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짓는 영주님-197화 (197/255)

197화. 뱀파이어 로드 (2)

“성수인가?”

분수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방울에서 운디네의 것처럼 따스하고 포근한 기운이 느껴졌다.

-응. 맞아. 저 분수대 모두 카시오페아의 성물들인 것 같아. 아니 분수대는 물론이고 이곳에 있는 모든 조형물에 신성력이 가득 담겨 있어.

“어떻게 된 거지? 내가 본 신전은 여기가 아니었는데?”

난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중급정령으로 각성을 하며 보았던 신전은 왕성 뒤 산맥에 있는 건물이었다.

[성주님이 보신 곳은 아마 기도실일 거예요.]

“……?”

[켄트 왕국은 성녀였던 케라시스 여왕님이 건국한 신성 국가예요. 그리고 이곳 왕성은 성녀이자 여왕님께서 머물고 지내시며 신의 응답을 받은 장소이기도 하고요. 이곳 모두가 켄트 왕국의 왕성이자 신전이에요.]

“아…….”

[탐욕에 찌들어 타락한 왕족과 귀족에 노하셔서 우릴 외면했지만, 이곳의 나무와 풀 한 포기조차 그분의 손때를 타지 않은 것은 없어요.]

터벅터벅.

린드 공주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브레드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리고 그녀의 발걸음과 손길이 닿는 모든 것들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고,

[으으읔.]

빛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브레드의 신음 소리도 같이 커졌다.

신의 외면을 받았을 땐 모두 이름조차 없는 꽃과 나무들이었지만 신의 계시를 따르는 린드 공주의 손길에 닿자 모두 밝은 빛과 함께 신성력을 내 뿜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지켜주고 보호해야 할 어린아이처럼 보였는데 지금은 마치 세계수처럼 강력한 힘이 느껴지는 물론이고 왠지 안기고 싶은 포근함과 따듯한 기운이 가득했다.

‘운디네! 우리도 돕자.’

난 입술을 굽게 다물며 허리에서 검을 꺼냈다.

브레드의 상태를 보아하니 왠지 지금이면 한번 비벼볼 만할 듯했다.

-참아. 괜히 접근했다가 되레 당하는 수가 있어.

‘…….’

-아무리 신성력에 노출돼서 상처를 받고 있다 해도 어설픈 네 검 실력으로 어떻게 해 볼 존재가 아니야.

‘그럼 정령 마법이라도…….’

-마법 역시 마찬가지야. 마족은 기본적으로 마법 방어력을 갖고 태어나는 존재야. 괜히 어설픈 마법으로 공격을 했다간 린드 공주한테 방해가 될 수 있어.

운디네가 내 앞을 막아서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이대로 지켜만 보고 있자고? 이러다 도망가면 어떡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다른 마족이라면 몰라도 뱀파이어 로드는 절대 이곳에서 못 빠져나갈 테니까.

‘……?’

-언데드, 늑대인간, 뱀파이어와 같이 순리를 거스른 존재들한테 신성력은 상극 중에 아주 상극이야. 이대로 시간만 끌어도 곧 소멸하게 될 거야.

‘흠…….’

난 고민하는 표정을 지으며 운디네와 린드 공주를 번갈아 쳐다봤다.

내가 봐도 브레드는 곧 죽을 것 같았지만 밖에 있는 뱀파이어들이 문제였다.

지금 이 시각에도 뱀파이어들은 계속 활개 치고 있었고 전염이 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게다가,

[모두 도망가라. 성녀가 나타났다. 이 사실을 발록 님께 알려야 한다.]

아직 정신 줄을 잡고 있는 브레드가 뱀파이어들에게 퇴각 명령까지 내렸다.

오크와 언데드 몬스터와 달리 뱀파이어는 차라리 이렇게 전면전을 벌이는 게 낫지. 도망쳐서 인간들 사이로 숨어들면 더 골치 아프고 상대하기 어려운 몬스터였다.

그런데 그때,

“#$#$#$#$$#$#$$홀리웨폰.”

“……!”

린드 공주가 마법사처럼 마법 영창을 했고 그녀의 지팡이에서 뿜어져 나온 하얀 빛이 아군의 헌터들이 들고 있던 무기를 감쌌다.

[헌터님들의 무기에 신성력을 부여했어요. 30분 정도 유지가 될 거예요.]

“오! 고마워요. 린하이 님, 뱀파이어들을 추적해서 척살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푸다닥.

푸다닥.

브레드의 명령을 받은 뱀파이어들이 박쥐로 변신해 하늘로 올랐고 그 뒤를 그리폰 기사들이 뒤따랐다.

[신성력이다. 모두 사방으로 흩어져. 싸워서는 승산이 없어.]

