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짓는 영주님-199화 (199/255)

199화. 영주가 되다 (2)

“넌 남아.”

“나? 왜?”

“몰라서 묻는 거야?”

지휘관들을 따라 함께 나가려 하는 이세훈을 불러 놓고 난 잔뜩 인상을 찡그렸다.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이십 년을 함께한 친구다.

뻔히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게 무엇인지 다 알 텐데도 모른 척하고 능글능글하며 건국을 하기 위한 발판을 밟고 나가려 하는 게 서운하고 못마땅했다.

“저 자리를 린드 공주에게 양보하고 켄트의 이름으로 이곳을 사수하면 국제 외교를 할 때도 부담이 적고 어쩌면 옛 켄트 왕국의 실향민들이 찾아올 수도 있어. 나도 나름 신중하게 고민을 하고 생각을 한 후에 결정을 내린 건데 그렇게 반대를 해야 했었냐?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그건 나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근데 그런 이유만 있었다면 난 당연히 네 뜻에 힘을 실어 줬을 거야.”

“또 건국 얘기를 하고 싶은 거야? 그건 네가 시간을 두고 차차 생각해 본다고 했잖아. 너도 그때 기다려 준다고 하지 않았나?”

“그랬지. 근데 우리에게 이제 그렇게 많은 시간이 남아 있지 않아서 그래.”

이세훈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날 가만히 쳐다봤다.

“스카이 캐슬을 지키기 위해서. 네 사람이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게 해 주기 위해서 이 전쟁을 시작한 거 알아. 지금도 청방과 몬스터의 위협만 없다면 넌 스카이 캐슬로 가서 농사를 짓고 낚시를 하며 소확행을 즐기며 여생을 살고 싶어 한다는 것도. 그리고 혹여나 네가 이 전쟁을 치르다 무슨 일이 생기면 남은 사람들이라도 그런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기 위해서 적성에도 맞지 않는 그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도.”

“…….”

난 아무런 말 없이 이세훈을 가만히 쳐다봤다.

또 얼렁뚱땅 이 자리를 모면하기 위한 말을 하거나 그도 아니면 또 날 설득하기 위해 고집을 부릴 줄 알았는데 이번엔 내 입장에 서서 말을 하고 있었다.

역시나 그는 내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건국?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살짝 마음도 흔들리고 등에 전기가 올 정도로 찌릿한 말이었지만 사실 지금은 크게 관심이 없었다. 아니 굳이 내가 태어나고 자란 대한민국 관료들과 얼굴을 붉히며 강행하고 싶지 않았다.

“근데 네가 하나 착각하는 게 하나 있어.”

“……?”

“넌 내게 무슨 일이 생겨도 지휘부에서 알아서 이곳을 다스려 줄 거라 믿고 있는 것 같은데 내 생각은 아주 다르거든.”

“…….”

“네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내분이 생길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내분이라니?”

“이거 봐 봐.”

이세훈이 가슴 안에서 수첩을 꺼내 펴서 내게 넘겨주었다.

「스카이 캐슬 연합 세력도.

1. 발키리, 태백산맥, 그레이. 마녀 부대, 레인보우, 울프.

2, 재난 관리 본부, 플로라, 화랑 연합, 중립 연합.

3. 엘프, 오크, 드워프.

4. 켄트 왕국 근위 기사단과 마법사단.

5. 그리폰 부대&중국인 헌터(포로)」

“지금 현 상태에서 네게 무슨 일이 생기면 이곳은 최하 다섯 곳의 세력으로 찢어지는 수가 있어.”

“너무 비약하는 거 아니야? 다들 똑똑하고 좋은 사람들이야. 내가 없다고 해도…….”

“나도 알아. 우리 지휘부 사람들 모두 좋은 사람들이라는 걸. 그래서 그렇게 된다는 거야. 네가 이곳에 머무는 사람들을 모두 네 사람으로 여기고 목숨마저 도외시 한 채 싸우는 것처럼. 그들도 자신의 세력에 포함된 이들을 위해선 못 할 짓이 없는 사람들이니까.”

“……?!”

