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해피니스 제국 (7)
“카프리 님, 수송선과 해안에 남아 있던 청방 길드 헌터들 모두 정리했습니다.”
“얼마나 되지?”
“1만여 명쯤 죽고. 6만여 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고 있어 일단 병원으로 옮겨 놨습니다.”
“쯧쯧, 많이 죽었군.”
무능한 아군의 지휘관 한 명이 백만의 대군보다 더 무섭다고 하더니 그 말이 진짜 사실이었나 보군.
“멍청한 놈들. 시야가 확보되지도 않았는데 무슨 생각으로 해안가에 상륙한 거야.”
“냐앙.”
“왜 인마!”
“냐아앙.”
“머리는 왜 갖다 대?”
칭찬이라도 해 달라는 거야?
쓰담쓰담.
카프리는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무릎 위로 올라와 가슴에 부비부비하는 검은색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들은 몰랐겠죠. 시야를 가린 해무가 실은 묘족이 만든 인위적인 운무였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리치를 상대하기 위해 미티어 스트라이크 마법진 수십 개를 본성에 새겨 넣었다는 것도.”
어찌 보면 참 불쌍한 놈들입니다.
보아하니 영주님과 헌터들이 모두 출정해서 빈집털이하려 했나 본데 되레 함정에 빠진 모양새가 됐으니까요.
창천의 활로 무장한 수만의 행주 부대.
총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수만의 예비군들과 마나 팔찌를 착용한 헬퍼들.
이미 한번 미국과 일본의 헌터 협회에 기습을 받고 몬스터의 위협 속에 사는 스카이 캐슬 주민들은 당장 전쟁에 참여해도 될 만큼 뛰어난 전투력을 갖고 있었다.
빈집처럼 보였겠지만 능히 수십만의 대군을 막아 낼 만큼 뛰어난 방어력을 갖고 있었다.
이부성은 검은색 고양이 아니 묘족의 네로를 흐뭇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러니까 멍청하다는 거야. 우리의 전력이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면서 저 많은 인간을 사지로 내몰았잖아.”
해용이, 아니 영주가 오면 또 한 소리 듣겠군.
영주였으면 분명 최대한 살려서 포로를 잡으려고 했을 테니.
카프리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스카이 캐슬 본성 진형이 그려진 지도를 쳐다봤다.
전투에서 승리한 건 기뻤지만 내 집 앞마당에서 너무 많은 피가 흐른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살아서 해안가를 빠져나간 인원이 얼마나 되지?”
“3만여 명쯤 되는 것 같아요.”
“흠…… 제법 많군. 게릴라전을 하면 우리한테도 사상자가 생길 수 있어. 영주가 올 때까지 부딪히지 않고 버틸 수 있겠어?”
“네, 가능할 것 같아요. 미티어 스트라이크와 화살 세례로 뿔뿔이 흩어져 있긴 하지만 마법사의 탑에서 다 위치 확인을 하고 있어요. 마스터 김연창과 부 마스터 강유와 김지훈이 문제였는데 또 알아서 사지를 찾아 이동하고 있더라고요.”
“사지를 찾아 이동하고 있다고?”
“절벽을 타고 올라가 우회해서 본성으로 올 계획이었던 건지 하늘목장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게 확인됐어요.”
“하늘 목장? 설마 해피가 있는 곳으로 가고 있는 거야?”
“네. 보아하니 다들 며칠 굶은 거처럼 매가리가 없더라고요. 그대로 두면 아마 하늘 목장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그곳에서 뭐라도 먹고 가려 할 테고 해피를 만나게 될 거예요.”
“적이지만 참 불쌍하군. 하필 가도 그곳으로 가다니…….”
아무래도 하늘이 영주의 편인가 보군.
“해피라면 그놈들을 붙잡아 둘 수 있겠죠?”
“붙잡아 둘 수 있냐고? 일전에 설명한 것 같은데 자넨 아직 드래곤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 같군. 알에서 갓 깨어나 새끼인 것 같지만 그 알에서 보낸 세월만 족히 백 년은 될 거야. 애초에 인간이나 우리 드워프랑은 차원이 다른 존재야. 그러니 아무 염려 말게.”
식충이 마냥 하는 것도 없이 매일 블랙앵거스 한 마리를 먹어 치워 대더니 이번에 제대로 밥값을 하겠네.
