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짓는 영주님-192화 (192/255)

192화. 다종족 연합국 (6)

‘정말 죽으려고 했었구나.’

이세훈의 말이 맞았다. 이 전쟁이 끝나면 정말 린하이는 자진(自盡)을 하려고 했었던 듯했고 헬퍼들을 살리기 위해 마음을 바꾼 모양이었다.

그의 눈빛에서 그동안 볼 수 없었던 따스함이 살짝 깃들어 있었다.

“잘 선택하셨어요. 똥 밭에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고 하잖아요.”

식당으로 걸어가며 난 린하이의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참모부에서 알려 주더군요. 어쩌면 당신이 죽을 결심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요.”

{제 심리 상태까지 꿰뚫어 보다니 정말 유능한 참모부를 두셨네요.}

린하이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리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걸 확인할 때마다 매번 비슷한 표정이었다.

우리 쪽으로 전향을 한다고 말했음에도 우리의 전력이 뛰어난 것이 마음이 편치 않은 모양이었다.

스카이 캐슬의 시스템과 우리가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 마지못해 전향을 결심해서 그런 듯했다.

이쯤 되면 그냥 못 이기는 척 우리에게 마음을 열고 제대로 함께하면 좋을 텐데 쉽지 않았다.

‘열 번만 찍어보자.’

난 아쉬운 기색을 애써 감추고 식당가로 걸어갔다.

이제 살기로 한 것 같으니 시간은 많았다.

비록 길드를 잘못 선택해 이런 고난을 겪고 있지만 린하이는 우리 스카이 캐슬 사람들과 제법 성향이 맞는 인물이었다.

굳이 내가 설득하지 않아도 사람들과 어울리면 조금씩이나 마음을 열게 될 것이다.

난 그렇게 믿었다. 그리고 기대됐다.

린하이가 길들인 그리폰의 등에 탄 헌터들이 이곳 대륙을 비행하는 그때가.

린하이만 우리 편으로 완전히 넘어와 준다면 지금까지완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빠르고 안전하게 길을 개척 할 수 있을 테니까.

“성주님도 함께 드시는 겁니까?”

“네.”

연어 스테이크.

게살 스프.

구운 채소.

식당가에 도착하자 마치 고급 레스토랑에 온 것처럼 헬퍼들이 정성이 가득 들어 있는 음식들을 갖다주었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고급진 음식에 부담스러웠는지 청방 길드 헬퍼들이 잠시 눈치를 살피다 쭈뼛거리며 식사를 시작했다.

‘……편하게 먹지.’

헬퍼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미안함이 앞을 가렸다.

국적과 신분을 떠나 눈치를 보며 밥을 먹고 있는 사람을 보는 건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성주님, 괜찮으세요?”

내 표정이 좋지 않자 지윤미 마스터가 걱정하는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보았다.

“네. 괜찮아요.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요. 저도 어렸을 적에 이래저래 돌아다니며 꽤 눈칫밥을 먹고 자랐거든요.”

“아…….”

“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시작한 전쟁이지만 저들을 보니 과연 제 선택이 옳았는지 살짝 의문이 드네요.”

“자책하지 마세요. 우리가 이곳 켄트성을 먼저 공격하긴 했지만, 전쟁은 몬스터 웨이브를 조장하고 우리의 친구인 드워프를 노예로 부린 청방 길드가 먼저 시작한 거잖아요. 저도 저들의 모습을 보는 게 마음이 편치 않지만 이제 우리의 품에 들어왔으니 그동안 고생했던 만큼 더 신경을 써주면 되고요.”

지윤미 마스터가 미소 어린 얼굴과 따스한 눈빛으로 나와 헬퍼들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중국인이라 해서. 조선족이라 해서. 적이었다고 해서. 저들을 차별하거나 편견 가득한 시선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우리에겐 항복한 순간부터 이미 지윤미 마스터는 저들을 가족으로 결정을 내린 듯했다.

그리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어요.”

“네?”

“저들이 성문을 열어주면 우리가 진입하는데 용이할 거예요. 하지만 그 와중에 분명 사상자가 생길 테고 이 전쟁이 끝났을 때 저들 중에 이 자리에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예요.”

“성주님…….”

“마스터님이 그러셨잖아요. 이제 우리 품에 들어 온 사람들이라고. 전 제 사람들이 그것도 이능도 없는 일반인들을 헌터들과 싸우게 할 수는 없을 것 같네요.”

지윤미 마스터가 당황스런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그녀의 말을 들은 내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성주님 그건 그렇지만 성문을 열지 못하면 더 많은 사람이 다치게 될 수도 있어요.”

