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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랑채로 들어갔다. 길고긴 복도를 지나서 생전에 민유나가 기거했던 방 앞에 도착했다. 이 문을 열었을 때, 민유리가 죽어있던 적이 한번 있었다. 그 생각이 나자 갑자기 찝찝했다. 눈에서 피를 흘리면서 기괴한 표정으로 죽어있는 시체의 모습은 되도록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다.
드르륵, 문을 열고 방안으로 시선을 향했다. 여기에 있을 민유리의 모습을 찾았다. 그녀는 침대에 쓰러져 있었다. 축 늘어져서 있는 모습을 보자 왠지 불안해져서 뛰어 들어가는데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발견했다. 다행히 걱정은 기우였다. 멀쩡하게 살아있었다.
울다 지쳐서 침대에 늘어져 있을 뿐이었다. 인기척이 나는데도 반응이 없는 건 그만큼 마음이 비어버렸다는 뜻일까?
나는 이제 안 좋은 소식을 전해야 한다. 흉수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 말이다. 지금도 충분히 안쓰러운 그녀에게 이 사실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왔다.
“괜찮아?”
침대에 엎드려 있는 민유리의 등에다 나직한 음성으로 질문을 했다. 그 말소리에 사람이 들어온 걸 그때야 깨달았는지 깜짝 놀라면서 민유리가 몸을 일으켰다.
“오빠... 언제 오셨어요?”
말소리가 들리니까 간신히 눈치 채다니, 이래서야 누군가 침입해서 죽이려고 했으면 바로 황천길로 향했을 것이다. 충분히 조심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조금 더 알아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을 잠근 것도 아니면서 너무 정신을 놓고 있으면 어떡해? 그 흑막은 언제든지 널 노릴 수 있다고?”
“별로...상관없어요. 죽어도 좋다는 생각은 솔직히 지금도 변함은 없는걸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나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살아가는 것에 대한 희망이 그렇게도 없는 걸까?
“정신 차려 민유리!! 아직 20대 초반이잖아? 이제 언니의 복수도 코앞에 다가왔는데, 언제까지 그렇게 살 생각이야? 언니가 죽기 전에, 하고 싶었던 일 같은 거 없었어? 뭐라도 있었을 거 아냐? 널 그렇게 끔찍하게 생각한 민유나씨가 지금 네 꼴을 보면 죽어서도 편안해 질 수 있을 것 같아?”
나도 모르게 화가 나서 소리를 질러버렸다. 그러자 민유리는 눈을 크게 뜨고는 멍하게 나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쿡, 웃어버렸다.
“왜 오빠가 그렇게 화를 내고 그래요? 언니가 하는 잔소리가 같아. 오글거려요. 그냥 해본 말인데...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그래? 그럼 다음부터는 조심 좀 해, 문도 좀 잠그고 있고”
“네..”
“그런데 여긴 왜 오셨어요? 서예리랑 대화하시던 중 아니었어요?”
“그게 새로운 사실이 밝혀져서...”
“그게 뭔데요?”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새로운 사실이 있다는 말에 민유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의문을 내비쳤다.
“그게 지수연하고 지수영이 시체로 발견됐나봐, 그녀들도 사용하고는 버리는 말이었던지 입막음을 당한 것 같아”
“그, 그게 정말이에요? 언니를 죽인 원수한테 아무런 복수도 하지 못했는데, 먼저 죽어버렸다고요?”
예상한대로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화를 내기 시작했다. 갈데없는 분노가 몸을 감싸고도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죽었으니 죗값은 치룬 거지. 그리고 복수라고 한다면, 그 흑막이 있잖아? 모든 걸 꾸민.. 아직 기회는 있어..”
“하지만...아직 정체도 모르잖아요...”
“아니야, 서예리가 화가 나서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 금방 잡을 수 있을걸? 그러니 네가 그 사람의 몽타쥬라도 그리는 데 협력하면, 그 날이 더 빨라지지 않았을까?”
“몽타쥬요...?”
민유리는 내말에 갑자기 고개를 떨궈버렸다.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화를 내다가 갑자기 몽타쥬라는 말에 급격하게 기운이 빠져나가 보였다.
“왜 그래?”
“그게..실은, 그 남자 얼굴을 본적이 없어요. 중후한 신사 같다고 한 것도, 듬성듬성 보이는 하얀 머리나, 피부에 핀 검버섯 같은 걸 보고 그렇게 생각했을 뿐, 항상 가면을 쓰고 있었어요. 언니는 얼굴을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뭐? 그럼 어떻게 얼굴도 안보여주는 사람을.. 그렇게 믿을 수가 있었어..?”
