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짓는 영주님-242화 (242/255)

242화. 리치 (10)

‘뭐야! 일왕이 나한테 무릎을 꿇는다고?’

정신이 어떻게 된 건가?

자기가 나한테 무릎을 꿇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건가?

아무리 권력이 없는 왕이라 할지라도 왕은 왕이었다.

그것도 1억 명이 넘는 인구가 있는.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경제와 군사 대국의 왕이었다.

왕이 무릎을 꿇는다는 건 일본이 무릎을 꿇는다는 거와 다름이 없었다.

‘설마 나를 정말 드래곤으로 생각하는 건가?’

해용은 당황했던 것도 잠시 부랴부랴 걸어가 일왕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1초라도 빨리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

그런데 그때,

“영주님께 무릎을 꿇은 건 스카이 캐슬을 일본의 상국으로 그리고 영주님을 황제로 인정했다고 여겨도 될까요?”

이세훈이 느긋하고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다가와 일왕을 향해 질문해 왔다.

한 나라의 왕이 무릎을 꿇고 땅에 얼굴을 묻는 데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니 그것이 당연한 듯 여기는지 위엄까지 서려 있었다.

“야, 이세훈. 이분 일왕이야.”

“알고 있습니다. 영주님. 그래서 묻는 겁니다.”

무시해도 되긴 하지만.

나중에라도 꼬투리 잡히지 않으려면 건국할 때 6개국 이상의 지도자에게 인정을 받아야 하거든.

일왕의 대답을 기다리며 세훈은 해용을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네. 인정합니다. 일본은 스카이 캐슬의 형제국으로서 아우의 도리를 다하며 최선을 다해 모실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위기에 빠진 일본을 도와준 것 역시 잊지 않고 제 자식의 자식. 그리고 또 그 자식의 자식까지 교육하여 은혜를 갚게 할 것입니다.]

“그래야 할 거예요. 지금까지 지원해 준 성수와 미스릴이 적지 않기도 하지만 리치와 싸우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씨익.

다 죽이라고 했는데. 살려서 의아해했는데 이유가 있었네.

이자 진심으로 우리한테 고마워하는 것 같네.

이세훈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일왕 무리를 경호하고 있는 다크 엘프들을 쳐다봤다.

척살.

혹시라도 리치를 해치우고 구심점이 될 것이 염려되어 모두 죽이라 했는데 일왕은 딱 봐도 스카이 캐슬에 매우 우호적인 존재인 듯했다.

그래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세훈 재상. 생색 그만 내고 일단 일어나라고 해야 하지 않겠냐? 한 나라의 왕인 분이야. 게다가 연세도 지긋하신데 이건 예의가 아닌 것 같은데?”

“영주님이 일어나라 명하시면 됩니다.”

째려보지 마라.

네가 좋게 그냥 왕 한다고 하면 나도 안 그러잖아.

네가 계속 안 하겠다고 똥고집 부리니까 나도 어쩔 수 없이 이런 상황을 만드는 거잖아.

이세훈은 어깨를 으쓱하며 해용의 눈빛을 피했다.

계속 마주치고 있기엔 해용의 시선이 너무 따가웠다.

“일어나세요.”

[가, 감사합니다.]

두고 보자. 너.

이세훈한테 따지고 물을 게 많았지만 해용은 일단 일왕의 어깨를 잡으며 자리에서 일으켰다.

그런데 그때,

“대통령님?”

“헐…….”

의외의 인물이 또 게이트 쪽에서 걸어오는 게 보였다.

한국 정부의 수장. 정삼철 대통령이었다.

“마침 딱 맞춰 오셨네요.”

“대통령 정삼철이라고 합니다. 스카이 캐슬의…….”

“에이! 그러지 마세요. 대통령님까지 무릎을 꿇으면 저 영주님한테 맞아 죽을지도 몰라요.”

“그래도…….”

“이세훈 재상 말 듣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근데 대통령님께서 여긴 어쩐 일로…….”

오신 거죠?

