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리치 (6)
[내 딸이. 내 딸이 아직 합류하지 않았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살아 있으면 우리가 잘 구출해서 뒤따라 보내 줄 테니까. 그러니 먼저 스카이 캐슬에 가 있으세요.”
[그럴 수 없습니다. 이 줄을 풀어 주세요. 우리를 구출해 주려고 왔다면서 왜 가기 싫다는 사람까지 억지로 보내겠다는 겁니까!]
“거참. 이 사람이. 여기 있다가 좀비한테 전염되면 적이 되어 버리니 그러는 거잖아.”
[자결하겠습니다. 혹시라도 딸을 찾기 전에 전염이 되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테니 제발 이 줄을 풀어 주십쇼. 전 제 딸을 찾아야 합니다.]
“하아…….”
미치겠네. 정말.
그냥 좋게 말로 할 때 가지.
어차피 풀어 줘도 구할 능력도 안 되면서 왜 남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거야.
붙잡은 포로들을 게이트로 보내는 임무를 맡은 태백산맥 길드 부마스터 김현규는 한숨을 내쉬며 포로들을 노려봤다.
딸의 생사가 확인되지 않아 불안해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이해는 되지만 포로들 한 명, 한 명의 사정을 봐줄 여력은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해용이 이미 일본을 적으로 간주했고 노예로 끌고 가는 것이기에.
“영균아.”
“네?”
“저놈 조용한 데로 데리고 가서 입 좀 다물게 하자.”
“……네.”
“미안하다.”
“아니에요.”
어쩔 수 없잖아요.
저리 계속 지시에 따르지 않고 반항하면 통제하는 데 어려움이 많으니까.
[놔라! 풀어 달라니까 우릴 어디로 끌고 가는 거냐!]
“잔말 말고 따라 와. 죽고 싶지 않으면.”
태백산맥의 또 다른 부마스터 김영균은 헌터들을 지휘해 통제에 따르지 않는 포로들을 데리고 인적이 없는 곳으로 끌고 갔다.
계속 소란을 부리면 다른 포로들도 동요할 수 있기에 따로 격리해서 정신 교육을 하기 위해서.
‘마음 약해지지 말자. 스카이 캐슬을 위해서야!’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도착한 김영균은 허리에 차고 있던 몽둥이를 꺼내 들었다.
좋게 말로 해서 따르지 않으니 무력을 행사해 통제에 따르게 하기 위함이었다.
웬만하면 좋게, 좋게 해서 데리고 가려 했지만 이렇게 하는 게 가장 효과도 좋고 빨랐다.
그런데 그때,
“멈춰!”
“세훈이 형님…….”
이세훈이 일행이 도착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그게 통제에 따르지 않아서.”
“아무리 통제에 따르지 않아도 그렇지. 헌터도 아닌 일반인들을 묶어 놓고 때려도 된다고 누가 그랬어?”
“그거야 이놈들도…….”
예전에 우리나라 사람들한테…….
저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거 아닙니다.
저라고 속이 편할 거 같습니까?
근데 저 같은 하급 지휘관이 어쩌겠습니까?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
모두가 싫어하고 꺼리는 일이니 제가 자발적으로 나선 것뿐입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김영균은 잔뜩 불만스런 표정을 지으며 이세훈을 노려봤다.
“풀어 줘.”
“그럴 수 없습니다. 태백산맥 길드는 영주님의 뜻에 따르기로 했고 전 제가 맡은 임무대로…….”
“그럼 죽여.”
“네?”
“너도 책을 보고 영화와 드라마를 봤으면 알 텐데?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했는지?”
“…….”
“왜 죽이지는 못하겠어?”
그래. 넌 거기까지가 한계야.
영균아, 살던 대로 살아라.
괜히 어설프게 못되게 굴어서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폭력을 행사하면 잠시 굴복시킬 순 있겠지. 하나 시간이 지나면 저자들은 지금 당한 일들을 주변 사람들은 물론이고 미국과 중국. 그리고 세계 헌터 협회 사람들에게 알리게 될 거야.”
“흠…….”
