아이템은 한가지뿐이다. 그것은 바로 [스톱워치]. 다만 이건 각 레벨에서 한 번 밖에 사용할 수 없고, 1회성 아이템이라 강화조차 할 수 없어서 제한적인 아이템이다.
한 번 써버리면 다시 사용하기 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란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한다. 전에 누나가 위기에 처했을 때도 망설임 없이 사용했던 적이 있다. 지금도 그런 때였다. 어떤 처지에 놓여있는가를 확인하지 않으면 도저히 다른 공략미션이나 히든미션을 클리어 할 마음이 들지 않을 정도로 가슴속이 갈팡질팡 떨려왔다.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물론 멍청하게 그 집 앞으로 가달라는 짓은 하지 않았다.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내려야 했다. 근방 어디에서 감시를 하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원래대로 라면 군대수준의 경비력이 있는 곳에 맨몸으로 침입한다는 건 미친 짓이나 다름없지만, 예전보다는 강력한 아이템이 많이 생겼다는 사실이 마음속에 불을 지폈다. 아이템과 스킬의 존재가 조금은 남아있는 망설임을 없애주는 계기가 되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스톱워치] 타임리밋은 3시간. 여기서 조금만 더 이동해도 곧 그 집안의 감시망에 들어갈 것이다. 슬슬 사용을 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곧바로 [세이브]를 해두려고 했으나 관둬버렸다. 어차피 집에서 [세이브]를 이미 해두었다. [스톱워치]는 [로드]를 한다고 해서 사용횟수가 부활하지 않는다. 따라서 [세이브]는 무의미하다.
아이템샵으로 들어가 [스톱워치]를 구입했다. 3억원이란 돈이 빠져나갔다. 항상 느끼지만 너무 비싸다. 다만 절대적인 능력이 있으니 어쩔 수 없이 구입할 수밖에.
[스톱워치를 사용하시겠습니까?]
구입하자마자 창을 터치해서 [스톱워치]를 발동시켰다. 순간 세상이 정지했다. 그 무엇도 움직이지 않는 세상. 아이템이 만들어낸 무한의 세계. 바람에 흔들리던 나무가 그 상태로 정지한 모습은 웃음을 자아내게 만든다. 이미 [스톱워치]가 만든 세상에는 많이 들어와 봤지만 그럴 때마다 신기했다.
3시간. 나는 일단 뛰었다. 그 넓은 집안에 그녀가 어디에 갇혀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따라서 3시간이라는 시간은 절대로 여유롭지 않다. 여유는커녕 촉박하다. 아직 집안에는 들어가지도 않은 상태가 아닌가.
10분정도를 더 뛰다보니 드디어 대궐 같은 집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늠름한 기와장이 마음을 들뜨게 만들고 있었다. 정문에는 평소보다 많은 경호원들이 서있었다. 마치 전시체제인 양 그 누구도 몰래 침입시키지 않겠다는 의지가 충만해 보였다.
[스톱워치]의 또 다른 룰. 정지되어 있는 물건은 내 손이 닿는다면 사용이 가능하다. 즉 커다란 대문 또한 내 손이 닿자 삐끄덕 거리면서 문이 열렸다. 수많은 경호원이 지키고 있는지라 굳이 잠겨있지는 않아서 [만능키]를 사용할 필요는 없었다. 뜰로 들어오니 익숙한 사랑채가 보였다. 민유리를 살리겠다고 사랑채에서 별짓을 다했던 기억이 생각나 잠시 실소가 흘러나왔다. 오래 되지도 않은 일인데도 불구하고 추억으로 다가왔다.
그러다가 뺨을 한 대 세차게 후려 쳐버렸다. 상념에 잠겨있을 때가 아니다. 아무튼 예리가 사랑채에 있을 확률은 거의 없었다. 행랑채도 마찬가지다. 결국 안채와 안채 옆에 딸린 예리의 침실이 있는 건물 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이 집안은 고용인과, 경호원이 너무 많아서 맘 놓고 뛰어다니기가 힘들었다. 실수로 사람을 쳐서 부셔버리기라도 하면 바로 살인이다. 살인과 강간 같은 범죄는 불가능하다. 내가 직접적으로 죽이는 게 불가능 하다는 말이다. 살인을 저질렀다간 바로 강제력이 나타날 것이다. 살인과 강간을 막는 건 미션을 쉽게 해결하지 못하게 하는 장치인 것도 같았다. 어느 정도의 범죄는 봐주지만 미션 난이도에 영향을 미치는 강력범죄들을 저지를 수 없다는 건 이미 레벨.1과 레벨.2때 깨달은 바 있었다.
