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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현실은 H게임-69화 (69/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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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리는 헬기 안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있었다. 심드렁한 얼굴로 턱을 괴고 헬기아래의 세상을 내려 보았다. 머리카락이 하늘하늘 휘날렸다.

“재미없어”

6일이나 한국을 떠나있었더니 스트레스가 너무나 쌓여있었다. 그 사람이 없으니 마음이 요동칠 일도 없고 편안할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만큼 지루함이 더욱 증대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지루함이 커지고 커져서 누가 심기를 잘 못 건드리기만 하면 그대로 폭발해 버릴 듯, 터지기 직전의 화산 같은 상태였다.

“아직 멀었어?”

“아가씨, 곧 서울입니다.”

공항에서 여기까지 헬기를 타고 날아온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독촉을 하자 경호원들을 땀을 뻘뻘 흘려야만 했다. 해외에 가서부터 계속 저 상태였다. 도저히 기분을 맞춰주기가 힘들어서 되도록 말을 거는 것조차 자제하고 있었다. 정말로 필요한 용건이라도 한 번 더 생각해보면서 말을 거는 걸 머뭇거리고 있는 상태였다.

“아저씨 위치는?”

“파악했습니다. 곧바로 이동하는 중입니다.”

그 말에 살짝 표정이 펴진 걸 경호원들은 알아차릴 수 없었다. 너무 찰나였기 때문이다.

“핸드폰 위치추적?”

“네 아가씨.”

그녀는 귀국하자마자 영준을 찾고 있었다. 괴롭히고 싶었다. 그 사람을 괴롭혀야 이 지루함이 가실 것 같았다. 언제나 그랬다. 6일이나 풀어줬으니 기고만장해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곧 헬기가 소유하고 있는 기업의 빌딩 옥상에 멈춰 섰다.

마중 나와 있는 차에 올라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차는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곧 아파트촌에 들어왔다.

“위치추적 결과, 여기에 있는 걸로....?”

경호원은 그렇게 말하다가 말을 멈춰버렸다. 그녀에게서 엄청난 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예리의 눈은 밖을 향해 있었다. 그녀의 눈 안에 들어온 것은 차도에 세워놓은 차 앞에서 남녀 두 명이 열정적으로 키스를 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있지,”

“아가씨?”

“경호원 소집해서, 저 여자 당장 죽여 버려.”

“네에?”

“칼을 좀 쓸 줄 아니까, 방심하지 말라고 전해. 1분 안에 해결해”

감정이 없는 눈초리로 예리는 그렇게 말했다. 뿜어 나오는 살기는 항상 옆에 붙어있는 경호원들조차 처음 보는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니 손만이 아닌 다리도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는 내 앞으로 끌고 와. 도망칠 생각도 못하게, 다리정도는 잘라버려도 좋아.”

“아가씨...?”

그녀의 눈에는 어떤 생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

.

.

“아가씨?”

“응?”

호텔의 VIP룸의 침대에 누워있던 그녀는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평소에 애용하는 후드티와 산발로 뻗친 머리. 최근에 한국에 있을 때는 하지 않았던 복장이었다. 남자사냥을 하려고 번화가를 돌아다니던 시절에 했던 꾀죄죄한 모습이었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았던 그 모습 말이다.

“갑자기 멍하게 계셔서 불러봤습니다. 괜찮으십니까?”

“그랬어? 뭔가 잠시 이상한 꿈을 꾼 것 같은 느낌?”

무슨 꿈을 꾼 건지도 기억이 안 나지만 불쾌했다는 실감으 남아있어서 기분이 좋지가 않았다. 게다가 잠에든 기억도 없었다. 침대에 누워서 뒹굴 거리다가 갑자기 악몽을 본 기분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기분이 더 더러웠다.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벌써 5일째인데? 갑자기 불러서 일을 떠맡겨 놓고 왜 만나주지도 않는 건데?”

“그게...”

“보나마나 또, 서양년들과 하렘을 즐기고 있는 거지? 정말 늙어서도 그러고 싶을까? 남자란 동물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 안 그래?”

“그, 그렇지는..”

