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짓는 영주님-237화 (237/255)

237화. 리치 (5)

“우리가 안 나섰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까딱하면 또 일본만 좋은 일 시킬 뻔했어요.”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직접 보셨잖아요. 대한민국에 저지른 만행의 죄를 묻는다며 자원 약탈을 지시하고 사람들을 붙잡아 오라고 해 놓고선 너무 쉽게 허락해 주잖아요.”

“그거야, 재상님께서 아버님 얘기를 하고. 청방과 비교하며 쓰레기가 되지 말자고 하셔서 마지못해 허락해 주신 것 같은데…….”

왜 짜증을 내시는 거지?

뭐가 마음에 안 드시는 거지?

원하는 대로 된 거 아닌가?

지윤미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이세훈을 쳐다봤다.

“그래서 하는 말이에요. 전쟁마저 불사하겠다는 놈이 그런 되도 않은 이유로 지원을 허락해서. 죄를 묻고 벌을 내리려 한 게 아니라 제대로 사과받고 싶었던 모양이네요.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요.”

휴우.

김용규 본부장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가는 이세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네? 그게 왜 큰일인 거죠? 당연히 일본은 우리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그럼 다 용서해 줬을 테니까요.”

“……?”

“저놈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요. 마스터님도 보셨다면서요. 오크의 숲에 처음 갇혔을 때 자기들끼리 살겠다고 도망치려 했던 유거성과 헬퍼들에게 밥을 해 주고 또 잘못을 뉘우치자 중용까지 했다면서요.”

나 같았으면 바로 열나게 패 버리고 가둬 버렸을 텐데.

그게 말이 되나요?

결과가 좋았기야 망정이지. 쯧쯧.

이세훈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헬퍼님들이야 원래 우리 사람이고 몬스터에 대한 두려움에 한순간에 판단을 잘못한 거니까…….”

“일본이라고 다를 거 없어요. 해용이 저놈은 분명 일본이, 그리고 일본 국민이 진심 어린 사과를 하면 다 용서해 줄 거예요. 그리고 그때부턴 약탈과 파괴가 아닌 켄트 왕국과 다크 엘프 종족을 도와준 것처럼 지원해 주려 들었을 거예요.”

“흠! 그럼 좋은 거 아닌가요? 지금처럼 암계를 쓰는 것보다 자비와 포옹을 통해 연합에 가입시키는 게 더 좋을 텐데…….”

“마스터님도 마찬가지네요. 사람들이 다들 왜 이렇게 순수한지.”

쯧쯧.

이래서 내가 없으면 안 된다니까.

“자비와 포옹만으로 일본이 우리 밑으로 들어올 것 같나요? 물론 우리가 성수와 식량을 지원해 주고 리치와 데스 나이트를 토벌해 주면서 지금이야 그런 마음을 가질 수도 있겠죠. 하나 정국이 안정되면 그 마음은 눈 녹듯 바로 사라질 거예요.”

“아…….”

켄트 왕국, 다크 엘프족과 일본은 그 상황이 달랐다.

몬스터들만 해결되면 일본은 여전히 대한민국보다 더 많은 인구와 영토를 가진 큰 나라였으니까.

“무슨 말인지 이해되셨죠?”

“네.”

“그럼 지윤미 마스터님이라도 이제부터 마음 단단히 먹으세요. 해용이 저놈이 변덕을 부려도 흔들리지 않게. 우린 지금 일본을 도와주기 위해 성수와 식량을 나눠 주는 게 아니에요. 복속시키기 위해서지.”

“네, 알겠어요.”

“믿겠습니다.”

“네.”

이 정도면 됐겠지.

세훈은 지윤미에게 다시 한번 다짐을 받고 저 멀리 안절부절못하며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김용규에게로 걸어갔다.

“본부장님. 저 왔습니다.”

“오! 이세훈 재상. 그래. 영주님한테 얘기해 봤나?”

“네. 성수와 식량을 지원하는데 허락을 받았습니다.”

“오! 그래! 잘됐네. 잘됐어. 역시 자네라면 해낼 줄 알았네.”

와락.

다행이다.

혹시나 하고 도움을 요청을 했는데 이세훈 재상이 영주님을 설득해 주었군.

이런 식으로 약탈을 일삼으면 바로 전쟁이야. 전쟁이 나는 건 어떡해서든 막아야 해.

