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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반박하려고 했으나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긴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건 사실이다. 서예리의 생각대로, 사랑을 제외하면 나는 그저 서예리에게 접근하기 위해서 이용당했을 뿐인데, 대체 왜 오해를 풀고 싶고, 구하려고 하는 건지 납득시킬 이유가 없었다. 물론 진실은 히든미션을 깨기 위해서 일 뿐이지만, 서예리에게는 내가 민유리를 사랑한다는 가정만이 이 상황을 납득시키는 것 같았다. 즉 사랑을 위해서 서예리를 납치한 게 되는 거다. 그녀에게는 참을 수가 없는 모욕이겠지.
납치한다는 선택지가 나타났으면 뭔가 깔끔한 방법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점점 이야기가 꼬여만 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시간이 있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서예리를 설득해야만 한다. 하지만 말이 없는 나를 보며 그녀는 정곡을 찔렀다고 생각했는지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나에게 따귀를 날려버렸다. 볼이 얼얼했다. 나는 지금 그녀의 다리를 깔고 앉아 있는 상태였으나 상체는 구속하지 않아서 발생한 참상이었다.
“나, 정말 멍청해. 죽고 싶을 정도야. 이런 남자가 부른다고 자다 말고 나온 내 자신을 죽이고 싶어. 뭐해? 아까 말했잖아. 날 죽이는 게 좋을 거라고. 어서 죽이고, 저 여자랑 사랑의 도피라도 해보시지? 할아버지가 목숨 걸고 범인을 찾으려고 할 테지만 내 시체가 발견되기 전에 외국으로 튀면 조금은 더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녀는 그러더니 내 따귀를 때린 팔을 감싸 쥐었다. 그건 다친 팔이었다. 완벽하게 나아가고 있는 것 같았는데, 100% 아물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붕대를 풀고 확인해 본 건 아니었으니, 그럴 수도 있었다. 나는 곧바로 몸을 일으켜서 그녀의 팔을 붙잡고 상태를 살피려고 붕대를 풀어버렸다. 마치 수술을 해서 꿰맨 듯이 실밥이 생겨나 있었다. 참 현실적으로 회복되고 있는 중이었다. RPG의 회복마법처럼 한 번에 상처가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게 하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뭐 꿰맨 자국이 있는 게 더 낫기는 했다. 갑자기 상처가 없어지면 그게 더 이상하다.
“조심 좀해, 너, 환자라고.”
나는 다시 정성스럽게 붕대를 감아주었다. 그녀는 의외로 뿌리치지 않고 그걸 가만히 보고 있었다. 나는 이때다 싶어서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그리고 사랑이 아냐!!, 오해가 풀려서, 진범이 잡히면 그녀에게 다시는 상관안할 수도 있어. 절대 안 만난다고. 네 말대로 사랑이라면 이게 가능할 것 같아?”
물론 진심이었다. 그렇게 되면 히든미션이 해결된다. 굳이 다시 만날 이유는 없었다. 지연이 누나에게처럼 정이 든 것도 아니다. 그저 둘 사이의 원한만 풀리면 히든미션이 해결이라는 눈앞의 성공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러면서 상체만 일으키고 있는 그녀의 몸을 와락 안아들었다.
“이유는 아직 설명할 수 없지만, 언젠간 말할 수 있어. 제발 알아줘. 진심이야. 일단 그녀와 대화를 해서 오해만 풀면 된다고. 그리고 그녀를 살려주기만 하면 다시는 안 만나. 그걸로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증명 할 수 있다고 생각해...예리야..제발 좀 믿어줘”
“.............”
딱히 반항 없이 나한테 안겨있던 서예리는 침묵을 유지했다. 그러더니 얼마 후 입을 열어 나를 향해 조용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지금 뭐라고 불렀어?”
“응?”
나는 당황했다. 간신히 입을 열었다고 생각했더니 생뚱맞은 질문을 해온 것이다. 뭐라고 불렀냐고? 방금 한 대사를 읊조려 보았다. 예리라고 불렀네. 성 빼고 이름만, 친근하게. 나도 모르게 너무 간절해서 튀어 나온 것 같았다.
“미..미안, 나도 모르게..”
“다시 불러봐”
“뭐? 서예리?”
그녀는 내가 다시 부르자 내 몸을 두 손을 밀치더니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얼굴은 냉정했던 표정이 풀려있었다.
“성은 됐어. 아저씨, 방금은 이름만 불렀잖아? 다시 불러봐”
“예리야라고 하긴 했지. 예리야?”
나는 생뚱맞은 명령에 얼떨결에 다시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 어느새 그녀가 다시 아저씨란 호칭을 쓰고 있었다.
