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스카이 캐슬 드림 (1)
한 잔, 두 잔…… 열네 잔.
각각 소주 한 병을 마시는 동안 김용규 본부장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생각이 많은 얼굴이었다.
“본부장님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전 대한민국과 스카이 캐슬. 그리고 저와 김용규 본부장님을 따로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복잡한 계산 없이 허심탄회하게 얘기해 주세요. 이세훈 팀장의 설득에 영주가 되기로 하긴 했지만, 본부장님과 얼굴을 붉히면서까지 강행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난 새로운 소주병 하나를 따고 김용규 본부장의 잔에 채워주며 가만히 그를 쳐다봤다.
미운 정이라도 든 것일까.
처음 그를 만났을 때만 해도 사사건건 정도(正道)를 주장하며 트집을 잡는 그가 못마땅했지만, 지금은 어느새 정겨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독립군의 후손이라며. 대한민국 사람이지 않으냐며. 계속 저지시켰던 그가 짜증나긴 했었지만 이제 와 돌이켜보면 덕분에 난 내 정체성을 지킬 수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독도는?”
사람이 참 한결같았다.
처음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그는 항상 내가 한국인이라는 걸 주지시키려 했다.
“2005년이었나. 혹시 허준홍이라는 연예인이 일본에서 기자 회견을 했던 거 아시나요?”
“흠…….”
“도박사가 주인공이었던 드라마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한류 열풍이 불었고 그 인기에 힘입어 일본에 가서 뮤지컬 공연을 하기 전에 열렸던 한일 공동 기자 회견이었죠.”
“제가 그런 것까지는 잘…….”
“그때 일본 기자도 그 연예인에게 본부장님과 같은 질문을 했죠. 독도가 어느 나라 땅이냐고. 일본에서 공연을 앞둔 연예인에게 대답하기 아주 곤란한 질문이었죠.”
“…….”
“그때 그 연예인이 뭐라고 대답하였는지 아십니까?”
“글쎄요.”
“아무런 말 없이 그 일본 기자에게 다가가 셔츠 주머니에 있던 볼펜을 빼앗았죠. 그리고 이렇게 말했대요. ‘기분이 어떠세요?’”
“헐…….”
“멋있죠? 저도 그때 그 말을 들었을 때 가슴이 찌릿했습니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일을 기억하고 있고 여전히 그의 팬입니다. 그래서 지금 아주 많이 후회하고 있어요. 그보다 더 많은 명성과 권력을 갖고 있던 전 돈을 선택했었으니까요.”
“…….”
“독도는 당연히 우리 땅입니다. 그러니 본부장님께서 도와주세요. 지금처럼 제 옆에 서서 제가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게.”
“성주님…….”
글썽글썽.
나의 질문에 김용규 본부장의 눈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주르륵.
그리고 그 눈물과 함께 얼굴에 서려 있던 불안함과 두려움 같은 것이 씻겨 사라지고 있었다.
“도와주시겠습니까?”
“네. 물론이죠. 제가 여력이 닿는 선에서 아니 설사 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성주님이 가시는 길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마워요. 한잔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저도 한잔 따라 드리겠습니다.”
“네.”
김용규 본부장을 알고 나서 처음으로 둘 다 진심이 담긴 미소를 머금고 술잔을 나누었다.
그리고 이내,
“……밖의 상황이 아주 심각합니다. 이대로 있으면 일본에 이어 미국은 물론이고 러시아와 중국도 곧 무너질 것 같습니다.”
“무너질 것 같다는 건?”
“몬스터 웨이브를 막지 못해 경제가 붕괴하는 것은 물론이고 법과 질서도 무너진 지 오래입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경찰과 군인을 신뢰하지 않고 몬스터를 상대할 수 있는 헌터들이 법 위에 군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대로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사달이 나도 날 것 같습니다.”
“흠…….”
그는 밤새도록 지구의 상황을 내게 설명해 주었다.
* * *
‘간만에 달렸더니 힘드네.’
