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104 --------------
서예리는 민유리에게 떠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리곤 이야기는 끝났다는 듯이 몸을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아직 한 가지 부탁이 더 남아있었다. 이왕 각오를 한 김에 끝장을 보기로 하고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갑작스런 내 난입에 앞으로 발걸음을 내딛던 서예리는 내 품안에 머리를 박아버렸다.
“아저씨....”
조용한 음성으로 나를 불렀다. 길을 막아서 화났나? 자세히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니 다행히 화를 내지는 않았다. 다만 갑자기 얼굴이 달아오른 것 같더니 혼란스런 몸짓을 보였다. 이상한 행동을 하다가 정신이 들었는지 나를 밀쳐내 버렸다.
“가, 가까이 오지 마 아저씨!! 왜 앞을 막고 난리야?...노, 놀랬잖아.”
답지 않게 혼자 중얼거리더니 나를 째려보았다.
“아니, 할 말이 있어서..”
“아, 알았으니까 떨어져 아저씨, 나, 이렇게 가까이와도 된다고 허락한 적 없잖아?”
그 말에 나는 뒷걸음질을 쳐서 원래 위치로 냅다 돌아왔다. 사이비 종교 때에는 껴안아도 아무렇지도 않더니 저건 또 뭔 태도인가 의문이 들었다. 우리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던 민유리는 그저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뭔가 한심하다는 표정이었다.
“아무튼, 이왕 선심 쓰는 거, 내일 출국도 아무도 모르게 할 수 있게 해줄 수 있을까? 그 흑막이 몰랐으면 좋겠는데. 아마 집안에 또 스파이가 있는 거 같긴 하지만, 고용인으로 잠입 했을 테니, 경호원들로만 일을 진행해줘. 경호원은 아무나 잠입할 수 없지?”
전에 경호원은 거의 어릴 때부터 기르고 교육시키거나 아무튼 엄격한 조건이 있다고 들은 것 같았다. 아마도 스파이는 주로 고용인 쪽에서 잠입시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고용인에 스파이가? 아저씨 그 말 무슨 소리야?, 뭐 그일 이후 고용인은 어차피 주기적으로 교체하기 시작했고, 중요한 일을 알아낼 수 없도록 안뜰 이상은 고용인들은 거의 출입을 못하긴 하지. 아저씨 말대로 경호원은 고용인하고는 비교도 할 수는 없는 심사를 거쳐. 그리고 내 직속 경호원은 어디서 뽑아오지 않아. 어릴 때부터 교육시키고 몇 차례의 검증을 거쳐야 가능한 거지. 그만큼 엄청난 보수를 주고 있기도 하고”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고용인들은 모르게 해서 민유리를 좀 안전하게, 그리고 비밀리에 출국시켜 줬으면 좋겠어.”
“아저씨, 정말로 각오하고 있는 거 맞아? 이 대가는 정말로 클 수도 있어?”
“좀 믿어줘. 이유가 있다고. 전에 네가 생각했던 사랑은 아니라고 증명했잖아? 사랑하는데 이런 식으로 떠나보낼 것 같아?”
“좋아, 하지만 그럼 아저씨도 모르게 진행시킬 거야. 내일 공항으로 나올 생각 같은거 하지 마. 내 쪽에서 알아서 출국 시킬 테니까, 이 후로 저 여자에 대한 이야기 끝이야. 다시는 꺼내지마. 알겠어?”
“그래... 알았어. 거래완료!!”
나는 손뼉을 치면서 몸을 돌려 민유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민유리는 살짝 한숨을 쉬더니, 이리로 오라면서 안내를 시작한 경호원에게 이끌려서 사라져 버렸다. 일단 그녀의 안전은 확보했다. 그런데 다만 문제가 있었다. 데이트 어떻게 하지?
경호원을 통해 그대로 보고 될 텐데? 몰래 접근해서 [수면스프레이]로 잠재워 버릴까? 서예리를 경호하는 것도 아닌데 수십 명의 경호원을 따라다닐 리도 없고, 그게 타당해 보였다.
