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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현실은 H게임-14화 (14/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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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나를 걱정해준 착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가 더 이상 난교파티에 끌려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그래서 아니길 빌었다. 하지만 아무리 메모를 뚫어져라 쳐다봐도 맨 위에 나타난 이름은 서예리였다.

실수? 악독하고 매사에 철저해서 증거자료까지 철저하게 모아뒀던 차유린이?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녀와 있었던 일을 돌이켜 보자. 침착하게 되짚어 보니 두 가지 정도 짚이는 점이 있었다.

첫 번째, 스카우터가 표시한 그녀의 랭크. 그건 무려 A였다.

솔직히 이 한가지만으로도 그녀를 의심하고 또 의심했어야 맞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의문을 아예 지워버렸다.

두 번째, 그녀는 나에게 힌트를 주듯이 말했다. 차유린과 조폭의 사이가 틀어져 있다고. 최근 자주 싸운다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았다. 사이가 안 좋다는 서예리의 말을 믿고 둘 사이를 이간질 시키려고 했다가 오히려 역공을 받아 죽을 뻔했다.

결국 확실하게 할 방법은 하나였다. 본인에게 직접 듣는 수밖에 없다. 나는 바로 핸드폰을 들어서 그녀의 집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한참을 신호만 울렸다. 하지만 전에도 한참을 기다리고 나서야 전화를 받았던 사실이 떠올라서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지루할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겨우 수화기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이번에는 남자가 아닌 본인이 직접 전화를 받았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여보세요”

일단 평범하게 대답을 했다. 하지만 막상 대놓고 물어보려니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저, 저기..”

말을 더듬고 있으려니 바로 나를 알아차린 것 같았다.

“아저씨?”

“맞아.”

“무슨 일이에요?”

“잠깐 만날 수 있을까?”

전화로는 도무지 못할 것 같아서 차라리 만나서 메모를 직접 보여주고 답을 듣자는 생각이었다.

“네? 급한 거예요?”

“응...전에 봤던 정류장 앞으로 갈게, 지금 나와 줘.”

“네? 여보세요? 아저씨?”

나는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는 곧바로 그녀를 처음 만났던 정류장으로 향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했다. 이런 나도 차별하지 않는 따뜻한 목소리. 이런 그녀가 차유린의 뒤를 봐주던 사람이라니. 뭔가 잘못되었다.

정류장에 도착해서 벤치에 앉아 30분정도 기다리니 그녀가 나타났다. 여느 때와 똑같이 후드티에 청바지차림 이었다. 그녀는 난교파티가 끝나고 따로 만났던 그날 아침처럼 내 옆으로 다가와 벤치에 앉았다.

“다짜고짜 나오라고 하면 어떡해요. 무슨 일 있어요?”

그녀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나는 떨리는 심정으로 가만히 그녀에게 메모지를 넘겨주었다. 그녀는 의문스런 표정으로 그걸 받아서 보았다. 그러더니 어깨가 들썩거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크게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이런 걸 써놨어? 재미없는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더 재미없는 여자네”

그러더니 메모지를 손에서 놓았다. 메모지는 그대로 팔랑이며 정류장 바닥으로 떨어졌다. 반응을 봤을 때 이미 답은 나와 있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정체가 뭐야?”

“아저씨, 그런 시시한 걸 물으면 나 화나는데..“

“뭐??”

존댓말이 갑자기 반말로 바뀌어 있었다. 태도에 급격한 변화가 찾아왔다. 똑같은 건 아저씨라는 호칭뿐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부터 울화가 치밀었다. 부들부들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고등학생 때의 트라우마가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그런 얼굴 하지 말아줘. 재미없으니까”

“무, 무슨. 정체가 뭐냐니까!!”

“난 그냥 나야. 이지혜의 뒤에 있던 건 사실이지만 그건 그저 재미? 사실 지루했어. 너무 지루해서 조만간 정리해 버리려고 했는데 아저씨가 정리해 버렸잖아. 아. 그러고 보니 이지혜가 아니고 차유린이던가?”

“뭐!?”

“그건 솔직히 나도 몰랐어, 그 여자의 본명 따윈 관심도 없었으니까. 억지로 알게 됐다고 해야 하나? 아저씨가 난데없이 이름을 물어보기에 조사를 시켰거든.”

서예리는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다 갑자기 나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더니 살짝 눈을 치켜떴다.

“그런데 아저씨야 말로 정체가 뭐야?”

그 순간 그녀의 표정은 매우 무서웠다. 웃다가 진지하다가 표정변화가 매우 심했다. 하지만 난 그녀가 뭘 묻는지 바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에휴, 또 그런 표정. 좋아, 아저씨는 나를 조금 재밌게 해줬으니 특별히 조금 설명해줄게. 나 이렇게 친절한 사람이 아닌데 행운인줄 알아. 아저씨, 이 나라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사람은 누구일거 같아?”