경호원은 진땀을 흘리면서 말을 고르고 있었다. 이런데 괜히 잘못 껴서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는 주인어른이든 아가씨든, 어느 쪽에게서 화를 당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나, 이제 못 참아. 돌아갈 거야. 프랑스가 뭐가 그리 좋다고 눌러앉아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하지만 그랬다가, 불호령이..”

“어머? 당신은 할아버지 경호원이야, 내 경호원이야?”

“아가씨를 모시고 있습니다..”

“나,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야? 할아버지가 정녕 그렇게 나온다면 적으로 돌릴 수도 있어?”

엄청난 말을 내뱉은 그녀에게 경호원은 침을 꼴깍 삼키면서 아무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이유는 역시나 아까 와 동일했다.

“요즘 들어 이쪽 정치가들과 관계를 맺는 건 나지 할아버지가 아니라고? 그렇게 모든 걸 떠넘기다 큰 코 좀 다쳐보시라지? 후후”

침대에서 일어나더니 호텔밖에 펼쳐진 경치를 바라봤다. 한국과는 전혀 다른 프랑스의 경치에 그녀는 아무런 감흥도 일어나지 않았다.

“당장 귀국 준비해”

“알겠습니다.”

그 기세에 눌려서 결국 경호원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고 호텔 밖으로 나갔다. 뒤에 서있는 다른 경호원들은 그 모습을 보며 불쌍하다는 생각과, 그 압박을 당하는 게 자신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명령을 내린 후에 욕실로 들어갔다. 한바탕 샤워를 마친 후에 알몸으로 방으로 돌아왔다. 경호원들이 그 모습을 보고 있었지만,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는지 오히려 당당했다. 경호원들을 남자로 취급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어릴 때부터 경호원들을 그저 전봇대라고 여기고 있었다.

물방울이 흘러내리는 머리를 닦았다. 머리를 말리려고 화장대 앞에 앉자, 고용인들이 달려와서 머리를 말려주기 시작했다. 어깨 아래로 내려오는 기다란 머릿결이 눈부시게 빛났다. 머릿결이 너무 좋아서 후드티를 입고 거리를 방황할 때는 목까지 내려오는 칙칙한 가발을 쓰고 다녔다. 그래야 더 불쌍하고 꾀죄죄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연히 지금은 그 가발을 쓰지 않았다. 그러니 기다란 생머리가 그녀의 미모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는 건 당연했다.

“옷 좀 줄래? 예쁜 걸로”

예리의 말에 고용인들은 서로 쳐다보았다. 이곳에 와서, 파티에 참석할 때 말고는 그냥 후드티에 츄리닝이 편하다며 한 번도 옷을 갈아입지 않더니, 갑자기 씻기까지 하더니 다른 옷까지 가져오라는 명령이 신기해서였다. 최근에 이런 일이 부쩍 잦아졌다. 그전에는 고용인들이 그녀를 꾸미려고만 해도 귀찮다면서 거부했던 그녀였다. 특히나 그녀들은 다른 고용인들과 달리 몇 안 되는 그녀의 전속이었다. 1살 때부터 같이 생활해온 믿을 수 있는 아이들인 것이다. 그런 그녀들이 신기해할 정도니 그 전에는 얼마나 꾸미지 않고 대충 살았는지는 알만한 것이었다.

코디해주는 옷을 받아 입고는 다시 침대에 다리를 꼬고 걸터앉았다. 검정스타킹을 신은 다리가 매우 매혹적이었지만 이 방안에서 그 매혹적인 다리를 느긋하게 감상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가씨!!”

귀국준비를 빠르게 종료하라고 압박하려는데 갑자기 경호원이 급하게 문을 열고 달려왔다. 그녀는 그걸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예의라고는 어디 간 걸까. 자신이 요즘 너무 풀어주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저씨를 좀 풀어줬더니, 경호원들까지 덩달아 풀어 진 기분이다.

“별거 아닌 걸로 그렇게 난리를 친 거면, 나, 화날지도 몰라?”

“수상한 놈을 잡았습니다. 흉기까지 소지하고 있었고, 한국인입니다. 아가씨를 노린 듯한데..”

“나를? 암살일까?”

예리는 조금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이곳의 지루하기만 한 일상에 더해서 평소와 다른 지루함까지 덮쳐 와서 버티기가 힘들었는데 조금은 그걸 달랠 수 있지 않을 까 하는 기대감이 생겨버렸다.

