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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 영주님-226화 (226/255)

226화. 거대 여왕개미 (5)

뭐가 그렇게 서러웠고 뭐가 또 그렇게 기쁜 걸까.

해용의 발에 입을 맞추는 다크 엘프들의 얼굴엔 모두 미소가 서려 있었고 눈에선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두 시간 남짓 지났을까.

마치 신성한 의식을 치르듯 경건하고 조심스런 몸짓으로 입을 맞춘 다크 엘프들이 이천여 명이 넘었다.

하나 아직도 남은 인원은 그 두 배가 넘었다.

나이를 먹어 노환으로 허리가 굽은 노인은 물론이고, 이제 갓 걷기 시작한 어리디어린 다크 엘프들조차 해용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계속 몰려들고 있었다.

“영주님, 힘드시면 조금만 쉬었다가 하자고 할까요?”

경직된 자세로 긴 시간 동안 의식을 진행하는 해용이 걱정된 지윤미는 그에게 다가가 잠깐 휴식을 제안했다.

말을 하지 않을 뿐 이미 해용의 등과 얼굴엔 땀이 흥건했다.

데스 나이트 로드와 싸웠을 때보다 더 힘들어하는 얼굴이었다.

“아니요. 계속 진행하죠. 힘들긴 하지만 저들을 기다리게 하고 싶지는 않네요.”

“힘들면 쉬면서 해도 된다. 자신들의 종교를 인정해 줄 군주를 수천 년 동안 기다린 이들이다. 몇 분, 몇십 분 더 기다리게 한다고 서운해하지 않을 거다.”

“그래서 쉴 수 없다는 거예요. 수천 년을 기다린 이들한테 단 몇 분이라도 더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아서.”

다크 엘프들을 바라보는 해용의 눈에도 어느샌가 습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종교와 종족에 대한 차별과 핍박받은 경험으로 인해 생긴 서러움과 고단함의 눈물.

사실 다 이해하지 못한다.

그가 사는 세상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겉으로나마 그걸 지키고 또 유지하려고 법과 제도를 만들고 운영하고 있었으니까.

하나 그건 겉으로만 그럴 뿐 해용은 알게 모르게 차별을 당하면서 살아왔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기다림에 익숙해져야 했다.

학력이 부족해서 원하는 직장이 있어도 응시조차 하지 못했었다.

감히 생과 사의 갈림길에 강제로 놓이면서 살았던 다크 엘프들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의 지난 삶도 꽤 고단하고 또 힘들었고 조금이나마 다크 엘프들의 마음이 이해되어 도저히 쉬고 싶다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또 병이 도졌나 보군. 의자 치운다. 그럼.”

“카프리 님. 어찌 말리지 않으시고…….”

“저 눈빛 봐 봐. 연민병 발작했잖아.”

“연민병이요?”

“멍청이 말로는 상대의 슬픔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감정. 뭐 그런 거라고 하더라고.”

“아…….”

역시 영주님은 여전하셨구나.

지윤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기다리고 있는 다크 엘프들이 다가올 수 있게 길을 비켜 주었다.

켄트 왕국을 개발하고 있는 안지현과 그녀가 데리고 온 직원들을 볼 때보다 다크 엘프들을 바라보는 눈빛이 더 따스하고 포근해 보였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모자람 없이 자란 안지현의 투정을 받아 줄 여력은 없었지만, 자신보다 더 힘들고 어렵게 자란 이들의 눈물은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해용은 그렇게 해가 지고 다시 새벽녘이 되어 동이 뜰 때까지 다크 엘프들의 존경이 담긴 인사를 받았다.

* * *

만여 명에 이르는 다크 엘프들에게 인사를 받은 해용은 바로 샌드성을 둘러봤다.

이제 스카이 캐슬의 일원이 된 다크 엘프들이 어떻게 사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도와줄 것이 있으면 도와주고 또 도움받을 만한 게 있으면 도움을 받기 위해 시찰에 나섰다.

“영주님, 조금이라도 주무시고 둘러보시지요. 피곤하실 텐데…….”

“피곤한 건 참을 만한데…… 숨쉬기가 불편하네요.”

SS급 정령사. 아니 굳이 이능이 생기지 않았더라도 하루 정도 안 잔다고 이상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해용의 체력은 약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괴롭히는 건 피곤함이 아니라 쉼 없이 코와 입으로 들어오는 모래 가루들이었다.

샌드성의 공기는 대한민국의 미세 먼지 저리 갈 정도로 사막의 모래로 오염되어 있었다.

“안 그래도 지현이가…… 저기 마침 오네요.”

“그게 뭐죠?”

“휴대용 산소마스크예요. 이곳 사람들은 적응이 돼서 괜찮은가 본데 저희도 영주님처럼 숨쉬기가 불편해서 본진에 가서 가져왔어요.”

“잘하셨네요.”

해용은 미소를 지으며 산소마스크를 착용했다.

숨쉬기가 한결 편안해졌다.

