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거대 여왕개미 (3)
“울긴 왜 울어. 우리가 잘못했는데 왜 네가 울어.”
“아니에요. 제가 너무 속 좁게 굴었어요. 영주님, 입장에선 한 번쯤 짚고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잖아요.”
흑흑.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고. 사실 우리 삶이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믿을 만큼 녹록지는 않았거든.”
토닥토닥.
지윤미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안지현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지난 몇 년간 자신은 물론이고 이곳에 있는 사람 대부분이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살아왔다.
몬스터랑 싸우는 것도 버거운데 일본과 미국 헌터 협회의 배신에 이은 도모 시도가 있었다.
그래서 의식도 하지 못한 채 누군가 새로운 인물이 합류하면 의심하고 또 의심하는 거였다.
단 한 순간의 방심으로 인해 영지민이 다칠 수도 있고 또 이곳이 무너질 수도 있으니까.
“이제 됐나요?”
“네?”
“이제 좀 기분이 풀렸는지 묻는 거예요.”
“네. 그렇긴 한데…….”
영주님은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거죠?
안지현은 울먹거리던 것도 잠시 당황스런 표정을 지으며 안해용을 쳐다봤다.
친근하게 구는 다른 마스터들과 달리 안해용의 말과 태도는 여전히 건조했기 때문이었다.
“저를 대신해 마스터들이 위로도 해 주었고 오해도 풀렸으니 이젠 일 얘기 좀 했으면 해서요.”
“…….”
“서러웠던 건 알겠는데 투정은 그만 부렸으면 하네요.”
해용은 무표정한 얼굴로 아니 그 어느 때보다 차가운 눈빛을 하고선 안지현을 쳐다봤다.
“뭐야? 왜 그래? 흑마법 배우더니 성격이 어떻게 되기라도 한 거야? 기껏 달래 났더니 왜 또 울리려고 그래?”
원래 우리가 울리고 네가 위로해 주는 게 맞는데? 뭔가 바뀐 거 같지 않아?
장지원은 당황스런 표정을 지으며 해용을 쳐다봤다.
평소 해용의 행동과 뭔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아니요. 아무 이상 없어요. 저도 사실 지금 핑계 삼아 같이 울고 싶거든요. 그리고 이곳에 사람 중에 지금 울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다 힘들어도 참고 있는 거잖아요.”
힘들다. 그것도 아주 많이.
마지막으로 부모님 얼굴을 본지가 언제인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연인인 수정이도 마찬가지였고.
지윤미가 여기 있으니 아마 다른 곳에서 지휘하고 있으리라.
지금 안해용의 삶이 그랬다.
이곳에 사는 모든 사람이 그를 존경하고 좋아한다지만 정작 자신이 정말 사랑하고 보고 싶은 사람과는 함께 할 수 없었다.
하나 약해져서는 안 됐다. 지금은 울 때가 아니라 나아갈 때였다.
그래야 하루라도 빨리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내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오순도순 지내며 평화롭게 지낼 수 있을 테니까.
자신의 마음을 몰라준다고 투정 부리는 어린아이를 달래줄 여력이 없었다.
그녀는 딴에는 평소보다 더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살고 있었다.
“지윤미 마스터님.”
“네?”
“전령을 보내 공사에 필요한 최소 인원을 제외하고 전 병력을 이곳에 집결하라고 해 주세요.”
“전 병력을요?”
“사막으로 가야죠.”
“네.”
지윤미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냥 농사를 짓게 해야 했나.’
변해도 너무 변했다.
언제부터인가 자상하고 부드러운 안해용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아이템과 전투, 전술…… 같은 것에만 몰두했다.
‘죄송해요. 영주님.’
해용과 함께한 지 벌써 수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슬펐다.
참고 있는 거니까.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속으론 아마 안지현에게 사과하고 또 위로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성격이 변한 게 아니라 어깨에 짊어진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스스로 다잡는 것이었다.
다정함이 사라지긴 했지만 안해용은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군주로서 또 총사령관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영주. 영지민과 희로애락을 함께 하는 영주.
