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거대 여왕개미 (9)
“이성민.”
“스승님…….”
“인상 쓸 거 없다. 영주한테 작업에 참여해도 된다고 허락을 받았으니.”
“아, 그렇습니까? 화해를 하신 겁니까? 잘됐네요.”
휴우. 다행이다.
이성민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카프리에게 길을 열어 주었다.
“나가.”
“네?”
“그동안 나와 함께했으니 다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난 내게 등을 돌린 자들과 함께 작업할 만큼 성격이 너그럽지 못하다. 나가라.”
“스승님…….”
“너흰 너희 입으로 스승은 임금과 아버지와 동급이라고 했다. 그런데 너흰 나보다 영주의 명령을 더 위에 뒀다. 너흰 내게 스승이라 부를 자격이 없다.”
“…….”
“나가라. 내 제자가 아니니 너흰 내 공방에 있을 자격이 없다.”
이 정도면 친절한 거 맞지?
예전 같았으면 뭐라도 집어 던지면서 바로 내쫓았을 텐데, 지금은 차근차근 설명까지 해 주고 있으니까.
카프리는 최대한 화를 삼키며 조곤조곤 말을 했다.
“용서해 주십쇼. 저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쇼.”
왜 저희한테 그러십니까!
영주님이 지시하신걸.
이성민과 헬퍼들은 억울함을 속으로 삼키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화를 내는 것보다 더 무섭게 느껴졌다.
“용서하고 자시고 할 문제가 아니다. 화가 나서 이러는 게 아니니.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너흰 선택한 것이다. 내가 아닌 영주를. 그러니 영주를 찾아가 새로운 공방을 차려 달라고 해라. 그것까지 막지는 않을 테니.”
“단언컨대! 저흰 영주님을 선택한 적이 없습니다. 만약 권력이나 알력 싸움으로 인해 영주님께서 스승님을 가택 연금하고 전쟁에 배제하였다면 저흰 목에 칼이 들어와도 따르지 않았을 겁니다. 한데, 영주님께선 스승님의 독불장군 같은 스타일을 염려하셨고 연합의 크기가 더 커지기 전에 바꾸기 위해 그러는 것이라 설명을 해서 따른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그랬다?”
“네. 그렇습니다. 영주님이 기대한 거와는 다르지만 저흰 이 기회를 통해 스승님이 깨닫길 원하셨습니다. 현재 스승님의 권력은 모두 영주님을 통해서 나오고 영주님이 등을 돌렸을 때 어떻게 되는지 직접 몸소 경험하길 원했습니다.”
“흠…….”
어렵다. 어려워.
분명 한국말을 다 배운 줄 알았는데…….
카프리는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며 이성민을 쳐다봤다.
이성민의 눈에는 존경심과 애정이 가득했다.
그동안 살아온 세월이 백여 년에 이르렀다.
아무리 인간과 교류가 없었다 하나 이 년 가까이 데리고 있던 제자의 진심을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영주를 좋아하고 존경해서 따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았다.
“더 떠들어 봐.”
“영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시진 않았지만 영주님께선 자신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을 때를 대비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스승님과 얼굴을 붉히면서까지 반목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흠…….”
“그런 느낌을 받으니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금이야 우리가 모두 따르고 좋아하는 분이 영주로 계시니 상관없지만, 만약 다른 자가 영주의 자리에 올라 잘못된 길로 인도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말입니다.”
“짧게 얘기해라. 어렵다. 그래서 네가 기대하고 원했던 게 뭐라는 거야!”
“스승님께서 상처받길 원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일을 반면교사 삼아 세력을 모으길 원합니다. 안해용 영주는 물론이고 다른 자가 영주의 자리에 올라도 다시는 스승님께 함부로 하지 못하게.”
“……?!”
“스승님께선 터프하시긴 하지만 현명하고 옳고 그름이 명확하신 분입니다. 한데 안해용 영주의 후계자는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저흰 스승님께서 세력을 모아 안해용 영주가 없어도 스카이 캐슬이 지금처럼 번창하고 바른길로 갈 수 있게 버팀목이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지금 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고 떠드는 거지?”
스카이 캐슬의 모든 병력은 영주인 해용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
영주도 건드리지 못할 세력을 만들자는 건 듣기에 따라서 반역하자는 뜻으로 여겨질 수도 있었다.