카프리가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하늘 목장이 있는 곳을 쳐다봤다.
드래곤 로드 씨엘의 자식.
아스날 대륙의 마지막 드래곤.
알에서 깨어나는 순간 중간계의 조율자 위치가 되어 로드의 권능을 얻은 드래곤.
김연창과 강유 그리고 김지훈이 가는 길엔 스카이 캐슬의 수호용인 ‘해피’가 기다리고 있었다.
* * *
[부 마스터님, 이쪽을 보십쇼. 말발굽입니다.]
[말발굽? 설마 기마병들이었던 건가?]
근데 왜 창이나 검으로 벤 상처는 보이지 않는 거지?
무기를 빼 겨룰 순간도 없이 짓밟힌 건가?
‘다들 B급 이상의 상위 헌터들인데…….’
바닥에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는 말발굽을 본 강유는 손가락으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어찌 된 게 그동안 힘들게 모은 정보가 들어맞는 게 없었다.
1년 가까이 염탐하는 동안 한 번도 생기지 않던 해무가 생기고.
전 병력이 출정을 확인한 걸 두 번, 세 번 확인하고 온 것인데 미티어 스트라이크와 화살 세례가 날아오더니.
이제는 고작 말들로 인해 청방 길드의 최정예 헌터들이 목숨을 잃은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강유야, 어떻게 할 거냐?]
[계획대로 신속하게 본성으로 이동하면 될 것 같습니다. 아직 우리의 위치가 노출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곳으로 온 걸 알았다면 저희를 상대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을 테니까요.]
[그래. 알았다. 그럼 빨리 이동하자.]
[네, 알겠습니다.]
모두 이동!
강유는 입술을 굳게 다물며 병력을 인솔해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위치가 노출되지 않은 것 같지만, 설사 노출이 되었다 해도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살아남으려면.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가려면 스카이 캐슬 연합 수뇌부들의 가족들을 무조건 잡아야 했다.
그래야 예전처럼 권력을 휘두르고 돈 걱정 없이 편안하게 살 수 있을 테니까.
지금이라도 도망을 치면 목숨만은 지킬 수 있겠지만 이미 기름진 고기와 권력의 달콤함을 맛보았기에 목숨만 연명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킁킁.]
어디서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소고기를 굽고 있는 건가?
[야, 강유야, 이쪽에서 고기 굽는 냄새가 나는데?]
[나도 맡았다. 산꼭대기라 아직 우리가 쳐들어온 게 전달이 안 된 건가?]
하늘이 아직 우릴 버리지 않았나 보군.
다행이야.
다들 이틀 가까이 먹지 못해서 걱정했는데 여기서 대충 끼니를 해결하고 본성을 기습하면 되겠군.
병사들이 많이 지쳐 있었다.
힘을 내려면 뭐라도 조금 먹어야 했고 강유는 수신호를 하며 병사들을 인솔해 냄새를 따라 은밀하게 움직였다.
‘냄새와 연기를 보니 최하 스물 이상이다.’
순식간에 제압해야 해.
혹시라도 소리를 듣고 병력이 찾아오면 위험하다.
고개를 뒤로 돌려 길드원들과 눈을 마주치는 강유의 눈빛이 스산하게 빛났다.
척살!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게 없었다.
강유는 눈빛으로 그 누가 됐던 고기를 구워 먹고 있는 이들을 모두 죽이라 명령했다.
-너희들 뭐냐?
[뭐야? 왜 아이 하나밖에 없어?!]
어서 주변을 수색해.
이놈들 눈치채고 도망갔다.
빨리 잡아!
강유는 다급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두리번거렸고 길드원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커다란 나뭇가지에 이분 도체 된 소 한 마리가 걸려 있는데 정작 사람이 한 명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한 명 역시 열 살이나 됐을 법한 어린 소년이었다.
-처음 보는 인간들인데? 너희 때문에 누나랑 삼촌들이 나만 남겨 놓고 다 마을로 내려간 건가?
‘뭐지? 왜 이 아이의 말이 이해되는 거지?’
한국말인 것 같은데?
분명 귀로 듣기엔 한국말인데 어떻게?
아티팩트라도 있는 건가?
강유는 의문 어린 표정을 어린 소년의 몸을 훑어봤다.
‘머리 색깔과 눈은 왜 노란색이야?’
혼혈인가?
엘프족과 함께한다고 하는 얘기는 들었는데…….