“뭐?...그, 그건 당연히 대통령 아냐?”

의외의 질문에 나는 얼떨결에 원론적이 대답을 내뱉었다. 그러자 그녀의 표정이 매서워졌다.

“그런 재미없는 대답 한번만 더하면 아저씨 죽을지도 몰라”

“뭐??”

내가 되물은 순간 갑자기 정류장의 유리창이 산산조각이 나서 깨져버렸다. 나는 깜짝 놀라서 깨진 유리창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보니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서 나에게 겨냥했다.

“지금은 유리창이지만, 다음에는 아저씨 몸에 총알이 날아올 걸? 사방에 배치돼있는 저격수의 총알이 아저씨의 심장을 뻥하고 말이야.”

나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마음속에 들끓던 분노가 사라져가고 공포가 밀려왔다. 경호를 무슨 저격수가 하고 있단 말인가. 그것도 다수가. 레벨을 떠나서 건드리면 안 되는 여자를 겁도 없이 불러낸 것 같았다.

“다시 물어볼게, 이 나라에서 가장 권력을 큰 가진 사람은 누구?”

그녀는 다시 웃는 표정이 되어서 나에게 같은 질문을 시작했다. 나는 충격으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마구 굴러야 했다. 트라우마고 뭐고 간에 일단 목숨을 건져야 한다. 무슨 대답을 할까 망설이다가 나는 그냥 나오는 대로 뱉어버렸다. 손은 로드창으로 향하고 있었다. 총에 맞아도 손이 움직여 줄까? 무섭다.

“너...?”

“푸하하하하, 역시 아저씨야, 나라고? 이렇게 대충 차려입은 여자애가? 어떻게 그런 대답이 나올 수 있는 거야?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후후후”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다행히도 기분은 좋아보였다. 아까 총알이 날아올 때의 매서운 표정은 아니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으려니 그녀가 말했다.

“그런데 반은 정답이야”

“뭐??”

“정확히는 우리 할아버지가 이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에서 막대한 영향력이 있거든, 주로 뒤에서 말이지. 거기 메모지에 나와 있는 정치가들도 전부 우리가 길러낸 사람들이고, 대통령도 우리 쪽 사람이야. 막대한 자금은 사람을 굴복시키지. 그래서 재미없어. 그리고 나는 아버지가 없어. 죽어버렸어. 그러니까 할아버지의 모든 건 나의 것이지. 대충 뭐 그런 거야.”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말 그대로 현대판 공주님이라는 소리였다. 그것도 궁 안에 갇힌 힘없는 공주님이 아닌, 권력을 가진 공주님 말이다. 랭크A는 당연한 거였다. 이보다 랭크A에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까?

“그래서 나는 어릴 때부터 모든 걸 가질 수 있었어. 유일한 피붙이인 나에게 할아버지는 모든 걸 쏟아 부었거든. 그래서 나는 어릴 때부터 매우 지루했어. 그래서 지루한 게 너무 싫어. 모든 건 내 예상대로 돌아가. 톱니바퀴 같은 세상이 너무 지루해, 사실 지금도 조금 지루해 지려고 해....아저씨 머리가 갑자기 터져버리면 조금 재밌을까?”

“지, 진정해? 손으로 총 모양 하지 마.”

지나가는 벌레를 밟아 죽이는 것 마냥 말하는 그녀였기에 나는 땀을 삐질 거리면서 옆으로 조금 이동하자 그녀는 다시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농담이야 걱정 마, 그렇게 무서워하지 마. 아저씨는 내 예상을 깨준 얼마 안 되는 사람인데 그렇게 쉽게 죽게 하진 않아”

“내가 예상을 깨버렸다고?”

“응, 그것도 두 번이나. 덕분에 조금은 지루함이 덜어졌었어. 관심이 생겼거든.”

내가 이런 여자의 예상을 그것도 두 번이나 깨버렸단 말이야? 금시초문이었다. 하지만 목숨을 위해서 호기심이 생겼다. 또 예상을 깨주기 위해서는 들어둬야 할 것 같았다. 이미 관여해버린 이상 이대로 도망치려고 했다간 정말로 총알이 날라 올 테지. 하지만 어떻게 예상을 깨버렸냐고 물었다가는 또 재미없다는 소리를 들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말은 곧 사형선고였다.

“말해봐”

“응? 뭘??”

내 대답이 의외였는지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되물었다. 좋아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내가 예상을 깬 감상을 말해줘,”

“하하하, 감상을 말해달라고?, 아저씨 뻔뻔한 사람이네, 뭐 좋아”

다시 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목숨 걸고 시소게임을 더 하다가는 죽어버릴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여서 아예 로드창을 눈앞에 꺼내두었다. 이 여자의 표정이 무서워지면 바로 로드를 하자.

