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언데드 학살자 (1)
인간은 쉬이 죽지 않는다. 아니 살아 있는 생명체라면 어떡하든 마족과 몬스터의 눈을 피해 살아 보려고 발버둥을 쳤을 것이다. 아니 지금 여전히 이곳 어딘 가에서 누군가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 버티며 살아가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오크들에게 잡혀 포로로 생활하며 삶을 영위했던 카프리와 수십 년간 땅속에서 생활했던 엘프들처럼 다크 엘프라는 이 종족이 살아 있다고 해도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혹시 그 스승이라는 존재를 어디서 만났는지 그리고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려줄 수 있나요?”
“플로라 길드가 관리하는 게이트로 들어갔다가 만났어요.”
“사막 지역을 말하는 건가요?”
“네. 맞아요. 베이스캠프 우측 하루 거리 필드에서 사냥하다가 거대 개미들한테 둘러싸여 위험에 빠졌었는데 다크 엘프들이 나타나 저흴 구해 줬어요. 정확한 위치는 모르지만 아마 그 근처 어딘가에 살고 계시는 것 같아요.”
“가 보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짐작하는 이유는 뭐죠?”
“사막 지역에 가 보셨으면 알겠지만, 그곳은 엄청나게 뜨겁고 습도도 높아요. 물이 없으면 버틸 수 없는 곳이죠. 저희가 확인한 바로는 근처에 오아시스가 있는 곳은 그곳밖에 없었어요.”
마계의 종족이라는 말에도 우리가 적대하지 않자 안지현은 경계심을 풀고 자신이 아는 그대로 대답해 주었다.
“만약 스승님이 아니었다면 저흰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거예요. 몬스터를 떠나서 물도 다 떨어진 상태였거든요. 그래서 말하지 못했어요. 마계의 종족이라 하나 그들은 우리에게 있어 생명의 은인이니까요.”
“아…….”
“아…….”
마스터들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던전 아니 대륙 탐험.
지금이야 우리로 인해 제법 넓은 대륙이 개척되고 있지만, 게이트가 생긴 초반에는 사상자가 엄청나게 많이 생겼다고 한다.
몬스터도 몬스터지만 지형과 날씨마저 갑자기 어떻게 변할지 종잡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특히 사막과 같은 지형은 한순간 방향을 잃으면 바로 황천길이었을 테고.
나는 물론이고 여기 있는 사람 대부분이 다 죽음 문턱까지 갔다 왔던 이들이기에 생명을 구해 준 이에 대한 고마움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는 가늠할 수 있었다.
“영주님, 부산으로 이동해 가 보시겠어요? 인간을 도와준 걸 보면 우리에게 우호적인 것 같은데 만나 보고 동맹을 맺을 수 있으면 동맹을 맺는 게 낫지 않을까요?”
“흠…….”
[다크 엘프가 마족과 돌아선 게 맞는다면 큰 힘이 될 겁니다. 아무래도 마계에서 살았던 종족이니 우리보다 마족과 몬스터의 습성과 특성에 대해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 게다가 그들은 기사와 마법사가 아닌 어둠의 계열 기술들을 갖고 있어 암살에 특화된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만약 적으로 돌아선다면 우리는 괜찮지만, 지구의 인물들에게 꽤 위협적인 존재가 될 겁니다.]
지윤미 마스터와 하몽은 당장 다크 엘프를 찾아가 만나보길 원했지만 난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다크 엘프를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급하게 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흠…….”
난 고민하는 표정을 지으며 글루틴 마을 동쪽 숲을 쳐다봤다.
각성할 때 본 게 맞았다면 저 숲을 따라 늑대인간과 타란툴라 지역, 그리고 언데드 지역을 지나면 사막이 나타날 것이다.
굳이 지구로 나가 다시 게이트를 넘어 이동할 필요 없이 저곳을 개척하면 자연스럽게 만나게 될 위치였다.
“다크 엘프를 만나는 건 잠시 뒤로 미루죠. 그들을 만나 동맹을 맺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일단 하루라도 빨리 성곽을 완성하고 도로를 개통하고 통신망을 뚫어 이곳을 안정시키는 게 더 중요하니까요.”
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안지현을 쳐다봤다.
“어느 정도까지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전 기업에서 아주 많이 적극적으로 움직여 주셨으면 합니다.”
“얼마나?”
“예전에 뉴스에서 봤는데 대현 건설에서 외국에 있는 강에다가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다리를 만드는 데 6개월이 걸렸다고 하던데 맞나요?”
“네. 맞아요.”
