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농사짓는 영주님-190화 (190/255)

190화. 다종족 연합국 (4)

“한번 맞을 때가 되긴 했지.”

난 살기 어린 눈빛을 하고선 이세훈을 노려봤다.

재작년이었나?

같이 술 한잔을 하며 옛날얘기를 하다가 오랜만에 같이 피시방에 가서 올나이트 정액을 끓고 게임을 한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 한참 재미있게 했던 게임이 리마스터가 되어 오픈해 복잡한 생각하지 말고 오늘 하루 옛날처럼 놀아 보자는 취지였다.

그런데 새벽에 출출해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 잠시 화장실에 갔다 온 사이 이세훈이 다 먹어 버려 훈훈했던 분위기를 깨 버렸다.

아마 그때가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내가 그를 때렸던 것이.

친구가 라면 하나 뺏어 먹었다고 때릴 정도로 내 인성이 그리 쓰레기는 아니었지만, 그때 이세훈은 배가 고파서 먹은 게 아니었다.

삼겹살에 소주 한잔을 하고 피시방에 들어 온 그는 과식했는지 소화가 안 된다고 계속 궁시렁거렸었는데 그 와중에 내 라면을 훔쳐 먹은 것이었다.

삼겹살을 너무 많이 먹어서 속이 더부룩한데도 재밌을 것 같아서 그랬다고 했다.

진중하고 점잖은 성격이었는데 가끔 이런 식으로 엉뚱하고 짓궂은 장난을 칠 때가 더러 있었다.

같이 장거리 여행하며 잠시 고속 도로에 내려 화장실에 간 사이에 버리고 간다던가.

내시경 검사를 앞두고 금식을 하는 날 밤 치킨과 맥주를 사 들고 찾아와 사람을 괴롭히는 악취미가 있었다.

마냥 받아주면 장난의 강도가 점점 심해져 경고 차원에서 손을 쓴 것이었다.

그때 이후로 한동안 잠잠한 것 같더니 그새 또 몸이 근질근질했던 모양이다.

“워워. 진정해. 이번엔 장난친 거 아니야.”

“내 허락도 없이 내 사진을 도용해 놓고 장난친 게 아니라고?”

내가 다가가자 이세훈이 손을 내밀어 다가오지 못하게 하려 했고 난 그 손을 붙잡아 살며시 거꾸로 꺾었다.

발키리.

태백산맥.

그레이.

마녀 부대.

울프.

레인보우.

.

.

.

다른 지폐에는 스카이 캐슬을 만드는데 일조했던 길드들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나만 얼굴이 들어가 있었다.

“진짜 장난친 거 아니라고. 은밀히 진행하느라 아직 마스터들의 허락을 받지 못해서 일단 너만 새겨 놓은 거야.”

이세훈이 내 손을 뿌리치며 정색을 해 왔다.

헷갈렸다.

위기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화난 척하는 것인지. 아니면 진짜 화가 난 것인지.

“네 사진이야 내 마음대로 새겨 놓아도 되지만 다른 사람은 그럴 수 없잖아.”

“흠…….”

난 고민스런 표정을 지으며 이세훈을 쳐다봤다.

이쯤 되면 잘못을 청하거나 도망가야 하는데 그의 표정과 말투가 너무 진중했다.

“내가 아무리 장난이 심해도 이런 걸로 장난을 치겠냐? 원래 우리나라 지폐에도 위인들 얼굴 들어가 있잖아.”

“내가 위인이냐?”

“위인 맞잖아.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넌 세계에서 가장 높은 헌터 등급을 갖고 있고 훌륭한 인망으로 인해 스카이 캐슬의 사람들의 존경을 듬뿍 받고 있잖아. 네가 위인이 아니면 누가 위인이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아니지!”

“아니긴 뭐가 아니야. 미국 달러에도 초대 대통령 얼굴 새겨져 있잖아. 당장은 부끄러울지 몰라도 그냥 모른 척해 줘. 다른 마스터들 얼굴도 차차 새겨 넣을 계획이니까. 장난삼아 만든 거 아니야. 카프리 님과 하몽 님의 협조 아래 심혈을 다해 마법진까지 새겨 놓은 지폐야.”

“하아…….”

난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세훈을 쳐다봤다.

그의 눈에서 활화산 하나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차라리 장난이길 바랬는데…….’

내가 거부 의사를 밝혔음에도 그는 계속해서 건국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백화점과 주유소 그리고 하다못해 동네 시장에서조차 상품권을 만들어 자체 화폐로 사용하고 있었지만, 우리가 만드는 건 의미가 남달랐다.

