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다종족 연합국 (5)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사람은 보통 음식을 먹지 않고 일주일 정도는 버틸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물이 없어 수분 공급이 되지 않으면 보통 사흘을 넘기지 못한다.
우리 몸은 약 70%가 물로 이루어져 있어 약 2%의 수분만 빠져나가도 심한 갈증을 느끼고 되고, 5%의 수분 빠져나가면 의식을 잃게 된다고 한다.
만약 린하이의 말이 사실이라면 장기화가 될 뻔했던 이 전쟁은 순식간에 승패가 날 수도 있었다.
“저들도 물의 중요성을 알 텐데 방비를 해 놓지 않았을까요?”
{스카이 캐슬과 달리 켄트성 내의 청방 수뇌부들은 기술직 헬퍼들을 무시하고 것은 물론이고 그들이 하는 일조차 하찮게 여깁니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로 멍청할 리가…….”
{켄트성 안에 지휘부들은 자신들이 오크들에게 포위된 걸로 알고 있을 겁니다. 오크를 길가에 다니는 개보다 못한 하등한 존재로 알고 있으니 수로를 막을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을 겁니다. 설사 헬퍼들이 수로를 지켜야 한다고 건의해도 묵살할 가능성이 백 프로입니다.}
린하이가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날 지그시 쳐다봤다.
그의 눈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청방 길드의 수뇌부는 더 무능하고 아둔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린하이는 그걸 자신의 입으로 얘기하고 있는 이 상황이 참담하고 화가 나는 듯했다.
“일단 가 보죠. 확인해 봐서 손해 볼 건 없으니.”
난 병력을 이끌고 린하이가 지도에 가리킨 지형으로 이동했다.
“여기가 맞나요?”
{네. 이곳이 켄트성 내부 가장 큰 우물과 연결된 수로입니다.}
“…….”
린하이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의 말처럼 계곡부터 켄트성까지 연결된 수로 중에 청방 길드의 병력이 배치된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오키도키 님!”
[네, 알겠습니다. 모두 수로를 막아라!]
“꾸륵, 꾸륵.”
“꾸륵, 꾸륵.”
나와 눈을 마주친 오키도키는 바로 오크들을 향해 소리를 쳤고 수만 명의 오크가 삽과 곡괭이, 톱을 들고 나무를 자르고 땅을 파며 수로를 막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흠…… 물길이 저 앞에서 여러 갈래로 갈라져서 성으로 들어가고 있는데?
‘그래?’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난 노움이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린하이가 알려 준 장소에 와서 댐을 만들어 물길을 막고 있는데 켄트성으로 들어가는 또 다른 물길이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지윤미 마스터님.”
“네?”
“병력을 데리고 절 따라와 주세요. 저 앞에서 물길이 갈라져 있다고 하네요.”
“네. 알겠어요.”
오크들에게 공사를 맡기고 난 발키리 길드 헌터들을 데리고 노움이 알려 준 방향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곳엔,
{양양?}
{린하이 님…….}
수백여 명의 청방 길드 헬퍼들이 삽과 곡괭이를 들고 또 다른 물길을 만들고 있었다.
{오크들에게 붙잡힌 겁니까?}
{지금 그게 중요한가! 헌터들도 없이 위험하게 여기서 뭐 하는 거야?}
{혹시 몰라 수로를 파고 있었습니다. 보급로도 끊긴 마당에 수로마저 끊기면 오크들이 아니라 탈진해서 죽게 될 테니까요.}
헬퍼들이 입술을 굳게 다물며 린하이를 쳐다봤다.
그들의 손에 들려 있던 삽과 곡괭이는 어느새 린하이 뒤편에 서 있는 우리를 향해 있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여차하면 우릴 공격하기라도 할 기세였다.
{지휘부에서 시킨 건가? 헌터들도 지원해 주지 않고 성 밖으로 나가 수로를 확장하라고?}
{그 멍청한 놈들이 그렇게 할 리가 있습니까. 목마른 놈이 우물을 판다고 아무리 말을 해도 콧등으로도 듣지 않아서 저희끼리 마음을 맞춰 나온 겁니다.}
{하아…….}
린하이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헬퍼들을 쳐다봤다.
그들을 쳐다보는 린하이의 눈빛에 걱정과 안쓰러움이 가득했다.
