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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이 있어.”
“응?”
나는 소파에 앉혀놓은 그녀 앞으로 가서 다짜고짜 머리에 손을 대었다. 미리 허락을 받아야 했나? 전에도 일단 허락은 구했던 것 같았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이미 질러버렸고, 다행히 그녀는 아직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전처럼 태양혈을 가리고 있는 그녀의 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기고 지압을 개시했다.
태양혈에서 정수리로 그리고 머리 뒷부분에서 목까지 이르는 대장정이었다. 연회에 나온다고 한껏 꾸미고 왔는지 평소보다 훨씬 좋은 향기가 났다. 평소의 샴푸향이 아니었다. 향수라도 뿌린 걸까?
날이 갈수록 더 꾸미고 다니는 그녀의 변화가 놀라울 뿐이다. 후드티 하나만 달랑 입고 다니던 때가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마사지를 마치고 뒤로 살짝 물러서서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조금 얼굴이 붉어 보였다.
“가, 갑자기 뭐하는 짓이야!? 나, 허락 없이 손대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어?”
“미안, 그래도 괜찮지 않았어?”
“나 또 이상해졌어.”
“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에 손을 얹더니 자기 심장고동을 느끼더니 곧 얼굴을 다시 들어서 나에게 말했다.
“일단 여기 앉아. 눈앞에서 알짱거리니까 정신없어.”
자기 옆을 가리키면서 말해서 나는 거부하지 않고 그녀 옆에 앉았다. 그러자 내 어깨에 두 손을 올리고 유혹하듯 내 귓가에 얼굴을 가져왔다. 그녀의 기다란 머리카락이 내 얼굴에 살짝 닿기 시작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너무 향기로웠다.
“그치만.. 마법 같아. 가슴이 이상해졌지만 짜증은 나지 않아. 그렇기 심했던 짜증이 안 난다? 다 부셔버리고 다 죽여 버리고 싶던 울화가 가라앉았어.”
귓속에 대고 그렇게 속삭이니 몸에 소름이 끼쳐왔다. 엄청나게 자극적이었다. 기분 좋은 소름이랄까? 가뜩이나 향기에 취할 것 같은데 입김을 뿜으면서 귀에다 대고 속삭이니 이상한 감각에 사로잡히는 느낌이었다.
“그래? 다행이네..”
“후후후.”
인상만 쓰고 있다가 전매특허인 보조개를 보이면서 웃기 시작했다. 이건 기분이 좋다는 표시라고 여러 번 확인한 적 있었다. 그러더니 나에게서 몸을 때고는 원래 위치로 돌아가 다리를 꼬고 앉더니 어깨 앞으로 넘어온 머리칼을 뒤로 넘기면서 다시 말을 꺼냈다.
“그런데 짜증은 안 나지만.. 지금은 막 열이 오르는 느낌이야. 아저씨, 이건 대체 왜 그런 걸까?”
열이 올라? 그 남들과 다른 특이한 감각을 내가 어찌 알리오. 물론 화가 치밀어서 열이 오르는 건 아닌 거 같았지만 왜 열이 오르는지는 추측조차 되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나 이제 가봐야 돼. 아무튼 짜증은 나지만 할아버지의 계획도 곧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니 망칠 수는 없잖아? 이게 돈이 되는 건 사실이니까. 그러니 끝날 때까지 기다려. 없어지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
기다리라고? 그건 좀 곤란했다. 이건 또 무슨 변명을, 아니 또 무슨 대가를 치루고 도망가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생각해보니 범인에게 다가가지도 못한 지금은 어차피 급할 것도 없었다. 아침에 누나한테 범인에 대해서 조사해달라고 할 때까지 시간은 남는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시야에 남자 한명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정장을 입은 남자였다. 이 색깔의 정장은 본 기억이 있었다. 아까 연회장에 잠시 들어갔을 때 예리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남자의 옷과 똑같은 색이었다.
그런데 연회장에서 본 뒷모습 말고, 얼굴자체가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어디서 봤더라?
“아가씨, 여기서 뭐하고 계십니까? 연설을 하실 차례가 됐습니다.”
“먼저 하고 계실래요? 저는 잠시 이 사람하고 하던 이야기를 끝내고 갈 테니까요”
“실례지만 옆에 분은 누구신지? 꼴을 보니 아가씨께서 대화를 베풀어줄 정도의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습니다만?
