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짓는 영주님-240화 (240/255)

240화. 리치 (8)

‘난 왜 이렇게 바보 같은 거지. 이건 뭐 해용이 형한테도 찍힐 대로 찍히고. 스파이가 돼서 일러바친 거나 다름이 없잖아.’

어휴.

쿵! 쿵!

어깃장을 부리며 떠나가는 해용을 바라보며 이부성은 깊은 한숨을 내 쉬며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안해용한텐 차마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있는 그대로 다 말할 수도 없었고.

그래서 기껏 나온 말이 ‘아무 말도 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였다.

이세훈과 진행하고 있는 비밀도 지키고 해용한테 거짓말을 하지 않기 위해 그런 것인데 어설프게 머리를 굴렸다가 양쪽 모두한테 신의를 잃어버리게 될 상황에 빠져 버렸다.

‘나한테 이리 차갑게 얘기를 하신 적이 없는데…… 정말 화가 많이 나셨나 보네. 빨리 알려야겠어.’

그래야 세훈이 형이 대처를 할 수 있을 테니까.

세훈이 형이라면 분명 이런 상황까지 감안하고 있을 거야.

누구보다 해용이 형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니까.

이부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세훈에게 달려갔다.

1초라도 빨리 자신과 해용이 대화한 내용을 전달해야 이세훈이 대응할 시간이 길어질 테니까.

“세훈이 형.”

헉. 헉. 죽겠네.

“무슨 일 생겼어? 무슨 일이기에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뛰어온 거야?”

“그, 그게 저 때문에 해용이 형이 다 눈치를 챘어요.”

“해용이가 눈치를 챘다고? 어쩌다가?”

“그게 차마 거짓말을 할 수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해 드릴 수가 없다고 하니까 단박에 유추를 하더라고요. 우리가 자기를 왕으로 만들려고 준비하고 있다는 걸.”

“이런! 그래서 어디까지 눈치를 챈 거야? 설마 다크 엘프 얘기까지 한 건 아니지?”

부성아. 그건 진짜 안 된다.

우리가 일본 각료들을 죽이기 위해 암살자까지 보낸 걸 알면 말짱 도루묵이야. 제발 아니라고 말해 줘.

이부성의 말에 이세훈은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을 기다렸다.

“네. 그 말은 안 했어요. 전 진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제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니 해용이 형 혼자 눈치를 채신 거예요. 그리고 이렇게 전하라고 했어요. 건국을 하는 건 도와주겠는데 자신은 절대 왕이 될 생각이 없으니 다른 사람을 알아보라고 하더라고요.”

“휴우.”

다행이다.

괜히 긴장했잖아.

“별일 아니고만. 사색이 돼서 뛰어와 놀랬잖아.”

“별일 아니라고요?”

“다크 엘프 얘기만 하지 않았으면 됐어. 언젠 해용이가 영주가 되고 싶어서 됐나. 상황과 분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맡게 된 거지.”

“흠…….”

“왕도 마찬가지야. 아무리 하기 싫다고 해도 우리가 상황과 분위기를 만들면 하게 될 거야. 그러니까 염려하지 않아도 돼.”

“정말 걱정하지 않아도 될까요? 전 또 제가 실수해서 일을 그르치게 될까 봐…….”

“형만 믿어. 해용이가 왕 되기 싫어하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네.”

역시 세훈이 형이야.

세훈이 형이라면 왠지 다 감안하고 있을지 알았는데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씨익.

이세훈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이부성의 얼굴에 서려 있던 걱정이 사라지고 미소가 가라앉았다.

“근데 이건 무슨 지도에요?”

“보이는 그대로야. 히로시마 지형과 몬스터 분포도가 그려져 있는 지도야.”

“네. 그건 저도 아는데 이걸 왜 보시는 거예요? 리치는 시간을 좀 두고 잡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미국이 투하한 원자 폭탄이 떨어졌던 히로시마.

수십 년이 흐르긴 했지만 다른 그 어느 도시보다 죽음의 기운이 짙게 서린 곳이었다.

그 때문일까?

일본 대륙을 돌아다니며 인간들을 유린하던 리치와 데스 나이트들은 그곳에 터를 잡고 정착하고 있었다.

