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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떠보았다. 아직 시야가 흐릿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픈 것이 오히려 살아있다는 실감을 주고 있었다. 기억이 소생한다. 멍청하게 등을 베이고 정신을 잃은 기억이 되살아났다. 근데 정신을 잃기 직전에 분명히 의외의 인물을 본 것 같은데?
곧 시야가 밝아졌다. 눈앞에 하얀색 천장이 들어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 의외의 인물의 모습이 보였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푹신해 보이는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고개를 꾸벅이면서 졸고 있었다. 입가에 침이 좀 묻어있는 거 같은데, 언제부터 졸았기에 저런 거지? 무방비하게 자고 있는 모습은 처음 본다.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혀있는 몸을 일으켰다. 둘러본 결과 병원의 개인실 같아 보였다. 매우 호화스러운 병실이었다.
이런데 누워있는 건 아마도 눈앞에 졸고 있는 여자덕분 이리라. 그녀의 도움을 받는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했었는데 위기에서 무슨 히어로 같이 나타나다니, 이런 감정 조금 이상하지만 조금 멋있었다. 눈앞에 침 흘리는 모습은 물론 히어로와는 거리가 멀고, 원래 성격도 히어로는커녕 악마중의 악마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아마도 다친 영향으로 뇌가 잠시 이상한 반응을 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건 그렇고 병실에 아무도 없는 걸로 봐서 경호원들은 일부러 병실 밖에서 대기시켰을 것이다. 환기를 위한 조그마한 창밖에 보이지 않아서 밖에서 지켜도 경호에 큰 문제는 없어보였다. 병실 안에 아무도 없는 게 납득은 가는 부분이었다.
고개를 꾸벅꾸벅 흔들 때마다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전에는 머리가 더 짧고 머릿결도 훨씬 엉망인 것 같았는데 자유자재로 바뀌는 게 신기했다. 영양제라도 찔러놨는지 링거가 박힌 팔 때문에 행동에 제약이 있었다. 움직이는 게 불편하다고 할까? 상황을 보면, 쓰러진 나를 구조해서 병원으로 옮긴 건 분명했다. 하지만 얼마나 쓰러져 있던 걸까?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 버리는 건 곤란하다. 깨워서 말을 걸어볼까 싶었지만 졸고 있는 것도 엄연히 자는 거라서 깨울 마음이 들지 않았다. 자는데 깨우는 걸 가장 싫어한다고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고 일어날 때까지 멍하니 있기도 뭐했다. 시간이라도 좀 알고 싶었다. 그리고 누나는 무사할까? 여러 가지 궁금증이 물밀 듯이 몰려왔다. 그러니 결국 마음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깨우는 쪽으로 말이다.
직접적으로 깨우는 게 아닌 간접적으로 깨우면 될 것이다. 그리고 시치미를 때는 거다. 그렇게 마음먹었다. 나는 살짝 일어나서 졸고 있는 예리의 새하얀 볼 살을 손가락으로 꾹 누른 후에 다시 침대로 도피했다. 하지만 반응이 없었다. 깊이 잠든 걸까?
어쩔 수 없이 한 번 더 몸을 움직여서 살짝 그녀의 볼 살에 손가락을 가져가려는데 갑자기 예리의 눈이 스르륵 열려버렸다. 순식간에 세상이 정지했다. 나는 숨이 멈춰버렸다. 내 손이 그녀의 볼 살에 거의 닿아있었고, 그녀는 눈을 깜빡이면서 그런 나를 바라봤다.
“아저씨, 지금 뭐하는 거야?”
그녀의 눈이 또 한 번 깜박였다. 아직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뭐라고 변명할까 머릿속을 굴리고 또 굴렸으나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안되겠어서 일단 아픈 척을 시작했다.
“갑자기 등이 왜 이리 아프지..?”
거짓말을 하면서 뒷걸음질 쳐 그대로 다시 침대로 돌아와 누워버렸다. 그 모습에 드디어 얼굴에 표정이 돌아왔다. 조금씩 눈썹이 치켜 올라가고 있었다. 물론 안 좋은 징조였다.
“진통제를 그렇게 주사했는데 아프다고??”
“그러게...?”
“아저씨, 진짜로 아프게 해줄까?”
무서운 말을 내뱉으며 의자에서 일어나 나에게 걸어왔다.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더니 내 팔에 꼽힌 링거바늘에 손을 가져갔다.
“자, 잠깐만? 미안, 거짓말이었어, 무, 무슨 짓을 하려고?”