너무 이해가 가지 않아서 따지듯이 묻자 그녀는 다시 그 눈망울에서 눈물을 흘려보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더니 흐느끼면서 대답했다.
“어릴 때부터, 언니와 저밖에 없는 세상이었어요. 어딜 가도 괄시받고, 그런 인생이었는데, 그 사람이 유일하게 우리 자매를 보살펴 주었단 말이야. 학교에 다니게 하고, 언니가 졸업을 하자마자 취직자리를 알아봐주고, 그런 사람인데 얼굴을 안보여준다고 해서 의심할 수 있어요? 지금도 믿기지가 않는데.. 그 사람이 우릴 이용해 먹으려고 그렇게 오랫동안 준비했다는 걸..”
이용해 먹기 좋은 고아들 중에 당첨된 것뿐이겠지만, 민유리 자매의 입장에서는 확실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나는 그녀 옆으로 가서, 등을 토닥였다. 괜히 따진 것 같아서 미안했다.
“미안해... 하지만 아직도 그 사람이 흑막이라는 걸 못 믿는 건 아니지?”
“그렇지 않아요... 죽여 버리고 싶어요!! 언니를 이용하고, 절 이용하고, 나쁜 사람..나쁜 사람이니까요...”
“그래그래...”
다행히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계속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한참을 그렇게 민유리를 위로하면서 시간을 보내버렸다.
얼마 후 울음이 그친 민유리가 침묵을 깨고 나에게 말을 걸었다. 하도 울어서 그런지 눈은 이미 부을 대로 퉁퉁 부어있었다.
“오빠, 서예리가 절 떠나라고 하지 않았어요?”
“어? 그걸 어떻게 알았어?”
“역시나...”
족집게같이 서예리의 언행을 맞추더니 어떻게 맞췄는지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리고는 다른 주제로 말을 돌렸다.
“좋아요. 떠날게요. 그 사람이 잡히면 알려주시겠어요? 그 정도는 괜찮겠죠? 어차피 이 후로는 제가 나선다고 될 일도 아닌 거 같고, 서예리가 잡아주길 바랄 수밖에 없다는 게 화가 나지만..그래도 원수를 갚으려면 기댈 수밖에 없겠네요. 아이러니해요.”
“살다보면 뭐 그런 아이러니도 있는 거지..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마.”
“네, 그러려고요, 아무튼 원수의 행방을 나중에라도 연락해 주신다면, 저, 서예리의 말대로 떠날게요.”
“그래, 행선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정착해서 살만해지면 나한테 연락해줘. 그전에는 비밀로 해, 서예리한테 부탁해서, 네가 이 나라를 떠났다는 사실도 비밀로 할 수 있게 해볼게. 그 흑막이라는 사람이 네 목숨도 노릴 수 있으니까”
“그건...”
“또 목숨이 아깝지 않다고 하면 화낸다?”
“.................알겠어요. 정착할 때까지 그 사람이 잡혔으면 좋겠네요. 잡히면 딱 한번만 돌아와도 되는지 물어봐 주실래요? 딱 한 번 만요.”
“그건 장담할 수가 없는데...”
“제가 생각할 때 오빠가 부탁하면 들어줄 것 같은데.. 아닌가? 오히려 안 들어주겠구나..”
“뭐? 너 뭘 알고 있는 거야 도대체?”
“후후, 아니에요”
그녀는 살짝 웃으면서 다시 얼버무려 버렸다. 그리고는 말했다.
“그럼 그때 가서 부탁할래요. 잡히면요. 지금은 말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후후”
그녀는 신나게 울다가 갑자기 웃어보였다. 그러다 엉덩이에 뿔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유치하잖아.
“당장 떠나래요?”
“아니.. 하루의 시간은 받아놨어.”
“다행이네요. 오빠와 데이트 약속... 지켜드릴게요. 혹시 이젠 마음이 변했어요? 싫으세요?”
꽤나 나긋나긋한 말투였다. 싫을 리가 있나? 나의 최종목적을 그렇게 부정하지 말아줘. 나는 고개를 흔들면서 대답했다.
“그럴 리가? 데이트는 해야지”
“그럼, 저 먼저 나가서 집에 좀 다녀올게요. 처음 만난 커피숍 앞에서 보는 게 어때요?”
“응? 왜? 같이 나가자”
그편이 낫지 않나? 왜 따로 행동하지? 나는 민유리와 데이트를 하는 게 최종목적이자, 목숨을 위한 것이기도 해서 다른 예정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갑자기 한숨을 쉬더니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오빠.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앞으로 고생 좀 하겠어요...”
“뭐?”