스모그로 인해 중국에서 캐나다의 청정 공기가 담긴 캔을 수입해서 흡입한다고 할 땐 웃으며 넘겼는데 샌드성에 와보니 이해가 되었다.

오염된 공기를 마시는 건 상상했던 것보다 꽤 곤욕스럽고 또 아주 찝찝했다.

게다가,

“밖에서 봤을 땐 꽤 넓어 보였는데 농지가 얼마 안 되네요. 양과 염소도 몇 마리 없는 것 같고.”

쿡쿠가 장담했던 거와 달리 샌드성의 식량 사정은 그렇게 풍족하지 않았다.

그저 죽지 않을 정도로만 먹고 생활을 하는 듯했다.

“쿡쿠 님, 여기서 계속 사실 겁니까?”

[네?]

“제가 볼 땐 살아 있는 생명체가 살만한 곳이 아닌 것 같네요. 원하신다면 켄트 왕국 내에 있는 성 하나를 내어 드리겠습니다. 그쪽으로 이사를 하시죠.”

켄트성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7개 북쪽으로 7개의 성이 지어지고 있었고 그곳 모두 숲이 울창하고 땅이 비옥했다.

14개의 성 중 어디를 가도 이곳보다는 천 배, 만 배 나았다.

게다가 현재 켄트 왕국은 넓은 땅에 비해 인구가 부족한 상황이었고.

[영주님이 명령하시면 따르겠습니다.]

명령하면 따르겠다? 가고 싶지 않다는 말인가?

해용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쿡쿠를 쳐다봤다.

땅을 내어 주겠다고 하면 감사하다고 할 줄 알았는데 쿡쿠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말투가 왠지 가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들리네요? 제 착각인가요?”

[…….]

“글루틴 마을에 드나들며 저희를 살펴봤다고 했죠. 그럼 아실 거예요. 전 제 생각을 지휘부와 또 제 영지민에게 강요하지 않아요. 제 판단으론 다크 엘프 종족이 이사했으면 좋겠지만 원치 않으시면 안 하셔도 돼요. 다만 이사를 하지 않겠다면 그 이유는 제게 알려 주셔야 해요.”

[저도 그렇고 이곳에서 지내는 다크 엘프 모두 이곳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아버지, 또 그 아버지의 아버지 때부터 수백 년을 산 곳이죠. 영주님께서 보시기엔 척박하고 살기 힘든 땅처럼 보이겠지만 이곳은 저희의 고향과도 같은 곳입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저흰 이곳에서 사는 게 좋습니다.]

“물어보셨어요?”

[네?]

“한 명, 한 명 다 찾아가서 물어보셨느냐고요? 고향에 살고 싶은 마음은 이해한다만. 더 넓은 세상에 나가서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또 안락하고 편안한 곳에서 살고 싶을 수도 있잖아요? 특히 어린 다크 엘프들은 더 그럴 것 같지 않나요?”

안 겪어봐서 그런다.

오염된 공기가 아닌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살고.

모래가 씹히는 얼마 안 되는 쌀밥이 아니라, 맵고, 짜고, 단. 다양하고 기름진 음식을 먹고.

나뭇잎과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꺼끌꺼끌한 옷이 아니라 부드럽고 포근함이 느껴지는 면으로 된 옷을 입어 보지 않아서.

가엽고,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크 엘프를 쳐다보던 해용의 얼굴에 어느새 못마땅함이 가라앉아 있었다.

물론, 이곳에 살고 싶다고 하면 도로를 뚫고 또 물길을 열어 생필품들이야 전달을 해 줄 수 있지만, 공기가 문제였다.

아직 현대의 발전된 과학으로도 이 사막의 모래바람을 어찌할 기술은 발명되지 않았으니까.

해 줄 수 있는 거라곤 공기 청정기와 산소마스크가 전부였다.

[한 명, 한 명 다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영주님의 말씀처럼 분명 어린 다크 엘프들은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 보고 싶어 하는 이들도 있을 겁니다. 하나 분명 그들은 밖에 나가면 상처를 입게 될 겁니다. 먹고 자는 게 아늑해질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이 대륙에 살았던 그리고 사는 인간과 이 종족들이 저흴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따가울 테니까요.]

“흠…….”

쿡쿠의 말에 해용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종교의 자유를 허락해도 다른 이들에게 있어 다크 엘프를 잘해 주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법과 제도를 만들어 다크 엘프가 더 이상 차별받지 않게 할 수는 있어도 다른 종족과 친해지고 어울리는 건 그들의 역량으로 해내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영주님이 계시니 저희를 배척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오십 년, 백 년이 지나도 유지된다는 보장은 없죠.]

백 년이 지나면 이 세상에 해용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를 일이었다.

비록 척박한 사막에서 사는 게 힘들고 고될지 몰라도 다크 엘프로선 샌드성에 머무르는 게 가장 안전했다.

[물론 제 생각이 이렇다는 거지. 영주님의 명령을 어기겠다는 건 아닙니다. 가시라고 하면 가겠습니다.]

“아니에요.”