“첫 번째는 처음 만났을 때야. 가끔 사람관찰을 하려고 아무한테나 자자고 말하거든? 어눌한 말투와 존댓말은 그럴 때의 유니폼 같은 거랄까? 당신도 거기에 걸려든 사람이었지. 아니 걸려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놀랐어. 보통 흉터를 보면 깎으려고 하거나, 기분 나쁘다면서 안한다고 하거나, 머뭇거리면서 깎지도 못하고 그냥 제값에 한다고 하거나, 3가지의 패턴이지. 그런데 밥을 먹자고? 나랑? 너무 재밌었어, 내 예상을 그렇게 깨버리다니, 지루함이 조금 사라져서 당신을 살려뒀어. 그거 알아? 거기선 3가지의 패턴 중 뭘 선택해도 모두 아웃 이라는 거? 그 모텔은 어느 방에 들어가도 사각지대가 없어, 저격당하기 딱 좋아. 나를 따라서 모텔에 들어간 순간 살아날 방법은 없는 거야, 그런데 밥을 먹자니..오랜만에 얼이 빠졌단 말이야, 나는 아저씨 같은 사람이 나타나길 바라고, 그런 짓을 계속해서 반복했나봐. 지루함을 덜어줄 사람을 찾아서 말이지.”

"그...그래?”

역시, 그날 하지 않은 건 정답이었다. 역시나 함정이었다. 그것도 엄청난 함정이었던 것이다. 나는 나의 결단에 경의 표했다. 그녀의 감상은 계속 이어졌다.

“근데 있지, 왜 이상하게 생각안하는 걸까? 흉터가 그렇게 심하고 화상자국은 정말 징그러운데, 그런 흉터를 모텔에 들어가자마자 옷을 훌렁훌렁 벗어던지고 보여주는 매춘녀가 어디에 있어? 옷을 안 벗고 하려고 하겠지. 안 그래? 후후”

그랬다. 그건 나도 솔직히 이상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그냥 듣기로 했다. 괜히 입방정을 떨다가 위기를 자초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나 설렁탕? 그것도 처음 먹어봤는데 괜찮았어. 그래서 할아버지 주려고 포장도 했지. 그런 음식점에 가는 거 자체가 처음이었어. 한번쯤 가보고 싶어서 그날 아저씨한테 가자고 한 거고. 생각한데로 상황이 안돌아가서 재밌었어, 칭찬이야 아저씨, 그리고 두 번째는 차유린하고, 조폭들하고 사이가 안 좋다고 말해서 아저씨를 함정에 빠뜨렸을 때야, 차유린이 자기 조직을 조사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다 죽였다는 건 알고 있었거든, 그 여자, 그런 거에 많이 민감하니까. 한번 시험을 해보고 싶었어, 거짓정보를 흘려서 죽나 안 죽나 보려고 한 거야. 나는 솔직히 죽을 줄 알았어, 그런데 또 예상을 깨던데? 오히려 나도 몰랐던 차유린의 정체를 알아내고 난교파티를 망가뜨리다니 후후”

“그거 다행이었네..”

“그래서 다시 본론인데, 아저씨 정체가 뭐야?”

다시 그녀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게 변해있었다. 나에게 접근해서 질문을 날렸다. 이 질문은 그녀가 아까도 물은 바 있었다.

“무슨 정체? 나야 말로 그냥 평범한 사람인데”

“웃기지마, 아저씨의 은행계좌에 프로텍트가 걸려 있었어. 외국을 경유해 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알아볼 수 없는 정보라니, 처음이야. 그러니까 말해. 아저씨 정체가 뭐야?”

“물론 난 평범한 사람이지만 평범한 사람이 아니지. 적어도 지금의 세상에서는”

내말에 그녀는 그게 무슨 헛소리냐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게임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나저나 역시 게임의 힘은 절대적이었다. 이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 여자도 내 정보를 못 알아냈다는 건 그 누구도 알아낼 수 없다는 거겠지. 이건 정말 소중한 정보였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하나라도 있어야 네가 덜 지루하지 않겠어? 그냥 나뒀으면 하는 바람인데”

“히히히. 그래? 좋아. 그렇게 나온다면 기대할게. 앞으로도 나를 이 지루한 세계에서 구해줘. 나는 딱히 아저씨 적이 아니야. 차유린? 아까도 말했지만 그 여자도 그저 재미로 뒤를 봐준 거지 그 난교파티나 약들도 나랑 직접적 관련 없어. 파티에 가본 것도 그날이 처음인 걸? 그거 알려줄까? 매춘녀 흉내를 내고 있지만, 나 처녀야 아저씨. 그래, 아저씨가 내 기대를 충족시켜 준다면 줄 수도 있다? 진짜야. 후후”