남자의 말에 나는 갑자기 열이 뻗쳤다. 말투도 문제였지만 비릿한 웃음을 날리며 나를 깔보는 시선은 더 재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예리에게는 뜨거운 시선을 보낸다는 것에 더욱 화가 치밀었다. 그녀에게 저런 시선을 보내는 남자가 있었다는 사실자체가 불편했다.
“민욱씨? 저는 먼저 가 계시라고 말했어요?”
“휴우, 알겠습니다. 그렇게 무섭게 쳐다보지 말아주세요. 하하하.”
남자는 혼자서 실성한 듯이 웃더니 나를 향해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는 걸 잊지 않고 2층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존댓말을 쓰는 걸로 봐서는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인 듯 보였다. 명령조의 말투가 변하는 건 아니지만, 국회의원 정도의 사람들에게는 존댓말을 쓴다는 걸 확인 바 있었다. 그렇다면 저 남자는 젊은 나이에 국회의원과 동등하거나 이상의 지위에 있다는 건가?
그런데 얼굴이 분명히 본적이 있었다. 그 비릿한 미소는 더더욱 말이다. 어디서 봤더라?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갑자기 뭔가 번뜩여서 핸드폰을 열고 저장된 사진을 보았다. 그래, 그 비릿한 미소는, 폭발하는 시체를 망원경으로 보면서 흘리던 미소와 똑같았다. 저 남자는 틀림없는 범인이었다. 쫓고 있는 연쇄살인범이 눈앞에 나타났다.
떨리는 손을 주체하지 못하고 핸드폰을 주머니로 되돌렸다. 그 모습이 이상했는지 예리가 남자에게 시선을 돌려서 나를 향해 말했다.
“아저씨, 왜 몸을 떨고 있어? 저 사람이 뭔가 했어?”
의외로 걱정을 담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녀가 이런 얼굴도 할 줄 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하지만 갑자기 나타난 범인 때문에 머리가 혼란해서 정신을 가다듬기에는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
“예리야, 저 남자는 누구야?”
걱정을 해줬더니 오히려 질문을 하는 모습에 짜증을 내려고 하는 것 같았으나 내가 워낙에 진지하게 물어서 그런지 표정을 두 번이나 바꾸더니 대답을 해줬다.
“재미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남자야. 다만 할아버지에게 지금 연회에서 떠들고 있는 계획을 제안한 남자고. 이 호텔의 주인이기도 해. 몇 가지 기업을 더 소유하긴 했지만 그래봤자 별 건 아니야. 일반적인 재벌이랄까? 하지만 머리가 좋은지, 세운 계획이 참신해서 우리에게 큰 이득을 가져다주고 있어서 어울려 주는 중이지. 할아버지가 정말로 마음에 들어 한 계획이라서..”
호텔의 주인이자 재벌? 이 호텔의 주인이라면 CCTV가 지워진 건 납득이 갔다. 그리고 재벌이라면 인맥은 어느 정도 있을 테니 경찰에 어느 정도의 압력은 넣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경찰 상부에서부터 압력을 넣어서 수사를 흐지부지 시키는 건 솔직히 흔한 일이다. 그런 압력을 이겨내고 정의가 승리한다는 영화가 여러 차례 화제를 불러일으킨 적도 있었지.
“그래?”
하지만 직접적인 권력이 아닌, 그저 인맥만으로 수많은 언론매체까지 검열할 수 있을까? 그건 단순히 경찰에 압력을 넣는 것과는 다르다. 사소한 정보까지 모두 추려서 보고받을 수 있는 광대한 네트워크와 힘이 필요하다. 인쇄소를 모두 검열할 정도의 힘. 나라를 검열할 힘이 고작 호텔정도를 소유한 재벌에게 있을 거라고 생각되진 않았다.
그리고 누군가 몽타주를 그릴정도의 목격자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여기서 이렇게 태연하게 연회나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나? 모습을 보니 그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는 눈치였는데? 너무 느긋했다. 아니면 벌써 알아보라고 지시했나? 하지만 그건 자신이 연쇄살인범이라는 걸 아랫사람에게 광고하는 꼴이니, 쉽게 내릴 수 없는 지시 일 텐데?