{흩어지긴 뭘 흩어져!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컥. 하등한 인간 따위가…….]

{하등한 인간한테 죽는 기분이 어때?}

휘이익.

퍽.

[컥.]

{그냥 한 번에 죽으면 좋잖아. 왜 괜히 피해서 더 맞고 그래! 크크}

신성 버프를 받아서인가?

그리폰 부대는 예상외로 쉽게 뱀파이어들을 추적해 제압했다.

미스릴로 만든 검에 베여도 치명상이 아니면 계속 달려들었는데 신성 버프를 받은 무기에는 살갗만 스치기만 해도 엄청나게 괴로워하며 전투력을 상실했다.

‘운디네, 이 정도면 할 만하지 않아?’

-흠…….

린드 공주는 내가 들고 있는 검에도 신성 버프를 해 주었고 난 다시 한번 브레드를 공격하고 싶다는 의향을 내비쳤다.

그런데 그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성주님이 쓰실만한 무기를 내어 드릴게요.]

“…….”

터벅터벅.

린드 공주가 손바닥을 펼치며 날 멈추게 하고 수호탑으로 걸어갔다.

‘뭐 하는 거지? 수호탑은 왜 갑자기? 저것도 성물이었나?’

수호탑으로 걸어가 손을 펼친 그녀는 마치 기도를 하듯 눈을 감고 마법을 영창했고 밝은 빛과 함께 수호탑이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다.

[전설이 사실이었구나!]

[에르메스의 검이 진짜 있었다니!]

퍼거슨과 에릭이 경악스런 표정을 지으며 린드 공주를 지켜봤다.

그레이트 소드.

2m가량 되려나.

수호탑이 점점 작아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사람 크기만 한 검으로 바뀌어 있었다.

검으로 변한 수호탑은 빛에 감싸여 공중에 둥둥 떠 있었다.

딱 봐도 범상치 않은 검처럼 보였다.

[초대 성 기사였던 에르메스 님의 검이에요. 전설에 따르면 카시오페아 님이 직접 하사한 걸로 알려져 있어요.]

“…….”

[받아 주시겠어요?]

린드 공주가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날 그윽하게 쳐다봤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저 검은 신검이라는 것이었다.

“제가 받아도 되는 건가요?”

[마족들을 상대하려면 이 검이 필요하실 거예요. 성 기사가 되어야 한다거나 하는 것 같은 제약은 없으니 받아 주세요.]

“그렇다면…….”

난 린드 공주를 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고 검이 하늘을 날아 내게 다가왔다.

착!

에르메스의 검을 손에 쥐자 팔을 시작으로 거대하고 따듯한 힘이 느껴졌다.

지금 마음 같아선 마족이 아니라 더 한 것이 나타나도 단숨에 벨 수 있을 것 같은 힘이 느껴졌다.

‘운디네?’

-네 뜻대로 해. 그 검이라면 충분히 해칠 울 수 있을 거야.

내 앞을 가로막고 있던 운디네가 길을 비켜 주었다.

나와 감정을 공유하고 있기에 그녀도 검에서 전해지는 힘이 다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린드 공주가 착용하고 있는 지팡이와 액세서리처럼 에르메스의 검에서도 거대하고 농도 깊은 신성력이 느껴졌다. 아니 몸에서 전해지는 느낌으로 봤을 때 에르메스의 검은 금속이 아니라 신성력 그 자체로 만든 것이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로 거대한 힘을 내포하고 있었다.

터벅터벅.

[으으으읔. 빌어먹을 신 같으니라고!]

내가 가까이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괴로운지 브레드가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비틀었다.

“죽여주마!”

휘이익.

[컥.]

부르르.

정확히 목을 조준해서 내리찍었는데 브레드가 몸을 꿈틀대며 피해서 그의 오른쪽 팔이 잘렸다.

“가만히 있어. 움직이면 더 고통스러우니까.”

[컥.]

왼쪽 팔.

“에이씨.”

[컥.]

오른쪽 다리.

“가만히 있으라니까?”

[컥.]

왼쪽 다리.

한 번에 곱게 죽으면 좋을 것을 브레드는 몸을 발버둥 치며 끝까지 반항했다.

허나 딱 거기까지였다.

그의 사지가 하나씩 잘릴 때마다 난 느낄 수 있었다.

단순히 신체를 잘라 내는 것뿐만이 아니라 에르메스의 검이 닿을 때마다 그의 마나가 뒤틀리고 있다는 것을.

[강한 상대에 대한 존중심과 배려조차 없는 비열한 인간 같으니. 더 이상 날 모욕하지 말고 어서 죽여라.]

브레드가 이를 뿌드득 갈며 날 죽일 듯이 노려봤다.