지금 그런 영주는 필요 없었다.
그런 영주는 태평성대 때나 필요한 것이다.
지금 영지민에게 필요한 건 몬스터들을 막아 내고 또 해칠울 수 있는 강력한 군주였다.
* * *
“그리폰과 함께 하는데도 사막의 지도를 그리지 못한 겁니까?”
[죄송합니다. 바람이 워낙에 드세서 모래바람은 물론이고 폭풍까지 예고 없이 몰아쳐 그리폰도 힘들어하고 또 지형이 워낙에 자주 바뀌어서…….]
“못 그렸다는 말이군요?”
[네.]
“그리폰 부대만 믿고 있었는데 난감하게 됐네요.”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늘을 나는 그리폰만 있으면 앞으로 지형 정찰을 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줄 알았는데…… 사막에선 땅은 물론이고 하늘을 날아다니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아시스가 있는 곳까진 제가 알아요. 제가 안내할 수 있어요.”
“일전에 그곳에 갔다가 거대 개미들한테 포위됐었다고 하지 않았나요?”
“네. 그렇긴 한데, 그때는 인원도 적고 상위 헌터도 몇 없어서 갇혔던 거예요. 지금 우리의 전력이면 충분히…….”
“장담할 수 있나요? 지형지물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막에 들어가도 몬스터들한테 갇히지 않는다고?”
“그건…….”
아, 진짜 나한테 왜 이러지?
나 찍힌 건가?
안지현이 얼굴이 잔뜩 붉어져 말끝을 흐렸다.
솔직히 장담할 수 없었다.
그때도 기껏 사막 초입에 들어섰다가 거대 개미들한테 갇힌 것이었고 안쪽에는 얼마나 더 많은 몬스터들이 있을지 파악이 되지 않았으니까.
“없어요. 하지만 그리폰 부대마저 지도를 그리지 못한 이상 일단 가보는 것 말고는 뾰족한 방법도 없잖아요!”
“그래요. 지금으로선 그렇죠. 그래서 여러분들과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거고요. 최대한 안전하고 확실한 길을 확보한 후에 사막에 진입하기 위해서.”
숲과 계곡 바다도 위험하지만, 사막은 더 위험했다.
S급, SS급 헌터 이런 건 다 필요 없었다.
아무리 뛰어난 초인이라 하더라도 뜨거운 햇볕에 노출된 채 제대로 수분을 섭취하지 못하면 일반인보다 조금 더 오래 버틸 수 있을 뿐 죽는 건 매한가지였다.
해용은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이미 몇 달 전부터 사막으로 진입한다고 선포를 한 이후였기에 마스터들이 무언가 준비해 놓길 기대했는데 다들 묵묵부답이었다.
“죄송해요. 저희 발키리에서도 사막 지형을 알아보기 위해 여러 번 정찰조를 보내긴 했었는데 오아시스까지가 한계였어요. 거대 개미도 문제지만 워낙에 날씨가 지랄, 아니 변덕이 심해서 더 이상 진입했다간 어차피 길을 잃을 것 같아서 제가 복귀를 시켰어요.”
“그렇군요. 그럼 어쩔 수가 없네요. 이번에도 몸으로 때우면서 진입할 수밖에.”
결국 내 말대로 할 거면서.
해용의 결정에 안지현은 티 나지 않게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가면 다크 엘프들이 전쟁하러 오는 줄 알고 오해를 할 수도 있으니 선발대는 저랑 같이 마스터님들만 함께 가는 걸로 하죠.”
“네, 알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안해용, 지윤미, 조성태, 최은빈, 이아영, 카프리, 하몽, 오키도키, 린하이, 안지현, 최영식, 최병용…….
A급 이상으로 이루어진 스카이 캐슬 최강의 헌터들이 무구를 챙겨 사막으로 진격했다.
* * *
“와! 이것들 징그럽게 많네. 이러다가 오아시스 가기 전에 탈진하겠는데?”
“그러게요. 수련 삼아 잡으면서 가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네요. 발렌!”
사막으로 진입한 해용은 데스 나이트 로드와 듀라한들을 소환했다.