아무리 대한민국의 실권을 모두 김용규 본부장이 갖고 있다 해도 이리 쉽게 몸을 움직일 만큼 가벼운 자리에 있는 분이 아니실 텐데?

해용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정삼철 대통령을 쳐다봤다.

“내가 오시라고 했어. 정삼철 대통령님.”

“네.”

“스카이 캐슬을 대한민국의 동맹국으로서 인정하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대한민국은 스카이 캐슬의 동맹국으로서…… 여기 서류로 작성해서 가져왔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로써 2개국의 동의를 받았네요.

귀찮게 해서 죄송해요. 사실 이 서류만 받아도 되는데 해용이 이놈이 계속 안 한다고 버텨서 어쩔 수 없이 모시게 됐어요.

찡긋.

이세훈은 서류를 받으며 정삼철 대통령과 윙크를 주고받았다.

스카이 캐슬을 운영하며 이미 알게 모르게 국정 운영에 대해 의논하며 몇 번이나 만나서 차도 마시고 식사도 같이하며 친분을 다져 놓은 사이였다.

“이런 제가 손님들을 모셔 놓고 계속 세워 두고 있었네요. 이쪽으로 가시죠. 식사를 준비해 놓았으니 밥 먹으면서 얘기하시죠.”

“네.”

“네.”

원하는 것과 원하는 말을 들은 이세훈은 일왕과 대통령을 만찬장으로 안내했다.

* * *

‘아씨. 다 죽여 버리려고 했는데 이놈들은 왜 여기까지 따라온 거야?’

만찬장에 도착한 이세훈은 미간을 찡그리며 일왕의 옆에 서 있는 노란 머리 사람들을 쳐다봤다.

미국과 러시아, 중국…….

일본을 돕기 위해 세계 헌터 협회에서 파견 보낸 헌터들이었다.

[죄송합니다. 죽이려고도 했었는데 판단이 서질 않아 살려 두었다고 합니다. 일본의 대신과 기업인들은 몬스터에게 당한 것처럼 자연스레 처치했는데 저자들까지 죽이면 괜한 의심을 받을 수 있을까 염려되어…….]

이세훈이 심기를 불편해하자 다크 엘프 종족 수장 쿡쿠가 다가와 알아서 먼저 변명하듯 설명해 왔다.

“잘했다고 전해 주세요. 보아하니 도와주러 온 게 아니라 일본의 전황을 살피러 온 것 같은데 저자들이 죽으면 세계 헌터 협회에서 움직였을 테니까.”

입에 로브스터 살을 넣으며 이세훈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A급에서 B급으로 이루어진 지원병들이라 전투력은 별로였지만 괜히 건드렸다간 귀찮은 일이 생길 수도 있었기에.

‘선발대로 보내서 다 죽이려고 했는데 계획을 변경해야겠네.’

이세훈은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식사하는 데 집중했다.

일본 헌터들과 민병대를 리치 레이드 선봉에 서게 하려고 했는데 보는 눈이 너무 많아서 계획을 변경해야 할 듯했다.

예상치 못한 불청객들로 인해 상황이 조금 복잡하게 되었다.

근데 저 새끼들 일왕한테 뭘 자꾸 속닥거리는 거지?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이세훈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일왕의 뒤에 서서 계속 귓속말을 주고받는 헌터를 쳐다봤다.

[재상님, 실례가 안 된다면 여기 있는 이 친구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는데 얘기하게 해도 되겠습니까?]

“이 자리에서요? 일본과 한국 그리고 스카이 캐슬의 지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니 발언권을 달라 이건가요? 궁금하네요. 도대체 무슨 위치에 있기에 이런 무례한 부탁을 하는지?”

“…….”

“…….”

이세훈의 대답에 공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긴 했지만 꾸짖는 말투였기 때문이었다.

“얘기해 보세요.”

[가, 감사합니다. 미국 헌터 협회 사무장 리암이라고 합니다.]

“아! 미국 헌터 협회 사무장님이었군요. 크리스 님은 우리 손에 죽었으니 후임자이신가 보네요?”