“그럴 수도 있겠죠. 근데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저들은 우리한테 전향 의사를 밝혔고 이제 가족이나 다름없어요.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가족한테 죽음의 위험이 있는 일을 시키는 가장은 없잖아요.”

“하아…….”

지윤미 마스터가 더 이상 반문하지 못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날 쳐다봤다.

그녀도 인정한 것이다.

정말 가족으로 여긴다면 이런 위험한 일을 시키는 건 아니라는 걸.

뛰어난 헬퍼일지는 모르나 눈앞에서 밥을 먹고 있는 저들은 헌터들과 싸우며 성문을 열기엔 너무 약했다.

수백 명. 아니 천 단위 이상의 헬퍼들이 동원된다 해도 헌터들이 지키고 있는 성문을 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언제나 그랬듯 성주님의 뜻이 그러하다면 따를게요. 허나 지금 상태가 유지되면 성내에 있는 헬퍼들의 고난은 더 심해질 거라는 거 아시죠?”

“네. 알고 있어요. 식사를 마치고 지휘부를 소집해 주세요. 백지장도 맞들면 가볍다고 하잖아요. 우리 둘이서 이러지 말고 여러 사람의 생각을 듣고 다른 방법을 찾아봐요.”

“……네.”

식사를 마친 지윤미 마스터가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린하이 님의 계획대로 하면 헬퍼들의 피해가 너무 클 것 같네요. 그래서 일단 반려하려 하니 다른 전략이 있으신 분은 제시해 주세요.”

“하긴 각 성문을 지키는 헌터들만 수백이 넘는데 헬퍼들이 그들을 뚫고 문을 열려면 꽤 많은 사람이 상하게 되겠네요. 게다가 아무리 청방 지휘부가 멍청하다고 하더라도 성문의 방어 중요성을 알 테니 자칫했다간 지원을 온 헌터들로 인해 몰살할 가능성도 있고요.”

“사실 저도 이번 작전이 그리 탐탁지 않았어요. 우리야 우리 의지로 총과 칼을 들고 군인이 되길 결심한 사람들이지만 헬퍼들은 일반인이나 다름없잖아요. 그런데 일반인한테 그런 일을 시키는 건 너무 가혹한 것 같아요.”

조성태와 권수정.

내 의견을 들은 지휘부 핵심 인사들이 적극적으로 내 뜻에 동의 의사를 내비쳤다.

다들 말은 안 했지만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듯했다.

그런데 그때,

{그러니까 지금 저희 청방 길드 헬퍼들이 다치는 게 염려되어 작전을 반려하시겠다는 겁니까?}

“네. 맞아요.”

{이해할 수가 없군요. 저희는 포로입니다. 그리고 성내에 있는 헬퍼들은 아직 스카이 캐슬의 적이고요. 그런데도 지금 적의 안위를 위해서 확실한 승리 방법이 있는데…….}

“양양 님 일행은 물론이고, 양양 님의 설득에 성문을 여는 일에 합류한다는 뜻을 밝히는 순간 우리 사람이 됩니다. 전 제 사람들에게 그런 위험한 일을 시킬 수 없어요.”

{당신은 도대체…….}

린하이가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을 지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난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나쁜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며 살고 있다.

그리고 전쟁하는 것에 있어서도 폭력에 잠식되지 않고 피아 구분 없이 최대한 사상자가 생기지 않게 진행하고 있었고.

그동안 린하이와 함께 하며 충분히 그 모습을 보여주고 어필을 한 것 같은데 그는 아직 내 마음가짐과 생각에 편견을 가진 듯했다.

[린하이 님, 더는 할 말 없으면 제가 얘기를 해도 될까요?]

{……네.}

퍼거슨이 의견이 있는 듯 손을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린하이가 넋이 나간 얼굴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양양 님에게 들으니 현재 켄트성 내에서 제대로 된 식량 배급을 받는 이들은 헌터들뿐이라고 합니다. 그로 인해 헬퍼들의 불만은 극에 달에 있다고 하고요.]

“흠…….”

[허나 우리가 지금 쳐들어간다면 지휘부의 명령을 받은 헬퍼들은 대부분 우리를 막으려고 할 겁니다.]

“그렇겠죠. 일단 전투가 벌어지면 저들을 설득할 시간이 없으니 대부분 우리한테 달려들 거예요. 그래서 지휘부 소집을 한 거고요. 최대한 사상자 없이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난 고개를 끄덕이며 퍼거슨을 쳐다봤다.

그는 예상되는 상황을 다시 한번 주지시켰다.

눈빛을 보아하니 우리가 염려하는 상황을 피할 방법이 있는 듯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성주님의 뜻대로 하려면 두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헬퍼들의 도움을 받아 성문을 열고 기습을 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비밀 통로를 이용해 들어가 적의 지휘부를 사로잡아 항복을 받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지휘부에 불만이 있던 헬퍼들은 알아서 투항할 겁니다.]