“세훈아…….”

“무슨 말 하려는지 알아. 돈을 만든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고 시작한 게 아니야. 근데 그냥 모른 척해 줘라. 건국하기 위해 포석을 까는 게 아니라 우리에겐 지금 이 화폐가 꼭 필요해.”

“…….”

“스카이 캐슬과 비토섬에 무궁무진한 자원이 있지만 당장 캐내서 돈으로 현금화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네가 계획한 대로 이 전쟁이 끝나면 이십만 명의 포로가 생길 텐데 그렇게 되면 매달 그들에게 나가는 돈만 조 단위의 금액이 될 거야. 지금 시스템으론 그걸 감당할 수가 없어.”

“끙…….”

난 앓는 소리를 내며 이세훈을 쳐다봤다.

나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포로 한 명당 월 천만 원씩 주고 십만 명이면 일조였다.

지금이야 포로 숫자가 얼마 되지 않고 그동안 채취해 두었던 광석과 무구를 팔아 모아 놓은 돈이 있어 감당되지만, 전쟁이 끝나면 난감한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이대로 있으면 들어오는 돈보다 나가는 돈이 더 많아질 때가 분명 한번은 찾아올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이세훈이 돈을 찍어 내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과연 이 돈을 쓰려고 할까? 자칫했다간 한순간에 휴짓조각 되는 거 알지?”

“당연히 알지. 근데 네가 염려하는 일은 생기지 않을 거야. 우리한텐 미스릴, 마나석 광석이 있잖아. 석유도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 네 얼굴과 동맹 길드의 문양이 새겨져 있고. 이미 스카이 캐슬에선 한국의 원화보다 우리가 만든 화폐를 보유하려는 사람들이 더 많아.”

이세훈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한국의 원화보다 우리가 만든 화폐를 보유하려 한다는 건 한국보다 우리를 더 신뢰한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영지민은 이곳에 삶의 터전을 잡은 사람들이라 그런 거 아니야?”

“그렇긴 하지만 외부인들도 분명 우리가 만든 화폐를 더 신뢰하게 될 거야. 몬스터 웨이브로 인해 언제 나라 하나가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시기에 우린 그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 낼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자원이 있으니까. 게다가 우린 현재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헌터 집단이기도 하고.”

“그렇긴 하지.”

난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비록 난 고졸이라 하더라도 화폐의 가치가 어떻게 올라가고 떨어지는지 대충이나마 알고 있었고 이세훈이 역시 짧은 기간 준비를 한 게 아닌지 막힘없이 내게 설명해 주었다.

짐작건대 전문가들을 초빙해 오랜 시간 준비를 해 온 듯했다.

돈을 찍어낸다고 해도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으려 하면 가치가 떨어지는데 이세훈은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한 듯했다.

그 하나의 방편으로 산적들마저 일부러 방치한 듯했고.

터벅터벅.

“죄송합니다. 잠시 얘기 좀 하느라.”

“아닙니다. 안 그래도 저희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긴 했습니다. 스카이 캐슬의 화폐로 교환해서 가겠습니다.”

보부상 헌터들에게 돌아가니 그들이 미소를 지으며 환전을 원했다.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혹시나 하고 얘기하는 건데 저희 눈치가 보여서 그러는 거면 일부러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저희가 원해서 그러는 겁니다. 이세훈 팀장님 말처럼 산적들의 공격도 불안하고 무엇보다 스카이 캐슬에서 발행한 화폐라면 현재 지구의 그 어떤 돈보다 가치가 높지 않겠습니까. 하하.”

다시 한번 되물었지만, 보부상 헌터들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적극적으로 환전을 원했다.

“근데 지금 가진 돈 말고 추가로 더 환전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얼마나?”

“여유자금이 1억 원 정도 있는데 가능하다면 모두 환전을 하고 싶습니다.”

“그렇게나 많이요?”

이세훈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보부상 헌터들을 쳐다봤다.

가진 돈을 환전해 주는 것도 고마운데 그들이 추가로 더 많은 돈을 바꾸길 원했다.

만약 허락하면 1억 원이 아니라 그 이상도 환전할 기세였다.

“환전을 해 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듣자 하니 오만 원 권을 제외하고 다른 지폐에도 스카이 캐슬 연합 마스터들의 초상화를 그려 넣는다고 들었습니다. 맞나요?”

“……네.”

이세훈이 얼굴이 잔뜩 붉어져 고개를 끄덕거렸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얘기했는데 우리의 대화 일부를 보부상 헌터들이 들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환전을 원하는 겁니다. 새로운 화폐가 나오면 지금 만들어진 화폐는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을 테고 그 희소성 때문에 이 돈들은 더 가치가 오를 테니까요. 하하.”