게이트가 생긴 지 5년인데?
설마 그 전부터 이미 아스날 대륙과 교류가 있었던 건가?
[강유야, 애 데리고 뭐 하냐. 어서 죽이지 않고.]
나 배고프다.
후딱 죽이고 얼른 밥부터 먹자.
냄새 죽이네.
장작 위에 올려져 있는 소고기를 보며 김지훈은 군침을 흘리며 다가갔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이틀 가까이 굶었더니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사람들이 도망을 쳐서 지원군을 불러 오든지 말든지. 일단 지금은 고기라도 몇 점 입에 넣고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우걱우걱.
냠냠.
-맛있어? 이제 보니 삼촌 고기 먹을 줄 아는 사람이네. 맛있지? 꽃살이라고 아랫 등심에서 떼어 낸 특수 부위야. 아! 그렇게 말하면 모르려나? 새우살이라고 들어봤지?
[……?!]
이놈 왜 아직 살아 있는 거지?
강유 이놈은 고작 애새끼 하나 처리하지 못하고 뭐 하고 있는 거야.
‘근데 이놈은 언제 내 옆에 온 거야?’
전혀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냄새에 취해 고기를 입에 넣고 씹던 김지훈은 반쯤 넋이 나가 소년을 쳐다봤다.
[마나가 움직이지 않아.]
-내가 차단했어. 그러니까 애쓰지 마. 무기들도 다 내놓고. 누나한테 혼날까 봐 참고 있긴 한데 계속 까불면 나도 내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거든.
[어…….]
[……?!]
[……?!]
[모두 뒤로 물러나!]
이놈 인간이 아니다.
위험해.
강유는 다급한 표정을 지으며 크게 소리쳤다.
마나가 움직이질 않는다.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은 지 혼자 둥둥 떠오르더니 소년의 뒤로 날아갔고.
[이놈 정체가 뭐냐?]
-나? 해피! 아, 이러면 누군지 모르려나? 드래곤이라고 들어 봤어?
[……?!]
[……?!]
[드래곤이라고?]
살아 있는 드래곤이 있었다고?
제기랄.
‘마스터?’
강유는 놀람을 넘어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김연창을 쳐다봤다.
현재 이곳의 최강자는 그였다.
그래서 물어보는 것이었다.
상대할 수 있겠냐고.
그런데,
[……위대하신 존재를 뵙습니다.]
[…….]
[…….]
드래곤이라는 말에 김연창은 바로 무릎을 꿇고 땅에 얼굴을 묻었다.
노예로 잡은 드워프들에게 들었던 드래곤에 대한 인사법이었다.
[마스터님…….]
[꿇어.]
새끼야.
분위기 파악 안 되냐?
마나가 차단됐어!말 한 번에 착용하고 있던 무기는 지 혼자 날아서 빠져나갔고.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아?
김연창은 미간을 찡그리며 강유와 김지훈을 노려봤다.
-안 돼.
[네?]
-일어나라고. 삼촌들이 그러면 누나한테 혼나. 그러니까 얼른 일어나.
[누나?]
하아…….
드래곤이 한 마리가 아니었던 건가?
잘못 왔어. 잘못 왔어.
애초에 이곳에 오면 안 되는 거였어.
김연창은 소년의 눈을 피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일어나겠습니다. 위대하신 존재여. 허락하시면 집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먹어.
[네?]
-다들 배고픈 것 같은데 일단 먹어. 너희의 거취는 누나한테 물어봐야 해.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야.
[……네.]
강유야. 지훈아. 일단 고기부터 먹자.
고기 먹으면서 기회를 엿보자.
애들을 미끼로 시간을 벌면 우리가 빠져나갈 틈이 있을 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
여러 번 해 봤잖아?
김연창은 강유와 김지훈과 눈을 마주치며 장작불에 다가갔다.
오물오물.
냠냠.
‘맛있어.’
이게 지금 맛있을 상황이 아닌데…….
이대로 있으면 황천길인데…….
안해용 놈이 오기 전에 어서 도망쳐야 하는데…….
십 분, 이십 분…… 한 시간.
김연창은 낭패스런 표정을 지으며 계속 고기를 입에 넣었다.
부하들을 방패로 기회를 엿보고 있는데 도무지 틈이 나지 않았다.
도망가면 죽는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기운이 주위를 감싸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