“네. 물론입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흠…….”
안해용 영주의 부재라…….
아주 위험한 말이긴 했지만, 일리가 있었다.
인간의 평균 수명은 끽해야 80살 남짓이다. 마나를 다루고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 사니 오래 살면 150살까지도 살겠지만 그래봤자 사, 오백 년을 사는 드워프의 평균 수명에 비교하면 반도 되지 않았다.
스카이 캐슬이 좋다.
멍청이도 좋고. 막걸리도 좋고, 작은 일에도 기뻐할 줄 아는 영지민이 좋았다.
권력 이런 거엔 관심이 없지만, 지금의 이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선 흘려들을 말이 아닌 것 같았다.
“믿어 주지.”
“네?”
“남아도 좋다고. 근데 다음부턴 그러지 마라.”
자신을 배제하고 전쟁 준비를 한 것이 괘씸하긴 하지만 이쯤에서 넘어가는 게 좋을 듯했다.
카프리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무릎을 꿇고 있는 헬퍼들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손짓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일단 활부터 만들고 시간을 내서 얘기하자. 짧게 끝날 대화가 아닌 것 같으니.”
“네.”
석궁을 만들고 있었나?
거대 여왕개미를 잡으러 가야 하는데?
근데 이건 뭐지 조준경인가?
대화를 마친 카프리는 공방을 둘러봤다.
“헌터들에게 배급할 활을 만들고 있었던 건가?”
“네. 맞습니다. 기존에 스승님께서 만들었던 석궁에 스코프까지 장착해서 훨씬 더 높은 명중률을 기대해도 될 것 같습니다.”
석궁의 조작 방법은 지구의 총과 비슷했다.
현재 스카이 캐슬에 머무는 헌터들은 물론이고 헬퍼들 역시 대부분 군필자였기에 능숙하게 사용 가능할 듯했다.
잠시나마 이번 전쟁에서 공방의 책임자를 맡았던 이성민은 미소를 지으며 카프리에게 현재 작업 진행 상황을 설명했다.
‘스승님도 이번엔 칭찬해 주시려나.’
KM-2 크로스보우.
카프리의 K와 이성민의 M을 따와 이름을 만든 석궁.
마법진을 기반으로 한 카프리의 기술과 현대 과학의 기술을 결합해서 만든 무구였다.
조립식으로 개조까지 해서 마법진을 그리는 것 외에는 만드는 게 간단해서 인원만 더 보충되면 양산 가능했다.
“쯧쯧. 이래서 영주가 일주일이라는 터무니없는 시간 만에 활을 이만 자루나 만들어 내라고 했나 보군.”
“네?”
“넌 거대 여왕개미가 뭐라고 생각하나? 고작 오크와 늑대인간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었던 이 석궁으로 거대 여왕개미의 두꺼운 껍질을 뚫을 수 있을 거 같아?”
“…….”
“물론 뚫을 순 있겠지. 100m 내외로 접근해서 쏜다면. 근데 그렇게 가까이서 공격하면 거대 여왕개미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
“동종의 8티어 급 몬스터와 비교해서 공격력이 약하다는 거지. A급 이하의 헌터들은 거대 여왕개미의 발짓 한 번 잘못 맞아도 즉사다.”
유효사거리 200m
최대사거리 1,000m
늑대인간 토벌을 위해 만들었던 석궁.
조작이 간단해 숙련되지 않은 이들도 사용할 수 있었지만 사거리가 짧았다.
최대 1,000m까지 날아가긴 하지만 200m가 넘어가면 명중률은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졌다.
“치워.”
“……네.”
“몬스터의 특성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무구를 만들고 있다니…… 헛가르쳤군.”
카프리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성민의 주도하에 만들고 있던 석궁을 들고 나갔으면 최하 수천 명의 사상자가 생길 뻔했다.
아무리 안해용 영주와 다크 엘프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고 해도 거대 여왕개미는 눈앞에 있는 적한테만 달려들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으니까.
사상자 없이 거대 여왕개미를 레이드 하기 위해선 유효사거리가 최소 1,000m에 이르는 활을 만들어야 했다.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스카이 캐슬에 연락해 블랙 앵거스의 뿔을 있는 대로 보내 달라고 해.”
“네.”