“그럼 우리는 물론이고 해용이까지 세계적으로 비난 받는 집단의 수장이 되어 버리는 거지.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어?”
“…….”
“그러니 하려면 제대로 하라는 거야. 괜히 어설프게 패서 해용이와 스카이 캐슬의 이미지 안 좋게 하지 말고 깔끔하게 죽여. 죽은 사람은 반항도 하지 못하고 떠들지도 못하니까.”
“끙…….”
부들부들.
몽둥이를 들고 있는 김영균의 손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애써 독하게 마음을 먹고 지시에 불응하는 포로들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이세훈은 그 이상을 원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면…….’
챙!
잠시 갈등하던 김영균은 끝내 몽둥이를 땅바닥에 내려놓고 검을 빼 들었다.
한 발자국.
‘미안합니다.’
두 발자국.
‘그러게 그냥 조용히 따라갔으면 좋았잖아요.’
세 발자국.
김영균은 입술을 굳게 다물며 포로들에게 걸어갔고.
주르륵.
주르륵.
그의 눈에선 쉼 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스카이 캐슬을 위해서 마음을 굳게 다잡고 있었지만 아무런 죄 없는 사람을 해쳐야 한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흘러내리는 건 어떻게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영균아 거기까지만 하자.”
“해용이 형님.”
이번엔 안해용이 나타났다.
포로 수송이 잘 되고 있는지 확인하러 왔다가 이세훈이 왔다고 해서 찾아온 것이었다.
‘마침 딱 왔네.’
이세훈은 미소를 지으며 등을 돌려 안해용을 쳐다봤다.
“내가 오고 있는 걸 알고 있었다는 얼굴이네?”
“어.”
“그럼 영균이한테 한 말은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을 테고?”
“그치.”
이세훈은 안해용을 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딱히 숨기고 감출 대화가 아니라 영주인 해용이 다가오는 걸 보고 일부러 더 크게 얘기한 거였기에.
“알게 해 주고 싶었거든. 네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
“난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넌 전쟁을 선택했어. 그리고 전쟁은 지금 네가 보는 것처럼 무고하고 힘없는 사람들까지 해칠 수밖에 없어. 괜히 정에 이끌려 살려 뒀다가 우리에게 위협이 될 수 있으니까.”
“그래도 이건…….”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선 앞으로 이런 일들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일어나게 될 거야. 그러니 넌 그냥 모른 척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하아…….”
이게 아닌데…….
내가 원했던 것 이런 게 아니었는데…….
난 그저 과거의 과오를 뉘우치지 않는. 일본의 제국주의자들을 혼 내주고 정당한 배상을 받고 싶었던 건데…….
이세훈과 대화하며 깊은 한숨을 내쉰 해용은 이내 김영균을 쳐다봤다.
그의 눈에선 여전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내가 너한테 몹쓸 짓을 했네.”
“아닙니다. 형님. 전 스카이 캐슬을 위해서. 그리고 형님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울고 있잖아. 여기까지만 하자.”
이러려고 일본을 혼내 주겠다고 한 게 아니거든.
나 혼자 잘 먹고 잘살려고 그런 게 아니라 스카이 캐슬에 머무는 사람들이 웃으며 행복하게 살게 해 주려고 그런 결정을 내린 건데 넌 지금 울고 있잖아.
해용이 반쯤 넋이 나가서 김영균을 쳐다봤다.
구시다 신사를 부수며 일본인들이 많이 다치고 상했을 땐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김영균의 눈물을 보는 건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너무 아팠다.
잊고 있었다.
아무리 돈이 많고. 힘이 있어도 반드시 행복해진다는 보장은 없다는 걸.
지금 김영균의 표정은 너무 슬프고 아파 보였다.
“이제 와서 뭐 하자는 거야? 설마 여기서 멈추겠다는 건 아니지?”
“……안될까?”
“마음 독하게 먹은 거 아니었어? 아니 넌 독하게 마음먹을 것도 없어. 넌 그냥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몬스터만 때려잡아. 나머진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그런 넌 행복하냐? 마음이 편해?”