“아저씨, 거래완료라니? 나랑 지금 거래를 했다는 거야? 아저씨가?”
이런 말을 할 때 평소라면 내 앞에 접근해서 가슴을 찌른다던지, 턱을 잡든다 던지 뭔가 도발적인 행동을 했었는데 오늘은 멀찍이 떨어져서 말만 중얼거릴 뿐이었다. 아침에 식당에서도 그렇고 왜 이리 사람을 벌레취급이야? 가까이 가는 걸 못하게 하네.
분명히 호감도는 높은 걸로 판단했는데, 언제 또 급 하락했나? 확인할 수가 없으니 답답하기만 하고 뭐가 뭔지 모르겠다. 계속 날 멀리하려는 거 같으니 또 뭔가 서운한 감정이 들면서 착잡했다. 왜? 서예리한테 왜 서운한 감정을.. 그건 좀..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 점심 같이 먹을까? 그거 먹고 나도 가봐야 할 것 같은데..?”
내말에 서예리는 갑자기 그 자리에서 쿡쿡쿡 웃기 시작했다. 뭔가 야릇한 미소였다.
“올 때는 마음대로 왔을지 몰라도, 누가 보내준데? 무슨 착각을 하고 계시는 걸까?”
“그렇지만 나도 할 일이 있는데..?”
“한번 들어온 이상 내 맘인걸? 아직 할아버지도 돌아오려면 멀었고, 사랑채에 가둬둘 생각인데?”
“그, 그러지마. 필요할 때 부르면 바로 달려오잖아? 전화한통에 말이지?”
“나, 그런 거 보단, 바로 가까이 두고 괴롭히는 게 좋은걸?”
멀찍이 떨어져서 할 말이야 그게? 아놔. 이걸 또 어찌해야 싶어서 고민하고 있는데 그녀는 다시 또 쿡쿡쿡 혼자서 웃어버렸다.
“정 가겠다면, 대가를 내놔. 전에는 먼저 보내주는 대가로 그 같잖은 반지를 받아줬는데, 이번엔 어떤 걸로 빠져나갈지 보겠어.”
“뭐? 그...준비한 게 없는데.. 다음에, 다음에 만날 때 주면 안 될까?”
아마도 뭔가 선물을 내놓으라는 것 같았다. 다만 모든 걸 가질 수 있는 여자가 마음에 들어 할 선물이 뭔지는 한참 고민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갇혀서 괴롭힘 당하는 거보단 낫잖아. 하지만 내 이런 생각을 들여 보기라도 한 듯 서예리는 단숨에 허들을 높이기 시작했다.
“다음에? 나, 그럼 기대해도 좋아? 만약 내 기대를 저버리면... 그때는 사랑채가 아니야?”
“뭐!? 그, 그럼 어딘데?”
“내 건물의 지하야. 거기에 박제실을 하나 만들까 생각중이야. 후후. 자꾸 가까이 가면 심장이 이상해지기도 하고, 그냥 확 박제로 만들어 버려서..”
“그만..그만, 알았어. 살려줘 제발. 사사건건 죽이지 못해서 안달이야? 함정 안파고, 복종하면 안 죽인다며?”
“지금 멋대로 가겠다는 행동의 어디에 복종이나 경의가 묻어있는 걸까?”
“그리고 죽이겠다고는 안했어? 산채로 박제로 만들 거야?”
다른 여자면 농담으로 들어줄 수도 있었다. 아니, 뭐 좀 심한 농담이지만 넘어가 줄 수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여자는 진담이다. 진짜로 그렇게 할 여자라고. 나는 화가 나서 그녀가 지금 매우 꺼려하는 행동을 해버렸다.
그녀 코앞까지 달려가서 그녀의 앞에 당당히 선 것이었다.
“오, 오지 말라니까?”