김용규는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던 것도 잠시 반색하며 이세훈을 부둥켜 안았다.

“근데 당분간은 빼앗긴 문화재를 되찾으면서 자원과 사람들을 좀 끌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 해용이 의지가 너무 완고해서 한 번에 뜻을 꺾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시간을 두고 조금씩 설득해 나가야 할 것 같아요.”

“그래. 알았네.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그럼 난 자네만 믿고 기다리겠네. 부디 영주님을 설득해 주게. 이런 식으로 영토침탈을 하면 분명 나중에라도 큰 사달이 나고 말 거야.”

“네, 알겠습니다. 그럼 성수와 식량은 재난 관리 본부에 인계할 테니 본부장님이 잘 나누어 주세요. 그리고 어련히 잘하시겠지만 해용이를 욕하는 사람이 없게 선전하는 것도 잊지 마시고요.”

해용은 어질고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일본 정부조차 해결하지 못한 몬스터를 처치하는 것은 물론이고 죽음의 위기에 빠졌던 일본인을 구해 준 영웅이 무조건 되어야 했다.

그래야 일본인들이 스스로 해용에게 무릎을 꿇게 될 테니까.

‘……스카이 캐슬의 주인을 뵙습니다.’

수십, 수백만 명의 일본인들이 해용에게 무릎을 꿇고 인사를 하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 등이 찌릿했다.

“본부장님만 믿겠습니다.”

세훈은 빙그레 웃으며 김용규를 쳐다봤다.

“그래. 알았네. 네 일본 각료들에게 전달할 때 확실하게 주지를 시키겠네.”

“각료들이 어디 있는지 위치 파악은 해 두신 거죠?”

“그러네. 리치와 데스 나이트. 그리고 언데드 군단이 너무 막강해 다들 숨어 있긴 하지만 어떡해서든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다들 부지런히 노력하고 있다네.”

“다행이네요.”

땅덩어리가 커서 일일이 찾아다니려면 시간 좀 걸렸을 텐데 덕분에 한결 수월해졌습니다.

“그럼 전 포로들에게 가 보겠습니다.”

“포로들한테?”

“네. 일본인이긴 하지만 대한민국에 저지른 만행을 부끄러워하고 미안해하며 사는 사람들도 많거든요. 그 사람들까지 다 강제로 영지로 끌고 가는 건 아닌 것 같아서요.”

“오! 그래. 그렇지! 그런 사람들을 선별해 영주님과 만나게 한다면 영주님도 조금이나마 화가 풀리시게 될 거야. 좋은 생각이네. 그럼 나도 이곳은 안심하고 자네한테 맡길 테니 잘 부탁함세.”

“네.”

김용규는 사막에서 길을 잃어 헤매다가 오아시스라도 발견한 거처럼 해 맑은 미소를 지으며 재난 관리 본부 소속 헌터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이세훈을 믿고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하지 않기 위해, 성수와 식량을 갖다주기 위해서.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역시 해용이의 허락 없인 움직이기 힘든 건가?”

다크 엘프들을 꼭 설득시켜야 하는데…….

잠시 김용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세훈은 다크 엘프 종족이 자리 잡은 섹터를 바라봤다.

그리고 이내,

‘혼자? 아님 은신을 하고 따라오고 있는 건가?’

저 멀리 뛰어오고 있는 장지원 마스터가 보였다.

“어떻게 되셨어요? 쿡쿠 님은…….”

[옆에 있습니다. 수하들과 함께요.]

“오! 와 주셨군요.”

이 정도였나?

나름 수련을 한다고 했는데도 느끼지 못할 정도라니.

선홍색의 마나 팔찌.

재상의 권력과 자금으로 코어를 구해 S급에 이르는 마나를 팔찌에 충전을 시켜 놓았지만 바로 옆에 왔어도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어.

이세훈은 감탄사와 함께 미소를 지으며 목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봤다.

“힘든 결정이셨을 텐데, 저희의 뜻을 따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가 생각하기에도 스카이 캐슬과 영주님을 위하는 일이라 판단됐습니다.]

영주님이 황제가 되어야 우리의 안전이 더 견고하고 오래 갈 테니까요.

[재난 관리 본부 소속 헌터들을 따라가 각료들을 암살하면 되는 거죠?]

