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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현실은 H게임-16화 (16/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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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거리의 어둠은 깊어간다. 그 위를 걷는다. 밤하늘의 달빛이 구름에 가린다. 찾아오건 더욱 깊은 어둠. 낮에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내가 일어났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그만큼 심신의 고달픔이 컸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리하여 새벽녘. 컴퓨터가 가동되지 않는 작은 방안은 고독뿐이다. 참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새벽2시. 평범한 생활을 한다면 깊은 잠의세계에 빠져있을 시간. 세상은 그런 평범한 사람 투성이다. 밤거리는 조용하다.

공략대상을 찾기는 쉽지 않다. 어둠이 내린 거리에 걸어 다니는 여자는 흔치않았다. 걷고 또 걷다보니 어둠속에서 불빛이 보인다. 자그마한 포장마차였다. 그러고 보니 배가 고팠다.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중년의 부인이 인사를 한다. 주인처럼 보였다. 테이블은 4개. 말 그대로 조촐했다. 손님은 한명도 없었다. 나는 우동을 시켰다. 포장마차 하면 우동이지. 주인은 웃으면서 알았다고 대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락모락 김이 나는 우동 한 그릇이 테이블위에 놓아졌다.

“맛있게 드세요”

아주머니의 온화한 표정이 왠지 기분 좋다. 웬만한 여자는 나를 보면 모멸감을 주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나를 겉모습이 아닌 내면그대로 봐준 여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서예리 한명이었다. 물론 어머니를 제외하고.

첫 만남 때부터 그녀는 사람을 그런 식으로 판단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모습 가짜. 내 마음도 흩날려 사라졌다. 하지만 진정한 모습의 그녀 또한 나를 겉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다만, 그녀의 경우는 모든 것은 오직 지루함의 잣대로 평가한다. 보통의 사람과는 완벽하게 사고방식이 다르다. 가지려 하면 얼마든지 조각 같은 꽃미남도 모델 같은 마초남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게 오히려 그녀는 재미가 없는 거겠지. 그런 그녀니 겉모습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 생각을 하다 우동그릇을 잘못 쳐서 그만 바닥에 쏟아버렸다. 맙소사. 아주머니가 달려왔다. 얼굴이 험상궂었다. 이거 하나 쏟았다고 너무한 거 아닌가? 내가 치우는 걸 도와주려고 하자 아주머니는 손을 저으면서 거부했다.

“아, 죄송해요. 하나 더 시킬게요. 물론 쏟은 것도 계산하고요...”

“알겠습니다.”

아까는 온화하게 웃더니 이번에는 무뚝뚝하게 그렇게 대답하고는 쓰래받이에 우동면발을 담아서 돌아갔다. 그러고 있는데 다른 손님이 들어왔다. 기다란 지팡이를 든 여자였다. 칠흑 같은 흑발이 어깨 아래로 드러내려 왔다. 검은색 스키니. 그리고 검은색 티셔츠.

검은색으로 도배를 한 옷차림은 어둠을 보호색으로 삼아 거리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신고 있는 신발 또한 검은색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미녀였다. 재미있어 보여서 스카우터를 불러냈다.

[스카우터를 사용하시겠습니까?]

화면을 터치했다.

유지연

나이 : 29세

남자친구 : 없음

직업 : 해결사

공략난이도 : F

사는곳 : 서울시 OO구 OO동 OO번지

전화번호 : 현레벨로는 불가

공략정보 : 잘못접근 했다가는 뒤 질수도 있음. 하지만 의외로 쉬운 여자? 밤거리를 배회하는 건 일 때문이기도 하고, 취향이기도 하다. 동생에 대한 판타지가 있다. 연하임을 어필하라.

호감도 : 0

공략정보가 떴다. 현 레벨에서 공략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정보가 애매하면서도, 정확했다. 잘못했다가 뒤진다는 건 무슨 뜻? 앞부분은 솔직히 전혀 모르겠고, 뒷부분은 알아듣기가 쉬웠다. 마침 나도 연하였다.