“후후후. 당장 대려와”

“하지만 위험합니다. 바로 처리를..”

“데려오라고 했어?”

“아,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경호원은 밖으로 나가더니, 4명이나 되는 남자들을 끌고 들어왔다.

“이국땅에서까지 나를 노리려고 하더니, 어디서 보낸 분들일까?”

침대에서 일어나서, 온몸이 포박당한 남자들을 둘러보았다. 입까지 묶여서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좀 괴롭히면서 놀려던 생각과는 다르게 한 사람에게 시선을 뺏겨 버렸다. 왠지 아저씨와 닮은 느낌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처리해버리고, 맨 왼쪽에 있는 남자만 놔둬봐”

그녀의 말에 3명의 남자가 몸부림을 쳤으나 아무 소용도 없이 밖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남은 남자에게 가까이 접근했다. 그리곤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당신, 살고 싶어?”

그러자 남자는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줏대도 없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신고 있던 구두를 벗더니 남자에게 가져갔다. 그리고 손짓을 했다. 입을 풀라는 소리였다. 경호원이 머뭇거리다가, 그녀가 노려보고 나서야 남자의 입을 풀어주었다.

“이거 핥아봐. 맛있게 핥으면 살려주는 걸 조금은 생각해 볼 수도 있어”

남자는 머뭇거렸다. 자존심은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때 호텔유리창으로 방금까지 같이 있던 동료가 떨어져 내리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남자는 그녀가 들고 있는 구두를 마구 핥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그녀는 갑자기 구두를 던져버렸다.

“재미없어. 왜 비슷하다고 생각한 걸까? 못난 사람이네...”

화가 난 표정으로 다시 침대로 가 걸터앉았다. 바로 죽여 버리고 싶은 욕구까지 생겨 올랐으나, 한편으로는 아저씨한테 보여주고 싶었다. 물론 내면은 전혀 틀려서 실망감이 컸지만, 겉은 비슷하니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자신과 분위가 비슷한 사람이 죽는 모습을 말이다. 그럼 더 복종하지 않을까?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모습을 떠올리니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사..살려주세요. 제발....전 그냥 아까 그 사람들이 돈을 준데서 시키는 대로...뭐든 말해 드릴 테니 제발 살려주세요..”

입이 자유로워지자 남자는 애원을 하며 울부짖었다. 하지만 예리는 그럴수록 살의만 쏟을 뿐이었다.

“저 남자의 입, 다시 막아버려”

그걸 끝으로 남자는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살아생전에는 말이다.

“하지만 한국에 데려갈 거야. 아직 죽이지는 마?”

그렇게 말하고는 호텔방을 나섰다. 슬슬 귀국준비가 끝나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너무 지루해서 한시도 더 이 나라에 있기가 싫었다.

시간은 흘러서 한국으로 날아와 공항을 지나 서울로 돌아오는 헬기 안에서 그 남자는 의자아래 묶여있었다.

“꼼짝하지 마. 내 다리를 편안하게 만들어주면 살려 줄 수도 있어?”

그렇게 말하면서 남자의 등에 다리를 올렸다. 생각보다 편하지는 않았다. 물론 당연히 살려줄 생각 따위는 벼룩의 간만큼도 없었다. 그러면서 예리는 경호원에게 명령했다.

“아저씨한테 전화 좀 해봐”

“네?”

“당신의 핸드폰으로 해보라고, 멍청한 표정을 짓고 그래? 당연히 집이 아니니, 직통전화가 없는 건 알고 있다고?”

