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짓는 영주님-213화 (213/255)

213화. 언데드 학살자 (7)

“잘못 본 거 아니에요? 전 아무런 마나도 느껴지지 않는데?”

난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카프리를 쳐다봤다.

반신에 이른 존재.

중간계의 조율자.

지상 최강의 생명체.

.

.

.

씨엘을 만나기 전 하몽에게 들은 드래곤에 대한 수식어다.

드래곤은 살아 있을 때도 강력한 존재감을 뿜어냈지만, 죽어서도 그 못지않게 강대한 마나가 뼈와 살 그리고 가죽과 같은 곳에 머물러 있었다. 그 덕분에 우린 씨엘의 부산물로 귀환 마법진을 완성하고 용 갑옷과 같은 무구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하나, 눈앞에 있는 뼈에선 그 어떤 마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뭔가 음침하고 끈적끈적한 기운이 얼핏 느껴지긴 했지만, 씨엘의 부산물에서 느꼈던 기운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마나가 모두 사용돼서 그런 거다. 우리가 귀환 마법진을 만들 때 드래곤 하트의 마나를 뽑아낸 것처럼. 누군가 이곳에서 드래곤의 부산물을 이용해 무언가를 만든 것 같다.”

카프리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무언가를 찾는 듯한 얼굴이었다.

“카프리 뭘 찾고 있는 거예요?”

“우리처럼 제단을 만들었던. 그도 아니면 마계의 문을 연 것이라면 그 흔적이 남아 있을 거다. 그걸 찾고 있는 거다.”

“아…….”

난 카프리를 따라 뼈 기둥 주위를 돌았다. 정확히 뭘 찾아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왠지 무언가라도 보면 카프리가 찾는 건지 아닌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이내,

“카프리, 부서지긴 했지만 여기 붉은색 보석이 있어요. 연설대 비스무리한 것도 있고요.”

난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의 잔해를 찾아냈다.

“신전이었군.”

“신전이요?”

“그래. 켄트성에 있는 신전처럼 누군가 마신을 모시기 위해 만든 거다.”

“헐…….”

난 입을 쩍 벌리며 카프리를 쳐다봤다. 마왕은커녕 마족들만 떠올려도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마신이라는 말에 절로 등에 소름이 돋았다.

“보석과 연설대만 보고 그걸 어떻게 단정하는 거죠?”

“맞아요. 이쪽을 보니 바닥에 마법진 흔적이 있어요. 다른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지윤미와 이아영 마스터가 간절한 표정을 지으며 카프리를 쳐다봤다.

그녀들 역시 나와 같은 마음인지 카프리가 아니라고 해 주길 바라는 얼굴이었다.

“신전이 맞다.”

“그러니까 그것만 보고 어떻게…….”

“드워프가 만든 것이니까. 이 신전 드워프가 만든 거다. 내가 못 알아볼 리가 없다.”

“헐…….”

“헐…….”

카프리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래도 카프리의 동료 중 누군가가 이 신전을 만들었던 모양이다.

“마신을 모셨던 신전이라고 해서 겁을 먹은 모양인데 그러지 않아도 된다. 마신을 소환한다거나 뭐 그럴 목적으로 지어진 건 아니니.”

“그럼?”

“신전을 세웠다고 해서 꼭 신이 응답해 주지는 않는다. 만약 응답했다면 이렇게 부서지게 방치해 두지 않았을 거다.”

“아…….”

“흑마법사들이 마법의 성취를 위해서 지었다가 버려진 것 같다.”

주변을 살펴본 카프리가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자신이 추측하고 있는 내용을 말해 주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의 설명을 들으니 나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카프리는 까칠하지만 함부로 말을 하는 이가 아니었고 추측이라 해도 최소 80% 이상 확신을 하고 말을 했을 가능성이 컸으니까.

“부숴 버릴까요?”

“아니 둬라. 연구할 가치가 있다. 여기 보니 땅속에 석판이 잔뜩 묻혀있다. 다 흑마법에 관련된 술식들과 필요한 재료들이다. 연구할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

“흑마법을 연구하겠다고요?”

난 놀란 표정을 지으며 카프리를 쳐다봤다.

그가 괴짜인 줄은 알았지만 흑마법을 연구하겠다고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쯧쯧, 제법 사고가 넓어진 줄 알았는데 아직도 편견을 갖고 있군.”

