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거대 여왕개미 (4)
“그 인사법을 어떻게 알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어나세요. 우리 대화가 필요할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쿠쿡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
[네?]
“전부 일어나라고요.”
그 인사는 처음 보는 사람이 반갑다고 악수하고 또 하이 파이브 하고 하듯이 하는 인사가 아니랍니다.
그대들에게 그렇게 인사해도 된다고 허락한 적 없으니 빨리 일어나 주세요.
해용은 마땅찮은 표정을 지으며 다크 엘프들을 쳐다봤다.
이들의 태도로 보아 자신을 알고 있었다.
해용은 그게 못마땅했다.
자신은 말로 전해 들은 게 전부인데 다크 엘프들은 마치 자신을 오래 본 것처럼 예의 있고 친숙하게 대하는 게.
“절 어떻게 알고 이렇게 인사를 하는 거죠?”
[서쪽 숲이 시끄러워 가보니 다시 인간들이 마을을 만들고 성을 짓고 있더군요.]
“저희 마을에 왔다 갔다는 얘기인가요?”
[글루틴 마을이라고 불리더군요.]
혹시나 했는데…….
해용의 인상이 잔뜩 찡그려졌다.
개발에 집중하느라 방비가 너무 허술했다.
다크 엘프가 집 앞마당까지 드나들었는데 그동안 아무도 몰랐던 것이었다.
만약 다크 엘프가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남의 영지에 허락도 없이 드나들어 놓고선 너무 천연덕스럽게 얘기를 하네요. 그만큼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건가요?”
[드워프와 엘프족이랑 함께하고 있으니 저희가 자유롭게 인간들의 마을을 다닐 수 없는 처지라는 건 알고 계실 텐데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마계의 종족으로 하데스를 모시고 있다고 알려진 다크 엘프족.
이 땅에 나라라는 것이 생기고 그 어떤 왕국도 이종족도 다크 엘프를 환영하는 곳은 없었다.
그래서 수백, 아니 수천 년을 숨어 지냈다.
쿠쿡으로선 몸을 드러내 방문을 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늦었지만 사과드리겠습니다.]
쿠쿡이 해용을 향해 허리를 깊게 숙였다.
“듣긴 했어요. 인간들과 그리 좋은 관계로 지내는 종족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근데 어찌 저희 마을을 찾아왔던 거죠?”
[처음엔 호기심에 갔었습니다. 이미 마왕과 마족들에 의해 피폐해진 대륙에 다시 인간들의 마을이 들어선 게 신기해서. 그리고 나중엔 먹을 것을 훔치러 다녔습니다.]
“먹을 것을 훔쳤다라…….”
몰래 관찰한 것도 모자라 음식을 도난당했는데도 아무도 몰랐구나.
분명 빵 몇 조각 훔치지는 않았을 텐데…….
조성태 마스터? 할 말 없습니까?
해용의 시선이 절로 조성태 마스터에게 향했다.
글루틴 마을 아니 이제 성이 된 그곳의 성주는 그였기에.
“죄송합니다. 식량 창고에 몇 번 도둑이 들었다는 보고가 있긴 했는데…….”
“성태한테 뭐라 할 거 없다. 다크 엘프들이 마음먹고 숨어들어서 훔쳤으면 S급은커녕 SS급 헌터가 있었어도 막지 못했을 테니까.”
인간과 이종족, 그리고 마족에게 조차 환영받지 못하고 수백, 수천 년을 살아온 종족이다.
아버지의 아버지. 또 그 아버지의 아버지 때부터 숨는 건 이골이 난 종족이었고 당연히 그 기술이 극도로 발전했을 것이다.
그러니 아직 종족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었고.
조성태가 곤란한 얼굴을 하자 카프리가 대신 앞으로 나서서 변명해 주었다.
“기본적인 개발이 완료되면 마법진을 그려 넣으려고 했다. 그러니 넘어가. 마법진을 그려 넣으면 다크 엘프는커녕 드래곤이 와도 몰래 숨어들지는 못할 테니까.”
“네.”
그런 게 있었으면 진즉에 좀 하시지.