“…….”

“…….”

싸가지 없는 새끼가.

고작 사무장 주제에 각국의 수장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하려 한다고?

이세훈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리암을 쳐다봤다.

그리고 이내,

“이세훈 사무장!”

왜 이러나?

그건 서로 암묵적으로 없던 일로 한 건데…… 이렇게 공개적인 자리에서 말해 버리면…….

“앗. 죄송해요. 제가 실언을 했네요. 미국 놈들이 우리 스카이 캐슬에 와서 도모하려 했다가 싸구리 전멸을 당한 건 없던 일로 하기로 했었는데…… 제가 깜빡했네요.”

[…….]

“…….”

그때는 우리가 힘이 없었거든.

근데 이제는 아니거든?

천조국? 세계 경찰 국가 미국?

웃기고 있네.

듣자 하니 라미아랑 타란툴라 때문에 골머리 좀 썩고 있다고 하는 것 같은데?

너희도 성수 필요하지?

그럼 더 고개를 숙여.

싸가지 없게 어른들 식사하는 데 방해하지 말고.

[알량한 재주 몇 가지 생겼다고 세상 무서운 게 없나 보네요. 우리 미국의 인정 없이 스카이 캐슬이 한 국가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알량한 재주? 푸하하하. 네 놈이야말로 우물 안 개구리라고 생각 들지 않나? 하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니 쯧쯧.”

이세훈은 리암을 쳐다보며 혀를 차고 나서 해용에게 시선을 돌렸다.

‘일본의 병력을 줄이지 못하게 됐으니 방법은 하나밖에 없네.’

압도적인 무력을 보여줘서 아예 싸울 의지도 생기지 않게 해 주는 수밖에.

이참에 겸사겸사 세계 헌터 협회에 무력 시위도 한번 하고.

아스날 대륙에선 최대한 감추고 또 감췄지만, 지구로 넘어온 이상 스카이 캐슬의 전력을 숨기는 건 어려웠다.

저 하늘 위, 눈에 보이지도 않는 높은 곳에 수십 대의 위성이 떠돌고 있을 테니까.

미국의 기술력이라면. 어쩌면 지금 식사를 하는 이 모습까지도 관찰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리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지구로 넘어왔을 것 같아? 미국이든. 중국이든 다 상대할 자신이 있어서 넘어온 거야. 그러니 내일 리치 레이드 할 때 똑똑히 봐 둬. 우리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직접 두 눈으로 보게 해 줄 테니까.”

[…….]

“그 이후에도 지금처럼 내 앞에서 고개를 뻣뻣이 들고 눈에 힘을 줄 수 있다면 질문하는 걸 허락하지.”

[흠…….]

성수와 미스릴 말고도 뭐가 더 있는 건가?

미국이라는 이름을 듣고도 왜 이렇게 당당하지?

이세훈의 엄포에 리암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 새끼 나한테 욕먹을 것 같으니까 일부러 정색하는 건가?’

뭐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해?

그런다고 내가 봐 줄 줄 알아?

해용은 조용히 식사하고 나서 은밀히 이세훈을 따라갔다.

* * *

“세훈아, 거기 서라. 마나 팔찌 좀 찼다고 날 따돌릴 수 있을 거로 생각하는 거 아니지?”

“내가 언제 널 따돌리려고 했다고 그래. 하하.”

아나. 그냥 좀 넘어가지.

생각할 것도 많은데 이제 좀 그냥 못 이기는 척하고 왕이 되어주면 안 되겠니. 친구야?

이세훈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가만히 안해용을 쳐다봤다.

“그래? 난 꽁지가 빠지게 뛰어가기에 도망치는 줄 알았지.”

“그럴 리가. 죄지은 것도 없는데 내가 왜 도망을 쳐?”

“죄지은 게 없다? 부성이가 암말도 안하디? 난 분명 왕이 될 생각이 없다고…….”

“왜?”

“뭐라고?”