“네. 맞습니다. 단, 누군가에게 살해를 당했다는 건 최대한 숨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인원도 최소화해야 하고요. 우리 쪽에 우호적인 성향을 지닌 이들은 살려 두는 게 더 도움이 될 테니까요.”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차원이 다르긴 하지만 이곳 아스날 대륙의 왕국들도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공작과 암계를 펼쳤습니다. 그리고 우리 다크 엘프 종족이 가장 잘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미 경험이 있다는 건가요?”

[네. 정적에게 밀려 자리가 위태로운 권력자들이 몇 번 저희에게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 종족의 안위를 약속했었죠.]

“근데 왜? 사막에? 설마 실패를…….”

[성공했습니다. 다만 한 왕국의 왕이라고 해도 저희를 공개적으로 포용하는 건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워했습니다. 상황이 바뀌면 저희의 존재가 언제든 약점이 되고 상대가 반역할 수 있게 하는 명분이 되니까요.]

“아…….”

[그래서 한 가지만 더 약속해 주셨으면 합니다.]

“말씀하세요.”

[혹시라도. 만에 하나라도 저희의 존재로 인해 영주님이 곤란한 상황에 빠져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됐을 때 재상님과 그리고 여기 계신 두 분의 마스터님이 저희 편에서 서 주셨으면 합니다.]

“당연하지요. 만약 그런 상황이 생기면 전 다크 엘프 종족의 편에 서서 힘을 보탤 겁니다. 한데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도 그런 상황이 생기질 않길 바랍니다. 하나 세상사는 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일이죠.]

“맞습니다. 근데 아무리 세상사가 쉼 없이 바뀌어도 제국의 개국 공신들을 함부로 음해하고 공격하는 간 큰 자들은 많지 않을 거예요.”

[네? 개국 공신이요?]

“당연한 거 갖고 뭘 놀래십니까? 그동안 이 땅에 있는 왕국들은 다크 엘프 종족을 부담스러워했을지 모르나 저흰 아닙니다. 제가 계획한 대로 해용이 황제가 되어 제국을 선포할 때 다크 엘프는 제국의 개국공신으로 그 옆자리를 함께하게 될 겁니다.”

[헐…….]

[헐…….]

개국 공신이라니.

“원하시면 서류로 남겨…….”

[아닙니다. 믿습니다. 재상님이 지시하신 대로 반드시 임무를 완수하고 오겠습니다.]

“네. 부탁드릴게요. 직접 가시는 건 아니죠? 쿡쿠 님이 안 계시면 해용이가 의심할 수도 있어요.”

[제 아들 다스라고 합니다. 저만큼이나 은신술이 뛰어난 아이입니다. 이 아이와 다크 엘프 종족 최정예 전사들이 갈 겁니다.]

“이쪽에 있나요?”

“네.”

장지원의 오른쪽을 보며 얘기를 하던 이세훈이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스 님 잘 부탁드립니다.”

[목숨을 걸고 임무를 완수시키겠습니다. 혹여나 발각되면 자진으로…….]

“그러지 마세요. 임무도 중요하지만, 여러분의 목숨이 더 중요합니다. 발각되면 무조건 도망치세요. 그리고 추가 명령을 기다리시면 돼요. 상황이 바뀔 것을 감안해서 플랜 투도 준비해 놓았으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출발하세요.”

[네.]

다스와 백여 명의 다크 엘프 종족 전사들이 입술을 굳게 다물며 고개를 끄덕이고 이내 성수와 식량을 지원해 주기 위해 준비하는 재난 관리 본부 소속 헌터들에게 스며들었다.

“그럼 우린 이제 포로들 선별하러 가죠.”

“……네.”

“……네.”

“다들 표정이 왜 그러죠?”

“아, 아니에요.”

플랜 투까지 준비가 되어 있다니.

도대체 언제부터 나라를 세울 준비한 거지?

설마 지금 이 상황까지 다 예상하고 있었던 건가?

“아니긴. 표정 좀 푸세요. 나 지금 은밀한 일을 하고 있다고 얼굴에 다 쓰여 있으니까. 해용이 그놈 눈치가 빠르니 표정 관리도 신경 좀 써 주세요.”

“……네.”

“……네.”

탁탁!

탁탁!

지윤미와 안지현은 손으로 얼굴을 쳐서 근육을 풀어 주며 이세훈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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