“저들이 굴복하고 충성을 맹세한 대상은 스카이 캐슬이 아니야. 바로 너 안해용이지. 네가 결정한 일이니까. 네가 명령을 내린 거니까.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아도. 탐탁지 않아도 따르는 거지.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오르면 아니 오르는 과정에서 내분은 반드시 일어나게 될 거야.”

“흠…….”

난 고민하는 표정을 지으며 이세훈을 쳐다봤다.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권력은 부모, 형제와도 나눌 수 없다는 말을 하는 건가?’

근데 난 그의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중국.

거대한 땅과 인구를 갖고 있으면서도 우리나라만큼이나 수없이 많은 왕조가 바뀐 나라.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세훈이 지금 말하는 것은 지난 역사가 이미 증명한 아주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지금은 내가 있어 스카이 캐슬 연합이라는 테두리 안에 있지만 이세훈의 말대로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진짜 어떤 일이 생길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오크의 숲 하나만 차지했을 때와 달리 지금은 비토섬은 물론이고 대한민국의 영토와 맞먹는 이곳 켄트 왕국의 땅까지 차지하게 됐으니까.

“그걸 원하는 건 아니지?”

“……당연하지.”

끄덕끄덕.

“그럼 내가 하는 일에 방해하지 말아 줘. 넌 지금처럼 내 소신대로 자비로운 군주의 모습만 보여주면 돼. 나머지 냄새나고 더럽고 욕먹는 일은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분명 넌 내가 욕먹는 것조차 속상해하겠지만 너 속상하지 않게 안 보이는 데서 조용히 잘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나 때문에 악역을 맡겠다는 거야?”

“너도 알잖아. 나라가, 아니 회사는 물론이고 하나의 세력이 제대로 굴러가려면 너처럼 착한 사람지도자도 필요하겠지만 누군가 한 명은 악역이 필요하다는 걸.”

“이러려고 널 불러온 게 아닌데…….”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야. 난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에 살았을 때보다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고 즐거워.”

이세훈이 빙그레 웃으며 날 지그시 쳐다봤다.

사실이었다.

그의 미소에서 정말 가식이라곤 1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지금 하는 일이 적성에 맞는 표정이었다.

“이곳의 이름을 켄트 왕국으로 하는 건 내가 마스터들을 설득시켜 볼게. 비록 마녀 부대에서 중국 본토에 안배해 놓긴 했지만, 지금은 최대한 우리의 정체를 숨기는 좋으니까. 단 너도 하나는 양보해 줘.”

“뭘? 양보하면 되는데?”

“영주(領主)가 되어 줘.”

“끙…….”

난 앓는 소리를 내며 이세훈을 쳐다봤다.

영주(領主)

단순히 생각하면 토지의 소유라고 받아들여도 되겠지만 이세훈은 지금 중세 유럽처럼 영지(領地)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영주권을 행사하는 최고 책임자이자 지도자가 되어 달라고 말하는 뉘앙스였다.

“네가 영주로 올라가야 마스터들을 지금 짓고 있는 성곽의 성주로 임명하고 발령을 보낼 수 있어.”

“마스터들을 성주로 임명하겠다고?”

“어. 전쟁을 치렀고 승리를 거뒀으니 상을 내려야지. 너도 그것 때문에 지휘부 회의를 하자는 거 아니었어?”

“……어.”

“전쟁에 승리했지만, 현재로선 마스터들에게 딱히 줄 게 없어. 금속과 광석, 성수는 모두 우리가 직접 관리를 하고 판매를 해서 돈을 벌어야 하니까.”

“흠…….”

“게다가 지금처럼 이 넓은 땅을 우리가 모두 관리 할 수도 없고. 마스터들 아니 각 길드에게 성을 하사하고 직접 관리를 하라고 하는 게 베스트야. 지금이야 스카이 캐슬의 구성원으로서 그리고 동맹으로 돕고 있어 운영에 소극적인 면이 있지만, 자신들의 땅이 되면 많이 달라질 테니까.”

“아예 성 자체를 넘겨주자는 거야?”

