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리치 (1)
“모습을 드러내세요.”
[……네.]
십여 명의 다크 엘프들이 정체를 드러냈다.
S급에 이르거나 그에 준하는 다크 엘프 종족 최강의 전사들이었다.
수백 년 만에 종교의 자유를 허락한 군주 해용을 보호하기 위해 실력과 충성심을 시험해서 추리고 추린 최정예 인원이었다.
[……면목 없습니다.]
다크 엘프 수장 쿡쿠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자책하실 거 없습니다. 엄마들을 속이는 건 쉬운 게 아니니까.”
[……?]
“저도 이 상황이 믿기지 않지만 어쩌겠습니까.”
느껴진다는데.
이해하려 하지 마세요.
그냥 저처럼 그러려니 하면 편해질 거예요.
비밀 조직으로 운영해 보려고 했는데…….
쿡쿠 만큼이나 해용도 허망한 표정을 지으며 행주 부대 부대원들을 쳐다봤다.
“제가 실수한 건가요?”
혹시 비밀이었나?
행주 부대를 너무 무시하는 것 같아서 활을 쏘기 전에 조금이나마 실력을 보여 주려고 한 건데…….
권수정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눈치를 살폈다.
“실수는 무슨. 아니야. 그럼 이제 활을 얼마나 잘 쏘는지 확인해 볼까?”
“네.”
착! 착! 착착!
착! 착! 착착!
권수정과 시선을 마주친 행주 부대 팀장들이 수신호를 보내자 수천여 명의 부대원들이 마치 한 명이 움직이는 것처럼 활에 화살을 메기고 하늘을 향해 치켜들었다.
“200m 목표물 조준하세요.”
“확인.”
“확인.”
“발사.”
스르륵.
스르륵.
“헐…….”
“…….”
“…….”
저 조그마한 게 보인다고?
거리가 멀어질수록 사물은 작게 보인다.
200m 거리에 있는 표적은 노트북 크기로 작았지만 수천여 발의 화살이 꽂히다 못해 파괴해 버렸다.
“300m…….”
“확인”
“확인”
“발사.”
스르륵.
스르륵.
400, 500…… 1,000m까지.
조금씩 거리를 늘리는가 싶더니 나중엔 아예 표적이 보이지도 않는데 팀장들의 지휘 아래 활의 각도를 조정해서 화살을 날려 파괴하였다.
“와…….”
집에 돌려보내려고 했는데…….
적당히 칭찬하고, 대충 핑계를 대며 허락하지 않으려 했는데…….
“행주 부대를 이번 레이드에 참여시켜도 되겠죠?”
“……어.”
절로 감탄사가 나오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실력이었다.
여자라는 이유로.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돌려보내기엔 다들 실력이 너무 출중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
“11시 방향. 거리 천 미터. 70도. 거대 여왕개미 조준.”
“확인.”
“확인.”
스르륵.
스르륵.
백여 년 동안 다크 엘프 종족을 괴롭혔던 거대 여왕개미가 창천의 활을 착용한 행주 부대원 만여 명과 스카이 캐슬 연합 헌터 만여 명의 화살 공격에 움직임을 멈췄다.
* * *
“받아라.”
“이게 바바리인가요?”
“그렇다. 그걸 입으면 리치의 마법 공격을 막아 내는데 한결 수월해질 거다.”
「바바리. (legend)
물리 방어력: 100,000+
마법 방어력: 100,000+
6서클 이하 마법 공격 대미지 100% 흡수.
.
.
.」
약속한 대로 카프리는 거대 여왕개미의 부산물로 망토를 만들어 해용에게 건네주었다.
“입어 봐.”
“네.”
“괜찮군. 그걸 입으니 진짜 군주 같군.”
금빛 물결이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망토였다.
“고마워요. 카프리. 근데 변신 주문서 제작은 완료됐나요?”
“십만 장 만들어 놨다. 하몽의 마탑과 협력해서 생산 시설이 완료됐으니 하루에 일만 장씩 찍어 낼 수 있다. 사용해 봐라. 샘플이니.”
“네.”
「변신 주문서.
6티어 이하의 몬스터로 변신을 할 수 있다. (유지 시간 2시간)」
‘해골로!’
변신 주문서를 건네받은 해용은 주문서에 적힌 대로 마나를 운용하며 찢었고 해골로 외형을 바꾸었다.
“훌륭하네요.”
변신 반지로 변신하는 게 지속 시간이 길지만, 하나밖에 없어서 많은 인원이 변신을 하기엔 시간이 오래 걸렸는데 변신 주문서의 개발로 단숨에 대병력을 변신시킬 수 있게 되었다.
