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짓는 영주님-235화 (235/255)

235화. 리치 (3)

“세훈이 형, 우리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요?”

“왜? 마음이 불편해?”

“네. 솔직히 편치가 않네요. 일본이 과거에 우릴 침략한 건 맞지만, 저들은 우리와 같은 일반 서민들일 뿐이잖아요.”

이부성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게이트로 가기 위해 차에 타고 있는 일본인들을 쳐다봤다.

가여웠다. 그리고 또 불쌍했다.

나라와 국적을 떠나서 몬스터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고 지인들마저 잃은 힘없는 사람들을 노예로 끌고 가는 모습을 보는 게 편치가 않았다.

저들은 아무런 죄가 없다.

죄가 있다면 대한민국을 쳐들어왔던 과거의 일본인들과 역사를 조작하고 숨기려 했던 수뇌부들에게 해야 할 것 같은데…….

“그치. 저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겠냐. 저 사람들도 너나 나처럼 정치에 관심도 없고, 먹고 살기 바빠서 투표조차 하지 않은 사람들도 태반일 텐데 말이야.”

“……?!”

“왜 그렇게 쳐다보냐?”

“아니 형도 저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몰랐어요. 형이라면 당연히 해용이 형을 응원하고 도와줄 줄 알았는데…….”

이부성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이세훈을 쳐다봤다.

인정이 없고 냉혈한 재상.

피도 눈물도 없는 철혈의 재상.

애써 쉬쉬하고 있지만, 이세훈은 지휘부는 물론이고 영지민한테도 그리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화목하게 어울리게 하며 영지를 발전시키려는 해용과 달리 이세훈은 견제와 경쟁을 부추기며 운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에 보이는 게 전부라면 당연히 해용이를 응원했지.”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해용이는 너무 마음이 약해.”

“마음이 약하다고요? 지금 저 모습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세요? 전 제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데. 제가 아는 해용이 형은 절대 힘없고 약한 사람을…….”

“도와주고 있지.”

“네?”

어딜 봐서 도와주고 있다는 거야?

이능도 없는 일반인들을 밧줄로 묶어서 차에 태우고 있는 거 안 보이세요? 저기 아이들이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눈물이 날 지경인데…….

도대체 뭘 보고 있는 건가요?

이부성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이세훈을 쳐다봤다.

“목숨을 구해 줬잖아. 저 사람들 이대로 있었으면 얼마 버티지 못했을 거야. 몬스터도 몬스터지만 식량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이십만 에 이르는 병력이 게이트를 통과해 일본으로 넘어왔다.

인원이 인원이다 보니 한끼 식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식자재가 필요했고 모든 양을 다 영지에서 조달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현지에서 조달할 수 있을까 싶어서 수색을 지시했는데 나오는 게 없었다.

굳이 강경하게 진압하지 않았더라도 시간을 두고 기다렸으면 알아서 항복할 상황이었던 것이다.

죽는 것보다는 조금 고될지언정 켄트 왕국으로 가는 게 나을 테니까.

“그건 그렇지만, 우리가 저들을 데리고 가는 건 광산과 성벽을 짓기 위해 노예로…….”

“해용이가 과연 지금 이 마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 마스터들. 그리고 헌터들 죄의식 생길까 봐 역사를 운운하며 혼자 짊어지려고 하는 놈인데?”

“……?!”

“장담컨대 저놈 얼마 못 가. 리치를 해치우고 몬스터를 다 해치우면 마음 약해져서 청방 길드 포로들과 같은 대우를 해 줄 거야.”

“오!”

“그럼 마스터들은 지금 너처럼 반색하고 좋아하며 알았다고 하겠지. 영주의 명령에 자원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잡아 와 노예로 부리는 게 편치 않았을 테니까.”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20년을 함께한 친구다.

이세훈은 이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 안해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은 위기에 빠지고 궁지에 몰리면 인성이 나오기 마련이고 그간 함께한 경험으로 미루어 봤을 때 해용은 절대 모질지 못한 인간이었다.

1인분에 15,000원짜리 소고기가 비싸다며 8,000원짜리 돼지고기를 사 먹으면서 정작 집에 갈 때 연로하신 노인이 길에서 과일과 야채를 팔고 있으니 몇만 원을 들여서 그걸 싹 사버리는 인간이었으니까.

다 먹지도 못할 거면서.

어찌 그런 사람이 힘없는 노인과 아이들을 노예로 부릴 수 있겠는가.