“네?”

“오크와 다크 엘프처럼 마계가 근원이라고 다 우리의 적이 되는 게 아닌 것처럼 흑마법 역시 마찬가지다.”

“……?”

죽은 자를 살려서 언데드 몬스터로 만들어 인간을 해치고, 살아있는 사람의 생명력을 이용해 소환진을 만드는데도 카프리는 흑마법이 나쁘지 않다고 말을 했다.

게다가,

-카프리의 말이 맞아. 흑마법이라고 꼭 눈에 색안경을 끼고 볼 필요는 없어. 신이 만든 순리를 거스르고 인간의 생명력을 제물로 발현되는 마법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나쁘게 단정 지으면 하몽이 쓰는 마법도 좋은 마법이라고 할 순 없을 거야.

운디네 마저 형상화되어 나타나 고개를 끄덕거리며 카프리의 말에 동의했다.

‘그렇긴 하지. 지금은 적이 몬스터지만 같은 인간과 싸우게 된다면 하몽의 미티어 스트라이크는 현대의 그 어떤 병기 못지않은 대규모 살상 마법이 될 테니까.’

-맞아. 제대로 이해했네. 흑마법이 나쁜 게 아니라 그동안 흑마법을 배운 이들이 대부분 나쁜 짓을 많이 해서 안 좋게 비친 거야. 내가 이전에 소환된 차원에서는 흑마법사들도 인간들과 친하게 지내며 전쟁에서 시체를 일으켜 고향까지 데리고 가거나, 자식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 부모의 영혼을 붙잡아 두고 있다가 인사시켜 주고 보내 주는 일을 하는 이도 많았어.

‘죽은 사람의 영혼까지 붙잡아 둘 수 있다고?’

-어, 성취가 제법 높아야겠지만 가능해. 그래서 대부분의 차원의 신들이 싫어하는 거고.

‘아…….’

카프리에 이어 운디네의 설명을 들으니 어느 정도 납득이 갔다.

다만,

“린드 공주가 가만히 있을 것 같지 않은데…….”

이곳을 그냥 두려니 카시오페아를 모시고 있는 린드 공주가 걱정이었다.

우리가 땅을 밟은 이상 이곳 역시 이제 켄트 왕국의 이름으로 개발을 해야 할 텐데 다른 신을 모시는 신전을 유지하면 그녀가 어떻게 나올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린드 공주 때문에 망설이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다. 아니 그래선 안 된다.”

“그래선 안 된다고요? 그게 무슨 뜻이죠?”

난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카프리를 쳐다봤다.

흑마법에 대한 편견을 살짝 지워지긴 했지만, 그래도 린드 공주한테 미안해 고민하고 있는데 카프리가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그러지 말라고 말했다.

“현재 켄트 왕국에 신전은 카시오페아를 모시는 곳밖에 없다. 게다가 카시오페아의 성물로 인해 브레드까지 제압했고. 아마 기존 켄트 왕국 국민들은 물론이고 중국인들과 새로이 들어온 한국인들마저 카시오페아의 신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흠…… 눈앞에서 신의 권능을 봤으니 아무래도 그렇겠죠.”

카프리의 말에 난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린드 공주가 착용하고 있는 성물.

켄트성에서 나오는 성수. 그리고 내 벨트에 착용된 에르메스의 검.

카시오페아의 성물들은 모두 언데드 몬스터에 대해 강력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었고 대부분 사람이 카시오페아 신전에 대해 우호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린드 공주 눈치를 살피면 안 된다는 거다. 지금도 이런데 만약 시간이 지나 신자가 더 늘어나고 린드 공주의 입지가 올라가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아…….”

“린드 공주가 거부해도 그녀는 언젠가 영주 너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 있을 거다.”

“흠…….”

“마신을 믿으라고 하는 건 아니지만 한 왕국에 하나의 신만 믿는 건 옳지 않다. 국민 자신이 원하는 신을 믿을 수 있게 여러 신전을 왕국 내에 만드는 게 좋을 거다.”

“네, 알겠어요.”

난 카프리를 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생각이 짧았다.

종교의 자유.

린드 공주의 도움으로 브레드를 제압한 경험으로 인해 난 헌법에 나와 있는 기본적인 권리조차 하마터면 무시할 뻔했다.