“흠…… 그럼 일 년이면 될까요? 이곳에서 머무는 사람들이 지구에 있었을 때와 비교해도 불편하지 않은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
“일 년 안에요?”
“네. 정부에서 추진하면 어렵겠지만 기업이라면 가능할 거라 믿습니다. 물론 그에 필요한 자금은 이곳의 자원을 유통해 충당시킬 수 있게 해 드리겠습니다.”
“네. 알겠어요. 영주님의 기대에 최선을 다해 맞춰 볼게요.”
안지현이 입술을 굳게 다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한민국 재계 서열 100위 안에 드는 기업들이 켄트 왕국 개발에 본격적으로 합류하는 순간이었다.
* * *
성진 십만 명.
대현 십만 명.
대박 십만 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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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들이 합류하고 얼마 안 돼 글루틴 마을에 있는 게이트를 통해 하루가 멀다고 사람들이 들어왔고 며칠 만에 백만 명이 넘어갔다.
“와! 우리나라 건설과 통신 기술이 세계에서 손꼽히는지는 알았는데 진짜 장난 아니다.”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마치 비디오 영상을 빨리 감는 것처럼 변해가는 글루틴 아니 켄트 왕국의 모습을 보며 이세훈이 감탄을 했다.
그에 반면 김용규는,
“너무들 하네요. 정부 차원에서 사람을 모집할 땐 시큰둥하더니 기업에서 나서니 사람들이 금방 모이네요.”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사람들 지켜봤다.
오크의 숲, 아니 스카이 캐슬을 개발할 땐 인력난에 허덕였는데 일주일도 채 걸리지 않아 백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이곳에 도착하니 많이 씁쓸한 모양이었다.
“본부장님 잘못이 아니니 너무 서운해하지 마세요. 지난날의 과오로 인해 아직 사람들은 정부라는 이름보다 성진, 대현, 대박…… 이라는 이름을 더 신뢰하는 거니까요.”
난 김용규의 등을 쓰다듬으며 그를 위로해 주었다.
내가 알고 겪은 그는 정치인에 대해 갖고 있던 내 가치관이 바뀔 정도로 국민에게 헌신하며 그 무엇보다 국민의 안위를 걱정하는 사람이었지만, 사람들이 그걸 알기엔 더 시간이 필요할 듯싶었다.
김용규 본부장의 표정이 좋지 않은 걸 본 안지현이 우리에게 걸어왔다.
“영주님의 말도 맞지만, 반강제로 온 이들도 많아요.”
“강제로 이곳으로 데리고 왔다고요?”
“아무런 면담도 없이 직원들을 발령 내고 협력 업체에도 협조 요청을 보냈어요. 던전 안을 개발하려고 하니 바로 출근하라고. 그리고 긴급 구인을 해서 이곳으로 출근할 의향이 있으면 학력 스펙에 상관없이 바로 입사를 시킨 사람들도 많고요.”
“아…….”
김용규가 조금은 표정을 풀린 얼굴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
군대 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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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대기업에 취직하려면 기본적인 교육을 16년이나 받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거기에 더해 유학 경험과 갖가지 스펙이 있어야 입사할 수 있었다.
사원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어렵고 긴 공부를 하고 나서야 들어간 회사에서야 발령을 내는데 어찌 거부할 수 있겠는가.
협력 업체들 역시 마찬가지였고.
눈앞의 작은 위험 때문에 회사를 나가고 협조 요청을 무시했다간 나중에 몬스터와의 전쟁이 끝났을 때 그들은 개밥에 도토리가 될 테니까.
그리고 이 기회를 이용해 자격이 되지 않는 이들도 대기업 간판을 따기 위해 참여하는 사람들도 많을 테고.
내가 삼천만 원, 아니 월 천만 원을 벌기 위해 이곳에 들어온 것처럼 대기업의 간판과 큰돈을 벌기 위해 들어온 사람들도 꽤 많이 보였다.
아메리칸드림. 아니 스카이 캐슬 드림.
안지현은 반강제로 불러 모았다고 했지만, 미소를 머금은 사람들이 꽤 많이 보였다.
“던전 안은 위험하다고 하더니 여기가 지구보다 더 안전한 것 같은데?”
“네가 봐도 그렇지? 뭔 헌터가 이리 많냐? 대한민국에 있는 헌터는 여기 다 모여 있는 것 같은데?”
기업에 소속되어 이곳에 도착한 이들은 수없이 많은 헌터들을 보며 놀라며 또 안도했고.
“저기 봐 봐. 저기 서 있는 사람들이 사람이 아니라 엘프래.”
“나도 들었어. 저기 오크랑 드워프도 있다.”