잠시 잠깐 모진 마음을 먹을 순 있겠지만 유지는 하지 못할 듯했다.

“역시! 전 그것도 모르고 해용이 형을 오해했네요. 젠장. 전 아직 멀었나 봐요.”

“자책할 거 없어. 지금의 해용이는 정말 마음을 독하게 먹은 것 같으니까. 근데 다만 천성이 착하고 어진 놈이라 그 마음을 유지할 수 없을 거라는 거야.”

“아무튼 저 사람들을 챙겨 줄 거라는 거에는 변함이 없는 거잖아요.”

“그치. 그러니까 우리가 도와주자. 해용이 성격상 이번 일로 앞으로 두고두고 죄의식을 갖고 살아갈지도 모르니까.”

“네. 알겠어요. 그럼 제가 뭘 하면 돼요?”

“일단 마스터들부터 만나야지. 지윤미 마스터 있는 데로 갈 테니까 넌 지원이 형을 찾아서 데리고 와 줘.”

“네, 알겠어요!”

후다닥.

“자식. 좋아하기는. 어쩜 저리 해용이랑 똑같을까. 근데 어쩌냐. 부성아. 난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닌데.”

이부성을 바라보는 이세훈의 눈이 스산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미안한데 친구야. 넌 독해지면 안 돼. 그럼 나중에 국가를 선포하는 데 어려움이 많거든. 지금처럼 착하고 어진 영주로 있어 줘. 나쁜 역할은 내가 할 테니까.”

그래야 왕이 될 수 있을 테니.

지윤미의 막사를 향해 걸어가는 이세훈의 얼굴에 빙그레 미소가 그려졌다.

* * *

“지원이 형, 세훈이 형이 은밀하게 모셔 오래요.”

“은밀하게? 세훈이가?”

이 새끼 또 무슨 꿍꿍이인 거지?

해용이 꼬드겨서 자원 약탈하고 사람들 노예로 끌고 가는 걸로 만족이 안 된 건가?

이세훈이 불렀다는 말에 장지원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이번 일의 주범. 원흉.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해용이 이런 결정을 하게 된 계기가 모두 이세훈 때문일 거라고.

“무슨 일인데? 안 가면 안 되나?”

“스카이 캐슬 연합의 재상으로 부르는 거예요. 무슨 일인지는 가 보시면 알게 될 거예요.”

“……그래.”

가기 싫지만 재상님이 부르시면 가야지.

그래야 갑옷 하나라도 더 보급받을 수 있을 테니까.

장지원은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이부성을 따라 지윤미 마스터의 막사로 걸어갔다.

이세훈은 이능이 없는 헬퍼였지만 그의 부름을 무시할 수 있는 마스터는 없었다.

처음엔 영주인 해용의 신뢰를 기반으로 영지 일을 맡기 시작했지만, 지금은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마스터들의 인정을 받아 스카이 캐슬의 재상이 되어 있었으니까.

영지 일을 주관하는 중역 대부분이 그가 발탁해서 데리고 온 사람들이었고 켄트 왕국의 화폐까지 만들고 또 유통하며 자금까지 담당하고 있었다.

영주인 안해용이 없어도 영지는 운영이 되지만 이세훈이 없으면 마비가 될 정도로 많은 일을 담당하고 또 진행하고 있었다.

“오셨어요.”

“오셨어요.”

“안지현 실장님도 있었네요.”

“네. 재상님이 부르셔서 왔어요.”

이부성을 따라가니 막사 안에 지윤미 마스터와 안지현이 실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 오셨으니까 시작하겠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을 은밀하게 모신 이유는 현재 해용이의 행보가 위태롭다고 판단돼서입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근데 어쩌겠냐. 해용이가 저리 강경하게 나오는데 따를 수밖에. 그리고 왜 이제 와서 딴소리야. 네가 해용이 부추겨서 저렇게 만든 거 아니었어?”

“그럴 리가요. 전 해용이처럼 순수한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순수한 사람이요?”

“뭔 또 개소리야? 해용이가 순수해서 저러고 있다?”

순수한 사람이 건물 다 때려 부수라고 시키고. 노인은 물론이고 울고 있는 아이들까지 다 잡아 오라고 시키냐?

