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다종족 연합국 (7)
“백 명에서 저 많은 그리폰들을 지휘하는 건가?”
난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을 지으며 땅으로 내려와 정렬하는 그리폰들을 쳐다봤다.
얼핏 봐도 그리폰의 숫자는 삼천여 마리 이상 되어 보였는데 헌터의 숫자는 백 명이 갓 넘었다.
{맞습니다. 저 백 명에서 모두 지휘하는 겁니다.}
“저 흉포한 놈들을 저리 적은 인원으로 길들여서 관리하고 있었다니 정말 놀랍네요.
{사실 고생을 많이 하긴 했습니다. 부화가 되지 않은 알 속에서 데려와 길들인 놈들인데 워낙에 머리가 나빠서 지금도 가끔 헌터들을 공격하기도 하거든요.}
“이미 길들인 놈들인데도 헌터들을 공격한다고요?”
{머리가 나쁜 사람들한테 새대가리라고 욕을 하곤 하잖아요. 몸은 사자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머리가 독수리 형상으로 되어 있어서 그런지 지능이 상당히 낮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길들인 거죠?”
{알을 깨고 나와 눈을 뜨자마자 반복 학습으로 교육했습니다. 성체가 되기 전에 특정 행동과 먹이 주는 것을 반복시키면서 그때마다 각기 다른 휘파람을 불었습니다.}
“아…….”
난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머리 나쁜 사람한테 괜히 새대가리라고 하는 게 아니었다.
금붕어만큼은 아니겠지만 새들도 상당히 머리가 나쁘다.
아무리 먹을 것을 주고 정성을 다해 키운다고 해도 기억력이 낮아 주인을 못 알아보는 경우가 많았다.
말과 고양이, 개 같은 경우는 아무리 동물이라 하나 함께 지내다 보면 정이 들고 자기한테 밥 주는 사람 정도는 알아보는데 독수리 머리를 한 그리폰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고기가 필요합니다.}
“네?”
{지금 제가 부른 휘파람 소리는 그리폰한테 밥을 줄 때 불렀던 소리입니다. 그래서 저렇게 단숨에 달려 온 거고요. 사람 얼굴을 알아보지는 못하지만 몇 년 동안 밥을 줄 때마다 같은 휘파람 소리를 불러서 훈련을 시켰습니다. 아무리 머리가 나빠도 기억할 수 있게.}
“아…… 지윤미 마스터님.”
“네, 알겠어요.”
린하이의 설명을 들은 지윤미 마스터가 바로 헬퍼들에게 달려갔고 부랴부랴 그리폰의 식사를 준비했다.
우걱우걱 냠냠.
우걱우걱 냠냠.
20kg씩 들어 있는 고기 수백 박스가 단숨에 사라졌다.
덩치가 커서 그런지 식성이 장난이 아니었다.
“꾸륵, 꾸륵.”
“꾸륵, 꾸륵.”
식사하는 그리폰의 모습은 상당히 위협적이었고 오크들이 긴장 가득한 모습으로 경계를 했다.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말씀하십쇼.}
“이렇게 많은 그리폰을 길들여 놓고 왜 청방 수뇌부에 알리지 않은 거죠? 수뇌부에 보고를 했으면 큰 상을 내렸을 텐데요?”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
{상을 내릴 수도 있지만, 저와 제 수하들 모두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제할 수 없었습니다.}
“죽임을 당한다고요?”
난 놀란 표정을 지으며 린하이를 쳐다봤다.
저 많은 그리폰과 함께 한다면 하늘을 지배할 수 있었다. 설사 드레이크 같은 준보스급 몬스터가 등장해도 어렵지 않게 해치울 수 있을 듯했다. 게다가 그리폰 자체만으로도 어지간한 헌터들마저 사냥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전투력을 갖고 있어 전략에 따라 지상 전투에서도 뛰어난 효율을 가질 듯했고.
상을 내리지는 못할망정 죽을까 봐 말하지 못했다는 린하이의 말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화룡의 둥지에서 드워프를 발견하고 그들이 뛰어난 장인이라는 사실을 알아낸 헌터들 아니 제 동료들도 모두 죽었습니다. 비밀 유지를 위해서.}
“……?!”
{청방 길드 수뇌부들은 저 같은 조선족과 힘을 나누어 가지지 않으려 합니다. 만약 제가 그리폰을 길들였다는 걸 보고 했으면 그 방법을 알아낸 후 저흴 죽이고 그리폰을 수뇌부에서 독차지할 소지가 다분했습니다. 그래서 말하지 못했습니다.}
“미친…….”
린하이의 설명을 듣고 있자니 절로 욕지거리가 나왔다.
아무리 인간의 욕심이 끝이 없다고 하나 나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다.