“네, 네”

남자는 전화를 꺼내들고서 주소록에 있는 번호를 눌렀다. 이미 영준의 번호는 경호원 사이에 공유되어 있었다. 영준이 그녀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말이다. 경호원은 통화버튼을 누르고 귀에다 핸드폰을 가져갔다. 하지만 그녀는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서 명령을 철회했다. 연락하지 않고 갑자기 등장해서 놀라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다. 됐어. 끊어”

오락가락 하는 그녀의 마음을 알 수가 없는 경호원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했지만, 자신들에게 어차피 생각 같은 건 허용되지도 않는다. 바로 기계처럼 핸드폰을 끊어버렸다. 상황을 보고 있던 남자는 뭔가 분하고 자존심이 상했는지 결국 최후의 발악을 시작했다. 갑자기 몸을 뒹굴면서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예리는 황당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변이 발생했다. 남자의 배가 부풀어 오르더니, 곧바로 터져버린 것이다. 남자는 암살에 이용당한 그저 부랑자에 불과했다. 그의 뱃속에는 이미 소형폭탄이 들어가 있었다. 배를 열어서 폭탄을 장착하고 꿰매둔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호텔방에서 터지지 않다가 바닥에 배를 굴리면서 충격을 주는 바람에 이제 와서 터져버렸다. 차라리 호텔에서 터졌으면 그녀에게 피해가 가는 일은 거의 없었을 것이나, 작은 폭발은 헬기의 중요부분을 손상시켜 버렸고, 그대로 헬기는 추락하기 시작했다.

.

.

.

“아가씨?”

“응?”

경호원이 의아스런 표정으로 예리를 불렀다.

“갑자기 멍하니 눈에 초점이 없으셔서, 괜찮으십니까?”

“응? 괜찮아.”

그러면서 잡아온 남자의 등에 다리를 올렸다.

“꼼짝하지 마. 내 다리를 편안하게 만들어주면 살려 줄 수도 있어?”

그러고 있는데 갑자기 남자가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갑자기 짜증이 솟구쳤다. 그러다가 그녀의 발을 쳐버린 것이었다. 아저씨 앞에 데려 갈 때까지는 살려두려고 했는데 이건 성질을 테스트 하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분노가 치솟았다.

“헬기 문 열어”

“네?”

“버려버려. 더는 필요 없어”

.

.

.

.

“아가씨?”

“응?”

경호원이 의아스런 표정으로 예리를 불렀다.

“갑자기 멍하니 눈에 초점이 없으셔서, 괜찮으십니까?”

“응? 괜찮아.”

그러면서 잡아온 남자의 등에 다리를 올렸다.

“꼼짝하지 마. 내 다리를 편안하게 만들어주면 살려 줄 수도 있어?”

남자는 가만히 있었다. 살려준다는데 일말의 희망을 갖고 싶었다. 자존심이 상하고 발버둥을 쳐서라도 이 오만한 여자의 콧대를 눌러주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지만, 왠지 그런 행동을 했다가 끝이 안 좋을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시간이 멈춰버렸다. 물론 헬기 안에 있는 그 어떤 사람도 시간이 멈췄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곧 3분이라는 시간이 돌려져 버렸다.

헬기는 서울을 향해 거의 도착했다. 그녀 아래에 깔려있던 남자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심기를 건드려서 헬기 밖으로 던져졌기 때문이었다.

“아저씨 위치는 찾아냈어?”

“네.”

“그래?”

그녀는 빌딩 옥상에 착륙한 헬기에서 내리면서 대답했다. 바로 1층으로 내려와 차에 올라탔다. 가까이에 아저씨가 있다는 생각이 들자 왠지 마음이 들뜨는 기분이었다. 또 심장부근이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나고 싶었다. 괴롭히고 싶었다. 아무튼 마주하고 말을 주고받고 싶었다.

차는 미끄러져 들어와 아파트촌으로 도착했다. 경호원들은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가만히 뒷좌석에 앉아서 소식을 기다렸다.

“아가씨, 핸드폰 위치는 이 근처라고 나오는데, 그분께서는 보이지가 않습니다.”

경호원의 말에 예리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들, 너무 한심한 거 아냐?”

“죄, 죄송합니다!!”

그녀는 화가 났다. 사람하나 제대로 못 찾는 게 무슨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SP인가 싶었다. 더 기다리기가 너무나 지겹고 지겹고 지루했다.