“집에 다녀 올 테니까, 오빠는 나중에 오세요. 서예리한테 가서, 저 먼저 집으로 갔다고 하고 점심때쯤 일 있다고 하면서 빠져 나오는 게 좋을 걸요?”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왜 굳이 그래야 하지? 사건을 해결했으니 가보겠다고 말하면 되는 일 아닌가?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는지 민유리는 답답하다는 말투로 말을 덧붙였다.
“지금은 제 말을 들어요. 말려들고 싶지 않다고 할까..”
고개를 저으면서 민유리는 침대에서 일어나더니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전 제가 알아서 허락받고 나갈 테니까, 그럼 이따 1시쯤에 커피숍에서 봐요~”
살짝 눈웃음을 치면서, 윙크를 하더니 민유리는 그대로 복도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놀라서 그녀를 따라갔다.
“자, 잠깐만? 그러면 경호라도, 혹시 모르니까 서예리한테 경호를 부탁해...”
“네?”
“아니지. 내가 가서 부탁할게. 네 말을 들어줄 리가 없구나. 같이 가자”
나는 민유리의 대답도 듣지 않고, 손목을 잡고 밖으로 뛰었다. 아무래도 혼자서 밖으로 내보내는 건 너무 위험했다. 흑막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가 없었다. 경호원에게 서예리의 위치를 물으니 안채에 있다는 것 같았다. 출입금지구역이었다. 급하게 부탁할 게 있다고 하니, 전해 준다고 경호원은 말했다.
대답을 기다리며 한참동안 있으려니 서예리가 직접 행랑채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곤 나를 발견하더니 말했다.
“아저씨, 이번엔 또 뭐야? 나, 일하는 중이야? 별것도 아닌 거면 대가를 치르게 해주려고 직접 왔어. 말해봐”
약간 신경질이 난 말투였다. 직접 찾아가려고 했는데 자기가 온 주제에 왜 저기압인가 하고 생각했으나, 이 여자가 이러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참아야지.
“부탁이 있는데. 민유리 있잖아..”
옆에서 우릴 쳐다보는 민유리를 가리키면서 말을 꺼냈다. 하지만 마주친 그녀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민유리와 관계되면 이상하게 더 날카롭게 되는 거 같은 기분이다. 경호원 보다는 아무래도 내가 직접 무형검으로 보호해주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같이 나가보겠다고 하려다가, 말을 삼켜버렸다.
민유리가 서예리 몰래 뒤에서 나를 꼬집었기 때문이다. 물론 뒤에서의 꼬집기 공격도 공격이지만, 앞에서는 서예리가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서 쫄아버린 탓도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민유리가 방안에서 말 한대로 같이 나가는 건 포기하고 경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 집에 간다는데, 경호원 좀 붙여줄 수 있어? 얼굴을 가리고 있다고 해서 몽타쥬 작성은 실패했지만 그래도 경호원 없이 나돌아 다니는 건 위험할 것 같은데..”
“왜 그렇게 까지 해줘야 하는데? 나, 저 여자가 죽든 말든 아무런 관심도 없어? 오히려 살인미수를 범한 범죄자라고?”
경호 좀 붙여 달라고 했을 뿐인데 미간을 좁히면서 짜증을 냈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설득을 계속했다. 내 의지력에 박수를 보낸다.
“그 흑막을 잡는데 나중에라도 필요할 수 있잖아? 유비무환 이라고? 지금은 당장 떠오르는 게 없어도 중요한 단서가 나중에 생각날 수도 있고, 살려두는 게 좋지 않겠어? 흑막을 밝혀내는데 아무래도 좀 걸릴 것 같지 않아?”
“.........아저씨, 뭘 그렇게 울상을 하고 난리야? 그 여자 목숨을 지키는 거에 대체 어떤 이유가 있는데? 전에도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했지?”
“그건..나중에 때가 되면 말해 줄 테니까. 이왕 살려주기로 했으면, 선심 한번만 써줘..”
서예리는 내 말이 끝나자 민유리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 시선은 마치 사자가 임팔라를 노리는 눈빛이어서 겁먹었는지 민유리는 흠칫 뒷걸음질을 쳤다.
“아저씨. 너무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나중에 그 이유라는 거, 타당하지 않다면 각오할 수 있지?”
“그..그래. 각오해야지. 타당 하고말고. 너도 납득할 수 있을 거야.”
그래 언젠간 게임을 완전 클리어 하면 말해주지 뭐. 살아남기 위해서였다면 납득하겠지. 그 만큼 타당한 이유가 어디에 있어? 나는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좋아. 경호원 붙여줄게. 넌 바로 나가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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