이번엔 스스로 뒷걸음질을 치는 그녀의 팔을 잡았다. 못 떨어지게 말이다. 경호원들이 접근하나 싶었는데 딱히 내 행동에 일일이 반응하지 말라고 저번에 교육을 받았는지 그냥 지켜보고 있었다.
“예리야, 충분히 복종 할 테니까, 제발 그 무서운 소리 좀 그만해주면 안될까?”
“이, 이거 놔. 이, 이름 부르지 마. 지금은 부르지 마. 나, 이상해. 또 이상해진단 말이야..!!”
이상했다. 그녀가 감정을 이렇게나 드러내는 건 정말로 처음보는 장면이었다. 그렇게 내 가까이 있는 게 싫은 걸까? 그러면서 못 가게하고, 정말 무슨 생각인지 누가 정답 좀 알려줬으면 좋겠는 기분이었다.
“놔줄 테니까, 말 들어줄 거야?”
“지금 이게 어디가 복종하는 건데? 협박이잖아? 아저씨, 미친 거야?”
“그건 그렇지만, 박제 당하는 거 보다는 낫잖아..”
“.........알았어. 팔 놔. 가버려. 보내 줄 테니까. 대신 부르면 당장 오도록 해. 늦으면 혼날 줄 알아”
“네에”
“빨리 팔 놔, 아저씨...나 지금 또 이상해 졌단 말이야”
“뭐가 이상해 졌는데?”
일단 허락을 받았기에 팔을 놔주면서 물었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곤 돌아보지도 않고 다시 안뜰 쪽으로 뛰더니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뭐 저리 뛰는 거야? 그녀 말대로 이상했다. 하는 행동이 말이다.
그 후에 딱히 날 만나려고 하지 않아서 대궐 같은 집에서 드디어 탈출할 수 있었다. 지금 간다고 경호원을 통해서 전달했으나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는 말만 돌아왔다. 일단 허락은 받았기에 딱히 제지를 받지 않고 차까지 얻어 타곤 항상 만나는 정류장까지 편하게 올 수 있었다.
차를 보내고 커피숍을 향해 걸었다. 아니지 그러다가 말고 일단 숨었다. 분명히 경호원과 함께 나타날 것이다. 그때 핸드폰의 진동이 울려서 확인하니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내용은 이랬다.
[경호원들 때문에 어떡하죠? 일단 집주인과 만나서 계약을 종료하고, 은행에 들린 후 볼일을 다 봤다고 말했더니 강제로 호텔로 끌고 와서 문밖에서 지키고 있어요. OO호텔 OO호실인데, 서예리가 시켰는지 그냥 내일까지 쉬시라면서 안 내보내주네요. 커피숍 앞까지는 못갈 것 같아요.]
서예리...감금이 특기냐? 아예 가둬버린 건가? 무슨 꿍꿍이야 대체. 이렇게 되면 쫓아가서 경호원들을 재우는 수밖에 없지.
[좀만 기다려, 다시 연락할게]
간단하게 답장을 한 후에 택시를 타고 민유리가 문자로 말해준 호텔로 이동했다. 클리어를 코 앞에 두고 갇히다니?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니 오히려 이걸 핑계로, 데이트는 못해도 섹스는 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방으로 잠입하는 건 매우 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문제는 민유리를 설득하는 것뿐이다. 어떻게 섹스를 할 마음이 들게 한담?
우선 근처에서 얼굴을 가릴 수 있는 복면을 준비했다. 그리고는 실패할 수도 있으니 세이브를 완료했다.
복면 쓰고 호텔로 들어가면 수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서 일단 엘리베이터에 오른 후 복면을 착용했다. 어차피 게임의 보호를 받는 나는 CCTV같은데 노출이 되지 않는 건 옜날 부터 확인했다.
그 후 민유리가 알려준 층수에 내렸다. 경호원 2명이 문밖에 서있었다. 한명은 어디서 가져왔는지 의자를 가져와 문을 막고 앉아서 잡지를 읽고 있었다. 이 상태로 민유리가 자력으로 여기서 빠져나오는 건 당연히 불가능했다.