{청방이라는 이름으로 한 울타리에 모여 있긴 하지만 수뇌부들은 한족이 아닌 자가 높은 자리에 오르는 걸 원치 않아 합니다.}
린하이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마치 왕정국가 시대처럼 청방 길드에서는 여전히 출신 성분에 따라 계급을 나누고 차별하는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면 청방 길드 수뇌부들은 강력한 무력을 바탕으로 다시 왕정국가를 꿈꾸고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나라 역시 겉으로만 계급이 사라졌을 뿐 알게 모르게 선민의식(選民意識)을 가진 자들이 많았으니까.
우리가 아닌 저들이 이곳을 차지했다면 그리 꿈같은 일만도 아니었다.
‘난감하게 됐는데…….’
난 고민스런 표정을 지으며 린하이와 그리폰을 번갈아 쳐다봤다.
수천 마리의 그리폰을 보고 있자니 욕심이 샘솟았다.
그리폰을 타고 하늘을 상공하는 발키리 길드와 그레이 기사단. 그리고 태백산맥 헌터들을 상상하자니 절로 등이 짜릿했다.
헌데 그리폰을 내 사람들에게 배당하면 나 역시 청방 길드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 같아 선뜻 내 마음을 밝힐 수가 없었다.
“성주님, 그리폰에게 먹이를 모두 나눠 주었습니다.”
“네, 알겠어요.”
“성주님…….”
“잠시만요.”
“이번엔 제 말을 들어주세요.”
“……?”
“표정을 보아하니 또 고민이 많으신 것 같네요. 제 예상이 맞는다면 저 그리폰들의 배급을 어떻게 해야 생각을 하는 것 같고요.”
“……?!”
지윤미 마스터가 마치 내 머릿속에 들어왔다가 나간 사람처럼 정확히 내 속마음을 캐치하고 있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함께 하다 보니 이제 내 눈빛만 보고도 내 마음이 다 보이는 모양이었다.
“성주님의 성향상 린하이 님께 그대로 그리폰을 맡기고 싶겠죠. 우리 쪽으로 가져오면 뺏는다고 여기실 분이니. 허나 이번엔 무조건 우리 쪽으로 가져와야 해요.”
“……?!”
“린하이는 위험한 자입니다. 상황 판단도 빠르고 시야도 넓고 수많은 헌터와 헬퍼들의 존경을 받는 자에요. 만약 그에게 계속 그리폰을 맡긴 상태에서 딴마음을 품게 된다면 한순간에 이곳을 뺏길 수도 있어요.”
지윤미 마스터가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나와 린하이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리고 어느새 오크들은 물론이고 발키리 길드 헌터들이 그리폰을 타고 있는 린하이의 수하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여차하면 포박이라도 할 듯한 기세였다.
그런데 그때,
{모두 그리폰에서 내려와 무장을 풀고 무릎을 꿇어!}
{형님?}
{형님?}
{난 내 남은 생을 스카이 캐슬을 위해서 살기로 결심했다. 오크는 물론이고 포로들인 우리에게조차 차별 없이 대하는 곳은 이곳밖에 없다. 게다가 포로인 우리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수뇌부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대신 쳐들어가겠다는 곳이고. 이곳이 아니라면 더 이상 우리가 살아갈 곳은 없다.}
{네, 알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린하이의 수하들이 자발적으로 그리폰에서 내려와 무장을 풀고 무릎을 꿇었다.
린하이 역시 내가 어떤 결정을 내려도 따르겠다는 듯 순종적인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보고 있었고.
‘어떡해야 하지?’
다시 선택의 순간이 찾아온 듯했다.
비록 무장이 해제됐다고 하지만 이곳 켄트성 성곽 대부분의 사람은 모두 청방 길드에서 잡아 온 포로들이었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린하이에게 그리폰의 소유권을 인정해 주고 무기마저 지급해 준다면 지윤미 마스터의 말처럼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이야 내게 충성한다고 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것이었으니까.
아니 아무리 린하이의 마음이 굳세도 수하들과 동료들을 위해서라면 그는 두 눈 질끈 감고 다시 내게 칼을 들이밀 수 있는 위인이었다.
“린하이 님, 저희 헌터들에게 그리폰을 부릴 수 있는 신호 체계를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저는 이미 스카이 캐슬에 제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그리폰 역시 성주님의 뜻대로 처리하겠습니다.}
린하이가 입술을 굳게 다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몸담고 있던 청방 길드에도 숨기고 길들인 것들인데 아무런 조건도 걸지 않고 내게 상납하려 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내가 이 자리에서 죽음을 명령하면 그것조차 따르기라도 할 듯한 기세였다.
“지윤미 마스터님.”
“네!”
“스카이 캐슬에 연락해 카프리와 공방 식구들을 불러 주세요. 그리폰의 무구가 너무 빈약하네요. 그들을 불러 제대로 된 안장과 라이더들이 착용할 무기를 만들어 달라고 해야 할 것 같네요.”
“라이더들이 착용할 무기요?”
지윤미 마스터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그녀의 눈이 급격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스카이 캐슬 연합 길드 헌터들은 다 길드 특성대로 무기를 갖고 수련을 하고 있었으니까.