“됐어. 됐으니까, 전화 줘. 갑자기 나타나서 놀래 켜주려고 했는데 할 수 없지. 아저씨가 직접 달려오게 만들래”

경호원은 황급히 자신의 핸드폰을 그녀에게 넘겼다. 예리는 주소록이 아닌,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번호를 눌렀다. 저장되어 있는 번호지만 무시하고는 번호를 모두 입력하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친구하나 없는 그녀에게, 핸드폰 자체를 가질 생각도 하지 않는 그녀에게 핸드폰 조작은 전혀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

“띠리리리리리”

신호가 계속 울렸다. 하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갑자기 울컥하고 분노가 쏟아졌다. 오랜 기다림과 지루함을 견디고 직접 전화를 해줬더니 안 받는 건 뭔가 싶었다. 그녀는 깨닫지 못했지만 6일내내 간절하게 보고 싶었던 사람이 전화를 받지 않자 인내의 끈이 끊어져 버린 것이다.

“띠리리리리리”

하지만 용케도 참으면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며 중얼거리곤,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것만으로도 그녀에게 영준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 수 있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기회를 주다니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다.

물론 영준에게 있어서는 좀 억울한 상황이었다. 항상 전화하는 비통지번호도 아니었고, 빌린 휴대폰의 번호였으며, 심지어 영준은 지금 핸드폰을 어딘가 흘린 상황이었다.

그녀는 물론 그런 사실 따위 알바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전화를 하는데 받지 않는다는 사실이 점점 큰 분노로 바뀌고 있었다.

그녀는 결국 전화를 내던져 버렸다. 큰맘 먹고 장만한 최신기종이 창밖으로 날아가서 지나가는 차의 바퀴에 산산조각이 나버리자 경호원은 마음속으로 울부짖었다. 물로 표현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부순 것에 한해서는 나중에 배가 되는 돈으로 보상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게 이 집안의 법칙이었다.

“아저씨의 핸드폰 전파가 이 근처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당장 경호원들을 풀어. 2분안 에 찾아내. 나, 더 이상은 기다릴 생각 없어.”

그렇게 말하고 창문을 올려버렸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거스르지 말라고 그렇게나 말했는데, 절대로 복종한다고 해서 부탁하는 것도 다 들어주었다. 꼴 보기도 싫은 여자에게 경호원까지 붙여주고 이후까지 책임져 주었는데 그랬는데..그랬는데..전화를 무시해?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감정이 뒤집어지는 기분이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뒤졌는지 경호원들이 뛰어왔다. 그걸 보고 그녀는 더 참지 못하고 차에서 내렸다.

“찾았어? 그게 아니라면 다들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찾았습니다. 어디론가 뛰어가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그녀는 다시 차에 올라탔다. 차는 곧바로 출발해서 도로를 질주했다. 물론 차도가 아니었다. 고급세단이 엄청나게 긁히고 있었지만 아무도 상관하는 사람이 없었다. 좁은 골목길에 들어서서 차가 멈췄고 곧바로 차에서 내렸다. 그 앞에 경호원들이 멈춰있었다.

“저 골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다만, 골목 안으로 복면을 쓴 사람들이 들어가던데, 어떻게 할까요?”

“복면??”

예리는 얼굴을 찡그렸다. 갑자기 무슨 복면? 직접 상항을 보겠다고 마음먹고 골목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5~6명의 남자들이 흉기를 들고 골목을 포위하고 있는 장면이 보였다. 그들에게 가려서 아저씨는 보이지도 않았다.

“저 사람들 처리해”

그 말과 함께, 소음기가 달린 권총을 꺼낸 경호원들이 흉기를 든 복면인에게 총격을 가했다. 한발에 한명, 순식간에 남자들은 정리가 되 버렸다.

남자들이 모두 쓰러지자 드디어 예리의 눈에 영준이 들어왔다. 그 사람은 이상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봤다. 하지만 쉽게 용서해줄 생각 따위 없었다. 잔뜩 눈썹을 치켜뜨고 그에게 다가갔다.

“전화하면 바로바로 달려오겠다고 말한 거 아저씨 아니야? 그런데 전화를 안 받고 무시하다니, 이게 어디가 복종인걸까?”

“...미안...”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영준은 짧은 한마디만을 남기고는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가서야 그의 등 뒤로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순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치솟던 분노는 이미 사라져 버렸다. 마음이 아리기 시작했다.

“아, 아저씨?”

그녀는 매우 당황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언제나 냉정하고 감정을 거의 내비치지 않는 그녀를 보고 지내온 경호원들로써는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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