“혈관을 터뜨리려볼까 싶은데 어떻게 생각해?”
“죄송합니다아..”
나는 고개를 숙이며 항복을 선언했다. 그런다고 봐줄 여자가 아니라 문제였다. 하지만 의외로 입가에 미소를 짓더니 순순히 팔에서 손을 때곤 나를 내려 봤다.
“그래서, 방금은 무슨 짓을 하려고 한 건데? 아저씨, 기회는 한 번이야? 또 거짓말 하면 이 병실에 꽤 오래 있어야 할지도 몰라?”
눈빛이 진지했다. 진심이었다. 다친 등에 식은땀이 나는 기분이었다. 아니 기분이 아니고 식은땀이 흘렀다. 자진납세 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보...볼이 귀여워서...나도 모르게...손가락을 찔러보려고 했어..제발 살려줘.”
“보, 볼을?”
내말에 손으로 뺨을 감싸 쥐더니 귀가 빨개져서 침대에서 일어나 뒷걸음질 쳤다.
“무, 무슨 짓을 하려고 한 거야? 구, 귀엽다니? 그게 아저씨가 품어도 되는 생각이라고 생각해?”
뺨을 감싸곤 나를 질책하기 시작했다. 별로 무섭진 않았다. 말은 저렇게 하는데도 살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더니 뺨에서 손을 옮겨서 가슴을 부여잡더니 얼굴을 찡그렸다.
“또 이상해지려고 해. 아저씨 용서하지 않을 거야. 꼼짝 말고 있어!!”
그러더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문을 쾅하고 닫으면서 말이다. 덕분에 귀청이 떨어질 뻔 했다. 밖에서 당황하면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걸로 봐서 역시 문밖에는 경호원들이 대거 서있던 모양이다. 그런데 갑자기 뛰어나가는 건 뭐야? 의문에 쌓여서 멍 때리는데 얼마 후에 물기가 촉촉한 얼굴로 돌아왔다. 세수라도 한 모양이었다. 천천히 걸어오더니 원래 앉아 있던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러자 종아리 쪽의 검정스타킹이 조금 찢어지고, 살짝 긁힌 듯 피가 묻어있는 모습이 보였다.
“다리 왜 그래? 다친 거야?”
이 아가씨께서 대체 뭘 하다 다친 거지? 얼마나 다급한 상황이었으면?? 경호원들은 호구인가? 그렇게 생각해서 물으니 그녀는 갑자기 다리를 내렸다. 그러더니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갑자기 스타킹을 벗기 시작했다. 살집이 올라 통통하면서 아래로 갈수록 얇아지는 잘빠진 하얀 다리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뇌쇄적으로 벗어 내린 스타킹을 한손으로 들더니, 언젠가의 차 안에서처럼 나를 향해 던져주었다.
물리의 법칙으로 허공을 날던 스타킹은 내 얼굴로 스르륵 떨어져 내렸다.
“아저씨 때문이야. 괜히 다쳐서 놀라게 하니까, 그거 가져가. 찢어져서 필요 없어. 하지만 쓰레기통에 버리긴 싫어? 그러니 이전에 준 스타킹하고 같이 보물로 모시도록 해”
이런 정체를 알 수 없는 선물은, 일단 받아야지. 첫 번째는 약간의 하얀 액체. 그리고 이번에는 그녀의 피가 묻어있는 기념품이다. 하하하. 뭐 완전 변태인데? 게다가 스타킹을 던지면서 말한 그녀의 대사는 그대로 흘러 넘길 수가 없는 것이었다.
“설마, 나 때문에 허둥대다가 긁혔다 던지 그런 거야? 네가?”
“자꾸 헛소리 하면 그 입을 꿰매라고 할 거야? 병원에 데려왔더니 그냥 스친 거라잖아? 거기에 마취약 성분이 좀 묻어있던 것 뿐 이라는데 내가 왜 허둥대야 하지?”
“그냥 그렇다는 거지..”
갑자기 발끈하기 시작해서 괜히 물어봤다고 생각하면서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역시 깊게 배인 게 아니었다. 기습을 당했을 당시도 그렇게 생각은 되었었다. 마비만 되지 않았으면 정신을 잃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 그럼 내가 정신을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거야?”
“그럴걸? 나, 시계 같은 거 없어서 자세히는 모르겠어.”
그렇게 말하더니 뭔가 재밌는 게 떠올랐는지 갑자기 보조개를 보이면서 미소를 지었다. 저 보조개가 기분 좋을 때 나오는 거긴 했는데, 그렇다고 꼭 좋은 결과를 수반하지는 않는다.