지금 이곳에서 무기를 갖고 있지 않은 이들은 포로들뿐이었다.
“설마 아니죠?”
“아니요. 맞아요. 린하이 님!”
{네!}
“당신을 스카이 캐슬 연합 그리폰 부대의 대장으로 임명합니다. 부대 운영에 대한 전권을 위임할 테니 포로 중에 선별해서 라이더가 될 사람들을 추려 보세요. 무장을 허락하겠습니다.”
“헐…….”
“헐…….”
{…….}
{…….}
나의 선포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경악스런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성주님…….”
“어떤 염려를 하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허나 마스터님도 하나는 분명 알고 있을 겁니다. 우리가 포로들을 천대하지 않으면 린하이 님도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는걸.”
“그렇긴 하지만…….”
“제 뜻에 따라주세요. 린하이 님을 믿고 이런 결정을 내린 것도 있지만 저와 그리고 지휘부의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기 위해 내린 이유도 있습니다. 머리로는 차별하지 않겠다고 하고 있지만 다들 은연중에 포로들을 외부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마음가짐이 길어지면 언젠가 사달이 날 테고요.”
“네. 맞아요. 그래서 제가…….”
“아무리 감시하고 구속해도 사달이 나려하면 어떻게든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건 우리가 경계를 게을리해서가 아니라 저들을 차별해서 생긴 것일 테고요. 그래서 린하이 님께 힘을 실어 주려고 합니다. 우리의 초심이 변하지 않을 수 있도록 그가 경고판이 될 수 있게.”
“끙…….”
지윤미 마스터가 앓는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에둘러 말하고 있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하나였다.
그녀는 물론이고 나 역시 대한민국 사람들과 포로들을 달리 생각하는 마음가짐이 있었고 린하이가 믿음을 보여준 것만큼 힘을 실어 주어 스스로 경계를 하자는 것이었다.
한국 역시 점점 다문화 사회가 되어 가고 있었지만 우리는 단일 민족으로 산 세월이 길었고 외국인을 대할 때 생소함과 어려움이 많았다.
허나 지금 이곳에선 그러면 안 되었다.
오크와 엘프, 켄트 왕국 국민, 그리고 이제는 중국인들까지.
이곳을 지휘하는 사람들은 한국인들이었지만 구성원의 숫자가 우릴 뛰어넘은 지 오래였다.
“……성주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고마워요.”
한참 동안 내 눈을 바라보던 지윤미 마스터가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 * *
{린하이 님, 스카이 캐슬 지휘부에서 무기를 지급해 주었습니다.}
{벌써 무기를 지급해 주었다고?}
우레이가 가져온 무기를 본 린하이는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무기들을 매만졌다.
‘드워프가 만든 것인가?’
아만티움으로 만든 석궁과 미스릴로 만든 화살.
무기를 지급해 준다고 해서 별 볼 일 없는 것들을 줄지 알았는데, 비싼 금속으로 만든 것은 물론이고 무기에 마법진까지 그려져 있었다.
하늘을 상공하며 싸우는 그리폰 라이더의 특성상 활은 최고로 효율이 좋은 무기였다.
빠른 비행을 하며 그리폰의 등에 타 위에서 화살만 퍼부어도 적들은 꽤 애를 먹게 될 테니까.
{린하이 님이 준 명단의 헌터들도 사흘 안에 이곳에 도착할 수 있게 해 주겠다고 합니다.}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구나.}
린하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안해용 성주의 막사가 있는 곳을 쳐다봤다.
B급 이상 헌터 삼천 명.
린하이는 청방 길드에 머물면서 친하게 지내던 동료 중에서도 상위 헌터들 그리고 자신의 명령이라면 불구덩이라도 뛰어들어갈 만큼 충성심이 뛰어난 자들로 선별했다.
발키리, 그레이, 태백산맥, 마녀 부대, 울프, 레인보우…….
만약 이대로만 진행이 된다면 린하이가 이끄는 그리폰 부대는 스카이 캐슬의 그 어떤 길드보다 가장 강력한 전투력을 갖게 될 텐데도 지원해 주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아니 무기를 보급하고 인원을 데려다주는 건 안해용 성주가 아니라 스카이 캐슬의 지휘부였는데 그들이 되레 더 협조적으로 나왔다.
청방 길드에서는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포로들에게 높은 임금을 주는 것과 헌터들에 무기를 지급해 주는 것은 달랐다.
헌터들에게 무기가 들리는 순간 그들의 신원이 바로 복귀되는 곳은 물론이고 그리폰과 함께한다면 스카이 캐슬의 지휘부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이 생기는 것이었으니까.
{앞으론 수하와 동료보다 스카이 캐슬의 이익과 안위를 더 우선해서 생각하고 판단하겠습니다. 성주님.}
린하이는 하늘에 뜬 달을 보며 스스로 다짐을 했다.
중국에 수십 년을 살며, 청방 길드에서 몸담고 수년을 생활할 때도 생기지 않았던 그의 마음속에 애국심이라는 게 싹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