“희소성이 있다고 해서 가치가 꼭 오른다는 보장은 없을 텐데요?”

“그렇긴 하죠. 헌데 전 오를 거라 확신합니다. 스카이 캐슬의 이만 원짜리 지폐가 만원의 값어치가 아닌 최소 십만 원까지는 오르지 않을까 싶네요. 하하.”

보부상 헌터들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이세훈과 날 번갈아 쳐다봤다.

정작 스카이 캐슬의 지도자인 난 혹시나 돈을 찍어내는 만큼 이익을 창출시키지 못할까 염려를 하고 있는데 정작 외부인인 보부상 헌터들이 우리의 화폐를 더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라면 얼마든지 환전해 드리죠. 더 있으시면 더 가져오셔도 됩니다. 하하.”

보부상 헌터들의 말이 듣기 좋았는지 이세훈도 소리 내어 웃으며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 * *

“성주님, 보부상 헌터 2만여 명이 켄트성 북쪽으로 이동을 시작했습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인원이 많네요. 청방 길드 잔당과 조우하지 않게 만전을 가해 주세요.”

“네. 안 그래도 아군끼리 싸움이 날까 염려되어 오키도키 님이 직접 오크들을 인솔해 내려와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혹시나 몰라 항마의 반지도 분배해 주었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항마의 반지를 분배했다고요? 이만 명이면 미스릴이…….”

“개당 백만 원씩 받고 판매를 했습니다.”

“아…….”

휴우.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항마의 반지.

물리 방어력: 0

마법 방어력: 5%」

피아 식별을 위해 만든 무구이긴 하지만 항마의 반지는 미스릴과 마나석으로 만든 것이었기에 그냥 분배하기엔 재룟값이 만만치 않아 염려했는데 다행히 적당한 값을 받고 나눠 준 모양이었다.

백만 원이라고 해 봤자 재룟값밖에 되지 않겠지만 말이다.

미스릴과 마나석이 들어가지 않았다 해도 카프리의 손길이 닿은 것만으로도 최소 천만 원 이상은 받아도 될 아이템이었다.

“잘하셨네요. 오늘은 몇 명이나 투항했나요?”

“산에서 먹을 것을 구하는 데 한계가 왔는지. 오늘 하루만 삼만여 명이 넘게 투항했습니다. 이제 산맥엔 이만여 명 정도 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짐작건대 사나흘 안에 그들도 모두 항복하지 않을까 싶네요.”

지윤미 마스터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현재 전장 상황을 보고 했다.

날이 갈수록 점점 싸늘해지고 있었고 어느새 산봉우리 곳곳에 하얗게 눈이 맺히기 시작했고 그 때문인지 산맥에 갇힌 헌터들이 버텨내지 못하고 대규모로 항복을 하고 있었다.

“이제 켄트성만 남았네요. 안에 상황은 어떤가요?”

“아직 식량에 여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번 겨울을 버텨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산맥에 들어가 있는 헌터들이 모두 항복하면 아무래도 저희의 정체를 드러내고 사신(使臣)을 보내 항복을 권유해야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흠…….”

난 고민스런 표정을 지으며 지도에 그려진 켄트성을 쳐다봤다.

켄트성 안에 사람들은 아직 우리의 정체를 오크로 알고 있고 몬스터들에 의해 고립된 줄 알고 있어 성문을 굳게 닫고 존버를 하고 있었다.

헌터들이 다 투항하면 린하이를 보내 정체를 밝혀 항복 권유를 하려 했는데 식량 사정이 좋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죽느냐. 사느냐.

헌터들은 천라지망에 갇혀 사지에 몰려 선택권이 없었지만,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그보다 한결 여유로웠으니까.

“배가 고파야 괜한 반항을 하지 않을 텐데…….”

혹여나 사신을 보냈는데도 그들이 항복하지 않고 죽기를 각오하고 농성을 하면 꽤 골치가 아플 듯했다.

그런데 그때,

{성안에 물이 나오는 곳이 몇 곳 되지 않습니다. 그 양도 많지 않고요. 그래서 여기랑 여기. 그리고 이곳에 있는 계곡에서 물길을 열어 끌어다 쓰고 있습니다.}

“…….”

{식량이 있어도 물길을 막으면 이번 겨울을 나기는 힘들 겁니다.}

“…….”

“…….”

린하이가 굳은 표정으로 지도를 보며 켄트성으로 들어가는 수로를 가르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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