나도 모르게 은연중에 카시오페아만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참고로 말하는 건데 오크들이 미소피아를 모시는 것처럼 우리 드워프도 따로 모시는 신이 있다. 엘프들도 마찬가지고.”

“네, 네. 무슨 말인지 알겠으니 더 말 안 하셔도 돼요.”

왜 이렇게 정색하고 얘기를 하나 했더니 카프리도 따로 만들고 싶은 신전이 있는 모양이었다.

“지윤미 마스터님, 글루틴 마을에 전령을 보내 공방 헬퍼들을 데리고 와 주세요.”

“네, 알겠어요. 근데 이곳을 누구한테 경비를 맡길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건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당분간은 발키리 길드가 해야 하지 않을까요? 훈련 때문이라도 계속 저랑 이곳을 와야 할 테니까요.”

“하아…….”

내 대답을 들은 지윤미 마스터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이었다. 내 명령을 받은 그녀가 이런 식의 반응을 보인 것은.

“옆에서 들으셨으면 알겠지만, 마신이라고 해서, 또 흑마법이라고 해서 다 나쁜 게…….”

“네. 저도 그건 이해를 했어요. 근데 머리로는 이해를 했는데 가슴으론 안 되는 걸 어떡하죠? 이곳에 동생들을 머무르게 하면 많이 찝찝할 것 같아요. 어쩌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고요.”

“흠…….”

난 고민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굳이 억지로 떠안길 필요는 없을 듯했다.

그런데,

“그레이가 맡아 주실래요? 따지고 보면 이곳 역시 애초에 그레이 기사단이 관리하던 베이스캠프 지역이니…….”

“저도 마신을 모시는 신전에 제 동생들을 보내면 꿈자리가 아주 뒤숭숭할 것 같습니다. 물론 영주님이 명령을 하면 따르겠지만 혹시라도 제게 선택권이 있으면 사양하고 싶습니다.”

조성태마저 거절의 뜻을 전해 왔다.

당황스러웠다.

지윤미와 조성태 두 명 다 내가 명령을 하며 목숨이라도 내놓을 사람들인데, 길드원들에게 마신을 모시는 신전을 지키게 하는 건 꽤 찝찝한 모양이었다.

마신을 모시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보초 좀 서면 되는데 그것마저 거부할 만큼.

“두 분 다 거절하시니 강요하지 않을게요. 전령한테 말해서 김용규 본부장이랑 안지현 실장한테 도움을 청하라고 하세요. 카프리가 이곳을 복구하면 지켜야 할 사람이 필요하니 마신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찝찝하지 않은 사람을 지원받아 달라고. 돈은 일반 구역 보초를 서는 것보다 두 배를 준다고 하시고요.”

“……네.”

지윤미 마스터가 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 명령에 거절의 뜻을 비친 것에 대해 많이 미안한 듯했다.

하나, 난 나무랄 생각이 없었다.

찝찝하다는데 어쩌겠는가. 게다가 나 역시 그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카프리와 운디네의 권유와 설득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 역시 웬만하면 부수고 싶었으니까.

“그럼 신전 일은 일단 이 정도로 마무리하는 걸로 하고 훈련을 시작해 볼까요?”

“오케이. 알았어.”

전령이 떠나는 걸 확인하고 나서 난 벨트에 꽂혀 있던 에르메스의 검을 꺼냈다.

좀비, 해골, 구울, 스파토이, 가스트…….

마신을 모셨던 신전이 있어서 그런지 크게 인기척을 내지도 않았는데 사방에서 수천여 마리의 언데드 몬스터가 몰려오는 게 보였다.

“카프리, 여기선 쇠사슬 안 묶을 거죠?”

“안 묶는다. 가서 얼른 해치워라.”

“네.”

난 빙그레 웃으며 언데드 몬스터에게 달려갔다. 처음 수련을 받을 때만 해도 두려움이 가득했는데 지금은 전투할 생각을 하니 등이 찌릿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숫자가 많긴 하지만 언데드 몬스터들은 늑대인간에 비해 움직임이 매우 느렸다.

게다가,

휘이익.

휘이익

뽀삭.

“뭐야? 왜 이렇게 쉽게 부서져?”

에르메스의 검으로 베니 언데드 몬스터들이 마치 볏짚처럼 몇 번 휘두르지도 않았는데 훅훅 나가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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