물론 그녀도 공략대상에 속하긴 한다. 랭크A도 분명히 공략대상이니까 스카우터에 나왔겠지. 하지만 딱 봐도 너무 어려워 보이잖아? 공략난이도A라는 건 섹스를 하는 과정이 무지막지하게 어렵다는 건데, 거기에 숨겨진 히든미션은 또 얼마나 파란만장할지 상상조차 안 된다. 지루함에서 구해준다는 건 대체 얼마나 거대한 이면이 숨어 있는 걸까. 사는 세계가 너무 다르다. 도저히 지금 레벨로는 말조차 더 섞고 싶지가 않았다. 목숨이 천개라도 부족하다.

“아, 하지만 아저씨는 나랑 섹스를 피했지? 왜 그런 거야? 그때 침대에서 잔뜩 발기해 있던데, 충분히 흥분했으면서 안하다니, 뭐 위험을 감지하는 촉수라도 있어?”

“뭐, 그렇지. 난 위험에 민감하니까. 참고로 그때 난교파티에서 니 말에 승낙하고 하려고 했으면...?”

“응? 죽었을 걸? 그런 건 재미없잖아. 거기서 해버렸으면, 결국 내 예상대로인걸? 총알은 어디서든지 날아올 수 있는 법이야 아저씨.”

“하하하...”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지루하다고 할 때의 그녀 표정은 정말로 우울해 보였다. 이 여자도 이 여자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다는 걸까? 아마 그건 히든미션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역시나 지금은 아니다. 나는 은근슬쩍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그런 나를 앉아서 가만히 올려보았다.

“이만 가 봐도 될까? 저번에는 네가 먼저 할 일 있다고 가버렸지? 오늘은 내가 할 일이..”

“흐음. 좋아 지금은 놔줄게. 나 졸리거든. 사실 나 야행성이야. 아침에는 자는 스타일이야. 사실 지금 같은 시간에 불러내서 조금 화가 났지만 그건 용서해 줄게. 아, 그리고 전에 가르쳐준 전화번호 있지? 그거 집 번호가 아니고 내 직통 핫라인이야. 히히히, 핸드폰의 개념이지. 나 핸드폰은 없어, 그런 거 귀찮아. 시시콜콜한 부탁이나 청탁을 하려고 접근하는 개념 없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렇다고 일일이 다 죽일 수 도 없잖아? 아저씨는 전화해도 돼. 단 재미없게 만들면 용서 안할 거야. 그럼 다음에 봐 아저씨. 그리고 이건 명령인데, 내가 부르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바로 나타는 게 좋을 거야. 후후, 나의 지루한 세계에 온 걸 환영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정류장에서 걸어 나갔다. 그러더니 차도로 가서 멈춰 섰다. 그러고 보니 정류장에서 그녀와 이야기를 할 때 한 대의 차도 지나다니지 않았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런 텅빈 차도에 어디선가 헬리콥터가 나타나서 내려왔다. 그리고 그녀는 나를 한번 돌아보더니 윙크를 날렸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윙크였다. 그리고는 헬기를 타고 사라져 버렸다. 얼마 있으니 다시 버스와 차가 정상적으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잠시지만, 경찰이라도 이용했는지 사거리 앞에서 교통을 통제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공사라도 한다는 명목을 붙여놨겠지. 이게 바로 그녀의 힘인가. 아이템 따위보다 100배는 더 대단하잖아?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하필 저런 여자한테 걸리다니. 세상에는 모르는 게 행복한 사실이 있는 법이다. 그녀 눈에 들어버린 이상 게임의 방향은 크게 뒤틀릴 것 같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앞으로도 계속 귀찮게 할 것 같은 저런 여자에게서 살아남으려면 레벨업이 필요했다. 그건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지만, 아무튼 이럴 때가 아니었다. 빨리 다음대상을 물색해서 공략에 들어가야겠다.

이전의 서예리에 대한 생각은 지워버렸다. 어눌하고, 착해보였던 그녀는 결국 환상이었다. 지금은 그녀도 위험한 냄새는 풍기지만, 결국 적이라고 부르기는 애매했다. 그녀 말 대로면 난교파티와도 큰 관계는 없어보였다. 그저 재미를 찾아 돌아다녔을 뿐. 흑막이나 그런 건 아니라는 소리.

나는 착잡한 심정에, 마음 한구석이 뻥 뚫린 것 같았다. 어쩌면 그녀가 연기한 서예리를 좋아하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서예리는 사라졌고, 남은 건 상대하기 너무 어려운 여자였다. 나는 실연을 당한 기분으로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레벨.3 미궁의 밤거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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