“바빴다. 누가 일을 끊이지 않고 줘서. 이번에 돌아가면 방어 마법진부터 그리겠다.”
“네.”
해용은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라 더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일을 많이 준다는 그 누군가가 자신이기에 말을 삼켰다.
카프리는 언제나 팩트만을 얘기하기에 말로는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좋아요. 자수했고 다친 사람이 없으니 그 일은 넘어가죠. 근데 제가 지금 궁금한 건 어째서 제게 절을 올렸냐는 겁니다. 보아하니 이 인사의 의미도 알고 있는 거 같은데 맞나요?”
[알고 있습니다. 이 땅의 지도자로서 영주님을 인정하고 충성을 맹세할 때 하는 인사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저한테 절을 올렸다?”
[저희도 스카이 캐슬의 일원이 되고 싶습니다.]
“식량 때문인가요?”
[아닙니다. 식량이라면 지금도 굶지 않을 정도로 수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하데스님의 신전. 영주님이 신전을 복구했고 또 종교의 자유를 허락한다 들었습니다. 게다가 스스로 흑마법을 배워 흑마법사가 되었죠.]
“흠…….”
[저희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지금 영주님의 그 마음이 변하지 않고 하데스님을 모시는데 제약이 없다면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하겠습니다. 다른 건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흠…….”
이미 종교의 자유를 주기로 한 건 결정 될 사항이었다.
스카이 캐슬 입장에서는 이득만 있을 뿐 마다할 이유가 없는 조건이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세요?
해용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마스터들을 쳐다봤다.
애초에 동맹을 맺을 목적으로 왔고 일원이 되면 더 좋은 것이지만 혹시나 하고 한 번 더 의향을 묻는 것이었다.
“우리의 법과 규율을 지키겠다고 하면 거절할 이유가 없는 조건이네요.”
“영주님의 뜻대로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마스터들이 해용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희 일원이 된다는 건 지금 지내고 있는 땅과 건물은 물론이고 인원까지 저희의 통제하에 관리를 받아야 해요.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저희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하데스님을 모시며 지내는 것뿐입니다.]
“좋아요. 허락하죠.”
알아서 밑으로 들어오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네요.
해용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내,
[스카이 캐슬의 주인을 뵙습니다.]
[스카이 캐슬의 주인을 뵙습니다.]
다크 엘프 다시 무릎을 꿇고 얼굴을 땅에 받는 것은 물론이고.
쪽! 쪽! 쪽!
“……?!”
해용의 발에 입을 맞추었다.
다크 엘프 종족 최고의 존경 표현이었다.
하지 말라고 해야 하는데.
이건 진짜 아닌 것 같은데…….
주르륵.
주르륵.
그만하라고 하고 싶은데 차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신발에 뽀뽀하는 다크 엘프들의 눈에서 모두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였다.
수백, 수천 년 동안 종족 전체가 숨어 지내야 했던 지난 세월의 한과 이제는 양지에서, 햇볕이 비치는 세상에서 살 수 있다는 기쁨이 담긴 눈물이었다.
그런데 어찌 저 눈물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부끄럽고 남사스러웠지만, 해용은 다크 엘프들에게 기꺼이 발을 넘겼다.
“거봐. 내가 뭐라고 했어. 마신의 신전 복구하자고 했지. 내 말 안 들었으면…….”
“가만히 좀 계세요.”
아무리 거침없이 산다지만 이건 아니잖아요. 다크 엘프들 제 신발에 뽀뽀하고 있잖아요.
해용은 코에 손가락을 대며 눈을 흘겼다.
다크 엘프들을 말리긴 힘들 것 같으니 최대한 경건하고 조용하게 기다리는 게 예의인 듯했다.
십 분, 이십 분, 두 시간…….
‘조금만,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
다리가 저리다.
오른쪽 발에 감각이 없었다.
다크 엘프들이 2시간 동안 다가와 발에 입을 맞추었고 부동자세로 있느라 경련이 온 듯했다.
털썩.
‘휴우.’
마지막 다크 엘프가 입을 맞춤과 동시에 해용은 바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몸도 몸이지만 심적으로도 꽤 부담스러운 의식이었다.
* * *
[저희가 머무는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래요.”