좀 더 복잡한 뭔가가 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재벌이라면 무서울 건 없었다. 눈앞에 있는 여자같이 정치까지 휘두르는 권력이 없는 이상 아이템에 대항할 수는 없다. 결정적인 장면만 잡으면 된다. 그 살해현장을 직접 경찰이 덮치게 만들면, 현행범이고서야 압력을 가한들 소용없을 것이다. 수많은 눈과 귀가 있으니.
“아저씨 아무튼 나 일하러 갈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
그렇게 말하면서 예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범인에 대해서 모를 때야 그녀를 기다리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한시가 급했다. 저 남자에 대한 정보를 모아야 한다.
“미안한데 오늘은 먼저 가보면 안 될까?”
“뭐??”
예리는 2층으로 걸어가려다 말고 몸을 돌려 나에게 돌아왔다. 표정이 조금 무서워졌다.
“실은 일하는 중이었는데, 좀 급해서 그래. 보내주면 안될까?”
최대한 난처한 얼굴로 그녀를 올려보았다. 아직 나는 소파에 앉아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내가 무슨 대답을 할 거 라고 생각해?”
“안 된다고 하겠지?”
“알면서 왜 묻는 거야? 나, 기분이 좋아졌었는데 왜 그걸 망치려고 해?”
“절대로 안 되겠어? 문자할게, 너 일 끝나는 대로 문자하면 바로 대답할 테니까”
“...........”
그녀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나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는 모습인 것 같았다.
“전에 핸드폰을 선물로 준거”
“응?”
“그거 마음에 들었으니까...”
그녀는 말을 하다가 갑자기 멈춰버렸다. 그리고는 크게 숨을 들이쉬더니 팔짱을 끼고 다시 말을 이었다.
“알았어. 전에도 말했지만 나 너무 착해 진거 같아. 왜 그런 하찮은 부탁을 들어주고 마는 걸까? 다른 사람이었으면 백번도 더 죽여 버렸을 거야.”
말을 마치고는 획 몸을 돌려서 쿨 하게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마지못해서 허락은 했지만 화를 나게 해 버린 걸까? 나중에 영향이 있는 거 아냐?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가라고 해놓고 딴말하지는 않겠지.
호텔로 나와서 바로 택시에 올라탔다. 이연지가 있는 커피숍으로 돌아왔다. 24시간 커피숍 안에는 밤을 새려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지 빈자리가 거의 없었다. 자리로 돌아오니 그녀는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자고 있었다. 뭐하는 거야? 대책이 없는 여자라고 생각하면서 어깨를 흔들어 깨워보았다.
“아우으!”
흔드는 어깨를 팔로 치면서 괴상한 소리를 내었다.
“이봐요. 연지씨? 일어나 봐요.”
한참을 흔들자 겨우겨우 테이블에서 머리를 때고 일어났다. 이마가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침은 줄줄 떨어지고 머리 꼴도 가관이었다.
“여긴 어디에여? 으웅?”
눈을 깜빡이면서 침을 닦는다. 정신 좀 차려라. 이여자야.
“아는 사람들한테 연락 좀 돌리고 있으라니까 자고 있던 거예요? 기자정신은 어디다 팔아먹었어요?”
“물어봤는데, 몽타주 같은 거 관심없다잖아여..그래서 자써여..”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면서 초딩 같은 말투를 연발했다.
“연지씨 지금 꼴이 말이 아니거든요? 화장실 가서 세수라도 하고 올래요?”
“눼에?”
술을 마셨냐? 혀는 왜 꼬부라져? 그래도 내말을 이해하기는 했는지 핸드백에서 손거울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다가는 화들짝 놀라는 모습이었다.
“꺄아악?”
비명을 내지른 후에 후다닥 일어나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자기 얼굴을 보더니 정신이 번쩍 들었나보다. 한참 후가 되서야 그녀는 깔끔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침자국도 없어졌고 머리도 정돈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제정신이었다. 말투도 말이다.
“죄송해요. 제가 원래 잠에서 깨어나면 저혈압이라..”
쪽팔리고 어색했는지 쭈뼛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덕분에 쓸데없는 시간이 흘러버렸기에 바로 본론을 꺼내며 말했다.
“그보다 놀라지 말아요. 범인의 정체를 알아냈어요.”
“범인을요?”
또 콘 소리를 내는 바람에 나는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댔다. 제발 주위의 이목 좀 신경 쓰라는 의미였다. 그 의미를 깨달았는지 황급히 입을 막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침에 젖어버린 수첩위에 펜을 가져다 들고 눈을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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