하지만 그녀가 들어올 때 아주머니는 다시 또 표정을 찡그렸다. 그리고 나한테 새 우동을 가져다주었다. 테이블에 사납게 내려놓아서 국물이 좀 튀었다. 갑자기 왜 저래? 이해를 할 수가 없었지만 우동자체는 맛있었다. 빈속을 부드럽게 달래주는 국물 맛이 좋았다. 먹고 있는데 그녀는 닭발을 주문하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조용한 포장마차 안에 먹는 소리만이 울려 퍼진다. 그리고 그녀가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면을 벌써 다 먹어치우고 국물만을 그녀의 페이스에 맞춰 홀짝이던 나는 곧바로 그녀를 따라 나왔다.

나오자마자 그녀의 행방이 보이지 않는다. 역시나 보호색의 위력은 대단했다. 나는 소지아이템을 불러냈다. 안경을 사용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안경을 사용하겠습니까?]

바로 안경을 터치했다. 이건 야간에도 대낮같이 밝아보이게 해주는 아이템이었다. 물론 어두운 집안을 탐색할 때 쓰려고 했는데, 미행에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안경, 망원경, 카메라 같은 아이템들은 효과가 눈 안에 직접 새겨진다. 사용법도 비슷한 것 같았다. 눈을 연속으로 두 번 깜빡이자 효과가 발생했다. 그리고 한번 길게 감으면 다시 원래의 어두운 밤거리로 돌아갔다. 사용법을 파악하고 세이브를 완료했다.

자 그럼 추격을 시작해볼까? 아니, 미행인가?

아이템을 사용하자 아무것도 안 보이는 밤거리 저 멀리로 걷고 있는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따라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똑바로 걸어가던 여자가 갑자기 골목길로 들어 가버렸다. 나는 허겁지겁 뒤따라서 골목길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막다른 길이었다. 그 상황에서 몸에 부자유가 찾아왔다.

[선택.1 골목안을 더 뒤져본다.]

[선택.2 골목밖으로 나간다.]

음? 일단 2을 선택해보았다. 이 골목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잘못 본거 같진 않았지만 다른 골목도 뒤져보자. 다시 몸이 자유로워 졌다. 선택지의 강제력으로 나는 골목 밖으로 밀려나다시피 해서 다시 거리로 나왔다. 하지만 그 전의 골목과, 앞의 골목에도 가보았지만 없었다. 다시 선택지가 나타났던 골목으로 돌아왔지만 역시나 아무것도 없었다. 행방은 귀신같이 사라져 있었다.

이건 명백하게 선택지 실수 미스였다. 골목 안을 더 뒤져본다는 선택지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바보 같아져서 할 수 없이 로드창을 불러냈다.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왔다. 서둘러서 아이템창에서 안경을 불러냈다.

[안경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아이템을 장착했다. 다시 거리가 환하게 보였다. 그녀는 아까랑 똑같이 다시 골목으로 사라졌다. 다시 골목으로 따라 들어갔더니 똑같은 선택지가 나타났다.

[선택.1 골목안을 더 뒤져본다.]

[선택.2 골목밖으로 나간다.]

후하하. 이 썩을 게임, 괜히 50만원만 낭비하게 하다니. 욕을 해주면서 이번에는 1을 선택했다. 선택지에 나온 대로 골목에 더욱 깊숙이 들어갔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골목을 막아선 커다란 담 벽이 있을 뿐이었다. 짜증나서 다시 몸을 돌려 골목 밖으로 나가려는데 갑자기 등에서 엄청난 격통이 찾아왔다.

“아아앜...”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면서 그래도 쓰러져 버렸다. 죽음의 감각이 찾아왔다. 차에 치었을 때와 똑같았다. 등이 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의식이 끊어질 것 같다.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을 것 같았다. 온힘을 다해서 로드창을 불러냈다. 바로 그냥 로드를 터치했다. 그러자 익숙한 하얀세상이 찾아왔다.

그리하여 다시 또 시작점이었다.

“하아...하아..하아..”

뭐냐고. 2개의 선택지다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나는 사망코스. 하나는 행방을 전혀 찾을 수 없는 말 그대로 무의미. 뭐 어쩌라는 거지? 순식간에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왔더니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이건 위험해 보였다. 히든미션의 난이도가 높을 것 같다는 생각이 덮쳐왔다. 시작부터 죽을 뻔 했다. 그래서 빠르게 마음을 접어 버렸다.

쉬운 것부터 차근차근 하고 싶었다. 주위에 왜 이렇게 고 난이도만 득실거려. 마음에 들지 않는다. 몸을 돌려서 그냥 반대 방향으로 나아갔다. 깔끔하고 빠른 포기가 때로는 좋을 때도 있는 거다.