“날 그렇게 부르는 건, 내가 어릴 때 할아버지 정도 려나? 모두가 아가씨, 아가씨, 질리도록 아가씨라고 불렀지, 난 아가씨? 내 이름은 대체 뭐지? 가끔 그렇게 주체성을 혼동하기까지 했어.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부르게 놔두지도 않아. 그리고 이름을 허락할 수도 없고. 그러니 아저씨 주제에 말도 안 돼는 거지.. 하지만...정말 저 여잘 사랑 하는 거 아니야?”
“아니라니까?”
“좋아. 아저씨 말은 믿어줄게. 이유라는 게 뭔지 이해가 안가지만, 다만 믿는다는 건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말을 믿어준다는 거뿐이야. 살려줄 수는 없어.”
조금 온화해진 얼굴로 말했으나, 다만 끝은 완고했다.
“서예리...너무한 거 아냐? 그녀도 오해했을 뿐이야. 한번만 자비를 베풀 수는..”
“서예리..? 아저씨 나, 다시 짜증나게 할 셈?”
그녀의 표정은 왜 다시 풀 네임을 부르냐는 모습이었다. 아니 방금, 아저씨 주제에 말도 안 된다며? 앞뒤가 안 맞잖아? 언행불일치를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다시 성을 빼고 이름을 불렀다.
“예리야..그러니까, 한 번만 자비를..”
“싫어. 그건 양보 못해. 사랑하지 않는다며 어째서 그렇게 살리려고 하는 건지, 그 이유라는 것도 도무지 모르겠고”
“아니, 그저 언니의 복수를 하고 싶어 한 가련한 여자를 눈앞에서 죽게 만들 수는.. 불쌍하지도 않아? 피붙이라고는 언니하나뿐인 그녀야. 그런 사람을 잃어서 저렇게 되어버린 것뿐인데..”
“그게 뭐? 그냥 살아가면 될 것을 복수를 선택한 시점에서 목숨은 내놓은 거 아닐까? 그것도 나를 상대로? 나 감안하고 노린 거잖아? 아니야?”
맞는 말이긴 했다. 민유리는 살해가 실패한 후 자살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좋아. 그럼 일단 오해는 풀어 줄 꺼지? 너, 민유나를 죽이지 않았잖아? 아무리 자료를 봐도 니가 죽였다고는 생각되지가 않았어. 그걸 좀 민유리에게 설명해줄 수 없어?”
“사실 내가 죽였다면 어쩔 건데? 그럼 저 여자는 계속 날 죽이려고 할 거고, 그때의 아저씨의 선택이 궁금한데?”
“그....니가 죽였다면?”
그건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서예리가 범인이 아니라고 단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일을 진행시켰다. 그래서 민유리는 그저 오해한 것뿐이라 원한은 충분히 풀 수 있고, 히든미션도 쉽게 풀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서예리가 죽였다면, 원한이 풀리지가 않고 미션 해결을 위해서는 서예리에게 복수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건 아니다. 해결이 불가능하다 그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정황상 서예리가 죽였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아저씨, 나, 자랑은 아니지만, 죄 많은 여자야? 천국에 가긴 힘들겠지? 그런 내가 죽이지 않았을 이유도 없잖아? 정황 따위 꾸며내면 그만 아냐?”
아니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랬다면 3번 선택지가 나타난 의미 따위 없게 된다. 그녀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나는 허세를 부리는 걸 선택했다. 그녀가 이렇게 나오는 의도가 조금은 짐작이 갔다. 자길 선택하는지 시험하는 게 틀림없었다.
“만약 그렇다면, 좋아. 둘 중에 한명을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널 선택하겠어. 범인이 너라면 더 이상 민유리에게 상관하지 않겠어.”
내가 말을 끝내자 서예리는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예전처럼 씨익 웃으며 보조개를 내보인 것이다.
“정말일까? 뭐 좋아. 나한테 복종을 하라는 말을 잊지는 않았나 보네. 그런데 이거 어쩌지? 민유나는 정말로 내가 죽였어.”
“뭐? 그럴 리가 없잖아. 이제 와서 재조사까지 명령했다며?”
“그건 다른 이유가 있어. 본인이 죽였다는데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이제, 저 여자는 죽여도 되지? 설마 두말할 셈은 아니지?”
서예리는 강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원하는 대답이 짐작이 가긴 해서 말한 건데, 오히려 뒷통수를 맞은 격이었다. 역시나 절대로 만만한 여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두말 할 수는 없었다. 그러면 상황은 더 최악이 될 것이다.
“그래...죽여...에휴..할 수 없지.”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터덜터덜 밖으로 나와 버렸다. 집안에 거미줄이 좀 많이 거슬렸다. 마루에 앉아서 밖을 쳐다보았다. 저 멀리 고속도로가 보였다. 하지만 현실을 외면해 봤자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결국 민유리는 죽을 운명인가? 무슨 방법을 써도 살릴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를 죽게 만들고, 다른 공략대상을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온 것 같았다.
