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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짜고짜 칼질을 하는 당신이 살인마가 아니면, 내가 살인마인가?”
“나를 노리고 따라다닌 게 아니야?”
“뭐?”
그녀는 내 황당하다는 표정에 다시 지팡이처럼 생긴 칼집에 검을 집어넣어버렸다.
“그럼 왜 여기서 알짱거린 거지? 나를 쫓아온 이유가 뭐냐”
“그건....”
“꼬셔 보려고...”
이상한 오해를 하게 하는 것 보다는 그냥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나아보였다. 그래서 사실 그대로 말해줬다. 그러자 그녀는 드디어 얼굴에 표정이 드러났다. 얼빠진 표정이었다.
“...................”
“...................”
한동안 서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 검을 모조리 막아놓고, 꼬셔 보려고..? 지금 나를 모욕하는 거니?”
그녀는 화가 났는지 다시 검을 뽑아서 공격하기 시작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아직 사용해제를 하지 않은 무형검으로 계속 공격을 막아냈다. 지루한 공방전이 계속 이어졌다. 슬슬 지쳐가고 있었다. 체력을 10이라도 올려나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지치는 건 그녀는 마찬가지였다.
“너...너......뭐하는 놈이야. 그리고 왜 공격은 안하는 거지? 무슨 속셈이야?”
공격을 할 수가 없으니까 안하는 거지. 방어밖에 안 되는 아이템이거든. 그런데 그녀는 보이지 않은 칼을 신기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설마 남에 눈에는 보이는 건가? 나에게만 안보이고? 그걸 물어보려다가 왠지 얼빠진 질문 이 될 것 같았기에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꼬셔보는 게 속셈이라니까”
“뭐야?”
“당신이 너무 예쁜 게 죄지....”
“............”
내 말에 그녀는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마치 그런 말은 처음 듣는다는 표정이었다.
“진심이야?”
“응? 뭐가 말이야? 꼬시는 게 목적이라는 거? 진심이라니까”
“아...아니, 그거 말고...”
갑자기 여자여자 해져서 말을 더듬었다. 뭐지?
“응?”
내가 되묻자 그녀는 간신히 말을 끝마쳤다.
“그..그게, 내가...정말..예쁘다고?”
아 그쪽을 물어보는 거였어? 거울도 안보고 사나? 나는 긍정해 주었다.
“응. 예쁜데?”
그러자 그녀는 다시 검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그..그래?”
그리고는 한참을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보더니 다시 말을 꺼냈다.
“그..그럼 나를 쫓아온 건 용서해 줄 테니, 돌아가”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담장을 올라갔다. 그 위에 서서 나를 잠시 내려 보았다. 바람에 긴머리가 휘날렸다. 아까는 놀라서 몰랐는데 담장위에 서니 달빛에 비쳐서 왠지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맴 돌았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뭔가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곧바로 바로 몸을 날려서 그 담장 안의 집으로 들어 가버렸다.
이미 발을 들여놓은 이상, 아까처럼 포기하기도 애매했다. 또 어디서 칼빵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고, 일단 그녀의 목적이 궁금했다. 왜 달밤에 남의 집으로 들어가는 걸까.
나는 골목에서 나와 당당하게 대문 앞에 섰다. 그리고는 이제는 필수아이템이 된 만능키를 불러냈다.
곧바로 대문이 개방되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정원이 딸린 단독주택이 나타났다. 크기로 볼 때 상당히 잘 사는 집이었다. 현관으로 가니, 현관문을 열려면 어쩔 수 없이 만능키를 또 써야했다. 다시 현관문이 열렸다. 집안은 매우 조용했다. 이쪽으로 들어간 그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안경을 불러내려다가 멈췄다. 무형검은 갑작스런 공격을 막을 수 없다. 내눈에 보이는 공격만을 막을 수 있는 단점이 있었다. 기습에는 약하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안경보다는 무형검을 들고 있는 게 나아 보였다. 2개의 아이템을 동시에 사용할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어둠을 밝히는 건 포기했다.
