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짓는 영주님-198화 (198/255)

198화. 영주가 되다 (1)

{으아앜.}

{으앜.}

헌터들이 움직임과 동시에 내성 곳곳에서 비명 소리가 난무했다.

살리타이와 홍복원, 그리고 친위대에게 검을 휘두르는데 망설이는 헌터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살아있는 사람을 제물로 쓴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줄 만큼 이곳에 성자는 없었다

.

{너희가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은가?}

{우리는 대중국의 청방 길드다.}

“근데 어쩌라고? 너희가 갇혀 있어서 소식을 듣지 못한 모양인데, 앞으로 이곳 대륙에서 생긴 일을 지구와 연관시키지 말자는 법령이 통과했거든.”

{…….}

{…….}

“우리가 여기서 너흴 다 죽인다고 해도 밖에서 중국이 할 수 있는 건 없어. 만약 오늘 일로 대한민국에 압박을 넣거나 하면 세계 헌터 협회의 주적이 될 테니까.”

{…….}

{…….}

“우리를 응징하고 싶으면 청방에선 하늘 다리를 건너와야 할 거야. 그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크크.”

친위대들은 칼에 베이면서도 중국을 운운하며 협박해 왔고 우리 쪽 헌터들이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적들에게 현재 상황을 일러주었다.

털썩.

털썩.

브레드가 제압되는 순간 이미 전세는 우리 쪽으로 기울었고 그나마 나라 이름을 들먹이며 반항을 하던 친위대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무기를 떨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나홀을 파괴하고 광산으로 보내세요.”

“항복했는데…….”

“저들은 항복했다고 용서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광산으로 보내서 다른 죄수들과 분리해서 딱 죽지 않을 만큼 먹을 것을 주고 잠을 재우세요.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게.”

“네, 알겠습니다.”

난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지휘관을 둘러봤고 내 뜻을 전달받은 헌터들이 입술을 굳게 다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위기를 모면했네요.”

[아니에요. 스카이 캐슬 연합의 구성원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난 여전히 신성력을 뿜어내고 있는 린드 공주를 보며 감사 인사를 했다.

나로 인해 왕권을 잃고 전쟁에서마저 배제했는데 이번에 정말 큰일을 해 주었다.

지금도 여전히 마계의 문에선 뱀파이어들이 나오고 있었는데 그녀의 신성력에 접촉되는 순간 모두 매가리 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저건 못 없애나요?”

[차원의 문은 여는 것도 힘들지만 그걸 강제로 닫으려면 개방을 할 때 썼던 마나의 몇 배가 필요합니다.]

“못 없앤다는 말이죠?”

[네. 현재 인력으론 불가능합니다.]

하몽이 마계의 문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구와 이곳 대륙에 생긴 게이트와 달리 마계의 문은 마나가 살짝 불안정한 것이 느껴져 물어봤는데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곤란하게 됐네요. 내성 한복판에 마계의 문이 열려있으면 앞으로 지내는데 애로사항이 많을 텐데…….”

[꼭 그렇게만 생각하실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마나 팔찌로 인해 몬스터의 코어가 하루가 다르게 가격이 상승하고 있습니다. 제 예상이 맞는다면 이 문은 뱀파이어 로드가 머물던 마계와 연결되어 있을 테니 넘어와 봤자 뱀파이어 이상의 몬스터는 없을 겁니다.]

“흠…….”

[마계의 문 위에 건물을 올려 빠져나가지 못하게 코어를 채취하면 오히려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긴 한데 그러다가 뱀파이어 로드보다 강한 마족이 넘어오면 낭패도 그런 낭패가 없는데요.”

[설사 마왕이 넘어온다 해도 이곳에서라면 승산이 있을 겁니다. 아무리 마왕이라 하더라도 이곳에선 온전한 힘을 발휘하지 못할 테니까요. 카프리 님과 상의해서 만반의 준비를 해 놓겠습니다.]

하몽이 자신감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마계의 문과 린드 공주를 번갈아 쳐다봤다.

“알겠어요. 마계의 문 관리는 하몽 님께 맡기는 걸로 하죠.”

[네, 감사합니다.]

난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 집 앞마당에 마계의 문이 열린 게 찝찝하기는 했지만 없앨 방도가 없다고 하니 그의 말처럼 하는 것이 나을 듯했다.