“그러려고 했는데, 너도 아까 봤지? 딸 잊어 버렸다던 포로.”

“네.”

“그 포로 딸이 히로시마 쪽으로 붙잡혀 간 것 같더라고. 그리고 그 포로 말고도 제법 많은 어린아이가 그쪽으로 납치를 당하고 있는 것 같아.”

“언데드한테 납치를 당하고 있다고요?”

“그렇다네.”

“헐! 설마 뱀파이어 로드 브레드를 소환한 것처럼 어린아이들을 재물로 해서 마계의 문을 열려고 하는 걸까요?”

“그걸 모르겠어. 잡혀간 인원을 보면 이미 마계의 문이 열렸어도 열 개는 열렸을 인원인데 아무런 징후가 없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아서 지도를 보는 중이었어.”

“리치 레이드를 뒤로 미룰 상황이 아니었네요.”

수십 년 전에 마계의 문이 열렸다는 아스날 대륙.

그리고 그로 인해 아스날 대륙은 이종족은커녕 인간들조차 쉬이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몬스터의 땅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아스날 대륙과 게이트 아니 차원의 문이 열려버린 지구까지도 몬스터 웨이브로 고통받고 있었고.

만약 지구에 직접적으로 마계와 연결된 차원의 문이 뚫려버리면 지구도 아스날 대륙처럼 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이부성은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이세훈이 쳐다보고 있던 지도를 같이 바라봤다.

“리치 레이드를 최대한 뒤로 미루고 혼란을 유지하면서 일본을 흡수하려고 했는데 상황이 공교롭게 됐어.”

“그러니까요. 자칫했다간 지구도 몬스터의 땅이 되어 버릴 수도 있잖아요. 빨리 해용이 형한테 알려서…….”

“잠깐만.”

뭐가 이렇게 급해?

“기다려.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어. 그리고 만약 마계의 문을 열려고 아이들을 납치한 거라면 이미 열렸어도 열 개는 열렸을 거야. 그러니 그렇게 급하게 서두를 건 없어.”

“그래도 일단 해용이 형한테 빨리 알려서 출정 준비라도 해 놔야…….”

“그럴까 봐 기다리라는 거야. 히로시마에 가는 길에만 언데드 몬스터가 최하 100만 마리는 있을 거야. 그리고 리치가 있는 곳엔 더 많을 수도 있고. 근데 그 많은 언데드 몬스터를 우리끼리만 상대하려고?”

“언데드의 숫자가 염려돼서 그러는 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 정도 숫자는 미스릴도 있고, 성수도 넉넉하고. 이제 창천의 활까지 생겨서 충분히 상대할 수 있어요.”

언데드 몬스터 따위는 더는 스카이 캐슬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데스 나이트와 리치 역시 마찬가지였고.

헌터들이 언데드 몬스터들을 상대하고 신화급 무구로 무장을 해서 탱커가 된 해용이라면 데스 나이트와 리치 정도는 혼자서 해결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남는 게 뭔데?”

“네?”

“우리가 미스릴이랑 성수를 쏟아부어서 히로시마를 정화하면 남는 게 뭐냐고. 그리고 아무리 상성이 좋은 무기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많은 언데드 몬스터들을 상대해야 하는데 우리는 사상자가 생기지 않을 것 같아? 남의 나라 도와주다가 우리 사람들을 다치게 해야겠어?”

“…….”

그럼 어떡하자고요?

사람들 다치는 게 걱정되니 이렇게 있자고요?

그럼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질 텐데?

이부성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이세훈을 쳐다봤다.

“상황이 공교롭게 됐다고 해서 착각을 했나 본데. 난 아직 일본을 흡수하겠다는 계획을 접지 않았어.”

“……!”

“난 반드시 일본을 흡수해서 해용이를 왕으로 만들 거야.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우린 최대한 병력을 유지해야 해.”

“저도 마음을 접은 건 아니에요. 근데 지금은 병력을 유지하면서 전투 계획을 짤 상황이 아니잖아요?”

“왜 아니야? 위험하고 다급하면 다급할수록 더 계획을 짜야지. 최대한 우리 병력이 상하지 않는 방향으로.”