다행히 구름에서 달이 나와서 칠흑 같은 어둠은 아니었다. 집안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냥 앞으로 나아갔다. 2층에서 뭔가 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 올라가 보니 뚱뚱한 아저씨가 그녀의 검에 목이 베여 있었다.
“히엑?”
나는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 살인사건의 현장이었다. 여자가 나를 공격해왔다. 검을 해제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무형검이 그녀의 칼을 튕겨내었다. 그러자 그녀는 내 얼굴을 뚫어져라 보더니 말했다.
“뭐야, 너인가? 왜 또 따라왔지? ”
“이 집으로 들어가 길래, 궁금해서”
그녀는 어떻게 들어 온걸까? 방의 배란다 문을 보자 예리한 칼질에 의해서 잠금장치 부분이 잘려나가 있었다. 허허.
“그런데, 사람을 죽인..거 맞지?...대체 왜?..살인마가 아니라며?”
그녀가 시체 앞에서 피가 묻은 검을 닦더니 칼집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하찮은 질문이라는 투로 대답했다.
“나는 청부업자. 아무 목적 없는 살인마와는 달라”
떳떳하다는 듯 가슴을 피고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게 그거 같았지만. 그런데 청부업자라면, 부탁을 받았다는 건가? 스카우터의 직접정보에는 해결사라고 나왔는데, 하긴 그게 그건가?
“흐음, 살인청부업자? 부탁받으면 뭐든 해주는 건가?”
“달라”
그녀는 그녀 나름의 철칙이 있는지 내 말에 나를 노려보았다.
“내가 납득이 갈 만한 이유라면 의뢰를 받아, 여기 이 남자는 정치가야. 그런데 자기의 지역구에 지지를 위해서 몰인정하게 빈민가를 돈 몇 푼 쥐어주고 철거시켰어. 그럼 그들은 어디 가서 살지? 초라하지만 잠은 잘 수 있고 몸을 쉴 수 있었던 보금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자살한 사람도 있고, 결국 노숙자가 신세가 되어 버린 사람도 있고, 몸을 팔게 된 여자들도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철거를 강력하게 반대하던 아빠를 의문의 사고를 잃은 아이의 부탁이 애절했기에 나는 칼을 들었다”
“정의의 편 이란건가?”
“아니. 우연히 내 마음에 들었을 뿐, 정의라는 건 없어. 있는 건 내 검에 대한 신념뿐이지.”
“그런데 너는 어떻게 들어왔지? 아무 소리도 못 들었는데.”
“나도 나만의 방법이 있어서”
“설마 동업자야?”
“아닌데..나는 살인은 하지 않는다고”
이유를 들어보니 딱히 그녀의 살인을 탓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최근 들어 시체를 너무 많이 본 기분이다.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것 에 익숙해진다고 생각하면서 이 현장에서 나가고 싶어졌다.
“목적을 달성한 거 같은데, 나갈래?”
내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밤거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너는 뭐하는 사람? 내 검을 막아낸 사람은 오랜만이야. 아까랑 똑같은 말은 하지 마. 목적이 아닌 정체를 묻는 거니까”
“흐음, 밤거리의 배회자?”
“뭐?”
그녀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 줬다.
“별로 실력이 대단하진 않아, 방어에 치중되어 있고, 공격에는 소질이 없거든”
내말에 그녀는 납득이 간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이 아이템이 공격이 안 될 뿐이지만, 왠지 그럴듯하게 말했나?
“그래? 어쩐지 전혀 공격을 하지 않더라니 그런 이유?, 반쪽자리네 너는”
“그...그렇지..”
그냥 두면 이대로 자연스럽게 헤어질 것 같아서, 어떤 말로 접점을 만들지 생각을 짜내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해놓고 그냥 보내기는 너무 아쉬웠다. 공략을 위해선 어찌해야 할까.