활은 그나마 많이 쏴 봤지만, 검술이 약해 일격 필살을 하지 못한 것인데 내가 고통을 주려고 일부러 죽이지 않는다고 오해를 하는 듯했다.

-해용아, 이놈 우는 것 같은데?

‘그러게?’

글썽글썽.

주르륵.

진짜 많이 아픈가 보다.

마족 중의 마족.

수만 아니 어쩌면 수십만이 될지도 모르는 뱀파이어의 수장 눈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죽었으면 죽었지,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 줄 알았는데 마족도 우리 인간과 같은 생명체는 생명체인 모양이다.

“죽여줘? 그럼 정중하게 부탁해 봐. 그럼 죽여줄게.”

[……?]

“싫음 말고.”

[으아아아악!]

부르르르.

브레드의 상처 부위에 에르메스 검을 갖다 대자 그가 입에 게거품을 물며 발버둥을 쳐 댔다.

[하등한 인간 따위가 감히…….]

“혀도 잘라야 하나?”

[……?!]

“계속 그렇게 까불면 죽지도 못하는 곳에 가둬놓고 계속 고문을 할 거야.”

내가 겁을 먹고 두려운 기색을 보이니 이 상황에서도 그가 기고만장한 것 같았다.

그래서 난 브레드를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여유 있는 모습을 보여줬다.

[죽여주십쇼. 제발.]

“흠…….”

내 작전이 통했는지 브레드의 입에서 처음으로 존댓말이 흘러나왔다.

“진즉에 그랬으면 서로 좋았잖아. 근데 그 전에 물어볼 게 있어.”

[…….]

“아까 발록 님 어쩌고저쩌고하던데 그놈이 마왕이라는 놈인가?”

[…….]

난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으며 브레드를 찾아봤다.

뱀파이어 로드.

짐작건대 앞에 있는 존재가 그동안 만났던 마족과 몬스터 중에 가장 고위직에 있는 자일 것 같았다.

단번에 죽이는 것보다 이왕이면 최대한 정보를 알아내고 죽여도 늦지 않을 것 같았다.

“넌 어차피 죽는다. 근데 네가 하기에 따라 최대한 고통을 받고 죽던지, 아님 단숨에 고통 없이 죽던지가 달렸다. 어떻게 할래?”

[발록 님은 마계의 동쪽과 남쪽을 다스리는 마왕이십니다.]

“동쪽과 남쪽? 그 말은 마왕이 한 명이 아니라는 얘기인가?”

[서쪽을 다스리는 데몬 님과 북쪽을 다스리는 얼음 여왕님까지 해서 총 세 분이 계십니다.]

내 협박이 먹혔는지 브레드가 내 질문에 순순히 대답했다.

발록.

데몬.

얼음 여왕.

덕분에 그동안 존재조차 몰랐던 마왕에 대해 알게 됐고 세 명이 아니라 한 명이라는 것도 알아내었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아는 것이 상당히 많은 자였다.

아무래도 따로 자리를 만들어 장시간 얘기를 나눠봐야 할 듯했다.

“퍼거슨 님, 이 자를 조금 더 살려둬야 할 것 같은데 구금시킬 장소가 있나요?”

[왕성 지하에 마족들을 가둬놓기 위해 만든 감옥이 있습니다. 그곳으로 데리고 가면 될 겁니다.]

“잘됐네요. 그럼 이 자를 데리고 가서 적당히 상처를 치료해 주세요. 할 얘기가 많을 것 같네요.”

[네, 알겠습니다.]

퍼거슨과 근위 기사단들이 브레드를 들어 내성으로 걸어갔다.

이미 신성력에 너무 많이 접촉해서 마나가 뒤틀려 있어 더 이상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맡겨도 될 듯싶었다.

“당신들은 어떻게 할 건가요? 계속 싸우실 건가요? 원한다면 그렇게 해 주고요?”

난 여전히 무기를 곧추세우고 우릴 보며 경계하는 살리타이와 홍복원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친위대를 쳐다봤다.

{항복하면 살려 줍니까?}

“저런 모습이라도 괜찮으면 그렇게 해 드리죠.”

난 싱긋 웃으며 근위 기사단에 의해 들려가고 있는 브레드를 쳐다봤다.

살리타이와 홍복원.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들은 절대 용서해 줄 생각이 없었다.

하몽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들은 물론이고 친위대 역시 마계의 문을 열어 브레드를 소환하기 위해 천여 명이 넘는 생명을 앗아간 흉악범들이었으니까.

살리타와 홍복원이 손에 들고 있던 무기를 꽉 움켜쥐었다.

내가 원하던 바였다.

“모두 마나 홀을 파괴하고 두 다리를 자르세요.”

“네!”

내성에 들어 온 헌터들이 얼음장 같은 기세를 내 뿜으며 살리타이와 홍복원에게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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