새벽까지 김용규와 술을 마신 난 몇 시간 자지 못하고 일어나 이세훈과 린하이를 호출했다.
숙취로 인해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김용규에게 들은 밖의 상황이 심각한 것 같아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리폰 부대를 이용해서 우리가 차지한 영토의 지도를 만들어 주세요.”
{네.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습니다. 성곽 공사를 하고 있어 기본적인 방어 시설은 갖추고 있지만 제대로 된 안전을 위해선 몬스터의 분포도와…….}
“몬스터의 분포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대륙 안으로 뻗쳐 있는 강줄기부터 먼저 확인해 주세요. 그리고 대규모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평야 지대가 있는 지도요.”
{강줄기와 평야 지대요?}
이른 아침부터 호출해 농사지을 땅을 찾아보라고 하자 린하이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뭐야? 얘기가 잘 된 거 아니었어? 왜 또 농사 타령이야?”
이세훈은 내가 또 정치에서 물러나 도망치려는 줄 알고 화를 냈고.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려고 알아보라는 거야.”
“……?”
“김용규 본부장한테 들어 보니 우리나라 말고는 다들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 내지 못하고 다 바리케이드가 뚫렸다며?”
“……어.”
“그래서 이러는 거야. 당장이야 괜찮겠지만 계속해서 이러면 곧 식량을 수급하는 데 어려움이 생길 거야. 몬스터 때문에 당장 목숨이 위험한데 누가 농사를 지으려고 하겠어? 게다가 그렇게 어렵게 수확한 농작물을 외국으로 수출하려고 할 것 같아?”
“아…….”
“당장 눈앞에 있는 몬스터를 막아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자급자족을 위한 식량부터 확보해야 해.”
“그렇긴 하지. 근데 스카이 캐슬에서 재배되는 농작물로도 우리가 먹을 정도는 되지 않나?”
이세훈이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내가 직접 참여하고 주관해서 스카이 캐슬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고 우리가 먹을 정도의 농작물은 재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천만 명. 아니 넉넉하게 일억 명이 먹을 수 있는 농산물을 매년 재배할 수 있어야 해.”
“헐…… 너 설마 대한민국 국민을 전부 먹여 살리겠다는 거야?”
“당연한 걸 뭘 물어. 그러니 너도 그에 맞춰서 개발 준비를 해. 아무리 성수가 있고, 강력한 무구와 병사들이 있어도 자급자족할 식량이 없으면 네가 만든 화폐는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게 될 테니까.”
“헐…….”
나의 설명에 이세훈이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날 쳐다봤다.
오천만 명이 일 년 동안 먹을 식량.
그 양이 얼마나 될지는 나 역시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이기는 했다.
한데 하나는 알고 있었다.
게이트가 생기기 전 세계 최대 강국으로 불린 미국은 3억 명이 넘는 인구의 식량을 자급자족할 만큼 농사를 짓고 있었다는 걸.
땅이 있고, 사람이 있고, 돈이 있다.
우리라고 못 할 게 없었다.
“좋아. 대한민국 사람까지 챙기는 건 나도 인정. 근데 다른 할 일도 많은데 농사부터 주력으로 해야겠어? 성주인 네가 관심을 기울이면 밑에 사람들도 자연스레 농사하는 데 더 힘을 싣게 된다는 거 알잖아.”
“어. 그러라고 이러는 거야. 그동안은 무력적인 위협이 없어서 등한시됐지만 이대로 있으면 예전처럼 쌀과 옷이 화폐 대신 쓰게 될 테니까.”
난 입술을 굳게 다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쌀과 면포.
먹고 살기 힘들 땐 그 두 가지가 현금과 같은 대접을 받았다.
아니 옛날 사람들은 현금보다 쌀을 더 우선시했다고 한다.
내가 너무 앞서 나가고 비약해서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난 머지않아 그런 상황이 초래할 수도 있을 거라 판단됐다.
은행에 수십억 원의 돈이 있고 강남에 건물과 땅이 있으면 뭐 하겠는가.
몬스터들로 인해 농사를 짓지 못해 식량 수급이 되지 않으면 굶어 죽을 텐데.