{안에 상황은 어떤가? 아직 식량에 여유가 있다고는 들었는데?}
{그건 수뇌부들과 헌터들 얘기입니다. 저희 헬퍼들은 식량이 떨어져 쓰러지는 사람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처럼 이렇게 성 밖으로 나와 위험을 무릎 쓰고 산에 들어가 사냥을 하거나 나무뿌리라도 구하기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잡놈의 새끼들! 혹시나 했는데…….}
뿌드득.
헬퍼들에게 성내 상황을 들은 린하이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이까지 갈며 켄트성을 노려봤다.
내가 보고 받은 것과 달리 성내 상황이 그리 좋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헬퍼들이 아등바등 방법을 찾아보고 있는 듯했다.
{린하이 님, 셋을 셀 테니 신호에 맞춰 저쪽 숲으로 달려가십쇼. 그곳으로 가면 헬퍼들이 모여 있을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저희가 오크들을 막겠습니다. 그러니 린하이 님은 탈출해서 헬퍼들을 이끌어 주세요. 이대로 있다간 오크들이 아니라 식량이 없어서 모두 굶어 죽게 생겼습니다.}
양양이라는 자가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우릴 노려봤다.
오크로 변신하고 있어서 우리가 자신들의 말을 못 알아들을 거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모두 변신을 푸세요!”
“네!”
{……?!}
{……?!}
터벅터벅.
그대로 있으면 헬퍼들이 되지도 않는 공격을 할 것 같아 발키리 길드 헌터들과 난 변신을 풀고 앞으로 걸어갔다.
싸움이 시작되면 다치는 건 우리가 아니라 저들이 될 테니까.
{빌어먹을! 역시 단순한 오크들이 아니었구나. 모두 흩어져 도망가!}
“모두 생포하세요. 다치지 않게 조심하고요.”
“네.”
휘이익.
휘이익.
퍽!
퍽!
사람으로 변신한 우릴 보고 헬퍼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도망치려 했지만, 발키리 길드 헌터들의 추적을 벗어나진 못했다.
애초에 일반인인 헬퍼들이 상위 헌터들로 구성된 발키리 길드 헌터들 눈앞에서 도망가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양양, 반항하지 말게. 이들은 너흴 해치지 않아.}
{그게 무슨 말입니까? 원정을 나간 헌터들이 한 명도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흴 살려두겠습니까?}
{모두 살아있네.}
{……?!}
{모두 투항하고 살아 있다고. 그러니 자네들도 항복하게. 직접 봐서 알겠지만 이들은 오크가 아니라 한국의 스카이 캐슬 연합이라네. 항복하면 살려준다고 약속했으니 나를 믿고 모두 반항을 멈추게.}
헌터들에게 붙잡히고도 헬퍼들은 몸을 흔들며 거칠게 반항했고 린하이가 다가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나서야 움직임을 멈췄다.
헌터들과 마찬가지로 린하이는 헬퍼들에게도 꽤 높은 신뢰를 받고 있었다.
“이대로 있으면 헬퍼들만 계속 죽어나겠군요. 물길을 막으면 그 속도는 더 가속될 테고요.”
{…….}
난 고민하는 표정을 지으며 린하이와 헬퍼들을 번갈아 쳐다봤다.
우리가 수로를 막는다고 해도 단숨에 물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성내 물탱크에 보관된 물도 있을 테고 이런 식으로 몰래 물길을 만들면 조금씩이나마 물을 공급받을 수 있을 듯했다.
그리고 그 얼마 안 되는 물과 남아 있는 식량은 수뇌부와 헌터들 위주로 분배가 이루어질 테고.
그동안 겪고 보았던 청방 길드의 행태를 봤을 때 안 봐도 비디오였다
그들은 함께 고립된 헬퍼들을 챙기기보다는 자신들의 안위와 병력의 전투력을 유지하기 위해 애쓸 게 분명했으니까.
“린하이 님, 성내에 헌터들이 몇 명이나 남아 있죠?”
{이만 명 정도 될 겁니다. 헌데 만약 스카이 캐슬에서 공격을 감행하면 8만여 명의 헬퍼들도 전쟁에 참여하게 될 겁니다. 비록 이능은 없어도 무기와 공성 장비가 있으니 성을 함락시키는 게 녹록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도 제법 큰 피해를 보겠네요. 헌데 그래도 공격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이대로 작전을 유지하면 헬퍼들만 계속 죽어 나갈 텐데 괜찮겠어요?”