다시 평온한 밤거리로 돌아왔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등 뒤에서 또 엄청난 고통이 찾아왔다. 식칼. 분명히 식칼이었다. 사시미칼보다 조금 더 긴 식칼이 내 배를 꿰뚫었다.

“으아아아악”

너무 아팠다. 상상초월이었다. 그대로 기절해 버릴 것 같았다. 모든 감각이 죽음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로드창...

떨리는 손으로 로드창을 불러냈다. 나를 찌른 사람은 보지 못했다. 볼 수조차 없었다. 그런 짓을 하다가는 팔이 힘을 잃고 영원히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 또 포장마차 앞 시작점으로 돌아왔다. 지겨웠다. 뭐지 이 무한 반복은?

의문이 등줄기를 타고 떨어져 내렸다. 식은땀과 같이 말이다. 어디서 무슨 플래그를 밟아 버린 거지? 어쩌다가 사방이 죽음으로 가득 찼단 말인가. 즉사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목이라도 동강났다면 그대로 베드엔딩이었다. 아니지, 데드엔딩이었다.

두 번다 너무 아팠다. 다신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적인 감각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다. 특히나 칼에 꿰뚫린 고통은 상상초월이었다. 아직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이 든다. 이건 너무하다. 하지만 왠지 이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어도 또 죽음이 닥칠 것 같았다.

앞뒤로 드리운 어둠의 거리에 사로잡혀 버린 기분이었다. 그나마 데드엔딩이 찾아오지 않았던 건 선택지 2번이었다. 그래서 다시 골목으로 가보았다.

[선택.1 골목안을 더 뒤져본다.]

[선택.2 골목밖으로 나간다.]

[선택.3 위를 본다]

선택지가 추가되어 있었다. 하하. 죽을 위기를 넘기니까 정답지가 나타난 건가? 하지만 이것도 함정이면? 선택하기 망설여졌지만 그렇다고 계속 무한루프 속에서 시달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3번을 골랐다.

선택지대로 위를 쳐다보았다. 만월이 된 달빛이 밤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구름에 가려진 달빛이 나타난 것이다. 그리곤 나는 담장위에 서서 나를 노려보는 여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찾지 못했던 이유는 이거였다. 위에 있었으니 앞과, 뒤, 땅만 뒤져봐야 나올 리가 없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지팡이를 잡아 당겼다. 그러자 기다란 검이 모습을 나타냈다. 식칼 같은 게 아니었다. 사극에서 나오는 기다란 진검이었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무미건조한 검이었지만 너무나도 날카로워 보였다. 분명히 선택지.1번을 골랐을 때 등 뒤를 공격한건 이여자일 것이다. 바로 저 검으로 나를 베었겠지.

“자..잠깐!!”

그리고 또 다짜고짜 나에게 검을 휘둘렀다. 뭐지. 이 미친 살인광은. 도망가도 끝까지 쫓아 올 것 같았다.

아이템. 아이테에에엠!!

또 베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 고통 이젠 사양 하고 싶었다.

수면스프레이? 그러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이건 거의 바로 앞에서 사용해야 된다. 망설이는 찰나에 소지아이템 목록의 맨 아래에 있는 무형검이 보였다. 그래, 이거다.

[무형검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서예리를 상대할 때 몸을 방어하기 위해서 쓰려고 했던 아이템인데 이렇게 쓰일 줄이야. 어차피 보이지 않는 공격, 즉 기습에는 통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아까는 사용해봐야 소용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딱 알맞은 상황이었다. 발동된 무형검은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날카로운 진검을 모조리 튕겨내고 있었다.

한참을 그런 공방이 계속되었다. 그러자 그녀가 동작을 멈추고 나에게 검을 겨냥하면서 입을 열었다.

“넌 뭐지? 내 검을 모두 막았어?”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만큼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어 보였다. 검 실력이 아마추어가 아니었다. TV나 영화에서나 보던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아무렇게나 난도질 해대는 칼질이 아니었다. 검도의 기술인 것 같았다.

21세기에 진검으로 검술? 여기는 검도장이 아니다. 웃기지도 않는 살인마잖아.

“살인마한테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은데?”

레벨.3 미궁의 밤거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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