1티어급 몬스터 거대 개미.
개미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2시간 동안 수백 마리는 잡은 것 같은데 여전히 죽여도, 죽여도 끊임없이 몰려들었다.
1m 80cm 정도의 길이에 그다지 힘이 세거나 빠른 것도 아니라 그리 위협적인 몬스터는 아니었지만,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그것도 너무 많으니까 체력적으로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나는…… 대아스날 제국의…….
“알았어. 알았으니까 절로 가서 저 개미들 좀 해결해 줘.”
-난 황제를…… 죽이러 가야 하는데…….
합!
크으으.
합!
크으으.
“우린 좀 쉬죠.”
“네.”
새끼. 어차피 시키면 할 거면서 말은.
데스 나이트 로드와 듀라한들이 거대 개미를 상대하기 시작했고 여유가 생긴 해용은 마스터들과 함께 잠시 휴식을 취했다.
“아, 가만히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히네.”
“물 드세요. 그럼 좀 나아질 거예요.”
사막은 보고 받은 것보다 훨씬 더 척박하고 뜨거웠다.
안지현 실장이 다크 엘프를 봤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만약 그 말을 듣지 않았다면 지성을 가지고 있는 살아 있는 생명체가 사는 땅이라고는 상상조차 못 할 곳이었다.
-왼쪽에 열, 오른쪽에 열. 그리고 북쪽과 남쪽에도 열 명이 숨어서 우릴 지켜보고 있어.
‘어, 나도 뭔가 이질감을 느끼긴 했어.’
동, 서, 남, 북 사방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다크 엘프가 온 듯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 주위를 포위하고 있었다.
안지현과 같은 기술을 시전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켄트 왕국의 영주 안해용이라고 한다. 우리와 싸울 생각이 아니면 정체를 드러내라!”
“……?!”
“……?!”
왜 그러지? 더위 먹었나?
해용이 아무도 없는 텅 빈 곳을 보며 소리를 지르자 마스터들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두리번거렸다.
“언니, 다크 엘프들이 온 것 같아요.”
“아!”
“이런!”
안지현의 말을 듣고 나서야 마스터들이 무기를 곧추세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는데…….
위험해.
보이지 않는데 공격하면 어떻게 싸워야 하는 거지?
하몽 님, 빨리 디텍션을!
마스터들의 얼굴과 등에 긴장감으로 인해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왼쪽에 백, 오른쪽에 백…… 인원이 계속 늘고 있어. 이놈들 전부 다 최소 B급 이상이야. 귀환 주문서 찢을 준비 하라고 해. 위험해!
“젠장! 모두 귀환 주문서를 꺼내세요.”
몰랐다.
그렇게 열심히 수련했는데 수백여 명의 다크 엘프들이 코앞에 당도할 때까지 눈치를 채지 못했다.
해용은 가장 가까이서 느껴지는 다크 엘프 무리에게 에르메스의 검을 겨누고 크게 소리쳤다.
다시는, 다시는 적을 앞에 두고 싸워 보지도 않고 도망가지 않으려고 했는데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다크 엘프는 몬스터와는 달랐다.
맹목적으로 눈앞에 있는 이에게만 달려드는 게 아니라 몸을 숨길 줄 알고 포위마저 해 왔다.
이대로 전투가 시작되면 자신은 몰라도 카프리와 오키도키, 최영식, 최병용과 같이 무력이 떨어지는 생명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때,
[……스카이 캐슬의 주인을 뵙습니다.]
[……스카이 캐슬의 주인을 뵙습니다.]
“……?!”
“……?!”
수백여 명의 다크 엘프들이 몸을 드러냄과 동시에 무릎을 꿇고 땅에 머리를 박으며 안해용에게 인사해 왔다.
“……절 아세요?”
[다크 엘프 대 장로 쿡크라고 합니다. 영주님이 오시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처음 보는데? 절 어떻게 알고? 근데 그 인사법은 누구한테 배운 건지…….
해용은 난감함과 당황스러움이 섞인 표정을 지으며 다크 엘프들을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