“오크랑 엘프, 드워프도 대단하지만 저기 서 있는 켄트 왕국 기사들과 마법사들도 장난 아니래. 들어 보니까 헌터 협회 등급으로 치면 다들 최하 B급 이상이라고 하던데? S급도 몇 명이나 있고.”
이종족과 이계인 들을 보며 마치 해외여행을 처음 간 사람처럼 신기해했다.
“사람에게 평생 세 번의 기회가 온다고 하더니 아무래도 삼십 평생 만에 첫 번째 기회가 온 것 같다. 평생 공사장을 돌아다니며 허드렛일만 했는데 이제는 성진 그룹 정직원도 됐고 돈도 많이 주고 나 여기서 뼈 묻으련다.”
“당연한 걸 입 아프게 뭐 하러 말해. 헬퍼들한테 얼핏 들었는데 여기 스카이 캐슬 소속으로 일해도 장난 아니래. 그냥 성곽 공사 인부로 일해도 헌터들이랑 비슷한 취급해 준다고 하더라고.”
던전 아니 몬스터가 출몰하는 세상에 넘어와서 상기된 것도 잠시 대부분 사람의 얼굴에 여유가 미소가 가라앉아 있었다.
이제 이쯤에서 난 개발 과정에서 빠져도 될 것 같았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지식도 없는 내가 어슬렁거려 봤자 방해만 될 테니까.
“세훈아, 난 이쯤에서 빠질 테니까 나머진 네가 알아서 해라.”
“엥? 빠진다고?”
“어. 이제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지.”
“설마 또 농사를 짓겠다는 건 아니지?”
“그건 하고 싶은 일이고.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잖아.”
난 빙그레 웃으며 저 멀리 켄트 왕국 기사단을 훈련하고 있는 퍼거슨을 쳐다봤다.
“네크로맨서를 만날 때도 느꼈지만, 브레드를 상대하며 확실히 깨달았어. 정령의 도움이 아닌 기본적인 내 실력도 키워야 한다는 걸. 그래서 나도 본격적으로 몬스터 사냥을 하면서 수련해 보려고.”
난 허리에 착용한 에르메스의 검을 매만지며 글루틴 마을 동쪽 숲을 쳐다봤다.
-잘 선택했어. 너도 겪어 봐서 알겠지만, 하위 몬스터라면 몰라도 상위 몬스터나 고위 마족들은 정령 마법만으론 상대하기 까다로워. 아무리 중급 정령사가 됐다고 하나 단숨에 해치우지 못하면 상대가 공격을 막아 내고 반격을 하면 부담스러우니까.
운디네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데 네가 검술을 익히고 실전 감각을 익히면 고위 마족도 상대할 수 있을 거야.
운디네가 그동안 많이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이미 수련하기로 한 거 듣고 느꼈을 텐데도 그녀가 다시 한번 더 적극적으로 권유해 왔다.
“영주님, 설마 헌터들을 데리고 가지 않고 혼자서 사냥하겠다는 건 아니죠?”
“그럴 리가 있나요. 퍼거슨 님과 함께 가야죠.”
“네?”
“퍼거슨과 둘이 간다고요.”
“헐…… 그 말이 그 말이지 않습니까?”
김용규가 잔뜩 인상을 찡그리며 날 노려봤다.
그동안 난 사냥을 나갈 때 백 단위 이상의 부대 단위로 출정했는데 퍼거슨과 단둘이 사냥을 나가겠다고 하니 많이 불안한 모양이었다.
“불안하시면 하몽 님한테도 부탁해서 같이 나갈게요. 그러니 반대하지 말아 주세요. 얼음 여왕도 얼음 여왕이지만 일본에서 설치고 있는 리치와 데스 나이트도 언제까지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요?”
“그럼?”
“수련하고, 성과가 있으면 잡으러 가야죠. 물 한 모금도 공짜로 주기 아까운 나라지만 그렇다고 망하게 둘 수는 없잖아요. 만약 일본이 망하면 리치와 데스 나이트가 우리를 향해 시선을 돌릴 수도 있고요.”
“아…….”
김용규 본부장이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헬퍼다. 지금도 여전히 난 농사를 짓고, 낚시하고, 공사 현장에 가서 땀을 흘리며 일을 하는 게 더 적성에 맞지만 이제 더는 고집을 부리면 안 될 듯했다.
내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는 이곳을 지키기 위해서도 힘을 길러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 마나 팔찌에 마나부터 채워 놓자.’
코어를 모아 마나 팔찌에 S급에 이르는 마나를 채워 놓은 안지현처럼 나도 겸사겸사 수련도 하고 사냥을 하면서 코어를 모아야 할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