“그렇지. 네가 그동안 스카이 캐슬의 성주였던 것처럼 그들도 이제 자신들의 성에선 최고 권력자이자 지도자가 되는 거지. 물론 그 위엔 우리가 자리하게 되고 도와줄 건 도와주면서 세금을 받는 방향으로 하면 될 것 같아. 네가 허락하면 이 부분은 전문가들과 상담해서 네가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제대로 된 보고서를 올릴게”

“대충 이해는 했어.”

“그럼 다행이고. 근데 그래도 보고서는 올릴게.”

“그래.”

난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허락하는 걸로 알고 난 가 볼게.”

“바로 가게? 간단하게 맥주 한잔하지?”

“나중에. 일단 마스터들부터 설득하고.”

“그래.”

난 입맛을 다시며 이세훈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직접 몸을 움직인 것은 몇 번 안 되지만 전쟁을 치르는 동안 제법 정신적으로 피곤함이 누적돼 한잔하고 싶었는데 이세훈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전을 나갔다.

* * *

대전에서 나온 이세훈은 바로 발키리 길드 부마스터이자 안해용의 연인이 권수정을 찾아갔다.

“제수씨, 저 왔습니다.”

“오셨어요. 어떻게 됐어요?”

이세훈이 올 걸 알고 있었는지 권수정이 안달이 난 표정을 지으며 이세훈을 쳐다봤다.

“허락 맡았어요. 영주가 되겠다네요.”

“휴우. 정말 다행이네요. 계속 거절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제가 얘기했잖아요. 허락하게 될 거라고. 일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절대 하지 않겠다고 할 놈이지만 이곳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절대 거절할 성격이 되지 못하니까요.”

“네. 맞아요. 오빠는 그런 사람이니까요. 그럼 이제 김용규 본부장을 만나러 가면 되는 건가요?”

“아니요. 린하이부터 만나야 해요. 김용규 본부장도 그렇고 이아영 마스터도 그렇고 이곳의 이름을 켄트 왕국으로 지어도 당장 어떤 액션을 취하지는 못할 거예요. 시간을 두고 천천히 달래 주면 돼요. 지금 문제는 포로로 있는 청방 헌터들과 헬퍼들이에요. 그들을 이대로 돌려보내면 이제는 청방이 아닌 중국과 세계 헌터 협회의 견제를 받게 될 테니까요.”

“네, 그럼 같이 가요.”

잠시 대화를 나눈 이세훈과 권수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리폰 부대가 먹는 섹터로 걸어갔다.

전쟁이 끝났으니 귀향을 하길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돌려보내야 했다.

목숨만큼이나 약속을 중요시하는 안해용이 내뱉은 말이었기에 반드시 지켜야 했다.

“훈련 중이었나 보네요.”

{두 분께선 여긴 어쩐 일로…….}

“잠시 대화를 하고 싶어서 왔어요. 시간 좀 내 주실 수 있나요?”

{네. 물론이죠. 들어가 계시면 정리하고 금방 따라가겠습니다.}

이세훈과 권수정이 찾아오자 린하이는 모든 훈련과 뒷정리를 중단하고 바로 둘을 막사로 안내했다.

안해용과 대면을 할 때도 항상 평정심을 유지했었는데 린하이의 목덜미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져 있었다.

{이아영 협회장의 말이 사실이었구나.}

린하이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막사 안을 쳐다봤다.

‘이곳의 최고 지도자는 한해용 성주님이지만 실제로 권력을 행사하고 운영하는 사람은 그 둘입니다. 내정에 관해선 저한테 얘기해 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포로들의 처우 문제로 인해 중국과 전쟁까지 준비하고 있다는 말에 린하이는 대전에서 나와 바로 이아영을 찾아갔고 그녀에게 들은 말이었다.

지휘부 회의는 안해용 성주가 큰 물줄기만 잡아 줄 뿐. 그에 따른 디테일한 부분을 계획하고 진행하는 이들은 따로 있다고.