코어로 채취해 돈도 벌고.

나름 상위 몬스터인 뱀파이어를 사냥하며 헌터들의 전투 감각도 올릴 수 있으니 현재로선 꽤 좋은 방법인 듯했다.

{성주님, 밖에 뱀파이어들도 다 정리 했습니다.}

“모두 죽인 건가요?”

{죄송합니다. 그러려고 했는데 적지 않은 뱀파이어가 도망을 갔습니다.}

도망친 뱀파이어를 쫓아갔던 린하이가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내게 고개를 숙였다.

전부 다 척살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늘을 날고 변신마저 가능한 몬스터라 꽤 많은 숫자를 놓친 모양이었다.

“죄송해할 거 없어요. 이곳에 있는 사람 모두 린하이 님이 고생이 많았다는 걸 아니까. 피곤하겠지만 내성에 있던 헌터들과 헬퍼들을 챙겨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내게 보고를 마친 린하이는 우레이와 양양을 이끌고 헬퍼들에게 다가갔다.

반년에 걸친 전쟁이 끝났지만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더 많이 남았다.

일단 죄를 지은 자들한테 벌을 내렸으니 이제는 상을 줘야 할 차례였다.

논공행상.

청방 길드와의 전쟁은 이제 시작이었고 앞으로 전투를 위하여 꼭 해야 하는 행사였다.

“전장 정리는 길드원분들에게 맡기고 마스터님들은 저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죠.”

“네, 알겠습니다.”

난 지휘부와 함께 켄트성 내성 안 대전이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 * *

대전 안에 들어 온 난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이세훈을 쳐다봤다.

간단한 차라도 마시며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데 대전 안에는 의자가 딱 하나밖에 없었다.

“다른 곳은 없어?”

“응. 이곳저곳 둘러봤는데 이 많은 사람이 한 번에 들어갈 만한 공간은 여기 밖에 없더라고.”

“흠…….”

난 고민스런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지휘부 사람들이 가운데 의자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흩어져 자리를 잡고 서기 시작했다.

발키리, 그레이, 마녀 부대, 그리폰 부대, 엘프 부대, 오크 부대, 울프, 레인보우. 켄트 왕국 근위 기사단과 근위 마법사단…….

오른쪽에는 스카이 캐슬에 가입된 길드의 수장들이 자리했고.

왼쪽에는 플로라, 화랑 연합, 재난 관리 본부, 중립 연합.

우리와 동맹을 맺은 길드의 수장들이 자리했다.

“성주님, 자리에 앉으세요.”

“네?”

“앉으셔야 회의를 시작하죠.”

“끙…….”

지윤미 마스터가 의자를 향해 손짓했고 난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얼굴이 후끈거렸다.

딱 봐도 저 의자는 왕이 앉던 자리였다.

난 저 의자의 주인이 아니었다.

“뭘 똥 씹은 얼굴을 하고 있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앉아. 마스터들 앉을 의자도 가져오라고 시켰으니까.”

내가 몸을 쭈뼛거리며 선뜻 움직이지 못하자 옆에 서 있던 이세훈이 내 등을 떠밀었다.

짐작건대 의도적으로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 낸 듯했다.

“까불지 말고 원탁 하나 더 구해 와. 없으면서 만들어서라도 오고.”

“…….”

난 눈에 힘을 주고 이세훈을 노려봤다.

가운데 있는 의자는 다른 곳보다 높은 곳에 있었고 저 의자에 앉으면 자연스레 마스터들을 내려다보게 된다.

아무리 급하게 만든 자리라 하더라고 난 마스터들과 눈높이를 달리해서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린드 공주와 퍼거슨, 그리고 에릭과 케인…….

의자를 바라보는 켄트 왕국 수뇌부들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다들 애써 참아내고 있었지만, 눈에서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고 다들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떨리는 몸을 애써 감추고 있었다.

수십 년 만에 다시 고향으로 와 왕이 앉았던 자리를 보니 감회가 새로운 모양이었다.

“린드 공주님, 올라가세요.”

[네?]

“저 자리의 주인은 제가 아닙니다.”

“…….”

“…….”

난 손바닥을 하늘로 올리며 린드 공주에게 손을 달라는 제스처를 취했고 사람들이 반쯤 넋을 잃은 표정을 지으며 우릴 지켜봤다.