“그리고 단지 농사 때문에 강줄기를 찾으라고 하는 건 아니야. 오크의 숲도 그렇고 이곳 켄트성 인근도 그렇고 대륙 곳곳에 꽤 많은 강줄기가 들어와 있더라고. 지금은 그게 우리의 이동을 막는 장애물이지만 제대로 개발을 해서 배를 들여놓으면 성곽을 짓거나 다른 산업시설을 짓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될 거야.”
“아…… 미국처럼?”
“그치. 아무리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안 했어도 너도 알 거 아니야. 미국이 세계 최강국이 된 원천을.”
“당연히 알지.”
난감한 표정을 지었던 것도 잠시 이세훈이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미국이 세계 최강국이 된 건 지형적 이점도 있지만, 미국 안에 들어와 있는 열 개가 넘는 강줄기도 한몫 단단히 했다.
개척의 시작은 도로다.
그런데 그 도로를 만들려면 엄청난 시간과 돈이 투자되어야 하는데 미국은 대륙 곳곳으로 펼쳐져 있는 강줄기로 인해 어지간한 곳은 다 배로 이동할 수 있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차로 물자를 나르는 것보다 배로 나르는 게 더 효율적이고 빠르고 가격도 저렴했다.
땅이 작았을 때야 도로를 만드는 게 빠르고 편리하겠지만 지금처럼 거대할 땐 배만큼 좋은 운송 수단이 없었다. 그리고 겸사겸사 농사를 지을 물도 확보하고.
{다시 한번 확인해 봐야 알겠지만 몇 번 정찰하다 보니 대륙 안에 강줄기가 많이 있기는 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연결이 되어 있었던 것 같고요.}
“흠…….”
{하늘 다리가 있는 곳도 그렇고 유난히 강줄기가 많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레이드를 할 때 많은 애로사항이 있었고요. 몬스터 무리에게 쫓겨 도망가다 보면 강줄기가 길을 막는 일이 허다했거든요.}
“잘됐네요. 그럼 안해용 성주, 아니 영주의 지시대로 지도부터 만들어 주세요. 이제 그 강줄기들이 장애물이 아니라 레이드를 할 때도 우리의 편이 될 수 있게 개발해 드릴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나와 이세훈의 의견이 잠시 맞지 않아 망설였던 린하이가 미소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막사를 나갔다.
이세훈이 내 뜻에 동의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듯했다.
“우리끼리 하기는 힘들 거야. 너도 알지?”
“알지. 근데 염려하지 않아도 돼. 명분이 좋잖아. 대한민국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뱃길을 연다는 데 김용규 본부장도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겠지.”
“맞아. 그분이라면 그렇게 하겠지. 그리고 이왕 협조를 받는 김에 대기업들과도 접촉하라고 해. 공사도 참여시키고 땅을 내어줄 테니 제조 공장도 이전하라고 해.”
“제조 공장을 이전시키라고 하라고? 말투가 권유가 아닌 강제로라도 시키라고 하는 것 같은데 맞아?”
“제대로 들었어. 들어보니 규모 좀 있는 기업들은 공장이 다 외국에 있더만. 우리의 보호를 받고 싶다면 한국으로 되돌아오거나 아님 이곳으로 이전하라고 해. 인건비 아끼겠다고 외국에 가서 차린 공장까지 지켜 줄 생각은 없으니까.”
“흠…… 만약 거절하면 어떡하지?”
“말했잖아. 권유가 아닌 명령이야. 거부하면 당연히 페널티를 줘야지.”
난 입술을 굳게 다물며 이세훈을 쳐다봤다.
“아니다. 김용규 본부장한테 얘기해서 우리나라 100대 기업 총수들 다 들어오라고 해. 내가 직접 얘기할게. 나한테 그 정도 힘 있는 거 맞지?”
“당연하지. 세계최강의 헌터가 부르는데 다들 한걸음에 달려 올 거야. 재미있겠다. 크크.”
이세훈이 마치 신이 난 어린아이처럼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