목숨을 지켜주기 위해 경호원 좀 붙여달라고 했더니, 오히려 지금은 또 혹이 되 버렸다.
[무형검을 사용하시겠습니까?]
터치.
[스킬]
[무형의 검날]
터치.
[무형의 검날을 사용하시겠습니까?]
터치.
바로 3명의 경호원을 적으로 인식했다. 그리곤 스킬이 바로 발동되었다. 이번 레벨에서는 아직 스킬 잔여횟수가 남아있는 게 다행이었다. 곧바로 3명의 경호원은 기절해 버렸다. 그런데 그 소리를 듣고 계단 쪽에서 한명의 경호원이 달려 나왔다. 담배라도 피고 있던 걸까? 낭패였다.
“무슨 일이야?”
파견된 인원은 총 4명이었나 보다. 쓰러진 동료들에게 다가가다가 복면을 쓴 나를 발견하고 경호원은 품에서 총을 꺼내려 하였다. 나는 무작정 달려들었다.
해결책을 고민하다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레벨이 올라서 스킬사용횟수가 2회에서, 3회로 늘어났던 기억이 났다. 백반 집에서 민유리를 대리고 도망치는 선택지를 선택했을 때 한번 [무형의 검날]을 사용했다. 그리고는 쓰지 않았다. 로드를 해도 스킬 횟수는 당연히 회복되지 않지만, 그래도 2번이나 남아있었다. 물론 방금 한번을 사용했다.
다행히 한번이 남은 것이다.
[스킬]
[무형의 검날]
터치.
[무형의 검날을 사용하시겠습니까?]
터치했다.
곧바로 남은 남자도 기절했다. 저 총을 꺼내드는 장면만 어떻게 할 수 있었으면 스킬횟수를 보존하고, [수면스프레이]로 잠재울 수 있었는데 조금 아쉬웠다. 확실하게 하려고 계단으로 가봤으나 더 이상의 경호원은 없는 듯 했다. 나는 복면을 벗어던지고 데스크로 내려갔다.
아이템을 사용 중이니 CCTV야 당연히 무효화 되었을 터, 나는 같은 층수의 방을 빌려서 경호원들을 다 그곳으로 밀어 넣었다. 나중에 민유리하고 헤어지기 전에 깨워버리면 되겠지.
그 후에 방문을 잠그고 민유리가 있는 방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네..”
민유리가 대답하면서 문을 열었다. 당연히 경호원들 인줄 알았는지 내가 서있자 조금 놀란 눈치였다.
“오빠? 어떻게?”
나는 그녀의 입술을 막으면서 그대로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리고 긴박한 표정을 지으면서 연기를 했다.
“잠시 따돌리고 들어왔어. 금방 다시 지키러 올걸? 그러니 문은 그냥 잠가나”
살짝 구라를 치면서 호텔로 들어왔다. 그래도 배려를 해준 건지, 상당히 넓은 스위트룸이었다.
========== 작품 후기 ==========
서예리의 경우, 왜 사랑이라는걸 모르냐는 질문이 있을수 있는데, 어릴때부터 부모님이 없어서 애정이란걸 못받았고, 할아버지도 딱히 애정을 준게 아닙니다. 친구한명 없고, 애정결핍 덩아리인데, 감정을 느껴보는것도 처음인애가 쉽게 마음을 깨닫는게 더 이상하죠 ㅎ
게다가 어릴때 이런 애정결핍을 거치면, 얀이 되기 쉽다고 합니다.
즉 이상집착에 잘 빠진다고 하던데, 전 본편에서는 서예리의 경우는 조금씩
마음이 치유되는 과정을 그리려고 하는데,
물론? 외전에서는 광기에서 미쳐날뛰는 장면도 보일겁니다. 그래야 더 대비적인
효과가..ㅎ 아무튼 본편의 흐름안에서 너무 진행에 방해가 안되도록
서예리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레벨.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