“김용규 본부장한테 연락하세요. 내일 일본으로 갑니다.”
“네!”
“네!”
이제 준비는 끝났다.
해용은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으며 일본과 연결된 게이트를 쳐다봤다.
* * *
“첫 해외여행을 이런 식으로 올 줄은 몰랐네요.”
“외국에 온 게 처음이세요?”
“네. 사는 게 녹록지 않아 외국에 나갈 일이 없었거든요. 지윤미 마스터는 이곳에 와 본 적이 있나요?”
“네. 전 몇 번 와봤어요. 한데 제가 예전에 와서 봤던 도쿄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드네요.”
“그렇겠죠. 이리 다 무너지고 부서져 있으니.”
폐허.
몬스터 웨이브로 인해 도쿄는 천만 명이 넘게 살았던 한 국가의 수도의 모습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태풍이 휘몰아치고 간 것처럼 건물들은 모두 쓰러지고 파편들이 길에 널브러져 있었다.
몬스터는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셨습니까! 영주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늦어서 미안해요. 근데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더 심각하네요.”
“네. 이미 일본 정부와 군대는 손을 놓았습니다.”
“손을 놓았다고요?”
“네. 리치와 데스 나이트는커녕 좀비와 해골마저 처치할 방법이 없으니 어떡하겠습니까. 다들 스스로 해결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세계 헌터 협회와 미국만 쳐다보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럼? 살아 있는 사람들은 어쩌고?”
“돈이 있는 사람들은 어떡하든 비행기와 배를 타고 다른 나라로 가려고 하고 있거나, 상황이 되지 않는 이들은 몬스터의 발길이 닿지 않은 산속 깊숙이 들어가 있거나 마을 단위로 모여 대항하고 있습니다.”
“쯧쯧. 무능한 정부 때문에 고생이 많네요.”
“……네.”
“후쿠오카로 이동할 테니 준비해 주세요.”
“거긴 왜?”
“예전부터 거슬리던 물건이 거기 있거든요.”
히젠도.
명성 황후를 시해한 검.
한 나라의 국모를 야습해 시해해 놓고 일본은 자랑스럽게 그것을 신사에 보관하고 있었다.
일본에 도착한 해용은 바로 히젠도를 보관하고 있는 구시다 신사로 이동했다.
* * *
“온 나라가 허물어져 가고 있는데 여긴 멀쩡하네요?”
“확인해 보겠습니다.”
검과 방패를 들고 다니는 수백여 명의 헌터들.
개미 새끼 한 마리 볼 수 없었던 도쿄와 달리 불로장생과 번생의 신을 모시고 있는 구시다 신사 인근엔 아직도 수천여 명의 사람들이 생존해 삶을 영위해 가고 있었다.
“일본 헌터 협회 소속 헌터들이라고 합니다. 이곳도 몬스터 웨이브가 지나가긴 했지만, 앞에 있는 신사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 방어선을 구축해 버텨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군요.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자 신을 의지해서 모인 사람들이군요. 대한민국의 국모를 시해한 검을 보관하고 있는 사당으로.”
“영주님…….”
“왜요?”
“기세를 거두어 주십쇼. 숨쉬기가 어렵습니다.”
“아! 죄송해요. 제가 너무 흥분했나 보네요.”
참 어처구니가 없었다.
한 나라의 국모를 몰래 야습해서 시해해 놓고 뭐가 그리 자랑스럽다고 그걸 사당에 비치해 놓다니.
그런데 더 어이가 없는 건 야습에 참여했던 인원들이 재판을 받았는데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가 되었다는 거다.
그런데 어찌 화가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국모가 시해당한 것도 열 받아 미칠 것 같은데, 일본은 저리 증거를 사당에 비치해 놓고도 증거가 없다며 오리발을 내밀고 있는 것이었다.
“후우.”
해용은 숨을 들이마시며 몸을 진정시켰다.
“본부장님.”
“네.”
“마스터들에게 저 사당에 어떤 물건이 있는지 알려 주세요.”
“영주님…….”
왜 그러시나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는 건 맞지만…….
지금 알려 주면…….
김용규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눈치를 살폈다.
“왜요? 역사를 알려 주려고 하는데 무슨 문제가 있나요?”
“그건 아니지만……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은 듯합니다.”
“또 이러시는군요.”
저랑 뜻을 함께하기로 한 거 아니었나요?
김용규를 쳐다보는 해용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재고해 주십쇼. 영주님.”
“무엇을요?”