“비밀 통로로 들어가 기습을 하자고요? 제가 알기론 비밀 통로는 좁기도 하지만 적의 지휘 건물과 꽤 거리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네. 맞습니다. 허나 성문을 열지 못한 상태에서 큰 사상자 없이 이 전쟁을 빨리 끝내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비밀 통로로 들어가 최대한 빨리 달려가 적의 지휘부를 잡아들이는 것밖에.]

“흠…….”

난 고민하는 표정을 지으며 퍼거슨을 쳐다봤다.

사실 나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게 아니었다.

켄트성 내엔 아직 2만여 명의 헌터와 8만여 명의 헬퍼들이 있었고 전면전을 치르지 않는 이상 이 전쟁을 끝내려면 지휘관을 사로잡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지휘관들을 잡아서 포로로 잡고 항복을 하라고 명령을 내리게 하면 되니까.

허나, 그건 헬퍼들에게 성문을 열게 하기보다 더 어렵고 피해가 클 수도 있어 차마 내 입으로 얘기를 하지 못한 것이었다.

[허락해 주시면 저와 근위 기사단이 선봉에 서겠습니다.]

“자칫하면 지휘 건물로 달려가다 비밀 통로가 봉쇄되어 고립될 수도 있어요.”

[귀환 주문서가 있지 않습니까. 여의치 않으면 바로 퇴각하겠습니다.]

“흠…….”

“저희도 함께 갈게요.”

“발키리 길드도 들어가겠다고요?”

“네. 저흰 들어가서 지휘 건물이 아니라 적의 시선을 분산시키며 성문으로 달릴게요. 그렇게 되면 적은 더 혼란스러워할 테고. 성공 가능성이 올라갈 거예요. 둘 중에 한 군데만 성공해도 우린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잖아요.”

지윤미 마스터가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날 지그시 쳐다봤다.

퍼거슨도 그렇고 그녀도 그렇고 모두 죽음을 각오한 얼굴들이었다.

헬퍼들을 희생시키지 않기 위해 회의를 하자고 했더니 되레 수뇌부들이 죽음을 자초하고 있었다.

산맥 전투에서야 천라지망으로 인해 우리가 압도적인 우위에 있어서 비교적 쉽게 전투에서 이기고 항복을 받았지만, 자기 집에서 기습을 받고 지휘관이 사로잡힐 만큼 청방 길드 헌터들은 약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가 모르는 함정과 장치가 준비되어 있을 수도 있고.

너무 도박과 같은 작전이었다.

그런데 그때,

{당신들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사람들인가요?}

“……?”

“……?”

{포로인 우리에게 일을 시키면서 돈을 주는 것도 어이가 없는데 헬퍼들 대신 죽음의 위협까지 무릎 쓰려하다니…….}

린하이가 괴상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픔과 분노. 웃음. 어이없음…….

그는 반쯤 미친 사람처럼 얼굴에 수많은 감정이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이내,

지이직.

지이직.

그는 자신의 상의에 박혀 있는 청방 길드와 중국 헌터 협회 문양을 뜯어냈다.

{그리폰 라이더 대장 린하이가 스카이 캐슬의 주인을 뵙습니다.}

“……?”

{여기 헌터들을 보니 성주님에게 이렇게 인사를 하더군요. 저를 아니 저희를 거둬 주십쇼. 저희가 선봉에 서서 청방 길드의 지휘관을 잡겠습니다.}

“그 인사의 뜻을 잘 모르시나 본데 저희 헌터들이 제게 충성을 맹세할 때 …….”

{앞으로 청방 길드가 아닌 스카이 캐슬의 검이 되겠습니다. 성주님의 명령이라면 중국의 주석을 공격하라고 해도 하겠습니다.}

“…….”

“…….”

나는 물론이고 지휘부 사람들 대부분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모두 린하이가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예상치 못한 얼굴들이었다.

삐이이이이이이익!

삐이이이이이이익!

그런데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충성 맹세를 한 린하이는 다시 한번 휘파람을 불었고 저 멀리서 검은 먹구름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헐…… 저게 다 그리폰은 아니지?”

“에이. 설마. 딱 봐도 수천 마리는 되어 보이는데. 까마귀 떼나 그런 거겠지.”

헌터들이 몸을 부르르 떨며 먹구름을 쳐다봤다.

다들 입으론 부정하고 있지만 모두 눈으로 확인을 한 것이다. 저 많은 것들이 모두 그리폰이라는 것을.

백여 마리 정도 길들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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