“그건 그렇고, 아저씨랑 비슷한 사람 봤다? 나, 습격당했는데 그중에 한명이었어. 막 나한테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거야. 그렇게 애원하는 거 나 별로 안 좋아해. 그래서 아저씨 앞에 대려놓고 죽여 버리려고 했는데, 도중에 너무 짜증나게 해서, 헬기에서 던져버렸어.”
이건 뭐 어떻게 반응해야 될지 모르겠다. 닮은 사람이 눈앞에서 죽는 건 확실히 별로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러니 다른데서 죽어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데 그녀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런데, 아까 아저씨가 살려달라는 건 또 딱히 아무렇지도 않았어. 이상하지?, 그건 그렇고, 대체 누구한테 당한거야? 아저씨 뭔가 능력이 있지 않았어? 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던 건데?”
“능력 없다니까 그러네.. 아무튼 기습당했어.”
사실대로 말하자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 보았다. 살짝 입술을 깨물더니 갑자기 살기를 담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떤 놈들이야?”
“응?”
“어떤 놈들이 다치게 한 거야? 아저씨는 나한테 복종한다고 했어, 물론 나, 복종한다고 아무나 받아주지 않아? 그러니 그건 아저씨가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돼. 아무튼 그러니까 날 배신하지 않는 한 아저씨는 내거라고? 내 소유물을 다치게 하는 거 용서하지 않아. 나에게 적의를 내보인 거랑 마찬가지니까.”
소유물 어쩌고 하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날 이렇게 만든 놈들에게 화를 내주는 건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가 도와주면 나와 누나를 습격한 놈들을 잡는 건 매우 쉬울 수도 있었다.
“아직 정체는 몰라.”
“정체도 모르는 놈들하고 싸우고 있었어? 아저씨답게 한심해.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골목에서 그 복면 쓴 놈들 중 한명정도는 살려둘걸 그랬네..”
손톱을 깨물더니 분한 듯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바로 조사시킬 테니까. 아저씨는 나을 때까지 얌전히 있어”
그러면서 다시 의자에서 일어나 나한테 오더니 이불을 덮어주었다. 뭐지? 뭔가 공포가 느껴졌다. 이런 애가 아니잖아? 이게 무슨 다정함이야? 대신 복수를 해준다고 부탁도 안했는데 열변을 토하지를 않나, 나을 때까지 가만히 있으라고 이불을 덮어줘? 순간 너는 누구냐, 라고 말하고 싶은 걸 간신히 삼켜버렸다.
얘가 이러는 건 처음이었다. 진짜 처음이다.
“아저씨는 빨리 다 나아서 내 전화 안 받은 거 대가를 치러야 하니까 얌전히 있도록 해”
하지만 이어진 대사는 아니나 다를까 협박이었다. 방금 들었던 모든 생각을 취소했다. 아무 저의도 없이 잘해줄 리가 없지 이 여자가. 게다가 전화를 안 받다니? 금시초문이다. 너무 억울한 죗값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나 전화를 어딘가 흘려서 못 받은 거지 일부러 못 받은 게..”
“시끄러워, 아저씨는 분명히 말했어. 저번에 우리 집에서 말했잖아? 언제든 전화하면 달려오겠다고 복종하겠다고 말했잖아? 그 말은 언제나 전화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도 포함하는 거 아냐? 그런데 2번이나 안 받았어. 나, 큰맘 먹고 전화를 2번이나 했다고?”
“예리야? 농담이지? 그때도 공격을 받아서 급박해서 전화를 놓친 거 뿐인데....?”
“내가 농담하는 거 봤어?”
잔인한 여자. 이걸 어떻게 타개하지?
“그..그러면 그 대가는 대체 뭔데?”
“싫어. 비밀이야.”
“설마 또 박제라든지 그런 소리를 하려는 건?”
“비밀이라니까?”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쩌라는 거야. 전화. 그래 어차피 잊어버린 전화. 이런 건 어떨까.
“그럼, 우리 둘만 통화할 수 있는 전화 2대 개통하자. 내가 선물할게. 그건 정말로 몸에서 안 때고 절대로 받을 테니까”
“나 핸드폰 싫다고 하지 않았어?”
“전화만 아니고 문자도 할 수 있는데? 솔직히 그게 좀 불편했어. 언제 자고 있는지도 알 수 없는데 직통 전화에 의존 하는 것도...내가 내 이름으로 개통해서 선물 할 테니까”
“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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