“난 괜찮아. 내 얼굴 안 보이냐? 전쟁이란 게 원래 이런 거야. 지금이야 살짝 죄의식도 생기고 그렇지만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질 거다. 그리고 전쟁에 이기면 지금 내 행보가 다 사람들에게 칭송받게 될 테고. 과정이야 어떻든 부유해진 스카이 캐슬에 내가 일조를 하게 된 것이니까.”
“내가 싫다. 스카이 캐슬이 부유해져도 난 내 친구가 이런 미치광이 살인마가 되는 게 싫다.”
“내가 괜찮다는데…… 왜 그러냐? 넌 그냥 모른 체하고 가만히 있어. 내가 다 알아서…….”
“여기까지. 그냥 리치만 잡고 돌아가자.”
“하아…….”
이세훈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안해용을 쳐다봤다. 아니 그의 시선은 포로들에게 가 있었다.
‘잘 듣고 있죠?’
우리 영주님이 그냥 돌아가자고 한 거.
나는 당신들을 죽이려 했지만, 우리 영주님이 당신들을 살려 준 거예요.
“지윤미 마스터님.”
“네?”
“그렇게 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저흰 언제나 영주님의 뜻을 존중합니다. 영주님이 나아가자고 하면 같이 나아가고 멈추자고 하면 멈출 거예요.”
“고마워요. 그럼 마스터들에게 연락해 주세요. 더 이상의 약탈을 금지해 달라고.”
“네, 알겠어요.”
무서운 사람.
일부러 그런 거였구나.
영주님이 오고 있는지 알고 일부러 더 잔인하게 굴었던 거야.
어차피 영주님이 말릴 거라는 걸 알고. 영주님의 착한 심성을 일부러 자극한 거야.
지윤미는 해용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해용이는 너그럽고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해요. 그래야지. 일본인의 영웅이 돼서 존경을 받게 될 테니까.’
겉으론 해용의 결정에 불만을 가진 듯하지만, 일부러 상황을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설득과 회유가 아니라 상황을 더 극대화해 역으로 마음을 돌리게 한 것이었다.
해용에게 덧씌워질 뻔했던 악역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빼앗으면서까지.
“젠장! 사람 한껏 들뜨게 해놓고 여기서 멈추라니. 입맛만 버렸네.”
“세훈아!”
“알았어. 알았다고 새끼야. 돌려보내면 되잖아. 이 사람 딸 잃어버렸다는데 그 딸까지 찾아주리?”
“……그래 줄 수 있냐?”
“시키면 해야지. 내가 힘이 있냐? 변덕이 죽 끓듯 하지만 영주가 시키는데 해야지.”
아저씨 잘 보고 계시죠.
전 하기 싫은데 영주가 시켜서 억지로 하는 겁니다.
그러니 돌아가서 소문을 내야 해요.
“영균아 가자. 이놈 딸 찾으러.”
“……네.”
이세훈은 잔뜩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태백산맥 헌터들과 함께 다시 포로들이 모여 있는 집결지로 걸어갔다.
“이봐.”
[……네?]
“운 좋은 줄 알아. 영주님이 살려주라고 해서 살려도 주고 딸도 찾아 주려고 가는 거니까.”
[네.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꾸벅.
“나한테 그럴 필요는 없고. 난 너희 놈들이 별로 마음에 안 들거든. 그러니 조심히 행동해. 눈에 거슬리거나 더는 날 귀찮게 하면 그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릴 테니까.”
[……네.]
나한텐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해용이한테 고마워하라고.
난 이제 제대로 악역이 될 생각이거든.
집결지로 걸어가는 이세훈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스산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야!”
[네?]
“좀 맞자.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론 분해서 안 되겠다. 너희 같은 버러지 같은 놈들 때문에 스카이 캐슬의 재상인 내가 영주님한테 꾸지람을 들었잖아.”
퍽!
[읔.]
퍽!
[읔.]
퍽!
[읔.]
이왕 나쁜 놈이 되기로 했으면 제대로 해야지.
그래야 해용이한테 감사하는 마음이 더 커질 테니까.
몽둥이를 꺼내 포로들을 구타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