“그..그럼, 아까 그 포장마차에서 뭐라도 먹을까? 당신 때문에 배가 고파졌어, 다짜고짜 공격해서 말이지”
“흐음..뭐 그래, 나도 출출하긴 해졌어. 그럼 가”
그녀는 호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서 우리는 처음 만났던 포장마차로 돌아왔다. 내 시작점이기도 했다. 그 시작점에서 다시 세이브를 했다. 포장마차에서 뭔가 말실수를 해서, 간신히 생긴 접점을 잃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는 포장마차로 들어갔다. 여전히 중년의 부인이 장사를 하고 있었다. 여전히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처음에는 따로따로였던 우리가, 지금은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닭발 한 접시, 너는?”
아까도 닭발이더니 어지간히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우동을 시켰다. 그거 말고 포장마차 메뉴 중에 좋아하는 건 없었다.
“당신들, 아까도 왔었죠? 이번에는 같이 왔네?”
부인이 그렇게 말하면서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머쓱하게 웃어보였다. 그녀는 그냥 아주머니의 말을 무시했다. 그러더니 닭발을 먹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여자였다. 아까 내가 우동을 쏟아버린 후부터 뭔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던 아주머니였는데, 다시 우리 둘이서 돌아오자 싱글벙글 한 표정이었다. 급격한 감정의 변화가 이상했지만 눈앞에 있는 여자가 더 신경쓰여서 생각을 관뒀다.
그러다가 왠지 목이 말라져서 아주머니에게 가서 물었다. 그녀는 칼로 야채를 써는 중이었다.
“저기, 물 좀 주실래요?”
내말에 부인은 앞에 있는 물통을 넘겨주었다. 그런데 그녀가 물통을 집느라 내려놓은 칼이 왠지 익숙했다. 찜찜한 기분으로 자리로 돌아왔다. 그녀가 나를 바라봤다. 순간 찜찜한 기분이 사라지고 아까 봤던 공략정보가 떠올랐다. 딱 좋은 상황이었다. 분명 동생에 대한 판타지가 있다고 했지?
“그나저나, 누나라고 불러도 돼?”
“뭐? 너, 나보다 연하야?”
“아....아마도? 나는 25살”
“흐음, 나는 29살. 그런데 너는 좀 더 나이 들어 보였는데?”
“25살 맞습니다...”
내가 말꼬리를 흐리면 대답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내 모습을 꺼리는 표정은 없었다. 매력치를 좀 올렸기 때문인지, 아니면 드디어 나를 그대로 봐주는 사람이 나타난 건지는 모르겠다. 아니면 사람 얼굴에 대한 잣대가 그녀도 특이한 걸 수도, 서예리가 지루함이 잣대라면, 그녀는 강함일까?
“후웃, 동생인가? 나는 동생이 없어서, 동생을 갖고 싶긴 했는데. 누나라고 또 불러봐.”
“누...누나?”
다시 부르자 그녀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느낌이 좋아보여서, 스카우터로 그녀의 호감도를 체크했다.
유지연
나이 : 29세
남자친구 : 없음
직업 : 해결사
공략난이도 : F
사는곳 : 서울시 OO구 OO동 OO번지
전화번호 : 현레벨로는 불가
공략정보 : 잘못접근 했다가는 뒤 질수도 있음. 하지만 의외로 쉬운 여자? 밤거리를 배회하는 건 일 때문이기도 하고, 취향이기도 하다. 동생에 대한 판타지가 있다. 연하임을 어필하라.
호감도 : 60
호오, 100이 최고라고 본다면 상당히 좋은 흐름 아닌가? 어깨를 부딪쳤다는 이유로 마이너스로 하락하던 호감도만 보다가 이런 수치를 보니까 매우 만족스러웠다.
레벨.3 미궁의 밤거리[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