장지원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세훈을 노려봤다.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제가 봤을 땐 순수해서 저러는 것 같거든요. 참 많이 고민했을 겁니다. 일본을 아무런 대가 없이 도와주자니 그동안 당한 게 억울하고. 그렇다고 안 도와주자니 사람들 다 죽을 것 같고. 그래서 과거에 대한 복수 그리고 보상을 받는 걸로 결론이 내린 모양인 것 같더라고요.”

“그걸 누가 몰라? 그래서 어떡하자는 건데? 해용이 명령을 어기고 항명이라도 하자는 거야?”

“그러면 쓰나요. 가뜩이나 힘들어하는데 항명까지 하면 바로 멘탈 나가 버릴 텐데.”

왜 이렇게 까칠해?

설마 운영비 안 올려 준다고 이러는 건 아니겠지?

이세훈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스카이 캐슬 연합에서 가장 약한 길드의 마스터였지만 장지원을 상대하는 건 늘 껄끄러웠다.

무력은 약할지 모르나 다른 길드의 마스터들은 물론이고 영지민과 카프리에게 해용 못지않은 신뢰와 사랑을 받는 인물이었으니까.

“뭐야? 정말 네가 해용이 부추긴 거 아니었어?”

“아시잖아요. 제가 때론 사악한 짓도 하고 깐깐하게 굴 때도 있지만 형님이랑 옆에 계신 지윤미 마스터님한테는 거짓말 안 한다는 거.”

“장지원 마스터님. 현재 상황이 불만인 건 아는데 진정하시고 우리 재상님의 말을 들어 봐요. 보아하니 영주님과는 생각이 다른 모양인 것 같은데.”

지윤미 마스터가 차분한 말투로 장지원을 달래며 이세훈을 지그시 쳐다봤다.

‘세훈이 오빠가 도와주면 막을 수 있어.’

그녀 역시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하나 해용의 뜻이 너무 강경해 따를 수밖에 없었고 왠지 이세훈이라면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생겼다.

몬스터와 전쟁을 통해서 영토를 넓히는 게 영주인 해용과 자신들이라면 그 영토를 안정적으로 개발하고 정착을 시키는 건 모든 그의 능력 덕분이었으니까.

“감사합니다. 마스터님. 그럼 제 생각을 말씀드릴게요. 일단 사람들을 영지로 데려가는 건 찬성입니다. 하나 지금처럼 과격한 방법은 안 됩니다. 몬스터의 위협을 받으며 이제 곧 식량까지 떨어져 가는 사람들을 구해 주며 욕까지 먹을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거야, 영지 개발을 하려고 노예로…….”

“돈을 줄 겁니다. 청방 포로들처럼 월급도 주고 집도 주고 다 하겠습니다. 해용이가 반대를 하면 제가 제 목숨을 담보로 협박이라도 해서 뜻을 관철할 테니 다른 길드에게도 전달해 주세요.”

“정말? 그렇게 할 수 있겠어?”

“네. 어차피 한 번에 큰돈이 나가는 것도 아니고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 조달해 보겠습니다. 그러니 그 부분을 헌터들과 또 김용규 본부장에게 전달해서 널리 알려 주십쇼. 그렇게 되면 무력 충돌을 최대한 줄일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하면 우리도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긴 하는데. 그렇게 해서 네가 아니 스카이 캐슬 연합에서 얻는 이익은 뭔데? 너 아무런 대가 없이 사람들 도와주고 막 그런 스타일 아니잖아.”

“물론이죠. 전 해용이처럼 호구가 아니니까요. 제가 이러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복수도 좋고, 전쟁 배상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게 의미가 있나 싶더라고요.”

“엥?”

“……?!”

돈 귀신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아무런 대가 없이 일본을 돕자고 할 위인이 아닌데.

지금 출정한 인원들 먹는 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자금이 깨질 텐데…….

지윤미와 장지원이 당황스런 표정을 지으며 이세훈을 쳐다봤다.

“어차피 일본이 우리 스카이 캐슬 연합의 일원이 되면 일본의 모든 것이 다 우리 것이 될 텐데 말이에요.”

“헐…….”

“헐…….”

“설마 그 말은…….”

“네. 맞아요. 전 스카이 캐슬의 이름으로 일본을 가질 생각입니다. 그러니 사람들 괴롭히지 마세요. 힘들게 자원도 약탈하지 마시고. 내 백성, 내 땅이 될 곳인데 괴롭히고 부숴 놓으면 달래고 복구할 때 힘들잖아요. 흐흐.”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이세훈은 함박웃음을 짓고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마스터들과 눈을 마주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