다른 성으로 가면 의식주에 있어 지금보다 훨씬 나아질 듯했지만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거주 이전의 자유는 헌법에서도 나와 있는 국민의 기본 권리니까.

해용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크 엘프가 가기 싫다고 하면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돈과 인력이 좀 많이 들겠지만, 이곳을 개발하는 방법밖에.

이해관계 그런 걸 떠나서 해용은 스카이 캐슬의 모든 영지민이 자신들이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것을 하며 살게 해 주고 싶었으니까.

“사막의 도시라…….”

그런데 생각해 보니 또 그렇게 나쁘지도 않을 것 같았다.

“제법 운치가 있을 것 같네요. 몬스터들을 다 몰아내고 길까지 뚫리면 사람들도 좋아할 것 같네요.”

사막의 도시 라스베이거스.

카지노로 유명한. 세계 최대의 관광 도시인 라스베이거스도 예전엔 모래만이 가득한 사막이라고 했다.

“근데 그러려면 그만한 값어치를 창출할 무언가가 이곳에 있어야 한다는 건데…….”

지금 스카이 캐슬의 자금력과 노동력이면 충분히 이곳을 개발할 수 있었다.

한데 이곳을 개발해서 이득을 얻는 건 다크 엘프밖에 없다는 게 문제였다.

이제 막 일원이 된 다크 엘프들을 위해 막대한 돈과 인력을 투자하면 지휘부의 반발을 얻을 수도 있었고 스스로 별로 탐탁지 않았다.

해용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모두가 만족할 만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답답했다.

[돈이라면 있습니다.]

“돈이 있다고요?”

무슨 돈이 있다는 거지?

대한민국의 화폐가 있다는 건 아닐 테고.

그렇다고 이미 망해버린 켄트 왕국의 돈은 있어 봤자 소용이 없을 텐데…….

설마 세훈이가 만든 새로운 화폐라도 훔친 건가?

“이쪽으로. 가서 직접 보여 드리겠습니다.”

“……네.”

해용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쿡쿠를 따라갔다.

수백 년간 이곳에서 고립된 다크 엘프들이 돈이라고 불릴 만한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하나,

[거대 개미의 코어들입니다. 스콜피온과 바실리스크의 것도 있고요. 일전에 글루틴성에 가 보니 몬스터의 코어가 제법 큰 돈이 되는 것 같던데 맞습니까?]

“헐…… 이 많은 게 전부 다 코어라고요?”

다크 엘프들은 진짜 돈을 갖고 있었다.

몬스터의 코어는 현재 금처럼 현금 자산으로 인정받는 물품이었는데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하얀색과 노란색, 파란색, 빨간색까지.

1티어에서 7티어에 이르는 형형색색의 코어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얼핏 봐도 수십만 개. 아니 백만 단위는 되어 보였다.

[지난 수십 년간 사냥한 몬스터의 코어들입니다. 저희도 나름 조금이나마 쾌척하고 안락한 곳에 보금자리를 만들려고 이리저리 부지런히 돌아다녀 봤고 사막의 북쪽과 남쪽에 제법 살만한 곳이 있어 이전하려 했지만 몬스터가 너무 많아서 계속 싸우던 중이었습니다.]

“몬스터가 얼마나 많기에…… 이 정도 코어양이면 멸종을 했어도 진즉에 했을 것 같은데…….”

압도적으로 많은 1티어 몬스터의 코어.

족히 백만 개는 되어 보였다.

이 정도면 그동안 스카이 캐슬이 사냥한 몬스터들보다 더 많은 숫자였다.

[멸종은커녕 지금도 숫자는 더 늘어난 상태입니다. 사막 중간에 거대 개미들의 여왕이 있는데 한 번에 알을 수천 개 아니 만 단위로 낳고 있습니다. 저희가 아무리 사냥해도…….]

“여왕개미요? 그럼 그놈을 죽이면…….”

[죽지를 않습니다. 그놈만 없으면 사막의 북쪽과 남쪽은 물론이고 모두를 차지할 수 있을 것 같아 병력을 이끌고 가봤는데 아무리 때려도 죽지를 않습니다.]

“…….”

[분명 타격하면 대미지를 입는 것 같은데 회복력이 좋은 건지…… 우리의 공격력이 약한 건지……. 때리다, 때리다 지쳐서 돌아오는 걸 반복하다가 지금은 체념하고 포기한 상태입니다.]

“흠…… 제가 직접 볼 수 있을까요?”

[네. 물론입니다. 덩치가 엄청나게 크고 맷집이 강하긴 하지만 공격력은 그리 강하지 않는 놈입니다. 영주님 정도의 무위라면 보고 오는 데에는 크게 위험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요. 그럼 가 보죠.”

해용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쿡쿠를 따라나섰다.

개미가 커 봤자 개미지.

‘능력이 은신과 암살에만 특화돼서 그런가?’

자신조차 간담을 서늘케 했던.

엄청난 무력을 가진 다크 엘프들이 질려 하는 게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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