하지만 로드한다고 해도, 결국 또 민유리는 죽을 뿐이었다. 게다가 선택지가 걸렸다. 강제력이 나를 계속 다른 공략대상을 찾지 못하게 못하고, 남은시간을 모두 소비할 때까지 선택지만 선택하게 만들어 버릴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서예리를 설득할 수가 없으면 민유리를 살릴 방법은 없다. 하지만 도저히 살려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허탈해서 눈이 갈 곳을 잃고 있는데 그런 내 옆에 서예리가 오더니 앉았다.
“아저씨 근데 저 여자는 왜 묶어 둔거야? 어차피 잠들어있던데. 수면제로 재운 거 같은데 굳이 왜 묶었어?”
“혹시라도 깨어나서 또 널 죽이려고 난리치면 곤란하니까. 묶어 둔거야. 일단 너부터 설득하고, 깨워서 다시 그녀의 원한도 잘못 된 거라는 걸 설득하려고 했지.”
“그래? 난 묶지 않았잖아? 그건 역시 저 여자보다 날 생각했다는 말일까?”
“뭐? 그럼, 깨어나자마자 민유리는 널 죽이려고 날 뛸 텐데 또 상처라도 나게 할 수는 없지.”
내가 대답하자 그녀는 나를 지그시 올려보더니, 한숨을 깊게 쉬었다. 하지만 바라보는 표정이 좀 따뜻해 보였다. 착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좋아... 나, 결심을 바꾼 적 따위 한번 도 없는데... 날 납치한건 정말로 건방지지만, 상황을 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나한테 복종하는 걸 거스를 생각은 없었다는 걸로 보이니까, 들어주면 되잖아? 그렇게 풀죽어 있지 마. 애도 아니고 정말이지. 민유나는 내가 죽이지 않았어, 아저씨 생각은 맞아. 민유리도 살려줄게. 하지만, 저 여자는 이 나라를 떠나 줘야겠어. 오해했었다고 해도, 나에게 칼을 들이댄 사람을 같은 하늘에 둘 수는 없잖아? 원하는 나라로 보내줄게. 비용은 내가 내고, 이정도면 된 거지? 정말로 파격적이라고? 내가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대우야. 아저씨가 내 마음을 건드린 단 한마디를 하지 않았으면 절대로 결심을 바꿀 생각 따위 하지 않았을 텐데...”
“저..정말?”
거의 포기하는 심정이었는데 다가와서 찬란한 대사를 해주는 그녀에게 놀라서 나는 무심코 되물어 버렸다. 그녀는 그렇게 좋냐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아저씨. 나 억지로 결정을 바꿨더니 매우 짜증이나. 어떻게 좀 해봐? 다시 결심이 바뀌기 전에”
끝난 이야기 인줄 알았더니 또 골치 아프게 만들기 시작했다. 이런 시골에서? 짜증을 풀어달라고? 물론 나도 시골출신이다. 공부한다고 올라와서 방구석에 박히게 되었지만, 고등학교 때의 사건 전, 그러니까, 초등학교 때에는 나름 들판을 뛰어다녔던 시절도 있었다. 그래서 시골을 잘 안다.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지.
나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마당 밖으로 나와 버렸다. 그녀는 순순히 따라오면서 말했다.
“밖으로 나가는 거야? 재밌게 해준다며 어이없게 또 껴안는다거나 할 줄 알았는데 의외네? 하긴 그렇게 예상대로 움직이면 더 짜증나지. 좋아, 따라가 줄게”
헛소리를 하는 그녀를 고이 모시고 뒷산 쪽으로 올라갔다. 대나무 숲이 있는 것 같았다. 그리로 들어가니 대나무 숲 옆으로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뭔가 신비로운 분위기였다. 다행히 그녀는 대나무 숲을 둘러보더니 신기한지 눈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나, 대나무 처음 봐. 이렇게 살아있는 대나무 말이야.”
기분이 괜찮은지 이리저리 숲을 탐방하기 시작했다. 옆에서 그걸 따라다니는데, 서예리가 갑자기 뭔가에 걸려서 균형을 잃고 넘어지기 시작했다.
“꺄악”
그래서 나는 재빠르게 그녀의 몸을 낚아챘다. 짧은 비명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이 나에게 안겼다. 그리고 그 후 졸졸졸 흐르는 냇물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면서도, 안아버린 여자의 향기 때문에 어이없게도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녀도 뿌리치거나 비키라고 하지 않고 가만히 그 상태로 얼마간 시간이 흘러버렸다. 그러다 먼저 말을 꺼낸 건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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