“이들은 죄가 없습니다.”
“지난 일로, 그것도 자신이 저지른 것도 아닌 선대의 죄를 물을 생각은 없습니다.”
“근데 왜…….”
무고한 사람들까지 희생시키려는 거죠?
지금 이 상황에서 진실을 알리면 분명 헌터들은 잔뜩 화가 나서 사당으로 쳐들어가 다 부숴 버릴 텐데…….
안에 있는 사람들이 반항하지 않으면 괜찮겠지만, 반항이라도 하면 발키리와 그레이 기사단 헌터들 성격상…….
김용규는 두려운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해용을 쳐다봤다.
굳이 겪어 보지 않아도 해용이 시키는 대로 했을 때의 상황이 눈앞에 그려졌다.
“약하니까.”
“네?”
“고작 좀비와 해골들한테 쫓겨 피신해 있는 모습이 너무 약해 보이지 않나요?”
“영주님…….”
“우리의 선조들이 약해서 일본과 서구 열강의 국가들한테 짓밟혀 고난의 시대를 보낸 것처럼 저들도 그걸 경험하게 해 주려고요.”
계속 고민했다.
열 번, 아니 백 번은 생각했을 것이다.
과연 일본에 도착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약육강식.
그리고 내린 결론이 이거였다.
과거의 복수, 잘못된 역사를 고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미래를 위해서.
스카이 캐슬의 번영과 안녕을 위해서.
해용은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모두 들으세요.”
“네!”
“네!”
“이곳은 조선의 국모를 시해한…….”
해용은 마스터들에게 크게 소리치며 구시다 신사에 대해 설명했다.
“이런 개새끼들이…….”
“미친놈들. 그 검을 보관해서 전시까지 해 놓고 있었다고?”
설명을 들은 마스터들의 입에서 거친 육두문자가 쏟아져 나왔다.
“전 저곳을 부수려 합니다. 그리고 수십 년간 대한민국을 무단으로 점거했던 일본에게 그 죄를 물으려고 합니다.”
“죄를 묻는다고 하면…….”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일본은 미국을 비롯한 승전국에게 모두 사과하고 배상을 했습니다. 하나 우리나라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잘못하고도 죄를 청하지도 않고 반성은커녕 오리발을 내밀고 있으니 어쩌겠습니까. 알아서 단죄해 줄 수밖에요.”
“…….”
“…….”
설마 이래서 변신 주문서를 나눠준 건가?
전쟁하려고?
일반인들까지 다…….
화를 냈던 것도 잠시 마스터들이 경악스런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해용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동안 어려운 사람을 보면 돕고 함께 힘들어했던 인자하고 따스했던 영주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나 여러분이 반대하고 절 말리겠다면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제 생각과 의지는 그렇지만 전 여러분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계속 진행할 자신은 없거든요.”
“흠…….”
“흠…….”
“정확히 알려주십쇼. 만약 영주님의 뜻에 따르면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모두 영지로 압송해 광산과 공사 현장에 보낼 겁니다.”
“아, 그럼 청방 길드 헌터들과 마찬가지로…….”
“아니요. 저들에겐 임금을 주지 않을 겁니다.”
“…….”
“…….”
“제가 저들에게 베풀 수 있는 배려는 거기까지입니다. 목숨을 구해 주는 것.”
“…….”
“…….”
“제 뜻을 따라줄 분들은 해골로 변신해 주십쇼. 그리고 내키지 않는 사람들은 그대로 계시면 됩니다.”
“…….”
“…….”
“대답!”
“……네.”
“……네.”
어떡하지?
어떡해야 하지?
마스터들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앉은 자리에서 결정하기엔 너무 어렵고 복잡하고 또 힘든 사안이었다.
그런데 그때,
처벅처벅.
처벅처벅.
검은색 갑주와 손에 창을 든 수천여 명의 흑기사 아니 그레이 기사단이 앞으로 나왔다.
“그레이 기사단. 결정하셨습니까?”
“네.”
“어떻게 하실 건가요?”
“저흰 역사, 복수, 배상. 이런 건 모릅니다. 저희가 아는 건, 아니 기억하고 품고 있는 건 딱 하나입니다.”
“……?”
“그레이 기사단은 오직 영주님의 뜻대로 움직입니다.”
찌이익.
조성태 마스터의 외형이 해골로 변해갔다.
그리고 이내,
찌이익!
찌이익!
“영주님의 뜻대로.”
“영주님의 뜻대로.”
뒤에 정렬해 있던 그레이 기사단 모두 변신 주문서를 찢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