[어찌 제가…….]

“약속드렸잖아요. 왕권을 유지하게는 못하지만 이름은 지키게 해 주겠다고.”

[그 말은?]

“이전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렇고 이곳은 사람들에게 계속 켄트 왕국이라 불릴 겁니다.”

[헐…….]

“…….”

“…….”

사람들이 넋을 놓은 걸 넘어 경악하는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그리고 이세훈은,

“뭐 하자는 거야!”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해지더니 코끝까지 찡그리며 내게 언성을 높였다.

게다가,

“성주님, 재고해 주세요.”

“켄트 왕국이라니요. 말도 안 됩니다. 이곳의 최고 지도자는 성주님입니다. 아무리 명분만 준다고 하나 이름을 그리 지어버리면 사람들에게 혼란이 올 수도 있습니다.”

잠자코 있던 다른 마스터들도 불만스런 표정을 지으며 언성을 높였다.

다들 말은 안 하고 있었지만 내심 이세훈과 뜻을 함께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심지어,

“켄트 왕국이라 이름을 정한다는 건 이곳을 대한민국과 독립된 영토로 운영하시겠다는 겁니까?”

임풍훈.

그동안 묵묵히 지시에 따랐던 재난 관리 본부 간부마저 내 명령에 이의를 제기했다.

“일단 표면상으로는 그러는 게 좋지 않을까요?”

“네?”

“전쟁이 끝났으니 린하이 님과 한 약속을 이행해야 해요. 모두 다 이곳에 남겠다고 하면 좋겠지만 분명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이들도 있을 거예요. 근데 이곳을 스카이 캐슬의 이름으로 차지하면 청방 길드가 바보가 아닌 이상 우리의 정체를 알게 되겠죠.”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미 세계 헌터 협회에서 이곳 대륙과 지구에서의 일을 연관 짓지 말자는 안건이 통과했습니다. 설사 청방 길드가 안다 해도 할 수 있는 게 없을 겁니다.”

“네. 맞아요. 혹여나 청방 길드가 미친 척하고 대한민국으로 쳐들어온다 해도 금방 후퇴를 하게 될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죠?”

난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며 최은빈 부대장을 쳐다봤다.

켄트성 공성은 이번 전쟁의 끝이자 또 다른 전쟁의 시작이었다.

아무리 세계 헌터 협회를 통해 각 나라에서 약속했다지만 이왕이면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정체를 숨기는 게 좋을 듯했는데 그녀는 밖에서 전쟁이 나도 쉽게 이길 수 있을 것처럼 얘기했다.

“포로들의 가족들과 연락하고 또 데리고 오며 청방 길드 본부 건물 근처와 중국의 주요 시설에 마녀 부대의 A급 헌터들을 포진시켜 놨어요.”

“…….”

“아마 지금쯤 함께 투입된 공방과 마탑 식구들이 미티어 스트라이크 마법진도 완성해 놨을 거예요. 만약 청방 길드가 세계 헌터 협회에서 통과된 안건을 무시하고 대한민국을 도발하면 그 즉시 중국은 불바다가 될 거예요.”

최은빈이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날 지그시 쳐다봤다.

내가 켄트성 공성에 집중하는 사이 지휘부에서 따로 안배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지윤미, 하몽, 카프리, 이세훈…….

최은빈과 달리 몇몇 지휘부 인물들이 마치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짐작건대 그들도 이 일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데 같이 동참한 듯했고 내 허락도 없이 선조치 후보고를 하는 이 상황이 눈치가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중국에 스파이를 심어 놓았다고요? 그러다 발각되기라도 하면 저희도 세계 헌터 협회의 공적이 될 수 있다는 걸 모르십니까?”

“그런 중요한 일을 저희와 상의도 없이…….”

의자의 좌측에 서 있던 임풍훈과 이아영은 나와 마찬가지로 처음 듣는 얘기인지 걱정과 불쾌감을 표출했다.

“이대론 답이 없겠네요. 아직 전장 정리도 끝나지 않았는데 너무 급하게 자리를 마련한 것 같네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걸로. 조만간 다시 자리를 만들 테니 모두 자신들의 입장을 정리해서 보고서를 올려주세요.”

“……네.”

“……네.”

나의 지시에 지휘관들이 모두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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