그렇다는 건 [스톱워치] 사용 중에 실수로 사람을 부셔버려서, 즉 죽게 만들면 그 순간 강제력이 발생할 수 있었다. [스톱워치]의 효과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던지 하는 강제력 말이다. 그러니 이 많은 사람을 피해서 조심히 걸을 수밖에.
나는 처음으로 예리가 사는 건물에 발을 디뎠다. 전에 이집에 머물 때는 들어오는 게 허락되지 않았던 미지의 공간이다. 건물 밖에는 상당수의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걸 봤을 때 여기에 갇혀 있지 않을까 하는 예상이 들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방이 3개가 있었다.
첫 번째 방문을 여니 침실인 듯 보였다. 철저하게 전통적인 미를 추구하는 겉의 모습과는 달리, 서양식의 침대가 놓여있었다. 시간이 정지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예리에게서 나던 달콤한 향이 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버렸다. 침대 앞에는 조그만 책상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내가 언젠가 주었던 반지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사이비 종교의 문양이 새겨진 반지 말이다. 그래도 선물이라고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어준 것 같아서 마음이 찡해져 왔다. 하지만 역시 외출을 금지당한 수준으로 방안에 가둬진 건 아니었다. 침실을 나와서 나머지 방도 뒤져보았으나 사람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 안채인가? 후다닥 움직여 안채로 들어갔다. 안채는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가장 복잡한 구조였다. 하지만 사방을 뒤지고 다닌 보람도 없이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서재에 갔을때 처음으로 예리의 할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근엄한 모습과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이 공존하는 할아버지였다. 책상에 앉아서 펜을 들고 있는 모습이 잡무중인 것 같았다. 그 옆에서 집사가 문서를 폐기하는 중이었다. 분쇄기에 문서를 넣고 있는 중이었다. 슬쩍 집사가 들고 있는 문서를 본 나는 놀라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문서에는 예리가 공격을 당한 터널에 대한 내용이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폭탄의 설치장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있었다. 나머지는 이미 분쇄 돼서, 확실할 수는 없다. 손녀딸이 테러를 당했으니 그에 대한 자료를 분석중일 수는 있다고 생각되지만, 그렇다면 왜 폐기를 해?
이 할배가 예리를 죽이려고 한 건가? 흑막이 한 짓이 아니었어? 소름이 돋으려고 하였다. 친 손녀딸을 죽여? 대체 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만약 죽이려고 한 게 사실이라면 일을 망쳐서 벌을 준 것 뿐이라며 주위의 시선을 납득시킬 수 있는 지금이 예리가 가장 위험할 때가 아닌가 싶었다. 보는 눈들을 신경 써서 테러처럼 꾸며서 죽이려고 한 게 맞는다면 말이다.
그녀가 위험하다. 안채에서 빠른 걸음을 나와서 밖을 둘러보았다. 대체 어디에 가둬 논거지. 그러다가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예리가 가끔 지하실이라는 말을 언급하곤 했던 게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박제가 어쩌고 할 때와, 전에 내가 문자를 제때에 하지 않았을 때도 지하실로 열어두라고 이야기 했던 게 떠올랐다.
그럼 그 지하실은 어디에? 다시 예리가 사는 건물로 들어가서 뒤졌으나 아무리 봐도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 또 그 부자들만의 패턴인가 싶어서 침대 밑을 찾아봤으나 그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일단 밖으로 뛰어나왔다. 예리가 자유롭게 드나드는 지하실이라면 안채가 아니고 분명히 이 건물에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건물을 한 바퀴 빙 돌았다. 그러자 경호원들이 뒤쪽에서 모여서 경비를 서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경호원들 뒤쪽에는 철문이 하나 있었다. 이쪽이 최고로 경비가 삼엄한 느낌이었다. 아무리 봐도 수상했다. 철문을 흔들어 보니 굳게 닫혀있었다. 굳게 닫힌 문 앞에서 지키고 있는 경호원들? 나는 이곳에 예리가 갇혀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만능키를 사용하시겠습니까?]
닫혀 있는 문이니, 당연히 만능키를 사용해서 열어버렸다. 괜히 부서뜨리면 나중에 수상하게 여겨질 수가 있으니, 아이템을 사용하는 게 속편하다.
문을 열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왔다. 조심스럽게 아래로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가자 문이 하나 더 있었고, 그것조차 잠겨있었다. 그 할배가, 엄청나게 독한 마음을 먹은 것은 이쯤 되자 틀림없는 것 같았다. 이정도의 경계를 해놓다니.
예리에게 권력을 빼고 신체능력만 보면 그냥 보통의 여자에다. 이런 경계는 참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아무튼 다시 [만능키]를 사용해서 문을 열었다. 가장먼저 눈에 띈 건 철로 된 침상이었다. 원형으로 된 돔 같은 느낌인데, 침상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게 없었다. 다만 예리의 모습은 찾을 수가 있었다. 놀랍게도 쇠사슬로 온몸이 구속되어 있었으며 입까지 막혀있는 상태였다. 이러니 당연히 핸드폰으로 문자나 전화를 하는 게 불가능하지.