“왜 왕이 되기 싫은 거냐고.”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내가 누누이 말했잖아.

난 조용히 살고 싶다고.

이렇게 신경전 벌이고 머리 쓰고 사람들이랑 얼굴 붉히는 게 싫다고 자식아.

그냥 농사나 지으면서 여유롭고 편안하게 살고 싶다고!

해용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이세훈을 노려봤다.

이십 년 지기 친구이기에 자신보다도 자신에 대해 더 잘 알 만한 사람이 모르쇠로 나오니 절로 미간이 찡그려졌다.

“난 너한테 조선 시대 왕처럼 살아 달라는 게 아니야. 농사를 짓고 싶으면 농사를 짓고, 낚시하고 싶으면 낚시해.”

“그게 가능할 것 같아?”

영주인 지금도 이렇게 바쁜데?

왕이 돼서 그게 되겠어?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줄게. 난 너한테 조선 시대 왕처럼 살아 달라는 게 아니야. 저기 보이는 일왕처럼 권력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서 국가의 가장 큰 어른으로서 상징적인 존재가 되어 달라는 거니까.”

“일왕이라…….”

“네가 바쁘게 일하고 싶다고 해도. 내가 그렇게 만들지는 않을 거야. 그냥 넌 스카이 캐슬의 건국 왕으로서 그 권리만 누리고 즐기면 된다. 나머진 나와 그리고 전문 교육을 받은 인재들이 운영할 거니까.”

“흠…….”

그렇게만 된다면야 거부할 이유가 없긴 한데…….

그럼 너무 양아치 같지 않은가?

그냥 다 내려놓고 조용히 사는 게 속 편할 것 같은데…….

해용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가만히 이세훈을 쳐다봤다.

“고민할 필요 없어. 네가 아무리 싫다고 해도 그 정도는 무조건해야 해. 나와 그리고 지금까지 생사를 함께한 동료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니까. 그게.”

“…….”

“애초에 너한테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야. 스카이 캐슬에 머무는 모든 사람이 좋아하고 존경을 받고 있으니 구심점 역할만 해 달라는 거야. 그 정도도 안 되겠냐?”

“그런 역할이라면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너 말고는 없어. 지윤미 마스터를 생각해 보긴 했는데. 인간들이라면 몰라도 오크와 엘프. 그리고 다크 엘프. 카프리까지 모두가 통일되게 따르는 사람은 너밖에 없잖아.”

“아…….”

이종족들이 문제구나.

이세훈의 말에 해용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윤미 마스터가 능력도 출중하고 인성도 훌륭하긴 하지만 이종족의 존경과 충성심까지는 얻지 못했기에.

“알았다. 근데 약속 지켜라. 난 정말 권력에는 관심이 없어.”

“꼭 지킬게. 그럼 나 계속 일 진행해도 되는 거지?”

“그래. 근데 하나만 묻자. 미국 사무장한테 왜 이렇게 까칠하게 군거냐? 아까 보니 일부러 시비를 건 것 같은데? 예쁜 놈은 아니지만, 굳이 미국과 척을 지을 필요는 없잖아?”

“척을 지을 필요는 없지. 근데 대한민국처럼 미국에 끌려다니기도 싫었거든. 내가 아니 우리가 만든 스카이 캐슬이라는 나라는 그 어떤 강대국 앞에서도 눈치 보지 않게 할 생각이거든. 그리고 오늘은 그 시작이었고.”

“흠…….”

“그러니 내일 우리의 능력을 숨기지 말고 다 보여줘야 해. 그래야 일개 사무장 따위가 알량한 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으며 우리 지휘부 앞에서 뻣뻣하게 고개를 들지 못할 테니까.”

“……그래.”

알았다.

나도 사실 아까 마음에 안 들기는 했거든.

스카이 캐슬을 무력으로 도모하려 해 놓고선. 눈치를 보지 못 할망정 당당하게 앞으로 나와 질문까지 하려 하니까 꿀밤이라도 때려주고 싶더라고.

씨익.

해용은 빙그레 웃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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