{재고(再考)해 주십쇼. 제가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린하이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성내 헌터들의 인원을 묻는 것만으로도 내 의중을 파악했고 거부 의사를 밝혔다.
“흠…….”
난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린하이를 쳐다봤다.
사실 이대로 작전을 유지해도 우리에겐 손해 볼 게 없었다.
식량과 물이 부족한 상태에서 시간이 길어지면 고난을 받는 건 저쪽일 테고 그게 우리의 노림수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난 귀한 인재들인 헬퍼들의 희생이 안타까워 공격을 감행하겠다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협조하는 린하이와 헌터들에 대한 내가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다.
{일단 잠시 공사를 중지하고 이들을 가까운 성곽 공사 현장으로 데리고 갔으면 합니다.}
“네, 알았어요.”
난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헬퍼들에게 너무 가혹한 작전인 것 같아 변경하겠다는 거였지만 린하이가 거절하는데 굳이 자처해서 배려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 * *
{우레이님, 춘바이님!}
{오! 양양 왔는가. 어서 오게. 잘 왔네.}
{어떻게 된 겁니까? 왜 헌터님들께서 그런 복장으로…….}
성곽 공사 현장으로 온 양양과 헬퍼들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포로들을 쳐다봤다.
포로로 잡힌 이들이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공사 현장에서 일하고 있으니 많이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우리 여기 취직했네. 하하}
{취직했다고요?}
{……포로로 잡혀 오긴 했지만, 생각보다 괜찮은 곳이더라고. 그래서 그냥 여기서 돈 받고 일하고 있다네.}
아직 포로의 신분인 우레이와 춘바이가 능청을 떨며 양양에게 이곳 상황을 알려 주었다.
{그럼 린하이 님도…….}
{난 아직 아닐세. 근데 만약 자네가 이곳으로 전향할 의향이 있다면 나도 그럴 생각이야.}
{네? 저도 이곳으로 전향을 하라고요?}
{오면서 봐서 알겠지만 이미 화룡의 둥지에서 이곳으로 오는 길은 끊겼네. 그리고 이곳엔 수십만이 넘는 오크들과 스카이 캐슬 연합 소속 헌터들이 머물러 있고. 이대로 이 전쟁이 유지되면 켄트성 내에 있는 헬퍼들 중에 많은 이들이 죽게 될 거야. 자넨 그걸 원하나?}
{끙…….}
양양이 앓는 소리를 내며 린하이의 시선을 피했다.
양양을 바라보는 린하이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돌아가서 헬퍼들을 규합해 주게. 그리고 성문을 열어주게. 그럼 우리가 들어가서 수뇌부들을 처단하고 헌터들을 제압하겠네.}
{헐…… 지금 저한테 청방 길드를 배신하라는 겁니까?}
{헬퍼들을 살려야 하지 않겠는가? 이미 난 헌터들에게 항복을 권유하며 많은 지휘관을 죽였네. 내 수하들과 자네들을 살리기 위해서. 그리고 본국으로 돌아가면 내 죄를 인정하고 자진(自盡)을 하려고 했네. 하지만 만약 자네가 내 뜻을 따라주면 수하들과 그리고 헬퍼들과 함께 이곳에서 한번 살아 볼 생각이네.}
린하이가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양양을 지그시 쳐다봤다.
그리고 이내,
{알겠습니다. 린하이 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양양은 큰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잘 선택하셨습니다. 제가 예전부터 말하지 않았습니까! 빌어먹을 청방 길드를 떠나자고. 다른 길드가 됐든. 다른 나라가 됐든 린하이 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 갈 테니 결정만 하라고요!}
{양양…….}
{린하이 님이 함께한다는데 그 어디를 가도 청방 길드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하하.}
양양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린하이를 쳐다봤다. 아니 입술을 올리고 소리 내어 웃고 있었지만 양양의 눈엔 눈물이 글썽거렸다.
마치 앓던 이가 빠진 사람처럼 아픔과 시원함이 교차한 얼굴이었다.
{성주님, 이들을 돌려보내도 되겠습니까?}
“아니요.”
{이들을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이들은 저와 오랫동안 함께한…….}
“밥부터 먹고요.”
{네?}
“뭐가 그리 급해요. 보아하니 다들 한동안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모양인데 따듯한 밥에 국물이라도 한 모금 먹고 가게 하라고요.”
{아…… 감사합니다.}
글썽글썽.
린하이가 눈물이 맺힌 눈으로 날 그윽하게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