“그거야 해용이 형한테 알려서 지휘부를 소집하면 알아서…….”

“안 돼. 그들은 절대 내 계획대로 움직여 주지 않을 테니까.”

“네? 이미 계획이 있던 거였어요?”

“그래. 그래서 지금 지도를 보고 있는 거였잖아.”

그러니까 설레발치지 말고 가만히 좀 있어 볼래. 부성아.

그래야 설명을 해 줄 거 아니야.

이세훈은 이부성을 진정시키며 다시 의자에 앉혔다.

“잘 들어. 전령들을 통해 알아보니까 일본 각지에서 아까 그 포로처럼 잃어버린 자식을 찾기 위해 히로시마로 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제법 되는 것 같아. 그리고 겐지를 비롯한 일본 헌터 협회 헌터들도 살아 있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나름 선전하는 것 같고.”

“네. 저도 그건 들었어요. 일본 수뇌부들을 지키고. 또 지역별로 삼삼오오 모여서 연명을 하고 있다고.”

근데 그 사람들은 왜?

“난 그들을 모아서 이쪽으로 데리고 올 거야. 그리고 히로시마 원정의 선발대로 차출할 거야.”

“헐! 그들을 모아서 선발대로 쓴다고요? 강한 부대가 아닌 자들이 선발대로 투입되면 꽤 큰 타격을 받을 텐데?”

“그렇겠지. 근데 자국의 땅과 자식들을 구하러 가는데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지 않겠어?”

그리고 그렇게 되면 우린 최대한 전력을 보존할 수 있고. 반대로 일본의 전투력은 떨어뜨릴 수 있잖아.

어때 내 생각이?

“그렇긴 한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요?”

“난 이미 손에 피를 묻히기로 결심했어. 건국하고 해용이를 왕으로 만들 수 있는 일이라면 망설일 이유가 없거든. 난 너도 나랑 생각이 같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부성아, 계속 그렇게 갈팡질팡하면 안 된다.

빨리 결단을 내려. 네가 그렇게 계속 어정쩡하게 행동을 하면 점점 더 위험한 일이 초래될 거야.

이세훈은 입술을 굳게 다물며 이부성을 지그시 쳐다봤다.

“해용이는 왕이 돼서 성군이 될 거야. 그리고 그렇게 만들기 위해선 누군가는 반드시 악역을 맡아야 해. 그리고 그 악역은 우리가 되어야 하고. 하기 싫으면 지금이라도 말해. 그럼 빼 줄 테니까.”

“아, 아니에요. 할게요.”

해야 하는 일이라면.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면 제가 할게요.

이부성이 입술을 굳게 다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일본인들에게 조금 가혹하긴 하지만 이세훈의 말대로 남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아군의 병력을 위험해 빠뜨리게 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 잘 선택했어. 만약 네가 빠진다고 하면 어쩌나 걱정을 했는데 다행이네.”

“죄송해요. 제가 계속 심려만 끼치네요.”

“아니야. 나도 이런 마음을 결심하는 데까지 제법 오래 걸렸어. 그러니 너도 조급해할 필요 없어. 기다려 줄 테니까.”

“……네. 근데 그럼 이제 전 뭘 하면 될까요?”

“우린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돼. 할 일이 있긴 하지만 그건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거든. 저기 마침 오네.”

이부성과 대화를 하다 말고 이세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막사 밖을 쳐다봤다.

“윤미 누나 부르셨었나 보네요. 근데 옆에 있는 분은 누구지?”

처음 보는 사람인데?

우리 연합 헌터들 중에 저런 미인이 있었나? 어라? 헌터가 아닌가?

마나도 안 느껴지고, 마나 팔찌도 없는데 일반인이 여기까진 무슨 일이지?

이부성은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며 지윤미 마스터와 나란히 걸어오는 여인을 쳐다봤다.

전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아주 평범한 차림의 여인이었다.

“작곡가.”

“작곡가요?”

“응. 노래 하나 만들어야 하거든.”

해용이를 영웅으로 만들 노래.

자리에서 일어난 이세훈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지윤미 마스터를 향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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