{차 좀 부탁하지.}

{네, 알겠습니다.}

린하이는 곁에 있던 참모에게 차를 부탁하고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바쁘신 것 같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성주님께선 켄트 왕국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대한민국과 이곳이 연관되어 있지 않다고 명분을 만들어 중국의 견제도 피하고 린드 공주한테도 나름의 보답을 하고 싶은 모양인데 그건 재난 관리 본부와 헌터 협회도 원하지 않고 무엇보다 그런 거로 중국의 견제를 피하는 건 어렵다는 게 저희 팀원들이 내린 결론이에요.”

{…….}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흰 포로들이 원하면 귀향을 시킬 겁니다. 재난 관리 본부와 사이가 껄끄러워지고 중국의 견제를 받고 최악의 경우 전쟁이 발발한다 해도 이곳 스카이 캐슬에서 성주님의 명령과 약속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니까요.”

{…….}

이세훈이 입을 열자 린하이는 긴장한 기색을 보였던 것도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에둘러 말하고 있었지만, 대전에서 있었던 갈등이 모두 자신 때문에 생긴 거라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걸 넘어 이세훈의 말대로라면 최악의 경우 전쟁이 발발하면 그것조차 자신 때문이라고 우회적으로 말을 하는 것이었다.

“이곳 켄트성과 남쪽 아래 있는 성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헌터들과 포로들을 설득해 주세요.”

{켄트성을 준다고요? 아까 대전에서 듣기론 린드 공주님께…….}

“켄트 왕국의 이름을 지켜주고 린드 공주님을 여왕으로 추대할 겁니다. 허나, 이곳을 실질적으로 관리하고 운영하는 것은 성주가 될 것입니다. 린하이 님과 린하이 님이 추천한 사람을 두 곳의 성주로 임명되게 해 드리겠습니다.”

{…….}

“린드 공주님과 켄트 왕국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건 딱 거기까지입니다. 그들은 성의 운영은 물론이고 병력도 가질 수 없게 될 겁니다. 그들에게 그런 힘까지 쥐여주게 되면 이곳의 정체성이 흔들릴 수도 있게 될 테니까요.”

{아…….}

“성주님은 몰라도 전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린드 공주와 켄트 왕국의 사람들이 이곳을 통치하는 걸로 보이겠지만 실질적인 이곳의 주인은 린하이 님과 동료들이 될 겁니다. 군사와 인력이 없는 왕실은 힘을 쓸 수 없을 테니까요. 그리고 켄트성 남쪽으로는 스카이 캐슬 연합이. 그리고 북쪽으로는 한국 헌터 협회 마스터들이 성주가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레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형국이 될 테고 포로로 이곳에서 생활을 시작했다고 하나 린하이 님과 중국인들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은 발생하지 않을 겁니다.”

{……?!}

린하이의 등이 땀으로 흥건해지기 시작했다.

전향했다고 하지만 그는 아직 이방인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이세훈은 자신의 계획과 그로 인해 생길 수 있는 것들을 예상하며 솔직하게 밝혔고 린하이는 그 모습에 오히려 두려움을 느꼈다.

켄트성의 성주 자리를 주겠다는 말은 달콤했지만 연합 길드들을 서로 견제시키겠다는 말은 살벌하기 이를 데 없었다.

헌데 그게 린하이 쪽에선 하나도 손해 보는 게 없었다.

가장 늦게 합류를 했지만, 힘이 합쳐지면 스카이 캐슬 연합에서 가장 많은 헌터와 헬퍼들을 보유하고 있었으니까.

{전 이미 스카이 캐슬과 성주님을 위해 여생을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허나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않습니다. 제가 설득을 한다 해도 끝내 고향으로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사람 마음을 재물과 권력으로만 잡을 수 없다는 걸. 그래서 전 지금까지 포로들이 진심으로 이곳이 좋아 전향을 할 수 있게 최선을 다했고 지금도 그러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고요. 그리고 이곳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서라면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고요.”

{……?!}

“전 린하이 님도 저와 같은 마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곳의 평화를 위해서. 그리고 중국 본토의 평화를 위해서. 우리 모두 우려하는 일이 생기지 않게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수하들과 회의를 해서 팀장님이 우려하는 일이 생기지 않게 일을 진행해 보겠습니다.}

린하이는 땀이 흥건한 손을 말아 쥐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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