의식을 맞추고 해용과 일행은 다크 엘프들을 따라나섰다.
“신기하네요. 우리끼리 올 때는 그렇게 덥고 거대 개미들도 미친 듯이 달려들더니 지금은 뜸하네요.”
“길을 만들었나 보네요.”
“네? 길이요?”
해용과 대화를 주고받던 지윤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오른쪽을 봐도 모래고. 왼쪽을 봐도 모래고. 뒤를 돌아봐도 모래였다.
그냥 사방이 모래투성이었다.
사막에 가면 있다는 선인장조차 보이지 않았다.
딱히 길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사막은 잘 모르겠지만 바다는 그렇거든요. 보기엔 그냥 다 망망대해 같아도 배를 모는 선장들은 다 자기들만의 루트가 있어요, 그리고 바닷속도 다 거기가 거기 같지만 포식자들은 다 자기만의 영역을 만들고 지내거든요. 그럼 아무리 머리 나쁜 물고기라 하더라도 그곳으론 들어가지 않아요.”
“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넘어가는 걸로.
지윤미는 해용을 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그때,
“저거 성 맞죠?”
“분명 조금 전까지 모래밖에 없었는데?”
갑자기 눈앞에 거대한 성이 나타났다.
그곳엔 커다란 강이 있었고 또 풀이 있었고 나무가 있었다.
오면서 들렸던, 안지현이 오아시스라 지칭했던 곳과는 규모가 다른 곳이었다.
심지어,
“이거 야생 벼 같은데요?”
사막 한가운데서 농사마저 짓고 있었다.
“마법진이군.”
“네?”
“대단해. 이곳으로 오는 길과 성 전체에 수백 개의 마법진을 그려 놓았어.”
환상 마법진.
카프리는 경외감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땅 밑을 내려다봤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형형색색의 보석이 박혀 있었다.
[아시다시피 인간은 물론이고 이 종족까지 마계의 신을 모신다는 이유로 저희를 보이는 배척했습니다. 두 배, 아니 열 배 정도만 돼도 어떻게 해 보겠지만 저희를 배척하는 이들은 너무 많았고 어쩔 수 없이 생명체들이 기피하는 사막에 와서 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혹여나 여행자들의 눈에 띄지 않게 수백 년에 걸쳐 마법진도 그려 놓았고요.]
“많이 힘드셨겠네요.”
해용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은신 기술과 환상 마법진.
다크 엘프의 기술력이 감탄스럽긴 했지만, 한편으로 가여운 마음이 들었다.
이게 다 고난과 핍박에 의한 산물로 탄생한 것이었기에.
[성문을 열어라.]
드르륵.
드르륵.
쿠쿡의 외침에 도르래에서 들리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성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안엔 해용 일행을 반겨 주기 위해 나온 수천여 명의 다크 엘프들이 서 있었다.
여성과 노인, 어린아이들이었다.
‘아니야. 아닐 거야. 그래 아니겠지.’
해용은 두려운 표정을 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내,
[스카이 캐슬의 주인을 뵙습니다.]
[스카이 캐슬의 주인을 뵙습니다.]
수천의 다크 엘프들이 해용을 향해 무릎을 꿇고 땅에 얼굴을 묻었다.
[영주님, 저들에게도 제대로 인사를 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전부 다요? 아까처럼? 꼭 해야 하는 건가요?”
[허락하기 싫으시면 안 하셔도 됩니다.]
“아 그래요? 그럼 그냥 안 하는걸…….”
[하지만 많이 슬퍼하겠죠. 다들 이곳에서 태어나 자라며 평생을 숨어 지내다가 이제야 세상에…….]
그냥 해야 한다고 하면 되지.
하아…….
강제로 하라는 것보다 더 무섭네요. 그 말이.
해용은 조심스럽게 오른쪽 발을 내밀고 팔을 허벅지에 붙였다.
마음 같아선 양쪽에 사람을 두고 부축이라도 받고 싶었지만 다크 엘프들의 표정을 보니 그마저도 할 수 없었다.
쪽! 쪽! 쪽!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인사를 받기엔 다들 너무 표정이 비장했고 또 떨면서도 행복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