아니 그 이전에 이지하실 자체가 핸드폰의 전파가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돔으로 된 구조에 철이 뒤덮여 있는 게 전파가 쉽게 통할 것 같지가 않았다.
여러 가지로 상상을 초월하는 대우였다. 마치 음식도 제공하지 않은 듯 식사의 흔적 같은 게 존재하지 않았다. 예리는 그저 지친얼굴로 묶여있을 뿐이었다. 굶어죽일 셈인가? 처절하게 갇혀있는 그녀를 보니 마음이 아파왔다. 일단 어떤 상태에 놓여있는지 상황을 알아보고자 침입을 했던 것이나, 방치하고 갈 수가 없었다. 이런 그녀를 어떻게 두고 간단 말인가. 그런 거 선택지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가서 [만능키]를 사용하여 쇠사슬이 묶여있는 자물쇠를 열어버렸다. 여기서 부터가 중요하다. 괜히 쇠사슬을 잘못 건드려서 예리의 몸에 상처를 주는 순간, 그녀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초긴장 상태에서 쇠사슬을 치우기 시작했다. 의사들이 수술을 할 때 이런 기분일까? 메스를 잘못 대면 쓸데없는 장기에 손상을 줄 수 있다. 나는 지금 마치 수술을 집도하는 상황에 놓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땀이 계속 흘러나와서 손이 더 미끌미끌 거렸다. 그러다가 쇠사슬을 놓쳐버렸고 그녀의 허벅지 쪽으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필사적인 움직임으로 쇠사슬을 다른 쪽 손으로 잡아냈다.
“휴우..”
잘못했으면 허벅지가 잘려나갔을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스톱워치]를 사용하는 동안에는 사람의 몸은 너무 부서지기 싶다. 여기서 그녀를 상처 입히면 진퇴양난이 되어 버린다. [스톱워치] 없이 이곳으로 잠입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아찔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 거다.
다른 여자를 찾아 공략미션을 클리어해서 레벨을 올리고 [스톱워치]를 다시 사용가능하게 만들어야 침입이 가능한데 그렇게 되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지금 상태도 위태위태해 보이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손에 난 땀을 닦아내고 다시 작업을 계속해서 간신히 그녀를 구속하는 장치들을 모두 제거했다. 그녀를 안아들고 밖으로 나와 문을 잠그고 계단을 올라왔다. 그리곤 철문을 닫아놓았다. 그냥보기에는 잠겨있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내려놓았던 예리를 다시 안아들고 조심스럽게 정문을 걸어 나왔다. 완전범죄란 이런 거지.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이상적인 범죄였다. 시간은 이제 1시간 30분 정도 남았다.
아무도 모르게 그녀를 빼오려면 집안에 있는 차를 쓰는 건 미친 짓이다. 그렇다고 걸어갈 수도 없는데? 일단 도로를 따라 뛰어서 지나가는 차가 있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나가는 차를 찾아내는 데에는 무려 1시간이라는 시간을 소비할 수밖에 없었다. 30분 동안 차를 타고 서울 시내로 돌아왔다. [스톱워치]의 시간이 간당간당 했다. 핸드폰의 시계도 멈추었다. 아무튼 시간은 가고 있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3시간이라는 시간을 잴 수 있던 건 순전히 핸드폰에 내장되어 있는 진짜 스톱워치 때문이었다. 멈춘 물건도 일단 내가 손을 대면 사용은 가능한 게 다행이었다.
아무튼 시간이 풀리기 진적이라 그 전에 차를 차도에 세워둔 후에 그녀를 안아들고 거리로 나섰다. [스톱워치]가 풀리기 전에 최대한 훔친 차로부터 멀어지는데 주력했다.
그리고 얼마나 뛰었을까 자연스럽게 [스톱워치]는 풀려버렸다.
[수면스프레이를 사용하시겠습니까?]
바로 예리에게 [수면스프레이]를 사용해서 잠재워 버렸다. 이런데서 상황을 설명하기도 힘들고 일단 집으로 데려간 후에 이야기를 나누는 게 합리적이다. 그 후 바로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서 좁은 침대위에 그녀를 눕혀두었다. 그리고 일단 [세이브]를 완료했다. 무사히 구해내었으니 세이브지점이 필요했다.
그후에 다시 [수면스프레이]를 한 번 더 사용해서 그녀를 잠에서 깨웠다. 그러자 그녀는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갑자기 순간이동을 해 버린 것 같은 상황일 텐데도 태연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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