“탄성이 좋은 나무도 필요하니 세계수에게 사람을 보내서 엔트 목도 좀 많이 얻어 오라고 하고.”
“세계수에게요? 세계수가 과연 눈앞에서 나무를 베는 걸 허락할까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일단 가 보는 거지. 가서 이렇게 전하라고 해. 나무 몇 그루 지키려다가 멸망할 건지. 나무 좀 내주고 이 대륙을 숲과 풀이 가득한 세상으로 만들 건지.”
“네, 알겠습니다. 근데 혹시 각궁을 만들려고 하는 건가요?”
“그래. 수만여 명이 단시간에 그것도 꽤 거리가 먼 데서 쏘려면 곡사로 쏴야 해. 그러려면 각궁만 한 게 없지.”
“역시. 스승님이십니다.”
“알아들었으면 어서 움직여. 오우거 힘줄도 닥치는 대로 모아서 가져 와.”
“네.”
블랙 앵거스의 뿔.
엔트 목.
오우거의 힘줄.
미스릴.
마나석.
.
.
.
카프리는 각궁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를 구해 오라고 지시했다.
하나하나 다 뛰어난 값어치를 가지고 있는 것들이었다.
“저 스승님…….”
“왜?”
“사람들을 보내긴 했는데 보급형으로 쓸 활에 재료가 너무 과한 게 아닌지 염려가 됩니다.”
“보급형 아니다.”
“네?”
“창천의 활을 만들 거야.”
“창천의 활이요?”
“과거 먼 옛날 아스날 제국의 부흥을 이끌었던 활을 만들 거야. 너희 세계 기준으로 보면 유니크에서 전설급 사이 정도 될 거다.”
“헐…….”
“뭘 놀래? 세력 만들자며? 그 정도 무구를 만들어 주면 이걸 받는 이들은 나한테 충성하지 않겠어?”
“혹시 발키리 길드를 염두에 두고 계시는 겁니까?”
“그래. 영주한테 무슨 일이 생겨도 발키리 길드 지휘부 애들이면 믿을 만하니까.”
발키리 길드는 은원이 확실했다.
은혜를 받으면 열 배로 갚았고 누군가 해코지를 하면 상대가 치를 떨 정도로 응징을 가했다.
전설급에 이르는 무구를. 그것도 하나도 아닌 대량으로 배급받으면 그 은혜를 마음속에 간직할 것이 분명했다.
“성민아.”
“네. 스승님.”
“그 스코프인가 뭔가도 이리 가져와 봐.”
“네.”
좋군.
스코프에 눈을 갖다 댄 카프리의 눈빛이 스산하게 빛났다.
* * *
“영주님, 이것 좀 보세요.”
“……?”
새벽 2시인데…….
잠을 자기 위해 침대에 누워 있던 해용은 당황스런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앞엔 검은색 장궁을 손에 든 지윤미가 서 있었다.
“카프리 님이 이번에 새로 만든 활인데 성능이 장난 아니에요!”
“그래요? 이 시간에 찾아올 만큼 그렇게 좋나요?”
원래 갖고 있던 활이랑 별 차이 없어 보이는데.
기존에 활을 갖고 있던 부대를 제외하고도 최소 15,000자루나 만들어야 해서 그다지 좋은 걸 만들어 줄 리가 없는데…….
“네! 엄청나게요. 화살에 마나를 덧씌우면 1,000m까지 80% 이상 보존돼요! 카프리가 정말 엄청난 걸 만들어 냈어요.”
“헐…….”
F급 헌터가 되면 검에 마나를 불어 넣어 검기를 만들 수 있다.
그리고 E, D, C, B, A급으로 단계가 올라가면 검기는 더 크고 짙게 발전이 되고 S급이 되면 검기가 아닌 검강이라고 표현을 한다.
같은 마나이긴 하나 그 파워와 절삭력이 그 괴를 달리하기 때문이었다.
하나 궁수들은 화살에 마나를 덧씌워도 날아가는 중에 대부분 사라져 버렸고.
“보여 주시겠어요?”
“네. 물론이죠.”
지윤미 마스터가 거짓말을 할 리가 없는데. 그럴 이유도 없고.
그렇다고 평소 과장을 하는 스타일도 아니고.
해용은 당황한 얼굴을 했던 것도 잠시 지윤미 마스터와 함께 부랴부랴 밖으로 나갔다.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